달이 범람하는 밤

02화. 랑을 경계하라.

아니면, 랑께선 이 정도 시중은 드시기에 곤란하십니까?

***

창백한 동화의 얼굴을 본 청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태의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상태로는 탕약을 가져다주어도 마시지 않을 성싶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폐하와 주 상궁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부터?”

“…….”

“처음부터라는 얘기네.”

못마땅하다는 말투에도 청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단하네. 참으로 대단해.”

“랑의 소임이자 자질이지요.”

“뭐가? 내가 한 얘기를 듣고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뻔뻔함이? 아, 지금은 대담하다고 칭찬을 해줬어야 하는 건가?”

“폐하께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후궁은 후궁답게. 투기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며 탐하지 말라. 주제넘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황제의 첩으로서 순종하라.”

“…….”

“한시도 잊어버린 적 없습니다. 소신, 폐하께서 바라는 일은 행하고, 바라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일 소신의 행동이 보기에 거슬리셨거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소서.”

무미건조하고 오만한 대답이었다. 동화는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목석같은 인간. 그의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청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동화가 딱히 저에게 벌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청윤은 서탁 위에 한가득 쌓인 책들을 옆으로 정리하고는 반에 받친 법률서들을 공손히 내밀었다.

“명하셨던 송의 법률서이옵니다. 우선 대죄와 관련한 법률부터 살펴보소서.”

동화가 몇 권의 책을 받자, 청윤은 주변을 정리하고 화로에 불을 붙였다. 차를 우리려는 듯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화는 법률서를 펼쳤다. 그런데 표지 한 장을 넘겨보던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진다. 두꺼운 표지와 얇은 종이를 엮은 안쪽의 실이 바깥 실의 두께와 미세하게 달랐던 탓이다. 동화는 저도 모르게 책을 덮었다.

“폐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지러워 그래.”

“태의를 부를까요?”

“그럴 필요 없다. 조금 쉬면 돼.”

청윤은 별말 없이 예, 하고 고개를 주억이고는 차를 마저 우렸다.

“제가 무심하였습니다. 이 궁궐의 주인은 오직 폐하뿐이십니다. 소신은 다만 옥체가 미령하시니, 폐하의 짐을 덜어 드리고자 한 것이옵니다. 부디 제 성심을 곡해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되었다. 내인들이 나를 아무것도 못 하는 병자 취급하니 내 홧김에 한 말이야. 그러니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했으나, 청윤은 그 말의 숨은 뜻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식은 잔을 데운 뒤, 차를 따랐다.

“폐하. 모레는 친국을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친국?”

“예. 조사는 다 끝났습니다. 증좌가 모두 명백히 죄인을 가리키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처분만 내리시면 되옵니다.”

“알겠다. 태의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하겠지.”

“하면 그리 준비하라 이르겠나이다.”

말을 마친 청윤은 시선을 옮겼다. 열린 창 너머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 수라를 들이라 할까요?”

“오늘부터는 죽이 아니라고 했나?”

“예.”

동화는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자고 책을 보는 곳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음식을 이화정으로 옮기라고 해.”

“밖으로 나가실 것이옵니까?”

“그래.”

“아직 바람이 찹니다.”

청윤의 말을 곱씹어보던 동화는 제 옷을 내려다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생각했다. 침의 차림으로 나갈 것이냐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군.

“청윤.”

“예.”

“앞으로는 그리 돌려 말하지 마. 헷갈린다.”

“예…….”

“…….”

“…….”

“뭐해?”

“예?”

동화가 옷시중을 들라며 팔을 벌리자 청윤은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다 들었다면서 잊어버렸나? 오늘은 누구도 여기 들어올 수 없다.”

“저는…….”

“그러니 어떡하겠어. 랑은 이미 들어왔으니, 오늘만 허락하지.”

“폐하.”

“아니면, 랑께선 이 정도 시중은 드시기에 곤란하십니까?”

동화가 말까지 높여가며 핀잔을 주자, 청윤은 하는 수 없이 옷을 받아오려 바깥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동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궁이라고 하더니 이만한 일로 얼굴 붉히기는.’

02. 랑을 경계하라

태화 원년
황제가 친국을 한 뒤에 자비를 베푸시어, 사내들은 유배를 보내고 아녀자들은 노비로 삼으며, 오직 역적모의를 한 최오규의 형제와 아비만을 극형에 처하였다. 이에 몇몇 신료들이 반발하였으나, 황제가 대송법전의 법률을 토씨 한 자 틀림없이 정확히 읊어 신료들의 논리를 반박하며 위엄을 보이매, 모두가 감탄해 마지아니하더라.

― 송松 내전록

 

또르르. 찻물이 잔을 채운다. 주전자에서 흐르는 찻물은 잔에서 넘치기 직전에야 비로소 멈추었다. 위태롭게 넘실대는 차의 파도를 보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주란은, 동화가 뜨거운 찻물을 고의로 본인의 손에 흘리려는 끔찍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 이 씨의 일은 정말 그대로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주란의 물음에 동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딱히 따라놓은 차를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턱을 괴고는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예?”

“청윤 말이다.”

“폐하. 랑 장 씨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때마침 들려온 궁인의 목소리에 동화가 주란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짓는다. 봐라, 내 말이 맞지? 하는 얼굴이었다.

“들여라.”

이전 같았으면 멋대로 침전에 들었을 테니, 황제의 허락을 받고 궁인들이 문을 열어주고 나서야 들어온 청윤을 칭찬해주어야 할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영, 험한 표정을 짓고 있던지라, 동화는 그만두기로 하였다. 청윤은 쿵쿵대는 발소리가 날 정도로 성큼성큼 다가와 절을 올렸다. 예법에 한 치 어긋남도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으나, 동화에게는 왠지 그 모습이 예의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동화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하듯 무척이나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쩐 일이실까? 사랑하는 나의 청윤.”

농담하듯 쉽게 뱉은 사랑한다는 말에 평소 같았으면 여유롭게 맞받아쳤을 청윤이지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동화는 생각했다. 이렇게 성이 났으면서 내가 허락해줄 때까지 용케 밖에서 기다렸군. 청윤은 동화가 예를 거두라고 말하자마자 서탁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어찌하여 역모 죄인을 궁인으로 들이셨습니까?”

“최 씨의 어미를 말하는 모양이지? 하기야 궁인을 들이는 일은 내명부의 소관이니, 네가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이해한다. 정히 불편하다면 네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도 좋아.”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청윤이 화내는 모습을 본 동화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의자를 가리켰다.

“우선 거기 앉아서 목이라도 축이는 게 어때? 네가 올 것 같아 차를 우렸는데 향이 제법 좋더구나.”

“차는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제 얘기를……!”

쨍그랑―. 찻잔이 깨지고 바닥으로 찻물이 흘러내렸다. 청윤이 잔뜩 격앙되어 책상을 짚으려다 ‘우연히’ 동화가 내민 찻잔을 쳐낸 것이다. 청윤은 동화의 손을 바라보았다. 차는 아주 펄펄 끓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직 다 식지 않았는지, 동화의 손이 붉어져 있었다. 주란이 화들짝 놀라 동화에게로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렴.”

청윤은 수건에 찬물을 부어 동화의 손을 감쌌다. 그는 본인이 저지른 실수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했다. 주란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치우겠습니다.”

“아니.”

동화는 청윤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치워.”

“…….”

“네가 내 서탁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 그러니 네가 치워야지.”

말투는 차가웠으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미간은 자꾸만 찡그리려 하고 있어서, 청윤으로서는 동화의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청윤은 바닥에 나뒹구는 깨진 찻잔 조각들을 주웠다. 그는 그러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신음했다. 동화가 슬쩍 바라보니, 조각이 날카로워 손가락을 베인 모양이었다.

“청윤. 다쳤느냐?”

“아닙니다.”

“고집은. 오늘은 물러가는 게 좋겠다. 돌아가서 태의에게 치료받도록 해.”

“……, 예.”

청윤이 돌아간 후, 궁인들이 어질러진 방을 치우는 내내 주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궁인들에게 다식을 준비하라 이른 뒤 서탁 옆에 서서 차를 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화는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너도 내가 왜 최 씨의 어미를 궁인으로 들였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알려주실 것이옵니까?”

“그럼.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동화는 궁인이 내어온 다식 하나를 조금 베어물었다. 쌉싸름한 차를 마시면서 쌉싸름한 다식을 먹는 것은 휘의 취향인가. 분명히 재료에 꿀이 들어가는데도 쓴맛을 이렇게 낸 걸 보면, 휘는 단맛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쓰려면 쓰고 달려면 달 것이지……. 동화는 한숨을 쉬며 손에 든 다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장난기 어린 웃음은 거두고 주란을 바라보았다.

“첫째로는 역적모의를 한 죄인은 최 씨와 그의 아비이지, 집안에 갇혀 살림이나 하던 아녀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는커녕 조당에 발조차 들일 수 없는데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삼족을 멸하는 것은 불공평해.”

“…….”

“둘째로는 이번 일은 미심쩍은 것들이 많아서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오규는 그저 이용당했을 뿐인 듯해.”

“하오면…….”

“그래. 목표는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최오규의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클 거야. 그날의 습격은 그저 최오규에게 역적이라는 누명을 씌울 명분에 불과했겠지. 그러니 진범을 바깥으로 끌어낼 미끼가 필요하다. 최 씨의 어미인 이 씨는 이 일에 적임자지. 이 씨는 집안일만 돌보고 순종적인 성격이라고 하였으니 뭔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부나방들은 이 희박한 가능성에라도 달려들지 않겠느냐?”

불공평하다며 역모 죄인의 식솔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치고는 냉정한 말이었다. 동화가 답을 주었음에도 주란은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궁금한 점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느냐?”

“…….”

“괜찮으니 말해보렴.”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찌하여 청윤 마마께서 잔을 깨도록 하셨습니까?”

“역시 너는 눈썰미가 좋구나.”

동화는 허둥지둥 수건을 적시던 청윤을 떠올리다 후후 웃었다. 그는 그러다 문득 입매를 굳힌다. 본심이 선한 게 무슨 소용일까. 욕망 앞에 사람의 마음은 부질없는 것을.

“생각해보렴. 랑은 총명한 사람이야. 후궁에서, 아니, 이 대궐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청윤이라고 말할 거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번 일이 이상하다는 점을 몰랐을까? 분명 알았을 거다. 그런데도 청윤은 최오규가 역적모의를 했다고 말했어.”

“하면 폐하께선 청윤 마마를…….”

동화는 법률서에서 찾아낸 문구를 떠올렸다. 그 문구가 적힌 종이는 책을 엮은 실에 붙어있던 것으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저 평범한 실이라 여겼으리라. 애초에 실의 미세한 두께 차이는, 어지간히 관찰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차리기도 힘들 터였다. 청윤이 돌아간 뒤 궁인들을 물린 동화는 법률서의 실을 조심히 풀어내어 물에 적셨다. 그러자 말려있던 얇은 종이가 펼쳐졌고, 그 위로 글씨가 떠 올랐다.

‘랑을 경계하라.’

누가 법률서에 이런 밀서를 숨겨두었는지, 랑을 경계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동화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잊어버린 기억 속에서 이 밀서에 적힌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물론 이 밀서에 적힌 문구가 아니더라도 동화는 청윤을 가까이할 생각이 없었다. 동화는 주란을 향해 예의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제 그 잘난 콧대를 꺾어줄 때도 되었으니까.”

***

매화림으로 유명한 송영산 어딘가, 그러나 화사한 매화가 피는 산과 같은 산이라고 하기에는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할 정도로 거친 바위 절벽이 있다. 그곳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한 해에 채 보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다. 볕이 거의 들지 않아 겨우내 내린 눈이 사월에 이른 지금도 녹지 않으니, 사람의 인연이 닿지 않은 골짜기라 하여 무연곡이라 하였다.

하나, 이름 붙인 이조차 이 절벽에 한 문파가 있음은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산 아래 호수에서 올려다보아도 까마득히 먼 데다가 바위와 나무가 교묘히 가린 전각을 찾아내기란, 아무리 맑은 날이었다 하더라도 하늘의 별 따기였을 터다.

성벽이라고 하여도 좋을 만큼 높고 두꺼운 담장 너머로 황성 건물들을 꼭 빼닮은 전각들이 늘어서 있다. 기다랗게 이어지는 회랑, 첩첩이 안으로 들어가는 집들과 중정.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황성보다 그 규모가 조금 작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도에 있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사는 집 크기의 세곱절은 되니, 영 작다고는 하지 못할 곳이었다.

누구도 오르지 않을 것만 같던 절벽 위로 덜컥, 쇠로 만든 갈고리가 박힌다. 그리고는 곧바로 누군가 솟구쳐 올랐다. 백의무복을 입은 이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방금 절벽을 오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색이 깨끗하였다. 망루에 서 있던 사내는 백의인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다 문지기를 향해 외쳤다.

“문을 여시오! 소궁주께서 돌아오셨소!”

육중한 문이 열리는 동안, 백의인은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송영궁松影宮이라는 글씨는 이십여년 전의 것이었으나, 세월이 무색하게도 어제 적은 듯이 깨끗하고 또렷했다. 문이 열리고서도 한참을 현판만 바라보고 있는 소궁주에게 문지기가 다가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소궁주를 보며, 문지기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궁주, 빙영은 은색의 귀신 탈을 쓰고 있다. 그는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형제와 스승의 앞이 아니라면 좀처럼 탈을 벗는 일이 없었다. 송영궁의 제자들은 모두 탈을 써야 하는데, 스스로 자기 얼굴에 맞는 탈을 만들었다. 그러니 송영궁에서 탈을 쓰는 일이야 여사였지만, 빙영의 귀신 탈이 유독 음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때문일 터다.

“궁주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사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나직한 음성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친 바람 소리와 섞여 청년과 노파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니, 말하는 이가 사내인지 여인인지는 물론이거니와, 얼핏 산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로 귀신이 내는 소리인지 헷갈릴 정도라. 귀신 탈을 쓴 빙영을 본 적 있는 범인凡人들은 그를 진짜 귀신이라 여겨 귀객이라 칭하였다. 문지기는 공손히 숙였던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언제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군.

빙영은 호국문을 지나 회랑에 들어선다. 이제 만개한 살구꽃이 회랑 옆의 삭막한 정원에 유일하게 피는 꽃이다. 제법 달콤한 꽃내음이 찬 공기 속에서도 가득 퍼졌으나,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눈길을 주지 않는다기보다는 외면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열매 맺어봤자 이제 먹을 사람도 없는 나무, 그냥 베어버릴 것이지. 그는 향내를 풍기는 꽃을 검으로 모두 잘라내 버릴까 하다가 그만둔다. 하다못해 이제 나무도 질투하느냐며 골려댈 궁주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그 대신, 사당까지 가는 동안에 간간이 잡일을 하는 일꾼들이나 사제들이 인사를 건네면 고개만 간단히 끄덕여주고 말 뿐이었다.

사당에 들어서자 짙은 향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향에 불을 붙이고 있는 이는 송영궁의 궁주 빙화. 흰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얼핏 소복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소궁주는 그가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을 기다렸다. 앞에 선 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귀객. 돌아왔느냐?”

“어찌 궁주께서도 저를 귀객이라 부르십니까?”

“녀석, 심통은.”

궁주라 불린 이는 옷매무시를 정돈하더니 위패를 바라보았다. 사당에는 두 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는데, 성씨도 이름도 적혀있지 않아 누구의 위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동화는 어쩌고 있더냐? 기억은 돌아온 것 같으냐?”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말이야.”

빙화는 날이 추우니 차라도 마시자며 사당을 나서고, 빙영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아이는 마음이 여려 탈이야. 내 심혈을 기울여 벼려놓았거늘 그리 쉽게 무너지다니.”

“황 의원 말로는 기억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내었다고 합니다만…….”

“위험한 방법인 모양이지?”

“그러합니다. 효과는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억지로 잊어버린 것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보니 병자가 정신적인 충격으로 미쳐버리거나, 아주 숙련된 의원이 아니라면 자칫 병자를 불구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는군요.”

“그 처방은 폐기하라고 해라. 동화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과업을 이뤄낼 수 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잃어서는 안 돼.”

빙화는 빙영을 향해 돌아섰다. 몸을 틀던 그 찰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 빙영이 몸을 움찔 떨었으나, 탈에 난 구멍으로 눈을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짓는 미소는 온화하기만 했다.

“우선은 기다려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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