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3)

017. 끝까지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구나.

"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응한 적 없어요."

"..........."

"한 순간도..."

프리실라는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보며 읊조렸다.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갈색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참고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단 한 순간도 원한 적 없어요!"

붉은 반지 위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흑, 흐윽..."

둑이 무너진 것처럼 프리실라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아무래도 그녀의 약혼반지인 것 같았다.

어딘가 알 수 없는 기운을 흘리고 있는걸 보니 저것 또한 아티펙트일테지.

찬물을 끼얹은 것 처럼 조용한 방 안에 프리실라의 울음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이레시아는 서랍 위에 올려진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이레시아는 조용히 기다렸다. 아직 그녀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프리실라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젖어버린 속눈썹이 보는 이로 하여금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가련해 보였다.

"네 약혼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프리실라는 고개를 저었다.

"... 카일은, 영주 부인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도시 경비원 단장이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인망도 높고 주변에 따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순 날라리 건달 같아 보였는데..."

"경비 단장에서 파직 당하고 성격이 다혈질로 변하긴 했지만 린드비오르도 그 덕분에 광산에 필요한 자원들을 값싸게 구할 수 있었어요. 만일... 둘 사이가 저 때문에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린드비오르는 큰 피해를 보게 됐을 거예요."

"그 때문에 네가 고통받는다고 해도?"

어리석은 여자. 아니, 힘 없고 못난 약혼자를 둔 미련한 여자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그리고 가장 개새끼는 카일. 그 남자였다.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것 같았다.

이레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 답답한 이야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네 약혼자를 죽였나?"

"... 네?"

프리실라가 놀란 듯 퍼뜩 얼굴을 들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히아센도 놀라 이레시아를 쳐다봤다.

"네 약혼자가 정말 광산 사고로 죽은 것이 맞는지 묻고 있는 거야."

프리실라의 눈이 사정 없이 흔들렸다.

"그건..."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을 네 약혼자에게 알려준 이가 누구지?"

프리실라는 환하게 웃음 짓던 린드비오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약한 성격이었지만 늘 성실했고 자상한 남자였다.

'그 돌만 찾으면 더 이상 힘들게 여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야, 프리실라.'

그의 얼굴 위로 쩌적 소리가 나며 사정 없이 금이 갔다.

곧이어 머리가 으깨진 채 광산 절벽 아래에서 발견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푸른 벽색의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고 함몰된 머리와 기이한 각도로 꺾여버린 목은 괴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다. 잊을래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그런 식으로 차갑게 광산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이는 분명...

그녀의 두 눈이 더 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며 대답했다.

"... 카일."

"..........."

"하하... 하하하..."

허망한 웃음소리가 프리실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카일. 당신은... 당신이라는 사람은 끝까지.

끝까지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구나. 끝까지 나를 기만하고 희롱해.

절망의 나락에 빠진 눈은 공허하게 가라앉아 내렸다. 허망한 웃음소리 조차 이젠 나오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부터 빛이 잘 들지 않는 눈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줄기 남아 있던 빛 마저 꺼져버린 듯 했다.

껍데기 빼고 텅 비어버린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불을 붙이면 그대로 불씨 한 점 남기지 않고 재가 되어버리겠지.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게 있나?"

마치 죽어버린 듯한 얼굴로 프리실라가 고개를 저었다.

"... 그래."

더 이상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 나가봐도 좋아, 프리실라."

끈 떨어진 인형처럼 프리실라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로, 로비까지 데려다주고 올게."

히아센이 옆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마지막까지 가엾고도 가여운 여자네. 입안이 쓴 기분에 이레시아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마님."

부축을 받으며 침실을 나서던 프리실라가 문뜩 발걸음을 멈춘 채 뒤돌아봤다.

"...... 부디, 다치지 말고 돌아오세요."

이레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 대신 히아센에게 닦달하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대로 나가서 아티펙트까지 가져오면 더 좋을 거야. 히아."

'절망'이 히아센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

"빌어먹을!!"

카일은 좁은 골목길을 휘청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얼굴은 잔뜩 사색이 된 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헐레벌떡 달아나고 있었다. 요즈음 일진이 사납긴 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좆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개 같은 악몽에서 깨어나 평소와 다름없이 술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웬 갈색 머리 남자가 별 같잖은 걸로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생긴 것도 곱상한 게 비리비리 하게 생겨서 화풀이 상대로 딱이다 싶어, 밖으로 불러낸 게 화근이었다. 술집 안에서는 잔뜩 주눅 든 것처럼 보이던 남자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그저 피떡이 되도록 주먹 맛 좀 보여주고 빼앗은 돈으로 사창가나 돌려고 했는데!

도시 경비원 단장으로 주먹 쓰는 일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 자신이 날린 주먹은 단 한대도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걷어차이고 발로 밟힌 건 자신이었다.

코 뼈가 나간 건지 피가 나는 코는 시큰거리고 턱은 욱신거렸다.

"으악!"

미쳐 발밑의 돌을 보지 못한 카일이 결국 대차게 바닥으로 넘어졌다.

"시발!!!"

카일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여유로운 걸음 걸이로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괴물인가 이 자식?

"처음엔 내키지 않았는데 말이야."

갈색 머리 남자. 아니, 히아센이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두 눈은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생각해 볼수록 괘씸해서 안 되겠더라고."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생각해봐. 친구의 약혼자에게 찝쩍거리는 새끼라니, 괘씸하지 않아?"

"너... 프리실라 그 여자가 보낸 거냐?!"

카일의 눈이 번뜩였다.

프리실라... 망할 그 여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여자! 그 빌어먹을...!!

"벗길 땐 벗기더라도, 어딘가 한군데는 망가트려 줘야 속이 시원할 거 같은데."

어디가 좋겠어?

히아센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카일이 히익 겁을 집어먹으며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줘! 나, 난 그저...!"

"오? 쓰레기가 말도 하네?"

히아센이 주먹에서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눈매를 좁혔다.

어디가 좋을까... 혹시 모르니 죽일 수는 없고, 주먹 꽤나 함부로 휘두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오른손잡이야?"

"ㅁ...뭐?"

"아니면 왼손?"

아, 손목시계를 왼손에 차고 있으니 오른손잡이겠네. 히아센이 날이 잘 벼려진 단검을 품에서 꺼냈다.

"고생 좀 하겠어. 앞으로 계속 왼손으로 밥 먹으려면."

히아센이 말갛게 웃으며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컥...!"

단검이 오른쪽 손바닥을 관통하는 순간 히아센의 무릎이 카일의 명치를 가격했다.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카일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히아센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단검을 뽑아내 한 번 더 손바닥을 찢어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히아센이 흥얼거리며 신발로 상처를 짓밟으며 헤집었다. 카일의 몸이 중간중간 움찔거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검을 든 손에 튄 핏방울을 탈탈 털어내며 히아센이 카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여간.

"좀도둑 역활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네."

곧이어 히아센은 카일의 옷과 소지품들을 모조리 챙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팬티 한 장 빼고 알몸이 된 카일을 내려다보며 히아센이 얼굴을 굳혔다.

"설마."

진짜 속옷이 아티펙트이진 않겠지? 더러워. 손대기 싫어. 내 눈도 분명 썩을 거야. 지금도 알몸이 된 남자를 보고 있어서 눈이 썩을 거 같은데.

히아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도깨~비 빤스는 질겨요~ 아 튼튼해요~"

시내로 들어선 히아센이 노래를 이어 부르며 눈에 보이는 속옷 가게로 들어갔다.

"빤스 빤스~ 도깨비 빤스~"

히아센은 요란한 색깔의 남자 속옷을 몇 벌 골라 담았다. 혹시라도 이레시아가 정말 카일의 속옷을 찾는다면 대신 보여줄 것들이었다.

필요가 없어지면 늑대에게 입으라고 던져주면 그만이고.

"그런데 이건 색이 너무 요란한가?"

히아센이 손에 들린 붉은 형광색 속옷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옆에서 가게 주인이 다가왔다.

"어머, 그게 거기 섞여들어 있었네?"

"응? 이거요?"

이게 뭔데? 그냥 빤스잖아.

히아센이 눈을 끔벅이며 속옷을 내려다봤다. 가게 주인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히아센의 귓가에 속삭였다.

"총각, 애인 잇슈?"

"... 애인이요? 왜요?"

히아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더욱 죽이며 속삭였다.

"사내를 지치지 않는 요부로 만들어주는 아티펙트가 걸린 물건이야."

그러면서 팔꿈치로 히아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이게... 정력과 관능미를 올려주는 그런 기능이 담긴...

"미친 도시..."

히아센이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날 밤 히아센은 결국 카일의 빤쓰까지 벗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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