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5)

019. 내가 지금 목줄이 짧아서 말이야.

늑대는 땅을 박차더니 단숨에 독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독사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독니가 채 닿기도 전에 이레시아가 쏘아 올린 칼날 같은 바람에 머리가 썰려 나갔다.

이레시아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수식들이 피어올랐다.

"뒤는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이레시아의 말에 늑대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검을 휘둘때마다 머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때 뿐이었다.

빌어먹을 뱀 새끼들! 늑대가 자꾸만 앞길을 막아대는 독사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아를 빼곡히 가리는 독사 무리가 끊임없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건 저 앞에 있는 게 메두사라는 확신이 들게 했다.

"Gladius(칼날). Ventus(바람)."

늑대의 발목을 물려들던 뱀의 머리가 또 다시 칼날 바람에 잘려 나갔다. 뒤를 흘끔 돌아보니 이레시아 역시 짜증이 난 듯 날 선 눈빛을 하고 있었다.

콰직!

걔 중 한 마리가 이레시아의 팔을 타고 올라와 독니를 박아넣었다.

"망할..."

이레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휘둘러 독사를 떼어냈다. 독은 들지 않아도 아픔까지 면역이 있진 않았다.

뱀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니, 점점 더 늘고 있었다. 늑대는 까드득 이를 깨물며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이런 잔챙이들 말고 메두사를 베어야 했다.

늑대가 다시 어둠 속을 노려보며 전진했다.

"키에에엑!!"

어둠 속에서 무언가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살갗이 저릿저릿한걸 느끼며 늑대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늑대씨 앞에...!"

이윽코 저 끝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칼이 있어야 할 곳에는 징그러운 뱀들이 꿈틀거리고 피부는 딱딱한 돌처럼 회색빛을 띠고 있는 존재. 시선 한 번으로도 손쉽게 인간들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였다.

늑대의 검이 크게 반달을 그리고는 그 앞으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메두사의 품 안으로 뛰어든 늑대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쩌정...!!

뱀의 동공과 닮은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큭?!"

두개골이 흔들리는 고통에 늑대가 신음을 흘렸다. 메두사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얼려버리려다가 튕겨 나갔다. 입안의 여린 살을 씹으며 고통을 참아낸 그의 검이 메두사의 목을 내리쳤다.

텅...!!

돌 따위를 내려치는 소리를 내며 메두사의 머리가 떨어졌다.

"Brevis(간략한). Lampas(등불)."

목이 바닥에 뒹굴기 무섭게 늑대가 메두사의 머리를 불태웠다.

"키에에에엑!!!"

잘려진 머리통에서는 진녹색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체액에 닿은 바위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 끼에에에엑...!!!!!

목을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지자 마치 동료를 잃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쏟아져나왔다. 솜털이 절로 오싹 일어났다.

"좀 닥쳐."

늑대가 안광을 번뜩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두통에 머릿속이 시큰거렸다. 그러나 아직 베야 할 것이 많았다.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늑대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갈수록 사나워지는 독사들의 머리를 베어낸 이레시아가 늑대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돌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메두사의 단말마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붉은 눈이 좁혀들었다.

'도대체 몇 마리가 있는 거지?'

독사들이 팔다리를 계속 타고 올라왔다. 이레시아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뱀들을 난도질했다. 소맷자락은 어느새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드레스는 독에 잔뜩 절어있었다.

"... 역시... 파셀텅을 배웠어야 했나?"

거만한 얼굴로 제게 뱀의 언어에 대한 책을 던져준 로엔 하르데카인 피에타 백작의 얼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복부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 역시. 그 남자를 떠올리는 건 실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큰 마법으로 죄다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좁은 광산이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끽해야 세, 네마리 정도가 무리 지어 있을까 싶었는데 열 댓 마리가 넘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했다. 메두사란 종족이 이렇게까지 무리 지어 몰려있다니. 내가... 뭔가를 놓쳤나?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뱀들이 다시 타고 올라왔다. 이레시아가 혀를 찼다. 여기서는 정리될 것도 안 될 것 같았다.

텅...!!

다시 돌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눈이 예리하게 빛나며 늑대를 다시 살폈다. 어쩐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늑대씨?"

"큭...!"

다섯 번째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내며 늑대의 입에서 다시 왈칵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그의 귀에 걸린 피어싱은 돌로 변하는 것은 막아주어도 머릿속이 얼어버리는 고통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떻게 할까, 일단 후퇴할까?

이레시아의 눈이 입구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후퇴해서 다음은? 늑대와 그녀 빼고는 메두사의 눈을 보는 순간 돌이 되어버릴 텐데. 이 이상 추가할 수 있는 전력이 없었다.

그녀가 갈등에 빠진 순간 쩌적! 피어싱에 금이 갔다.

"?!"

귓가에 파고드는 소리에 늑대가 왼쪽 귀를 감싸 쥐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그 소리는 선명하게 박혀 들어 이레시아가 놀란 기색으로 늑대를 돌아봤다.

늑대가 인상을 구기며 코 앞까지 다가온 메두사를 노려봤다. 이미 동상이라도 걸린 것 같이 차가운 머릿속을 얼음 송곳 따위가 긁어내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코피가 주륵 흐르며 시야가 흔들렸다.

"... !!"

이레시아의 벼락 같은 외침이 들렸다. 눈앞에 암전이 찾아왔다.

+++++

숨통을 끊으려는 듯 단검을 내리 꽂으려는 손이 멈췄다. 숨은 거칠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상했다. 단잠에 빠져있는 여자의 목숨 같은 건 아주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인데. 땀으로 두 손이 축축했다.

일족을 멸망시킨 여자를 죽이는 것이 일생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다. 이 여자는 분명 그의 원수가 맞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잊을 수 없는 단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여자가 아니야...'

몇번이고 들었던 음성이 그를 흔들었다. 목덜미의 동맥을 끊으려던 손에 힘이 풀렸다.

"하..."

알 수 없는 깊은 체념과 함께 결국 늑대는 단검을 거뒀다. 그 순간, 이레시아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이 열렸다. 지척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방금 전 제 손으로 죽이려고 했던 여자의 두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왜 멈춰?"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잠잠했던 속을 다시 끓어오르게 했다.

"죽여. 죽이고 싶으면."

그런데... 쉽게 죽어주진 않을 거야. 붉은 눈동자가 그를 올곧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신도 염원이 있겠지?"

나 또한 마찬가지야. 침대에 누운 여자에게서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절대 쉽게 당신 손에 죽어주지 않을 테니까."

마치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웃어 보이는 것 같았다.

+++++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잔뜩 무겁고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이레시아가 분명 제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던 거 같은데...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보아도 눈앞은 암전이었다.

뭐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피어싱에 금이 가고 결국 돌이 돼버린 건가?

눈도 보이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를 확인해보고 싶어 눈을 깜빡였지만 자꾸만 감겼다.

귓가에 목소리는 그때 들려왔다.

"쉬이잇... 움직이지마."

귓가에 들릴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다. 감기려는 눈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이레시아의 목소리였다. 머릿 속이 윙윙 울리며 삐이이 하는 이명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가...

정신을 잃은 그의 몸은 이레시아의 품에 안겨있었다. 잘 가누어지지 않은 목을 조금 들자 이레시아의 목덜미가 보였다.

그들은 바짝 서로에게 밀착한 채 돌 틈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배리어 벽을 치고 숨죽이고 있었다. 여전히 광산 안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전 미쳐 채 베어내지 못한 메두사들까지.

"눈 감아."

이레시아가 그의 얼굴을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 젠장...

검을 쥐는 손가락에 힘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피어싱에 금이 가면서 메두사의 힘의 일부를 맞아버린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쯧."

이레시아는 여전히 끈 떨어진 인형처럼 멕을 못 추는 늑대의 머리를 꽁꽁 끌어안으며 주위를 긴밀히 살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내구성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이렇게 맥없이 금이 가버릴 줄이야.

명백한 그녀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늑대에게 돌아왔다. 그녀의 눈에 살기가 덧씌워졌다.

밟으면 그대로 내장을 토해낼 벌레들이 감히.

그냥... 싹 다 죽여버릴까.

저 안에 혹시나 모를 생존자가 있던 말던, 이 광산을 통째로 무너트려 저것들을 모조리 터트려버리고 싶었다.

늑대가 그녀의 살기를 느낀 건지 품 안에서 작게 움찔거렸다.

'예민하긴.'

이레시아가 작게 숨을 내쉬며 그것을 갈무리했다.

이제 어쩐다...

붉은 눈이 가늘게 좁혀들며 메두사들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늑대가 목을 떨어트린 개체가 다섯, 남은 메두사는 일곱 정도인가?

세마리는 그들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저 안쪽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그럼 나머지 한 마리는 뭐지?

줄곧 저 안쪽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움직임이 없는 메두사의 기척이 있었다.

이 메두사 무리의 우두머리인가. 메두사들에게 우두머리가 존재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어어어..."

근처를 맴도는 개체들은 괴기한 소리를 흘리며 그들을 찾고 있었다. 이레시아는 숨을 죽이며 늑대를 끌어안은 몸을 더욱 밀착했다. 숨어있는 시간이 길수록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딴 배리어는 그저 잠깐의 눈속임일 뿐이니까.

혼자라면 저들의 머리를 당장 뜯어내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자신이 달려들거든 메두사의 독사들은 늑대를 물어뜯으려 들게 분명 했다.

도망치는 일이든, 싸우는 일이든. 지금 이 상태로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일단 잠시라도 시간을 벌만한 곳이 필요했다. 이레시아의 눈길이 흑요석이 반짝이는 곳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 옆의 낭떠러지로.

처음 발을 딛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산맥을 따라 광산 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깊을까, 얕을까?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선택지도 없었다.

낭떨어지까지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본 그녀는 조용히 손끝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혹시나 해서 늑대의 귓가에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늑대씨, 혹시 수영할 줄 알던가?"

할줄 안다고 해도 지금 몸 상태로는 무리겠지만.

"부탁이야, 물리지만 말아줘."

두 사람의 모습을 가리던 배리어가 걷혔다. 메두사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 곳에 몰렸다. 이레시아가 재빠르게 준비한 마력어를 내뱉었다.

"Gladius(칼날). Ventus(바람)!"

"키이이익?!"

방향도 목표도 없이 난잡하게 흩날리는 칼날 바람 사이로 이레시아는 늑대와 함께 흑요석이 반짝이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윽...?!"

발목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통증에 이레시아가 비틀거렸다. 좁아 터진 광산 안에서 아무렇게나 쏘아 올린 칼날 바람이 벽을 맞고 이리저리 튀어 오른 탓이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는 사이 독사 한 마리가 바닥을 미끄러지며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

이레시아가 순간적으로 독사와 낭떠러지 사이를 가늠하고는 늑대를 힘껏 밀어 떨어트렸다.

"Requi... 흐윽?!"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늑대를 향해 완충재 수식을 쏘아 올리려던 이레시아의 머리칼이 붙잡혔다. 그리고는 채 반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고통에 저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커헉...!"

풍덩.

늑대가 떨어진 낭떠러지 밑에서 작게 물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얕은 물길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 운도 좋아."

이레시아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처박힌 채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이 저를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메두사를 올려다봤다. 이제 이 빌어먹을 뱀 새끼만 치워버린다면야...

"... ?"

무언가가 그녀의 얼굴 위로 뚝뚝 흐르고 있었다. 먹잇감이 된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려던 이레시아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얼굴을 적시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눈물이었다. 뱀처럼 찢어진 메두사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뭐야...?"

지금 나랑 장난해? 깨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이레시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메두사를 올려다봤다.

"... 울어?"

아. 그런데 이를 어쩌지. 울고 싶은 건 내 쪽인데. 저 남자가 물살에 휩쓸려가 너무 멀리 떠내려가면 곤란한데. 피곤함이 절로 몰려왔다.

"이를 어쩌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어서, 봐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 붉은 눈이 기묘한 빛을 띄면서 휘었다.

"버러지들이."

"키익?!"

서걱!

돌같이 단단한 메두사의 머리가 간단히 잘려 나갔다. 비명도 다 지르지 못하고 나뒹구는 머리통 위로 이레시아의 손이 눈알을 짓뭉개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메두사의 목이 꿰뚫렸다.

"그, 거... 거거걱..."

피 거품을 물며 메두사가 꿈틀거렸다. 이레시아는 천천히 목을 꿰뚫은 손목을 돌렸다. 메두사의 목에 파묻힌 손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메두사의 목이 척추뼈 일부와 함께 무 뽑히듯 몸체에서 뜯겨져 나왔다.

아직 신경이 살아있는 모양인지 눈을 뒤집어까고 턱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다른 한 손으로 눈을 뽑아냈다.

질긴 근육이 지이이익, 안구와 함께 딸려 나왔다.

이레시아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목이 시큰거리는 게 아까의 칼날 바람에 인대가 나간 모양이었다.

메두사들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이레시아는 피를 뒤집어쓴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미안한데 올 거면 한꺼번에 와줄래?"

붉은 눈이 말갛게 웃었다.

"내가 지금 목줄이 짧아서 말이야."

뽑아낸 안구 두짝이 손안에서 뿌직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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