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균열 (4)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정말 별것 아닌 순간이다. 그런 별것 아닌 것들이 모여서,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사랑이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교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 그 반짝임을 머금은 눈동자 색이 아름다워서. 약간 허스키한 톤의,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 활짝 웃는 순간 호쾌한 미녀로 변하는 순간이 좋아서. 누구에게나 친절한 태도가 좋아서.
순간들이 모여 결국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저 목소리가 내 이름만을 머금었으면. 오직 나만 보며 웃어줬으면. 누구나가 아닌, 나에게만 상냥했으면.
바라는 것은 사랑. 사랑이란 감정은 상호 관계에서 건강하게 발전해 나가야 의미 있는 것이지만 채주현은 그걸 몰랐다. 건강한 사랑이란 게 뭐지? 채주현은 권여루를 틀림없이 사랑했다.
사랑했지만 사랑에 서툴렀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사건이 누군가의 안배였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다. 그리고 ‘권여루’다.
내가 왜 사랑에 빠졌냐고? 왜 권여루를 사랑하냐고?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지금 내가 여루를 사랑하잖아. 그리고 알고 있다. 이것이 한순간의, 찰나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확신한다. 이것이 영원불멸하리란 것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아니야. 틀렸어. 그건 당신이 아직 그런 사랑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래...
──여름은 우리에게 중요한 계절이다. 다른 세 계절도 여루와 함께라면 사랑스러운 계절임이 틀림없지만, 여름은 특히나. 그건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 햇살, 비, 장마. 사랑스러운 것들이 모여 여루와 나를 이루는 기억의 요소가 되어간다. 우리의 추억이. 우리의 과거가. 그리고 영원히 함께할 우리의 미래가.
그러니까 내가 사주한 것은 절대 비극이 아니다. 희극의 시발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우리 화해하자.”
“……”
“그런 의미에서 같이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여루야.”
누군가를 피하려 부러 일찍 등교했건만 저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채주현이었다. 여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미리 예매해둔 영화 티켓. 타이틀은…
“...<말할 수 없는 비밀>.”
“응.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이번에 리마스터로 재개봉한다고 해서 같이 보려고 끊어왔어.”
피아노가 등장하는 영화치고는 싫어하는 영화는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과연 운이 좋은 걸까, 감이 좋은 걸까. 여루는 조금 망설이다 표를 받아서 들었다.
“...우리 둘이서만?”
“응. 둘이서만.”
“누가 보기라도 하면 너… 나중에 데뷔할 때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괜찮아. 모자랑 마스크 쓸 거야.”
“...”
그런 문제가 아니라… 뭔가 더 말하려다 결국 입을 꾹 닫고는 습관적인 한숨을 내쉬고 만다. 여루는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것 같은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현 딴에 화해하자고 먼저 말해 온 것만 해도 많은 발전이었다. 여루가 보기에 주현은 절대로 먼저 사과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피해자 쪽에서 먼저 사과하게 만들면 모를까.
여루는 납치되듯 차에 태워져 주현의 오피스텔까지 갔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진짜로 납치되는 줄 알았다. 얘가 드디어 미쳐서 사람까지 제 맘대로 하려고 하나 보다 했었는데… 결국 강제로 집에서 주현의 비위를 맞춰주며 이야기하다 돌려보내졌더랬다.
“이번 주말 2시 40분이야. 30분 전까지 **역으로 나와.”
“...나 아직 본다고 말 안 했는데.”
“영화 보기 전에 근처에서 같이 밥 먹자.”
“……”
역시나 제멋대로였다. 이래 놓고는 무슨 화해를 하자고. 여루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이게 네가 내미는 호의라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지. 이걸 마지막으로 끊어내면 되니까. 어울려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주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제 턱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응시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여루는 부러 가벼운 투로 작별 인사를 하곤 자기 자리에 가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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