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4)
018. 사냥을 하기 좋은 시간
빠르기도 하지.
이레시아는 히아센이 늘어놓은 옷가지들과 소지품을 내려다봤다. 밤늦게 돌아온 히아센은 어딘가 속이 좋지 않은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놓고,
작고, 투박하고 역겨워. 더러워... 더러운걸 봐 버렸어... 라며 울상을 짓고는 사라져버렸다.
늑대는 미간을 좁힌 채 제게 떠넘기고 간 봉투를 뒤적였다.
"그건 뭐야?"
이레시아의 질문과 함께 봉투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형형색색의 남자 속옷이었다.
미친놈.
늑대는 짜증 어린 기색으로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집어던져 버렸다.
"아하하...!"
이레시아가 어깨를 떨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전 히아센이 중얼거리던 말과 가격 태그가 그대로 붙어있는 속옷들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다 벗겨오라는 말에 질색을 하더라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대용품을 내밀려다가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손과 눈을 박박 씻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으려나?
히아센은 보기보다 비위가 약하니까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래도 기특하니 늘상 부탁한 일은 해주는데...
이레시아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속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두 눈에는 장난기가 넘실거렸다.
"이왕 사다 준 거, 버리지 말고 입지 그래?"
"불쏘시개로 쓰기 딱 맞겠네. 이리 내."
"히아가 기껏 사 들고 온 선물을 태우는 건 무슨 경우야?"
속옷을 낚아채려는 손길을 이레시아가 간단히 피해냈다. 늑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 속옷을 손에 들고 재미지다는 듯 키득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하여간 히아센 이 자식은 진짜.
아니, 히아센도 히아센이지만 눈앞의 여자가 문제인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외모를 가져서 가끔 사람 속을 긁어놓지.
라미아와 서큐버스.
재해급 미모를 가진 두 괴이의 피가 섞인 여자가 턱짓, 손짓 한 번만 하면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하게 해달라고 매달릴 남자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아니. 비단 남자뿐이 아니지 않나?
"무슨 짓이지?"
"놀자는 짓?"
그녀가 야하게 웃으며 늑대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라붙었다. 늑대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어쩌면 이레시아는 그저 재밌다는 웃음일 뿐인데, 그녀가 흘리는 매혹의 힘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던 늑대에게는 좋지 않았다.
"한 번만 입어봐. 응?"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농밀하게 흘러들었다.
"싫어."
"어울릴 수도 있잖아."
"싫다고 말했어."
늑대는 또 다시 거절을 입에 올렸다. 붉은 눈이 아쉽다는 듯 손에 들린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주술이 걸린 물건인데 아쉽네. 이 남자가 개처럼 구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쩐지 입 안이 바싹 말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체취를 크게 들이마셨다.
... 좋은 냄새.
맥박이 뛰고 있는 자리 위로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을 아프지 않게 깨물자 늑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순간 머리 속이 녹아내릴 듯이 뜨거워지면서 굶주림이 더욱 심해지는 걸 느꼈다.
'아, 이건 조금... 위험한데.'
자제력을 잃고 달려들 것만 같아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참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지금 달려들어봤자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였다.
게다가 잘 참고 숨기고 있지만, 그의 자제력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늑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귓불이 조금 붉었으니까.
아사 직전까지 굶는 것도 억울한데, 혼자서만 안달 나는 건 더 억울하지 않는가?
같이 이성을 잃고 뒹구는 거라면 몰라도.
이레시아는 짙게 묻어나오는 속마음을 감추며 뒤로 물러났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부서져라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을 애써 못 본 마냥 그녀가 손에 들린걸 건네주었다.
"그래도 버리지는 마.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잖아?"
"... 헛소리."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손에 들린 속옷을 낚아챘다. 성질은...
이레시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다시 본래의 일로 돌아왔다.
알뜰살뜰하게도 다 벗겨왔네.
그녀의 눈이 카일의 옷가지를 살폈다.
고급 가죽은 아니어도 돈깨나 들어 보이는 가죽 부츠와 지갑. 바지는 이리저리 해진 것이 어디서 한바탕 대차게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라? 그런데 이 피는...
이레시아는 피에 흠뻑 젖어있는 상의를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놓았다.
"히아센 짓인가."
이 정도 피의 양으로 봤을 때 한쪽 손을 아주 난도질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인 셈이지.
그녀의 손이 꼼꼼하게 물건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탈락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치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뜩 그녀의 시선이 어느 물건 위로 꽂혀 들었다. 푸른 빛을 띈 물건에서는 어딘가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두사의 시선도 무력화 시키는 아티펙트라고 했던가.
그녀 역시 '괴이'이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사기를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레시아의 손끝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푸른 보석이 박힌 피어싱은, 찬탄스럽게도 서늘한 늑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피어싱?"
"내구성은 좋지 않아도, 이런 진귀한 것을 잘도 가지고 있었네."
작은 피어싱이 손 끝에서 두둥실 떠오르더니 그녀의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붉은 눈이 좁혀들었다.
"Miserabilis(가여운). Gratia(은총)."
색이 바랜 보석 따위를 다시 되돌리는 수식이 피어올랐다.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던 피어싱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히아센이 억지로 귀에서 뜯어낸 건지 핏자국이 남아있던 피어싱이 마치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여전히 내구성은 좋지 않았지만, 뭐...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일 테니.
이레이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은 깊었고, 달은 밝지 않았다.
"바로 갈 거니?"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냥을 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이리와, 늑대씨."
늑대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다가와 몸을 숙였다. 왼쪽 귓불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곧이어 뚜둑! 피어싱 끝이 그의 귓불을 꿰뚫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늑대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차가운 손이 달래듯 귓불을 어루만졌다.
검은 사제복을 걸친 채 푸른 피어싱을 한 미남이 보였다.
"... 예쁘다."
이레시아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눈으로 웃었다.
+++++
'4구역 광산'은 프리실라와 아이린의 조부가 실종된 곳이었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광산 입구를 폐쇄시킨건지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사람들이 실종된 곳이니 당연한 일인가?
광산 입구에 다다라서야 이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불을 좀 밝힐까?"
피어싱이 불편한 듯 귓불을 만지작 거리던 늑대가 이내 아공간에서 아티펙트를 꺼냈다. 불 빛에 서로 간의 얼굴이 비쳤다. 붉은 눈이 긴밀하게 자신을 살피는 걸 발견했다.
"불편해?"
"... 앞에 봐. 넘어지기 싫으면."
늑대가 작게 혀를 차며 귓불에서 손을 뗐다.
"어머, 설마 넘어질까 봐? 라미아나 서큐버스가 밤눈 어두운 거 봤어?"
이레시아가 별게 다 걱정이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걱정되면 손이라도 잡아주는 게 어때?"
그녀가 늑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난질은 이제 그만하라고 입을 열려던 늑대의 눈에 그녀의 드레스 끝자락에 비치는 구두가 밟혔다.
... 차라리 포기하면 편해질까.
늑대는 체념한 듯 이레시아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다 이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늑대는 입을 닫았다.
광산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어쩐지 숨이 점점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발이라도 잘못 딛는 순간 그대로 떨어질 낭떠러지는 절로 발밑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이레시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광산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반쯤 모습을 드러낸 사파이어 광물부터 돌 틈 사이에서 반짝이는 흑요석까지.
이러하니 티파의 영주가 왕가보다 재산이 많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도 하네.
"아가도 같이 데려오면 좋았을 텐데."
"말이 되는 소리를..."
아무리 쥰이 반짝이는 돌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위험한 곳에 데려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히아센이 같이 있으니 어련히 잘 돌봐주고 있겠지.
그것보다도.
늑대가 예민한 감각을 끌어올려 저 앞쪽을 노려보았다.
"저 안에서 뭔가 기척이 느껴지는군."
그것도 한 둘이 아닌 기척이었다. 흥미로운 얼굴로 흑요석을 구경하던 이레시아가 저 너머 어둠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어쩜 이리도 거짓말처럼 첫수부터 바로 마주치게 된 걸까.
"음... 실종자들이라고 생각해?"
"... 아니."
광산 안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바램과는 다르게 저 앞에 있는 것은 실종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치고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벌레 한 마리 보지 못했으니까.
"역시 내 늑대는 감이 좋단 말이야."
스르륵.
어디선가 뱀이 기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몸을 긴장시키며 어둠 속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이윽고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 수백 마리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천장에서도, 벽에서도 바닥에서도.
그리고 그 뒤에는 아마도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메두사가 있을 터.
"한 두 마리가 아닐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숫자는 도대체..."
떨리는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살갗을 아프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레시아는 손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 늑대씨, 독사에 면역력이 있던가?"
"헛소리."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든 늑대가 칼날에 마력을 덧씌웠다. 라미아의 피라도 흐르지 않는 이상, 인간이 독사의 독에 대한 면역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메두사를 보면 가장 먼저 머리를 베어. 그리고 머리가 떨어지거든 불로 눈을 지져버리도록 해."
독사는 내가 처리 할 테니까.
수 백마리 뱀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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