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내 절교를 받아라 - 5화
모니터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켜져 있는 직사각형의 초록색 창. 네이놈 지식인.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궁금증을 커버해주는 천국 같은 그곳. 그리고 그곳에 내가 있다. 나는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초록색 검색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몸을 바로 하고 숨을 한번 들이키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깜빡거리는 커서처럼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친구가'라고 치자마자 촤르르 뜨는 자동 검색어.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친구 감동시키기, 친구가 짜증 나요... 등등등. 혹시나 내 고민이 있나 싶어서 눈으로 훑어봤지만 역시 없다. 아니 그래도,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 한 명쯤은 분명히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왜냐면, 세상에 정수현 같은 또라이를 나 혼자만 감당하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그래 침착하자, 김아연. 어차피 알아봐야 할 거였잖아? 자, 쳐보는 거야. 눈 딱 감고.
<친구가, >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마저 쳤다.
<친구가,
가슴을 만져요.>
쳐, 쳤다. 아 떨려.... 어떡하면 좋아...
내 절교를 받아라 5화
5. 엄마 아빠의 스킨십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 中
".... 어... 그러네..."
헐... 어째서 하고많은 편의점과 휴게소는 온데간데없고, 하필 모텔이란 말인가.
그러나 조금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디선가 잠을 자야 했고, 정수현도 휴게소에서 쪽잠을 잤던 터라 여전히 '나는야 존나 피곤한 상태라서 언제 사고를 낼지 모르는 잠재적 졸음운전자'라는 메시지가 쓰여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배고픔보다 피곤함이 더 심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모텔의 이름은 그 이름도 기가 막힌 [야산 무인텔] 이었다. 무슨 이름이 저렇게 직설적이야. 야산에 있다고 야산무인텔이라니. 그러나 처음엔 좀 경계하는 눈빛으로 모텔을 바라보던 나는 의외로 깔끔하고 깨끗한 건물의 외관을 보고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묘한 분위기의 모텔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무인 체크인 기계만 달랑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4만 원으로 과연 될까? 나와 정수현은 둘 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체크인 기계를 보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말에 정수현은 슬그머니 기계에 다가서더니 버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방 이름으로 보이는 버튼들을 누르니 가격이 떴다. 정수현은 꾹꾹 버튼을 누르며 슬그머니 나를 보았다. '돈은 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비... 싸..."
어째서? 여름 성수기라서? 주말이라서? 뭐 이렇게 비싸! 이 사람 한 명 보기 힘든 동네에... 이렇게 비싼 숙박비를 받다니. 사색이 된 내 표정을 흘금 보던 정수현은 나완 달리 그냥 침착했다. 나는 지갑을 꼭 쥔 손으로 체크인 기계를 한참 보다가 버튼을 꾹꾹 눌러보았다. 뭐야, 4만 원짜리 방이 없어? 모텔이 원래 이래? 이러다가 저 쪼그만 풍뎅이 안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사태가 올까 봐 겁이 났다. 게다가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너 모텔 처음 와봐?"
"당연하지!"
"흐응- 그래?"
"......"
나는 정수현에게 쏘아주고는 망했다, 싶어서 꾹꾹 아무거나 눌렀다. 가격이 그나마 괜찮은 방은 이미 다 찼는지 아예 버튼에 불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정수현이 나를 스윽 밀더니 제일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계의 액정에 45000이라는 숫자가 떴다.
"어?!"
사, 사, 사만 오천 원!
"나 오천 원 있어, 찹쌀떡."
꼬깃꼬깃, 청바지 주머니에서 다 구겨진 오천 원을 건네는 정수현이 그때 처음으로 정상인처럼 보였다. 웬일이야 네가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다행히 45000원짜리 방은 그 방이 유일했고, 행운인 건지 불행 중 다행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정말 차에서 잘 각오를 하고 있던 터였다. 망설이지도 않고 우리는 그 방을 선택했다. 기계가 카드키를 뱉어내고, 우리는 지친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의 제일 끝 방이었다.
"일단 자고, 모텔 로비에 ATM기가 있을 수 있으니까 찾아보자."
"찹쌀떡, 근데에-"
"응?"
정수현이 문을 여는 동안, 나는 정수현의 부모님과 우리 엄마에게 연락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며 따라들어섰다.(정수현의 핸드폰은 풍뎅이 기름이 떨어지는 동시에 방전되었다. 도대체 날 찾지 못했으면 어떻게 다시 돌아갔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메시지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우뚝 서는 정수현 때문에 따라 멈추었다.
"... 야 비켜."
"찹쌀떡, 있잖아-"
"응?"
"여기 불륜커플들을 위한 곳 같지 않아? 애초에 관광지도 아닌 촌구석에 모텔만 덩그러니 있는 게 이상하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럼 이건?"
탁- 정수현이 무슨 스위치를 켰고, 무심결에 방을 보던 나는 입을 쩍 벌렸다.
".... 어..."
붉은 조명이 비취자 무슨 아라비안나이트풍의 야릇한 캐노피가 제일 먼저 보였다. 침대만 덩그러니 있는 방. 심지어 온통 붉은 벽지에, 붉은 조명에, 붉은 커튼에, 붉은 시트. 손님용 가운도 빨간색이었다. 그리고, 싸구려 레이스 슬립이 잘 게어 져 놓여있는 게 보이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만지다 말고 멍하니 정수현을 바라보았다.
"......"
"흐음-"
"너, 너 씻어! 피곤하잖아."
"응."
왜 내가 민망해야 해. 나는 괜히 어떤 말이라도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정수현에게 씻으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헐. 모텔은 이런 곳이구나. 나는 정수현이 욕실로 사라지자마자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수현이 사라진 욕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슬쩍 침대에 앉아보았다. 푹신푹신한 매트는 자리에 앉자마자 쑤욱 들어갔다. 모텔의 침대는 이런 것이었구나. 이렇게 화려한 시트로 덮여 있었던 거였어. 새삼 처음 와보는 모텔이 조금 신기하기도 해서 한참 동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백팩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문득, 정수현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엄청난 확신을 느끼고 어떡해야 하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부모님댁에 내려온 지도 모르고 있었던 정수현은 잘못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대책 없이 나를 찾아다닐 거면 기름값에, 지갑에, 휴대폰에, 갈아입을 옷에, 최소한의 세면도구는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내 티셔츠를 줘야 할 게 분명했다.
"찹쌀떠어억-"
아니나 다를까, 문을 빼꼼 열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옷 있어어?"
"위에 건 있는데 밑에 입을 거 없는데..."
"응. 알았어."
"일단 이거 받아..."
"됐어. 필요 없어."
읭?
헐?
내가 팔만 쑤욱 욕실 문틈으로 내밀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활짝 열려서 주춤했다. 뭐야. 의아한 눈으로 활짝 열린 욕실 문 너머를 보는데 더운 김이 홱- 끼쳐왔다. 그리고 하얀 김 사이로 씨익 웃으며, 완벽한 나체로 뚜벅뚜벅 나를 지나쳐가는 정수현.
여전히 티셔츠를 건네주려고 팔을 뻗은 채 가만히 있던 나는 차마 지금 보는 장면을 못 본 것처럼 어색하게 시선을 처리하며 바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민망했다. 친구 끼린데 뭐 어때, 하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하필 야릇한 분위기의 모텔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래, 그런 거야. 나는 정수현이 썼던 욕실로 들어와 문을 잠그면서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정작 정수현은 민망함 따위는 모른다는 듯 나체로 뚜벅뚜벅 걸어올 뿐이었던 것이었다. 아... 놀랬잖아. 진짜...
"으어 뜨뜻해..."
그러나 민망함이고 자시고 욕실에 들어와 버렸다. 뜨거운 물을 받으니 모든 것이 순간 다 잊혔다. 노곤하게 풀어지는 근육의 느낌이 좋았다. 여행 따위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피곤하긴 한 걸 보니 오늘 하루가 참 다이내믹하긴 했나 보다. 이게 다아- 다 정수현 때문이지.
나는 뜨거운 물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이 일순 나긋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잠이 무척 잘 올 것 같아서 나를 사정없이 귀찮게 해준 정수현에게 감사한 마음이 0.1초간 들었다.
욕실 문을 열고 머리를 탁탁 수건으로 닦아내며 들어서자 이미 정수현은 누워있다. 그래 너도 피곤할 거야, 그렇게 대책 없이 쳐들어와 날 괴롭히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불 끈다?"
이미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정수현을 보고 불을 끄기로 결심했다.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끄자 침대 옆 협탁에 놓은 붉은 스탠드 불만 은은하게 켜졌다. 정수현의 옆으로 다가가서 스윽 침대로 올라섰다. 침대는 좀 높았다. 푹신한 만큼 높은 매트인 게 분명했다. 아, 이불은 왜 한 채인 걸까. 두 개였으면 더 편했을 텐데... 그치만, 여름이었고 이불이 있건 없건 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고 슬쩍 이불을 벗겨내 몸을 뉘려는데, 정수현이 홱- 돌아섰다.
그리고 내 고개도,
홱-
돌려 버렸다.
"아 미친!"
"왜애애-"
"티셔츠 줄 테니까 그거라도 입고 자, 당장!"
"나 원래 옷 안 입구 자는데?"
"자!"
나체의 정수현이 빙긋 웃으며 나를 껴안으려 했다. 설마 진짜 옷을 안 입고 누워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최대한 정수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티셔츠를 내밀었다. 그러나 정수현은 싫다며 찡찡 거리고는 제 옆자리를 팡팡 때릴 뿐이었다. 아, 진짜 매너 좀. 속옷만 입은 채 말끔히 벗고 있는 정수현이 씨익,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으쓱한다.
"빨리 자자, 찹쌀떡."
"...야, 너. 감기 걸려. 이것만이라도 입어."
"혹시 민망해서 그래?"
"아니거든!?"
"그럼?"
"아 몰라, 잘 거야."
에라이 나도 몰라. 나는 정수현에게 내민 티셔츠를 던져버리고 스탠드 불을 껐다. 그리고는 홱-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고 정수현을 등진 채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아, 분명 잠이 잘 왔는데 정수현 때문에 수면 욕구에 파동이 생겼다. 한참 동안 베개를 이리저리 베다가 나는 슬쩍 눈을 떴다. 이 야속한 마음은 모르고 내 뒤에 누워있던 정수현은 벌써 잠이 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뜨고 이리저리 모텔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방안의 윤곽이 대충 보였다.
인테리어 때문에 몰랐는데
여기 제법 채광이 괜찮은 곳이네...
달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비취는 빛이 뭔가 했는데 알고 보니 달빛이었다. 오히려 이런 곳이라서 달빛이 더 밝게 보인 건지도 모른다. 온통 불빛 따윈 없는 허허벌판의 촌구석. 나는 가만히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가 이내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여행을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지리산 정상 등반이라도 한 것 같은 여독이 밀려오는 건 뭘까.
그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추억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나중에 정수현과 나 사이에 생긴 도저히 일방적으로 내가 힘들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추억 중에 그래도 제법 괜찮은 쪽의 추억이라고.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정수현이 나를 찾아 그 먼 길을 차를 타고 내려왔다는 것(게다가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캐물어서 온 진 모르겠지만 그 노력을 상상해보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휴게소에서 눈을 붙일 때, 내 손을 꼭 잡고, "또 도망가면 안 돼, 찹쌀떡."하면서 입을 헤- 벌린 채 잠이 들었던 것.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정수현과 절교를 하려던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1년에 수십 번, 지옥을 선물해주는 정수현에 대한 우정 때문에 나는 진짜 성격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더 바보 같아진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정도라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마 그렇게 내가 잠이 들고 그 다음날 말끔히 일어났다면 우리의 여행이 비록 즉흥적이고 피곤하긴 해도 제법 좋은 추억으로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
"....."
"야, 뭐 하는 거야?"
"있어봐, 잠시만..."
"어, 어머, 미친, 야! 야... 헐..."
"아, 잠시만, 응? 잠시만, 잠깐이면 돼. 뭐 확인해 볼게 있어."
"....아, 싫어!"
"응, 알았어. 알았어, 찹쌀떡 잠시만... 응? 아이, 착해..."
"정수현!"
반쯤은 수면상태에 빠져있던 나는 갑자기 뒤에서 껴안아오는 정수현의 움직임에 황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 갑자기 내 티셔츠 밑단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는 정수현 때문에 잠이고 나발이고 정신이 번쩍 들어 나도 모르게 내 허리를 껴안은 정수현의 손을 잡았다. 마치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는 동물처럼. 숨이 헉, 들이켜졌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궁금해서 그래."
"뭐가?!"
"이거..."
브래지어 밑단을 잡고 쑤욱 올려버린 정수현은 내가 뒤돌아보지도 못하게 내 등 뒤로 온몸을 기대면서 양팔을 교차해 내 가슴을 꽉 안고 그대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곰인형에 얼굴을 묻는 아이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에 나는 아주 잠시간 이게 꿈인가 싶었다.
이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 내 심장소리.
2. 내 심장소리.
3. 내 심장소리.
4. 내 심장소리....
...였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할 말을 잃는다는 게 딱 그 짝이었다. 그리고 스윽, 한쪽 다리를 내 허리 위로 올리면서 품을 꽉 조여오는 정수현. 나는 팔꿈치를 뒤쪽으로 톡톡 두드리며 정수현을 돌아보려고 했다. 이거 풀어 이 미친아. 그러나 미친 정수현은 모른 척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미쳤어?!"
어둠 속에서 내 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여자 끼린데 뭐 어때..."
역시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끈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낭창하기 짝이 없었다.
"... 놓으라고 했다."
정수현의 그 말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여자 끼린데 뭐 어때'라는 말이 제일 문제잖아. 여자끼리니까. 나는 몸을 흔들며 정수현을 밀어냈다. 마지못해 정수현이 밀려났다. 올라간 브래지어를 내리고 티셔츠를 다시 정리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슬쩍 몸을 일으켜 놀란 눈으로 정수현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놀랬어, 찹쌀떡?"
"너... 너.... 장난에도 정도가 있는 거야."
나는 달빛에 한쪽만 보이는 정수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씩씩거렸다. 그런데 속옷만 입은 채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정수현은, 지금까지 내가 봤던 정수현과는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갑자기 좀 겁이 났다. 게다가 달빛이 사선으로 내리쬐는 곳은 하필 정수현의 쇄골과 허리였는데, 나도 모르게 새삼, '얘 왜 이렇게 야하게 생겼어?'싶어서 심장이 덜컥했다. 미친년의 옆에 있으면 같이 미친년이 되는 걸까.
아니, 그때는, 그러니까,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직감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좀, 위험한, 상황, 이야, 하고.
"너 이런 장난, 그만해. 이건 도를 넘는 거야."
"있지, 실험해보고 싶어."
"뭐래..."
"나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거든?"
정수현은 여전히 누운 채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곤조곤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말투였다. 나는 이불을 끌어모으고는 정수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자 정수현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쩌란 말이야? 손을 잡으라는 건지, 그만 떨어지라는 건지,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잡아줘, 손."
"...... 너 왜 이래?"
"나 찹쌀떡이랑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
그날 정수현은 한 번도 내게 보여주지 않은 표정들을 엄청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초진지한 표정. 아니,
초섹시한 표정.
같은 여자로서, 안타깝게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얜, 예쁘긴 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도 떨릴만하겠다는 생각. 비록 네가 사실은 엄청난 또라이에 구제불능의 사고뭉치라 해도 지금 네 분위기라면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겠어. 그렇지만 나는 네 또라이적 기질을 100%아는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정수현과 아이컨택을 하고 체념한 듯 정수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쑤욱, 정수현이 내가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분위기가 차분해져서 나도 끌려가며 정수현의 바로 옆에 딱 붙어 누웠다.
"너 무슨 일 있어?"
내 말에 정수현은 말없이 내 손을 꼼지락꼼지락 만져댔다.
"야."
"있지... 찹쌀떡은 해 봤으려나?"
"뭘?"
"으응- 섹스."
헐.
내가 입을 쩍 벌린 채 정수현을 보고 있으니 정수현은 그새 진지했던 얼굴을 풀고는 샐쭉 웃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 사이에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왜 우리는 항상 피의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대화를 나눠야 했을까. 물론 그건 네 잘못이지만. 다른 단짝 친구처럼 비밀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여야 했었는데... 정수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지만 않았으면 우린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눴을 거야. 그리고 진작 둘이서 여행도 다녔겠지.
나는 정수현의 말이 당황스럽지만, 의외로 조금 차분해져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런 걸 왜 물어."
"안 해봤지?"
"야, 사람 민망하게..."
"안 해봤구나? 그렇지?"
"......"
"좋아. 아주 착해. 그치만 하지마, 안 좋아."
".... 어?"
꼼지락, 꼼지락. 정수현에게 잡힌 손가락들이 괜히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정수현은 내 눈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대화가 이렇게 어색하고 이상할 수 있지? 화제를 돌려야 해, 하고 생각했다. 나는 장난처럼 정수현의 말을 돌리려다가 이내 내 손을 꼼지락거리던 정수현이 슬며시 내 손을 똑바로 잡자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김아연."
"아, 왜. 좀 자자, 나 피곤해..."
"나 너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돼?"
".......?"
"딱 한 번만. 진짜 한 번만.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 난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훠얼씨인- 지금 좀 복잡하단 말이야아."
내 귓가에 숨이라도 불어 넣듯, 정수현은 조곤조곤 속삭였다. 꼭 달콤한 주문으로 나를 재울 것만 같다.
"... 무슨 소리야?"
나는 안간힘을 썼다. 넘어가면 안 돼. 정수현의 강력한 마법에 대한 저항을 위해 부러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그리고 무서운 얼굴이랍시고 정수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 정수현의 포커페이스는 미동도 없다. 표정이 없는 새침한 얼굴만 보인다.
"...... 만져본다니 뭘?"
"네 거."
......?
반사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뭔 소리야... 이게... 하는 순간,
슬쩍 티셔츠 위로 조심스럽게 작은 손바닥이 올라왔다. 내 가슴, 그게 무슨 작고 잘 깨지는 물건이라도 되는양 소중히 감싸잡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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