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스틱스에 맹세컨대

5. 위안

밤새 두통에 시달렸다. 속에 든 것을 다 게워내느라 양동이가 두 개나 가득 찼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아서 눈을 도저히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마우리스는 내 행동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별개로 나를 썩 열심히 간호했다. 피와 토사물을 치우고, 땀을 닦아 주는 것 따위의 행동들. 나는 그가 손을 쓰지 않고도 신전을 깨끗이 관리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동으로 물건들을 채우고, 빗자루들에게 명령해서 바닥을 쓸게 하고. 마찬가지로, 굳이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나를 간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음에도 그는 직접 일하는 것을 고수했다.

오르피아는 간호를 돕고 싶은 듯이 침실을 기웃거리고는 했지만 마우리스는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오르피아도 충격을 받았을 테고 다친 곳이 있으니 쉬어야 한다는 것이 마우리스의 논지였다. 그는 아마 다른 방에서 자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곳은 항상 밤이고, 시계를 볼 정신조차 없었으니까. 아무튼, 며칠 정도가 지났을까? 상태가 꽤 나아졌을 때 오르피아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앞의 침대에 앉아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더러 어떻느냐고 물었다.

“많이 아파?”

“머리가 계속 울려. 이렇게 아파 본 건 머리 굵어지고 나서 처음이지 싶은데.”

어릴 적이 생각났다. 나는 꽤 자주 아픈 편이었고, 부모는 내게 돌봄을 제공해주지 않았으니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낸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타나토스였다. 이번에는 어떨까? 그는 더 이상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에 이끌려 저승으로 떠나게 될까? 그토록 바라던 대로 그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상했다. 더 이상 그것이 내키지 않았다.

내가 오르피아의 혈육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타나토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겠지. 줄곧 바라던 대로. 오르피아가 죽길 원하지 않았다고? 천만에. 나는……. 남을 그 정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명백했다. 나는 그곳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르피아 소렌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내 위에 포개어진 채였다.

“오르피아.”

“응?”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서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듯이 말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때는 죽음을 바랐지.”

“죽음을 바랐다는 것은.”

“내 삶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너도 알겠지, 넌 나에 대해 거의 모든 걸 아니까.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어. 유일하게 날 신경썼던 이는……. ‘그’였지.

웃기지 않아? 내게 신경을 쓰는 유일한 이가 죽음이었단 것이 말야. 일종의 유아적인 욕망이었어. 그를 따라가고 싶었어. 그가 매일 나를 두고 그의-죽은 이들의 세계로 떠나버릴 때 나도 따라가고 싶었어. 그럼 그가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내가 죽는다면, 그의 소유가 된다면. 그런 생각을 꽤 자주 했었거든.“

”…….“

오르피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결국에 그는 완전히 떠나버렸어. 언제였더라, 나도 이제 한 사람의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더 이상은 자신이 필요없다고 내게 말했었지. 말도 안 돼, 내가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정말……. 웃겨. 살아가기만 하는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그는 몰랐나 보지. 계속 생각했어. 죽어버린다면 그가 날 받아줄 거라고. 그때가 되면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뭘?”

“당신을-당신을 혼자 남겨두는 것. 당신을 그렇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래. 네가 뭘 할 수 있었는데? 넌 그때 코흘리개였을걸. 어쩌면 태어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비웃자 그가 옅게 따라 웃었다.

“지금은 죽는 게 두렵다면서.”

“그렇지.”

“어째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들과의 시간. 나를 신경쓰는 이들. 나를 사랑한다고-지옥에라도 같이 가 주겠다고 말하고……내게 키스했던 오르피아. 나는 그런 것을 바랐었던가? 애정을? 정말로 그렇지 않은지, 단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 시간들이 내게 미련을 주었다.

”……너희들. 마우리스, 그리고……. 너. 오르피아 소렌탈.“

”……내가.“

“그래, 너 때문에 미련이 생긴 걸지도 몰라.”

“미련이라니, 코라. 보통은 다른 표현을 쓰지 않아?”

“어떤?”

“……희망이라고.”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꽤나 감상적인 말을 쓰네.”

“예전에 누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거든.“

“누구?”

“아직은-”

“또 그러네, ‘아직’이라고. 항상 그렇게 말을 돌리더라.”

오르피아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어떻게 아는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 그리고……. 그래.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있잖아.“

”응.“

”타나토스와 둘이 아는 사이 같던데.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어? 아니면 이번에도 답 대신 의뭉스럽게 굴기를 택할 건가?“

”…….“

오르피아가 잠시 망설이더니 답했다. 또다시 회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긍정했다.

“그래, 그를 알아.”

“너도 그를 만났던 거겠지. 어릴 때인가? 아니면 다 커서야?”

타나토스에게도 챙겨주던 다른 아이가 있었을까. ……나 말고.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누군가가-이를테면 그 딸이라던가.

”따지고 보면은, 음, 어릴 때는 만난 적이 없었지. 글쎄, 코라. 신을 만날 기회를 얻는 인간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많아. 특히나 죽음의 신 같은 종류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만나는지 당신은 모를걸? 뭐, 대부분은 죽은 인간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코라, 그걸 알아두어야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야. 당신에게 그가 그랬듯이.”

“내게 그가?”

“그렇지 않아? 그와 가족이 되기를 바랐잖아. 그건 당신에게 유일무이한 소망이었고.”

“……그래, 그렇다 치자. 하지만 타나토스가 날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은-”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거다. 그런 소리겠지, 뭐.”

“미안해.”

“미안할 것도 없어. 기대도 안 했으니까.”

“…….”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그가 내게 무언가를 숨길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오르피아가 나와의 관계에서 정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짜증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달랐다.

“머리 아파? 마우리스를 불러올까?”

나를 살피는 듯 오르피아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피아는 내 말을 듣더니 나가서 마우리스를 불러왔다. 그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일종의 검진이라도 되는 건지, 열을 재 보거나 만세를 하게 시키거나, 그런 것들을 했다.

“진통제라도 줄까? 먹어두면 도움이 될 거야.”

“그런 게 있어?”

“비상약 정도는 있지. 언젠가 방문객이 올까 싶어 준비해놓았던 것이 이렇게 쓸모가 생기는구나. 오르피아, 잠깐 같이 가 주겠니? 찬장에 아직 비지 않은 아편 약병이 좀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편?”

“그래. 모르니? 양귀비 즙을 모아서 말려 두면-”

“정신 나갔어!?”

쓸데없이 목소리가 커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르피아가 난데없이 소리지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그럴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영문을 모르게 된 것은 마우리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째서? 요즘은 그런 치료법을 쓰지 않나?”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지금 고작 두통 때문에 아편을 쓰겠다고? 미쳤어?”

“네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 보통 그러잖아. 나 어렸을 때도 자주 썼었으니까.”

신전에 오기 전을 생각해 봤다. 의사가 흔한 환경이 아니었으니 양귀비를 키우는 집도 꽤 있었고, 옐레나도 내가 아플 때마다 아편을 물에 개어서 마시게 하곤 했다. 높은 사람들은 또 다른가? 오르피아가 내 말에 희게 질린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자주 썼다고? 어떤 자식이?”

“글쎄, 특별히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그게 대체 왜?”

오르피아가 무어라 욕을 하는 것도 같았다.

“아무튼 안 돼. 애 중독자로 만들 일 있어?”

“중독자라니? 소렌탈,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진통의 목적으로 아편을 몇 번 복용한다고 해서 중독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두루두루 치료제로 쓰이니, 양귀비 자체가 신의 선물이라는 말도 있지. 당장 신들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식물이야. 이를테면 밤의 아들인 잠이 데메테르에게-”

“고릿적 이야기를 하다니. 경고하건대, 감히 내게 무어라 가르치려 들지 마. 네가 만나본 적도 없을 높은 신들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도 말고. 이름도 없는 하급 신 주제에.“

오르피아도 나름 생각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 한 마디는 그리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마우리스도 그것을 들은 듯했다-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을 보니.

”이름조차 없는 신이라……. 우습네. 오르피아 소렌탈, 지금 네 처지가 어떠한지 망각했나 보구나.“

”네 신세보다는 낫겠지, 없어진 신의 권속아. 고작 인간 둘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기생충 주제에.“

……그 이후로도 둘이 무어라 언쟁하는 게 들렸다.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버린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왜 오르피아가 진통제 따위에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지도. 전혀 그럴 문제가 아닌데. 둘이서 앵앵대는 것이 꽤 듣기에 거슬려서 나는 결국 입을 열기로 했다.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싸우고 앉아 있어……. 머리 울리잖아. 그냥 내가 안 쓸게. 생각해 보니까 그 정도로 아프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럼 됐지? 이제 둘 다 입 닥쳐.”

“……미안해.”

오르피아가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한 번 하더니, 방금까지 살벌한 말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사과할게, 기생충이라고 부른 거.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다음부터는 말 좀 조심하렴.”

“애초에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한 건데? 넌 귀족이었지. 가문의 금기였나, 그런 거야?”

“근본도 없는 가문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 그건 아냐. 그저…….”

“그저?”

“예전에, 아편에 빠져서 신세를 망친 이를 본 적이 있거든.”

마우리스가 오, 하는 소리를 내며 흥미롭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러니?”

“……시작은 사소했어.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던 여자였는데 고이고이 키우던 자식들 중 하나가 살해당했지. 범인을 알았지만 처벌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 이후로 마음의 병을 얻은 건지 이래저래 힘들게 살아가다가 아편을 처방받았어. 정말 그뿐이었는데, 그걸 마시면 잠이 잘 온다면서, 악몽을 꾸지 않는다면서, 몸이 아프지 않는다면서……. 점점 양을 늘려가다가, 더 강한 걸 찾다가 그대로 신세를 망친 거야.”

“흐음.”

“……네 지인이었니?”

“고작 사람 한 명 가지고, 신인 네가 신경쓸 일이야? ……글쎄, 적당히 성에서 일하던 사용인이라고 해 두자.”

“해 두자, 라고…….”

“아무튼.”

오르피아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다 일도 놓아버리고, 주변인들도 엉망이 된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지쳐 곁을 떠나가고, 결국에는 아무도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지. 그가 무너지는 꼴을 좀 보았었는데 아주 가관이더라고.”

오르피아의 어조는 그 여자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오르피아가 용변을 보러 다녀와야겠다면서 침실을 나가고, 마우리스는 잠시 오르피아가 나간 자리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침묵이 어색했던 건지 뜬금없이 내게 말을 붙여왔다.

“코라, 혹시 저 애가 말한 게-”

“나 잘 거니까 말 걸지 마.”

“……그래, 푹 자렴. 잠깐 자리를 비켜 줄게.”

솔직히 대답하기 귀찮았고, 둘 앞에서는 그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고 했지만서도 사실은 꽤 머리가 지끈거렸으므로 나는 마우리스의 말을 끊고 돌아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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