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계, 피상적 이해 혹은 구체적 몰이해

착각계 자체는 이미 다루기 한참 늦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장르 저 장르 할 것 없이 유행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 유행을 다루는 것 자체를 심드렁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서사적 특성이 너무 단순한 탓도 있다. 어떤 장르를 고르든 간에 착각계의 공통점은 '실제로 주인공은 약은 구석도 있고 마냥 선량하진 않아 자신의 기준으로 어떤 합리성을 갖춘 선택을 하고, 때론 주변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착각계의 특징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지 메이킹'이란 점이다.

보통 착각계에선 '손실/피해 최소화'에 집중한다며 주인공이 자신만 희생을 하는 게 합리적인 것처럼 굴 거나 무언가 이득이 확고해 희생적인 행동을 한다. 아니면 때론 장기 투자 목적일 때도 있다. 어쨌든 외부에 비치는 모습만큼은 희생적이라 숭고해보이므로 작 중 조연 캐릭터들은 주인공을 우러러 본다. 

나는 이 부분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아주 심플하다. 대중이 사실 이런 걸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은 다들 누군가가 희생해서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굴러가는 사회에 신물을 내기 때문에 이런 장치가 가능한 것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자아전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자아전시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건 아니다. 우린 이미 뉴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고 SNS를 안 하며 사는 사람은 극소수이지 않은가. 젊을수록 더 그렇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자아전시는 기본적으로 SNS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이미지 위주인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활발하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지루하고 시시한지 다들 은연중에 잘 알고 있기에 일상 중 조금 특별한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이를 자랑하고 싶은 약간의 과시욕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런 특별함을 온전히 자신의 특성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욕망 중 하나인지라 '나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라고 일상을 찍어올렸는데 알고 보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출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쪽 구석에 찍힌 명품처럼 말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메이킹에는 변주가 많다. 외모나 여행 경험, 패션, 시험 성적, 육체적 건강함, 뭐가 됐든 어쨌든 평균보다 상회한다는 느낌만 낼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써먹는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메이킹을 스스로가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젊을수록 SNS를 떼놓을 수 없다는 건 이런 이미지메이킹을 일상적으로 수행한다는 얘기이자, 주류 사회로부터 동떨어진다는 점에서 대단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단 얘기기도 하다.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젊은 친구들일수록 SNS의 속성을 더 잘 알아서 자신들을 칭송하던 대중이 순식간에 돌변해 밑바닥까지 끌어 내리려든다는 걸 매일 같이 보며 지낸다. 특히나 그게 도덕이나 윤리와 연관되어 있다면 더 그렇다. 당연하지만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성범죄를 저질렀어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슥 뭉개고 지나가던 과거에 비하면 이런 반응이 필요할 때는 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없어질 거라고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두려워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착각계 요소가 널리 퍼진 것일 뿐이다. 실제로 대단한 도덕성이나 윤리관을 갖추고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 사회 규범상 올바른 축의 행위라 주류 속성을 갖추되, 그런 이미지로 착각한 건 남들이니 악의적으로 속인 건 아니라는 일종의 합리화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한다는 착각 속에게 살아갈 뿐이지 그 누구도 결코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 듣기 싫은 말이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렇기에 으레 누군가를 알아간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사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살면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실망해본 적 없는 사람은 없잖은가.

그럼에도 이해받고 싶어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넘쳐나는 구체적인 물이해가 두려워 어쩔 수가 없고 얼마나 드러내놓고 표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 모두가 그 벽을 부수고 들어올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착각계는 이 욕망을 들어준다. 착각이 무너지고 나서도 조연 캐릭터들은 주인공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용인하지 않던가.

착각계는 이렇듯 이미지메이킹에 열심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 가지는 사회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일상을 잠식한 구체적 몰이해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요소라 앞으로도 먹힐 테다. 누가 뭐래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타인과의 관계와 소속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딴소린데, 동시에 나는 이 요소에 깊숙이 내재되어있는 갭이 약간씩이나마 앞으론 줄어들 거라 예상한다. 특히나 젊은 여성층의 SNS 자아전시를 보면 그런 확신이 든다.

누가 뭐래도 21세기 최고의 히트 상품은 '자아'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독자성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는 개성을 이미지로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소비 사회에 살고 있고 보통은 이걸 충실히 들어주고 있다. 헌데 최근의 트렌드는 좀 특이하게도 비시각적 요소가 의외로 중시되고 있다. 패션에서는 향수가 그렇고, 필터링을 거치거나 손 볼 수 없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그러며, 또 독서가 그렇다. 카페에 앉아 슬쩍 관찰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혼자 오는 젊은 층이 확고히 있다. 물론 노트북 들고 와서 일하는 사람은 제외하고(불쌍한 프리랜서들이다.), 옛날에 비해 남성 혼자서 와 디저트나 커피를 즐기고 가는 사람도 늘었고 혼자 온 여성이 책을 읽다 가더라. 보통은 혼자 오면 예전엔 성별 무관하게 핸드폰을 주로 들여다봤는데 말이다.

이런 예시를 들으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디지털네이티브인 Z세대일수록 아날로그를 상상하지 못한다. 아날로그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단순성을 오히려 쾌적하게 여기는 거고, 반대로 얘기하면 디지털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이 때론 지긋지긋한 게다. 이건 다른 의미로는 이미지가 지나치게 흘러넘치고 모든 게 단편적으로 소모되는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틀에 박힌 유행에 디지털네이티브인 Z세대가 고분고분 이미지로 자아를 표출해주기에 질렸단 얘기기도 하다. 미디어가 원하는 대로 잘 유도되지 않는 세대로 어쩌면 새로운 정체성이 생길 수도 있단 얘기다. 물론, 밀레니얼 세대도 일부 그렇고 말이다.

게다가 이 젊은, 특히나 여성 세대들은 SNS로 만드는 버즈량이 곧 이슈가 가지는 파급력이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지금의 젊은 여성층은 과거랑은 다른 방식으로 매우 정치적이다. 자기과시든 상품성 광고든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뉴미디어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가 가장 효과적인지도 잘 알고 있다. 온 세상이 그들의 침묵을 원해도 바락바락 화내며 따지고, 순종을 요구해도 무시하고 제 갈 길 가는 태도를 보면 개인적으론 참으로 흐뭇하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긴 하다. 사람 뉜들 이미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지독하게 불안하기 때문에 때로는 모든 걸 단순화해서 적대적 대상을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건 우리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기도 하니 말이다. 페미니즘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갖은 정치,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지위와 권리, 기회를 달라는 '평등'이 중요한 사상인데 그런 건 모르겠고 '성별이 남성이니까' 내지는 '과거에 잘못했으니까' 죽어버리라는 식의 태도가 가끔 눈에 띄일 때마다 답답하긴 하다.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데다 때론 그 심리를 헤집어보면 페미니즘이랑 전혀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도 신도 없는 이 불안의 시대에서 두려워하면서도 끝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지금의 세대라면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 안에 내재된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태도에 약간의 여지만 둔다면 말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불안과 복잡성이니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한 게 정상이다. 아직 자아가 확고히 잡히지 않은 시기인지라 더 그런 면도 있을 테고 말이다.

얼마든지 그럴듯한 이야기로 '이렇게 하면 불안이 해결된다!'고 현혹시키고 있지 않단 점에서 싸우는 그대들에게 대한 애정이 느껴지길 바라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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