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순미래와 의지미래

작가님, 외계인이세요?

BGM: SPITZ - CHERRY

단순미래와 의지미래


어느 날 그는 병아리가 되었다.

최초목격자는 추리소설가 쥐였다. 그는 몇 년째 혼자 산다. 가는 곳이라곤 집 앞 마트와 쥐의 작업실과 시골쥐 탐정 사무소가 다다. 연락하는 사람은 타이완에 사는 집주인과 쥐뿐이다. 집주인은 월세가 두 달쯤 밀려도 연락을 먼저 건네지 않을 만큼 호방한 사람이었으므로, 병아리가 된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쥐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전에 왕씨 집안 정통 중화식당에서 뉴스를 보고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 쥐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다. “한 달 이상 집에 없으면, 이 번호 누르고 들어와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냅킨을 서너 장 뽑았다. 모나미 153 0.7로 황색 냅킨 귀퉁이에 열네 자리 숫자를 꾹꾹 눌러 적어 건네자, 쥐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 초쯤 지났을까. 그는 스텐 유광 물컵에 담긴 차가운 보리차를 삼켰다. 컵을 내려놓았을 때 쥐는 그가 건넨 냅킨을 미트볼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뭉치고 있었다. 글씨를 쓴 장은 그렇다 쳐도, 아래에 받친 것까지 그렇게 버릴 것까지는 없지 않나. 자원 낭비가 심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쥐가 둥근 공 모양의 냅킨을 입에 넣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는 쿨럭거리고 기침을 하고 말았다. 사레가 들린 것이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였기 때문에 빨리 진정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어이쿠, 쥐가 재생 종이 냅킨을 오물오물 야무지게 씹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갑자기.”

“놀라, 놀라서요.”

쥐가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린다. “저 아저씨? 대단하긴 하다. 곱빼기를 나오자마자 비우네.” 곱빼기를 한 방에 비우는 남자와, 중국집 종이 냅킨을 씹어먹는 남자. 어느 쪽이 더 경악스러운지는 자명하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그는 물병을 들어 스텐 컵에 물을 따랐다. 소주병을 들고 흉악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남배우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씀하심 되잖아요. 가깝지 않은 사이에 이런 부탁 껄끄럽다,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왜 휴지를 집어먹고 그럽니까.”

쥐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젓가락을 가운데 놓인 탕수육 그릇으로 향했다. “먼 소리야.” 쥐는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 외웠는데.”

“열네 자리를 이 잠깐에요.”

쥐는 제 머리를 검지와 중지로 톡톡 쳤다. “나 작가야. 이 정도 정보도 못 기억해선 작가 못 해.” 작가인 것과 기억력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게 말하는 쥐가 무척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난다. 미심쩍은 심정으로 절반쯤 남은 짜장면을 뒤적이며 그는 물었다.

“빨리 외우는 비결은요? 계좌 번호로 치환한다든가.”

“비결 없는데. 워낙에 타고나서. 그래도 도움되는 거 하나는 있다. 평소답지 않게 색다른 사건이 있으면 절대 안 잊지.” 춤추면서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야. 쥐가 그렇게 부연했다.

그래서 애꿎은 휴지를 씹어먹은 것인가. 기가 막혔지만 동조는 해 주었다. “하기야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던 날 날씨가 어땠는지는 절대 못 잊죠.”

“너는 뭐 그런 살벌한 비유를 드니.” 고개를 내저은 쥐는 볼에 바람을 넣으며 냅킨이 잇몸에 꼈다고 투덜거렸다. 한 장도 아니고 몇 장씩이나 씹었으니 당연하다. 펄프가 소화는 잘 될지 의문이었다.


다시 현재. 그의 마음속에서 믿음직스러움 속성이 일 퍼센트포인트 정도 상승한 쥐는 이렇게 말한다. 

“조금 놀랐어.” 태평하기 짝이 없는 가지런한 눈썹을 하고서 쥐가 말한다. 초인종이 울리고 한참이 지나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중국집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문을 열었다고 했다.

“아하.” 그는 병아리가 되고 나서 무거워진 고개를 끄덕인다.

“왕씨네 쟁반 짜장 예술이잖아.”

“맞아요.” 실은 쟁반 짜장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쥐와 함께 어딜 가면 늘 쥐가 계산하기 때문에, 메뉴판 제일 상단에 있는 메뉴를 고르게 된다. 상사와 함께 오마카세를 먹느니 혼자서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는 것이 나으며, 특히 그 상사가 쥐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는 쥐에게 그런 속사정을 털어놓을 용기가 없다. 병아리가 된 몸으로도 계속 쥐와 함께 점심을 먹어야 할까. 병아리는 짜장면도 돈가스도 육개장도 먹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앞으로의 자신은 감격한 얼굴로 얼큰한 육개장을 먹어치우는 쥐를 맞은편에 놓고 좁쌀 따위나 쪼아 먹어야 하는가. 그가 진지하게 고뇌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쥐는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그때 말했지? 비통상적인 일은 암기에 도움이 된다니까.” 죽었을까 봐 걱정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쥐가 현관 신발장에 서서 해 주었다.

그는 손바닥만 한 원룸에 살고 있다. 원룸 한가운데에 침대가 있다. 거기에 누워서 고개도 까딱이지 않고 쥐를 방 안으로 초대했다. 인간이었다면 자신의 유일한 연락 상대인 보스를 앞에 두고 드러누워 있는 호사는 결코 누리지 못했으리라.

“실례합니다.” 짧게 인사한 쥐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신발을 벗었다. 성큼 방에 들어선 쥐는 남의 방을 제 것인 양 둘러본다. 쥐의 걸음은 크고 빠르며, 따라서 자그마한 원룸을 한 바퀴 도는 데는 오 초도 걸리지 않는다. 한 바퀴 돌아 그의 앞에 선 쥐가 대뜸 입에 올리는 화제란, 다시, 그의 도어락 비밀번호다. “가물가물했거든. 근데 다섯 번 만에 맞췄어. 추리소설가답지.”

“예.” 냅킨까지 씹어먹어 놓고 잊어버렸단 것인가. 그러니까 먹지 말고 안전하게 보관했다면 좋았을 텐데. 도움받은 입장이니 사사롭게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병아리가 됐구나.”

“그렇게 됐어요.” 그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날개를 파닥이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 덜 여문 날개는 미약하게 움찔거릴 뿐이다.

쥐는 그의 날개를 조심성 없는 손길로 움켜쥔다. 허공으로 잡아당기다시피 해서 들어 올렸다가 섬세하지 못하게 내려놓는다. 그는 부리로 앓는 소리를 낸다.

“말도 하구.”

“예.” 그는 몸을 굴려 일으켰다. 병아리가 된 첫날은 익숙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방향도 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을 잡았다. 자신이 공이라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반동을 주어야 한다. 아직도 날개 운용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라지 않지.” 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왜 닭이 아니라 병아리일까. 병아리라면 성체가 아닌 거잖아. 그러면 너 지금 미성년자니, 혹시?” 성실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까 맥이 탁 풀린다. 이런 남자였지, 애초부터.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 반문할 지점은 대범하게 지나치면서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저, 성인 남자만 한 병아리인데요. 말을 하는데도요.”

“뭐.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일탈을 꿈꾸니까.”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턱을 잡고 고개를 끄덕인다. 당사자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을 멋대로 납득하지 말란 말이다.

“그렇지만 병아리라니까요.”

쥐는 “뭘, 네 바로 옆에 쥐도 있는 걸.” 하고 실없는 농담을 했다. 쥐는 쥐의 이름 첫 자의 머리글자로, 쥐의 필명이기도 하다. 동물의 이름도 알파벳 이름도 되는 그것을 쥐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그의 필명을 검색하면 아트 슈피겔만이 쓰고 그린 동명의 만화나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그랬다. “나는 차라리 너보다도 이 현실이 더 놀라워. 레이먼드 챈들러 알지?”

“필립 말로요.” 당연히 알 것이라는 말투의 질문이어서, 레이먼드 챈들러라면 이전에 기나긴 이별을 몇 페이지 읽다가 포기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챈들러도 읽지 않고 하드보일드를 쓰겠단 사람이 이 세상에는 있어.” 쥐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차량 매뉴얼, 설명서도 읽지 않고 자동차를 모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

“재미있던가요? 그 사람의 하드보일드는.”

“형편없지. 물론 챈들러에 비하면 내 글도 불쏘시개나 다름없지만.”

기나긴 이별도 빅 슬립도 읽지 못했지만 영미 추리 소설에 대한 선형적 고찰이란 삼백오십 페이지짜리 에세이는 하룻밤 만에 완독했다.

불쏘시개 쪽이 잘 맞는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요점은 이거지.” 쥐는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다른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빙빙 돌렸다. 셀프로 도배해 울룩불룩 일어난 벽지에 몸을 기댄 채였다. “미스 추 스터디방에 이제 예전의 위상은 없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쥐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올려다본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곱슬머리가 아직까지도 초안을 수기로 작성하는 이른바 아날로그 작가의 길쭉한 손가락에 둘둘 말려 있다. 요점, 중요한 것, 우리의 신경 회로를 집중시켜야 하는 대상. 그것이 병아리가 된 그의 상황이 아니라 미스 추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의 스터디방이라고 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스 추,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얼마 전에 졸업한 애 하나 새로 들어왔는데, 아주 물건이야. 그게 챈들러도 안 읽고 스릴러 쓰겠다고 한 걔거든. 하라 료라면 전권 원서로도 탐독했으니까 상관없다나? 말이 돼? 아무리 취향의 영역이라고 해도 말이지. 하라 료 별명이 뭔데.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 아니야. 카페 차린다면서 에스프레소 한 번도 안 마셨다, 그렇지만 최고의 카푸치노 제작자에게 사사했으니 상관없다, 그러는 꼴이잖아.”

“그래서 전화하신 거예요?”

“응?”

“또 일반 독자의 의견이 필요하셨느냐고요.”

지난 며칠 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진동했던 휴대폰을 떠올리며 그는 말했다. 병아리가 된 첫날, 서툰 날갯짓으로 119를 누르다가 휴대폰을 바닥에 떨치고 말았다. 액정에는 금만 갔지만, 터치가 먹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수도 걸 수도 없었다. 그래도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는 알았다.

“너는 명색이 추리 작가 보조면서 자기를 일반 독자라구 하면 어떡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목록 줄줄 외잖아. 프라이드 없어? 못해도 마니아야.”

“그럼 왜요?”

“뭐가 왜요?”

“전화요.”

“전화를 당연히 걸어야죠. 내가 댁 고용인이니까요.” 쥐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월급 두둑하게 챙겨 줬더니 보조가 출근을 안 하길래요. 그래서 걸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는 어수룩한 호응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논리였다. 매일매일 얻어먹는 점심값이 얼만데. 잠수 타면 돈 떼어먹혔나 걱정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는 침대 밑으로 내려서며 물었다. “뭐 먹을 것 좀 드릴까요?”

“점심시간인가…. 병아리한테 얻어먹기는 미안한데.” 그렇게 말한 쥐는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그는 병아리가 된 몸을 자그마한 식탁 의자와 식탁 사이로 구겨넣는다.

웨지우드 르네상스 골드 접시 두 개가 각각 그와 쥐 앞에 놓였다. 해외 직구를 처음으로 시도했을 때, 받아본 그릇은 검지와 엄지를 맞붙인 원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그 일을 투덜댔더니 며칠 뒤 쥐가 한심해서 주는 보너스라며 택배로 부쳐 주었다. 아까워서 일 년에 두세 번밖에 쓰지 못한다.

그의 몫으로는 오트밀이, 쥐의 몫으로는 오이 샌드위치가 준비되었다. 그의 그릇 옆에는 터치도 안 먹는 핸드폰이 놓여 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것을 쥐가 올려놓은 모양이다.

“시리얼이나 드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챙겨 드시네요. 남의 집에서.” 그는 목을 빼 쥐 뒤편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부엌 공간을 내다보았다. 도마나 칼, 설탕 같은 것을 잘도 찾아서 사용했다. 물건을 쓰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기왕 요리를 시작했다면 깔끔하게 뒷정리도 마무리한다면 좋겠다.

“너랑 내가 남이야?” 쥐가 몸을 한껏 기울여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깜빡이는 눈의 속눈썹이 길다. 쥐라면 사막에서도 눈이 따가울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이죠.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왜 이렇게 편협해. 차려 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감사합니다.”

“옳지.”

그렇게 말하는 쥐의 뒤로, 봉지가 열린 오트밀 봉투가 보인다. 얼마 전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 세일을 해서 샀던 것이다. 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던 어젯밤, 부리로 봉투 끝 부분을 물어뜯은 다음 바닥에 쏟아 쪼아먹었다.

“셰프님.”

“네에.”

“오이 샌드위치는 어떻게 요리하셨나요?”

“크림치즈, 마요네즈, 절인 오이. 크림치즈 담백하길래 나는 설탕도 뿌렸어. 너 설탕 좋은 거 쓰더라. 라 뻬흐슈?”

“오트밀은요?”

“예쁘게 부었지요.” 뭐랄까,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태클을 걸고 싶지도 않다. 좌우간 쥐는 문밖을 나갈 의욕도 없던 그에게 찾아와 준 유일한 사람이다. “고맙다고 안 해?”

“고맙습니다.”

“옳지.” 쥐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접시에 부리를 박았다. 곧이어 방 안에 쩡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릇에 여러 갈래로 금이 나 있었다. 깨지진 않았나, 생각하는 순간 그릇이 본래의 형체를 잃는다. 그는 양 날개로 부리를 감쌌다.

물건에는 집착하지 않지만 선물 받은 것은 나름대로 소중히 여기고 있다. 명백히 실수다.

샌드위치를 먹던 쥐가 입에 든 것을 삼키고 감탄한다. “어머.”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네 그릇인데.”

그릇 조각과 쏟아진 오트밀을 치운 쥐는, 식탁 위에 오트밀을 부었다. “이렇게 먹는 수밖에 없겠네.” 민망하다는 듯이 쥐가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쥐가 오기 전까지는 내내 이렇게 먹었다. 부끄러울 것은 없다. 자신은 병아리니까 사람의 식기를 사용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쥐가 샌드위치를 베어 문다. 찬찬히 몇 번 씹고 삼킨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병아리가 된 자신의 피고용인이 앞으로 저지를 사고들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얼굴을 한 쥐는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 입을 열지 않는다.

오이 씹히는 소리와 그의 부리가 식탁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그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웨지우드 르네상스 골드와 라 뻬흐슈에 대하여 생각한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유럽어를 인식하게 된 데에는 쥐의 공산이 크다.

매번 거절은 한다. 작가님 형편을 아는데 제가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 일반적인 범위 내의 답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존심을 자극했던 걸까. 너무 많이 받아 버려서 간이고 쓸개고 빼앗겨도 할 말이 없다.

“좋은 병아리는 삐악삐악 울음소리가 나야 하고, 눈동자라든가 다리 벼슬 부분이 선명한 색을 띠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쥐의 접시에는 빵가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솜씨다. 접시를 손가락으로 훑는다거나 혀로 핥는 것은 분명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떤 수를 쓰는지 미스터리다. 이런 예의범절을 갖춘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일개 서민을 몰래 팔아치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했어요?”

“무슨 정부 문서 같은데.”

쥐가 휴대폰을 스크롤 하며 대답했다. 뭘 하나 보고 있자니 휴대폰 화면을 들이댄다. 하얀 PDF 화면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보아하니 구글에서 병아리 키우기라도 검색한 모양이다. 성의껏 병아리로 대우해주려는 것일까. 별로 고맙지 않다.

“저는 좋은 병아리가 아닙니까?”

“글쎄. 삐약거리지는 않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쥐가 또 말했다. “병아리부터 못 되겠지.”

“그런가요.”

“너는 낮의 하늘을 보면서 우주를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의 감수성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쥐가 말을 마칠 즈음 어디선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구사노 마사무네의 담백한 목소리가 그 위로 얹혀졌다. 쥐가 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노래 감상인가요.” 그렇게 물었는데 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해서 어깨를 으쓱인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119에 전화를 연결하려 해도 터치가 먹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는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그 무력한 화면은 있는 힘껏 반짝이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올 때 나타나는 연녹색 빛깔이다.

노래를 튼 게 아니라,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그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며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글자인 것처럼 직사각형 위로 떠오른 세 음절의 단어를 바라본다.

윤효숙. 쥐가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읽었다.

그는 그제야 놀랐다. 화들짝 날개로 휴대폰을 덮었다. 봄 햇살은 반 암막 커튼을 뚫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으므로, 쥐의 얼굴은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적당한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무언가 해명해야 한다는 죄악감을 느꼈다. 더듬더듬 날개로 휴대폰을 들어 올리려다가 식탁 아래로 밀치고 말았다. 짧은 낙하, 그 끝에 휴대폰은 깜빡이는 화면을 아래로 하여 종착한다.

쥐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허리를 굽힌다. 계좌 이체는 꼬박꼬박 하고 있다. 생활비를 독촉하는 용건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는 초조하게 날개를 매만지며 쥐가 그것을 주워 주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서툰 털에 안겨 주기를 기다린다.

쥐가 휴대폰을 집었다. 들어 올린다. 후두둑, 유리 파편을 닮은 무언가 떨어졌다. 액정이 박살 났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수리비, 된통 깨질 것이다. 그것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 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뭘 자꾸 죄송하다야.” 쥐가 휴대폰을 몇 차례 뒤집으며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이거 못 쓰겠는데.”

“제, 제가 치울게요.”

“아냐… 됐어.” 쥐가 웅크려 앉았다. “전화 못 받아서 어떡해.” 쥐가 그렇게 말했다. 그가 왜 자신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박살난 휴대폰에서는 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쥐는 만신창이가 된 사각의 기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계 조각들을 휴지로 쓸어모았다. 꽤나 다정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인다. 오늘만 소중한 물건을 두 번이나 깨먹었다. 병아리의 몸으로 인간답게 살면 집안 살림을 모두 새로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다. 눈이 뻑뻑하단 느낌이 든다.


쥐의 도움 덕분에 병아리가 된 이후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나가기 싫다고 주장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왜 나가야 하는데요?” 물었더니 “병아리는 일광욕을 좋아하니까.” 하고 주장했다.

“저보고 병아리 아니람서요.”

“내가 병아리야.”

억지 논리를 들이대면 당할 수가 없다. 

트렌치 코트를 껴입고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몇 겹이나 껴 신었다. 쥐가 몇 년 전 러시아 여행에서 사 온 샤프카와 선글라스, 마스크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린이집 다닐 때를 빼면 누군가가 옷을 입혀 주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단지 보송한 털을 가리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지만 기분이 이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꼭 어릴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발 좀 들어 봐. 이미 니삭스를 네 개쯤 신은 오른 다리를 잡고 쥐가 말한다. 그는 넘어지지 않게 유의하면서 왼쪽 다리를 든다. 쥐는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빼낼 때처럼 신중한 태도로 그에게 두툼한 수면 양말을 신긴다.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불평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봄인데요.”

“너나 나나 겨울 모자밖에 없잖아.”

“그냥 나가는 것보다 이게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은데.”

“이러고 나가면 수상해 보이지. 옷 안 입고 나가면 카이스트로 끌려가.” 쥐의 머릿속에서 대표적인 이상 현상 연구기관은 아마 카이스트인 모양이었다. 원서 접수를 할 엄두도 못 내본 곳에 그런 식으로라도 끌려가면 영광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몇 발짝 떨어진 데서 그를 바라본 쥐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무래도 다리가 너무 얇아졌단 말이지.” 미묘한 문장이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요.”

“항상 만일을 대비해야 돼.” 그러면서 양말을 하나 더 신긴다. 쪼그리고 앉은 쥐는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병아리가 되면서 사람이었을 때보다 키가 커졌다. 쥐의 정수리를 볼 수 있다. 키가 커진 것의 장점은 그뿐이었다. 내내 누워 있어서 몰랐는데,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털이 짓눌린다.

“이상해요?” 그는 뒤뚱거리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옷이 무거워서 움직임이 둔해졌다. 안 그래도 커다래진 덩치가 옷을 겹겹이 껴입자 배는 커졌다.

“언뜻 보면 좀 추위 많이 타는 사람처럼 보여.”

“근데 너무 더운데요. 문제는.”

“바깥은 아직 쌀쌀해. 집이라 그렇지 나가면 또 다를걸.”

쥐의 차량은 6세대 구형 그랜저. 검은색이고 선팅도 잘 되어 있다. 쥐가 문을 열어 주어 조수석에 앉았다. 조그만 날개를 버둥대고 있자니 쥐가 쏜살같이 달려 차 주위를 빙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손길은 세심하다. 인간이었을 적엔 경험하지 못한 친절이다. 무심코 예스맨이라고 불러 버리게 될까 봐 부리를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아무것도 못 하네.” 그렇게 얘기하는 쥐는 웃고 있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들떠 보였다. 책임감이 너무 강한 사람은 반대로 중요한 일을 쉽게 팽개치는 쪽에 매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차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집 앞 골목에 벚꽃이 만개했다. 골목마다 심긴 벚나무는 두 팔로도 안지 못할 만큼 허리가 굵다. 동네가 낙후되었는데도 봄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서울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자연에 감흥이 없는 그로서도 이해가 갈 정도의 장관이다.

저 멀리, 떨어지는 꽃잎 아래서 사진을 찍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봄이면 언제나 벚꽃이 피어난다. 예외는 없다.

따라서 사진으로 기념해야 할 만큼 유일한 순간도 없어야지 옳다.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면, 벚꽃이 피고 지는 것도 사람이 살고 죽는 것도 동일한 찰나일 뿐이다. 사진을 남기는 것은 그 찰나에 우열을 따지는 것이다. 가공된 과거는 편집자의 취향 외에는 아무것도 반영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지금을 놓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된 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쥐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쥐는 계절마다 그를 찍었다. 예스맨 이후로 이렇게나 자주 자신에게 카메라의 대포 같은 렌즈를 들이대는 남자는 쥐가 처음이었다. 봄에는 벚꽃이 예쁘고 여름에는 녹음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단풍이 붉고 겨울에는 정취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중에는 24절기 이름이 전부 나왔다. 이미 전부 아는 것이라 크게 감흥은 없었지만.

예쁠 것도 많다고 뷰파인더에 담길 때마다 생각했다. 무슨 얘기에든 삼단논법을 들이대는 쥐가 얼토당토않은 근거로 자신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 우스웠다. 사람이 사진을 찍는 데 명쾌하고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비논리적인 존재다. 아마 외계인도 그러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비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미스 추는 인간적인 존재는 아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한강은 보이지 않는다. 차가 줄줄이 막혀 있어서였다. 

“오늘따라 차가 많네요.”

“토요일이니까.”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즈음부터 켜놓은 영어 라디오가 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끼어든다. 스프링 인 원스 스텝. 봄을 말하는 스프링은 아니지만, 요즘 날씨와도 잘 어울리는 숙어죠. 그는 라디오를 흘려 들으며 멍하게 햇볕에 뜨끈하게 달궈진 자신의 털을 날개로 어루만졌다.

날씨란 것은 무얼까. 날씨로 시작된 얼마나 많은 대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연결하고 또 단절했을까. 그러고 보니 예스맨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얘기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오늘 흐리다. 그러게. 비는 안 온다고 했는데. 못 믿을 일이야. 믿을 건 할머니들 관절밖에 없어.

쥐가 스프링 인 원스 스텝, 하고 아나운서의 발음을 따라 웅얼거리다가, 볼륨을 줄였다. “평일 아니면 보통 이 정도 걸려.”

“그랬나요.” 벌써 토요일이구나. 그런 체감도 없었다. 병아리가 된 후로는 어린 아기가 된 것처럼 하루 중 반나절은 잠을 잤다. 나머지 반은 꾸벅꾸벅 졸았다. 생체 시계가 백팔십 도 돌아간 정도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저번에 들어온 건 말이야.”

“예?” 갑자기 이야기 주제가 튀어서 따라갈 수 없다. 조금 후에 저번이라는 말이 인간일 때를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며칠 안 되었는데도, 인간일 적의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이십 대였지. 여자였지. 법적으로는 무직자였지. 통계 결과를 분석할 때 쓰일 법한 기본 정보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왜. 자기 남자친구가 외계인인 것 같다고.”

무직자라고는 해도, 정식으로 계약서 쓴 프리랜서 비슷한 것이다. 쥐의 옆에서, 그는 글쓰기 조수이자 일종의 탐정이었다. 시골쥐 탐정 사무소는 쥐의 작업실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쥐가 작업실과 탐정 사무소를 오가며 추리 소설 집필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경찰서를 놔두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네,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인 아마추어 탐정을 찾을 정도로 별난 고객들을 상대했다.

“그 사람이요.”

무작정 기르기만 한 머리가 인상적인 여자. 작년엔가 처음 찾아왔다.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고 할 때는 차라리 괜찮았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 보고서(추정)를 들고 찾아왔을 때가 난감했다. 돌아가시라고 해도 듣지를 않고, 침울한 얼굴로 이 지구가 외계 세력의 침공에 얼마나 무방비한지 일장연설을 했다.

다른 고객을 상담할 때는 늘 동석하던 쥐는, 그 여자만 오면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꼼짝하지 않았다. 한번은 화장실 문앞에서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토로했다.

못해 먹겠어요. 이러다간 저도 음모론자가 될 지경이라고요.

상담료 받잖아.

외계인 침공이 무서워지고 있다고요 지금.

걔네 꽤 사람 귀여워해. 너 정도면 예쁨 받을걸.

지구가 납작하다고 한다면요?

상담료 받잖아….

말하는 변기는 이미 여자의 현금에 잠식당해 있었다. 주민센터고 경찰서고 병원이고 연락해서 상담해 봤지만, 꼬박꼬박 비용을 지급하고 태도도 점잖으며 다만 방문할 때마다 일반적인 대중의 시각에서 다소 괴상하게 느껴지는 음모론을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뿐인 사람을 내쫓을 방도는 없는 듯했다.

쥐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네가 연락이 없길래 내가 조사해 봤어. 외계인 맞더라.”

“예?” 그는 병아리가 되고 처음으로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병아리의 얼굴 근육은 사람의 것과 달리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깨달았다. “농담 마세요.” 말하는 변기는 현금에 더해 음모론에까지도 잠식당한 듯했다.

“거대 병아리도 있는데 외계인이야 못 있을 이유 있나.”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라고,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는 힘없는 날개로 윈도우 스위치를 조작해, 애꿎은 차창만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 바깥의 사람과 눈이 마추졌다 깜짝 놀라 올렸다 했다

“진심입니까?”

“날짜 정해서 만난 거, 그거 바람피워서가 아니라 나머지 날엔 상부에 정기 보고 올려야 해서였대. 새로운 행성 탐색이 목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서 사귀고 만 거래. 지구에 머무는 기간은 애당초 삼 년으로 정해져 있었다나. 지구는 생명체가 너무 많아서 거주 행성으로는 적합하지 않았고.”

어느새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더블유엘엠 은하로 떠났어. 더블유엘엠. 알아? 울프룬드마크멜로테 은하. 나도 몰랐는데 국부은하군 어디에 있는 독립 은하래.”

쥐가 휘파람을 불었다. 멜로디는 스피츠의 너는 태양. 작곡가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노래는 듣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인 쥐가 유일하게 듣는 요즘 밴드다.

SF는 잘 읽지 않아서 모른다. 외계인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면 읽었던 책 중에도 몇 권 있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얘기다. 현실 속에서 연락이 잘 안 되고 자꾸 거짓말을 하는 연인의 정체를 외계인이라고 추측할 이유는 없다.

“그, 그래도 사람을 귀여워는 해준 모양이네요. 기꺼이 떠난 걸 보면….” 그는 닫힌 창문에 얼굴을 기댔다. “작가님 말씀이 맞을 줄이야.”

“뻥이야.”

왜 스피츠일까. 그런 느낌의 일본 밴드를 좋아하는 거라면 아이묭도, 범프 오브 치킨도, 레미오로멘도 있다. 궁금해서 이전에 물어보았다. 쥐는 옛날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가 실수로 들었다고, 그 후로 스피츠만은 예외로 정했기 때문에 듣는 것이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쥐는 구사노 마사무네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집에 구사노 마사무네 인터뷰가 실린 잡지도 몇 편 있다. 그는 아직까지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 방금처럼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속은 척을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따금씩 무표정을 뚫고 나오는 쥐의 상냥한 미소를 못 본 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쌍생성과 쌍소멸에 어긋나는 단서들을 눈감아 주는 것은, 아마추어 탐정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죠. 거짓말이죠.” 역시 거짓말인 것이다.

“사실일 수도 있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주제 선정이 잘못됐어요.”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제가 알아서 일지 확인할게요.”

쥐의 오므려진 입술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노래 속 직유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품격 있게 느껴진다. 쥐가 핸들을 꺾는다. 그는 몸에 힘을 주어 실수로라도 털북숭이 몸이 안전벨트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 하늘에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태양의 핵에서는 수소가 헬륨이 되고, 그 결과 방출되는 태양 빛은 약 8분간의 여정을 거쳐 지구에 도달한다. 얼마 전 읽었던 한 입짜리 과학이란 책에서 그렇게 설명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에 산란한 햇빛은 차창을 통해 그의 노란 털을 내리쬘 즈음에는 너무 미약해져 있다. 이래선 일광욕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무색할뿐더러 길을 잃지 않을 수도 없다. 그 노래의 가삿말처럼, 태양이 있는 사람만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강에는 세 시간 후에야 도착했다. 그 둔치를 차를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창문이란 창문은 다 내리고 그렇게 했다. 칠십이 마이크로그램 퍼 세제곱미터 미세먼지의 향이 달콤하다. 바깥 공기 어때. 좋지. 쥐가 그렇게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환하게 웃는 쥐는 지구에 도달한 팔 분 전의 태양 빛을 닮아 있었다.


병아리로 사는 것은 성가시다. 일단 탐정 활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병아리 탐정이라니. 병아리와 탐정, 이 두 단어 간의 척력이 너무 강하다. 동물로 된 탐정 캐릭터를 만든다면 엉덩이나 고양이나 강아지가 주인공이지, 병아리는 절대 아닐 것이다.

몇 주 전부터 그는 탐정 사무소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며칠은 첫날 그러했듯이 옷을 여며 입다가, 나중에는 눈썰미 좋은 행인이 자세히 보면 사람이 아니라 병아리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차려입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좋은 행인이라고 해도 설마 이 세상에 인간에서 대왕 병아리로 변한 케이스가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동네가 카프카의 세계도 아니고….

탐정 사무소는 집에서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걸린다. 1980년대에 지어진 다세대 주택 3층. 철로 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없으니만 못한 좁디좁은 마당이 나온다. 그는 공동 현관을 통과해 3층으로 뒤뚱뒤뚱 올라간다. 병아리의 다리로는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 이전에는 오 분도 안 되어 올라가던 것을 지금은 십오 분 걸려 올라간다.

3층에 올라오면 오른쪽으로 탐정 사무소가 있다. 미닫이문을 열자 미음 자 모양으로 배치된 소파가 보인다. 소파에 기대 커피를 홀짝이던 쥐는 손을 들어 인사한다.

“안녕.”

“안녕하세요.”

“커피?” 아메리카노가 보이게 컵을 든 쥐가 작위적으로 덧붙였다. “아차, 병아리는 못 마시지.”

“놀리지 마세요.” 이런 식의 놀림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런 친근함은 무척 익숙한 것이다. 

그는 얇은 다리로 허청허청 사무소 안쪽으로 걸어갔다. 가림막 안쪽으로는 마호가니 책상이 있다. 책상 옆 벽에는 바닥부터 천장 높이의 서류보관함을 설치했다. 최근 병아리 날개로도 잘 꺼낼 수 있게끔, 버튼을 누르면 열리는 식으로 바꾸었다.

어제 사무소를 찾아온 의뢰자는 남고생으로, 의뢰 내용은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걸 맡기는 곳이 아닌데. 그 분야는 고양이 탐정이라고 전문직이 따로 있다. 

“얼룩무늬. 흔한데.” 쥐가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그는 인간일 적 하루 1000미리미터씩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였다면 단숨에 들이켰을 커피를 쥐는 수십 모금에 걸쳐 나눠 마신다. 역시, 탐정이라는 직업에는 그가 아니라 쥐가 어울린다. 저 고상한 애티튜드만 봐도 그렇다.

오늘의 스피츠는 네가 추억이 되기 전에를 부르고 있다. 그는 하루에도 수 시간 공을 들여 자신의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편집하는 쥐를 떠올린다. 그래 봤자 결국 트는 건 스피츠면서, 어째서 그렇게 처절하게 마음을 쓰는지 그는 알 수 없다.

“이미 일주일이나 지났대요. 못 찾는 게 당연하죠. 그리고 이쪽은 전문 분야도 아니고요. 작가님의 그 논리란 것이 안 통하잖아요. 고양이한테는.”

물론 그에게도 음악을 탐닉하는 사람에게 몰입해 있던 시절은 있었다.

“글쎄. 고양이 탐정보다 병아리 탐정이 잘 먹히지 않나. 시골 살 때 고양이가 병아리 좋아해서 종종 물어가던데.”

“그런 농담 무섭습니다.”

“덩치만 믿지 말고 조심해. 요즘 너희 집 주위로 길고양이 얼쩡거리더라.” 히죽거리는 쥐의 얼굴은 어딘가 지친 것처럼 보였다. “혹시 모르지. 고양이한테 물리는 순간 인간으로 돌아올지도….” 그리곤 곧 사무소 내에 울리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린다.

지난 몇 달,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병아리가 사람이 된 선례는 찾을 수 없었다. 쥐도 그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오히려 어디 수상한 과학 연구소에 붙들려 가면 더 좋다.

날개도 자주 활용하면 근육이 붙는다. 그는 몇십 일간의 수련 끝에 익힌 방식으로 노트북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고양이 목격담을 수집하고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하지만 마땅히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마우스 휠을 굴린다. 목격담은 몇 개 있으나 일관성이 없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고양이었으므로, 납치의 가능성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쥐가 아까부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단 것을 알았다.

“왜요.”

“응?”

“왜 보세요.”

“그랬나.” 쥐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내가 널 보고 있었나.” 그는 노트북을 밀어 두고 쥐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만, 쥐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는 양날개로 잡은 하늘색 형광펜으로, 테이블에 놓인 에이포지 한 장에 고양이를 그렸다. 쥐가 “이게 뭐지. 드래곤?” 하고 말했지만 무시했다. 목이 타는 기분이다. 부리로 날개 털을 고르다가 입을 (정확히는 부리를) 열었다.

“징그럽지 않으세요?”

“못 그리긴 했지만 봐줄 만은 해.”

“아니, 그림 말고요. 저 말이에요.”

“너?”

“병아리의 생김새가, 징그럽지 않느냐고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을 본다. 원래 조류를 싫어한다. 동그랗고 까만 눈은, 작게 보았을 때도 그렇게 호감형은 아니었는데, 거울 속에서 몇 배 확대된 버전으로 보니까 더욱 싫어졌다. 쥐가 어울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희생이라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히려 인간일 때보다 귀엽게 봐 주려나.

쥐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재은아. 쥐의 입에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너무 놀라서 한 바퀴 앞구르기를 했다. 쥐는 침착한 태도로 굴러가는 그를 껴안다시피 하여 붙잡는다. 하마터면 협탁 유리에 코를 박을 뻔했다. 다급한 숨을 헉헉, 내뱉었다. 쥐가 그를 굴려 소파 의자 위로 올려놓았다.

“병아리야, 너.” 어처구니없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가 병아리란 문장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병아리잖아요.”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그는 답했다.

“병아리를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두 종류밖에 없어. 첫째, 병아리한테 먹히는 입장. 이건 이해할 만하지. 둘째, 싸이코패스. 여기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나는.”

“그런가요….” 졸지에 싸이코패스가 된 그는 으음, 하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네 생각에 문학은 뭐니?”

모르겠는데요, 대답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쥐는 회피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글로 쓰인 거라면 뭐든지요.”

“세븐일레븐 영수증 쪼가리도 의미를 부여하면 문학이 되겠지. 사람들은 맥락을 봐. 맥락과 상황과 의미를 본다구. 오만과 편견. 장르는? 틀림없는 로맨스지. 그럼 그 글을 계속 읽게 독자를 추동하는 질문은 뭐야.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할까, 이거지.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사랑을 눈치챈 후 뭐부터 해. 왜 나를 사랑하게 됐냐고 묻지. 사랑이야 시작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애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그게 뭐야. 논리를 확인하는 거잖아. 그 질문으로 둘의 로맨스는 완성되는 거라고. 내 말은, 모든 관계에는 논리가 있다는 거야. 시작을 설명하지 못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가. 문학은 곧 인생이고, 따라서 인생은 사랑과 범죄가 그렇듯이 논리 문제나 다름없거든.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일부 사람들이 추리 소설을 문학으로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는 논리밖에 없다는 거야. 웃기지 않니.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기쁨도 슬픔도 감동도 아니고 탐정인데. 명쾌한 원리원칙이 의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인데.”

그런 주장에 우리로 얽히는 것은 달갑지 않다. 예스맨과의 관계에 논리는 없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라면, 설명 못 한다. 서술은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논리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다. 칠십억 인구를 놔두고 왜 예스맨이었는가.

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에.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근거로 좁혀 나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 원리를 따져봤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한테는 태어날 때부터 기본적으로 논리라는 나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떨어져 있는 논리 조각을 주워서 빈 곳을 채우려고 시도하는 과정일 뿐이다. 논리 문제로 접근하면, 쥐는 그의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

“그게 병아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말대로면 문학은 비논리를 설명하지 않고 놔두는 거거든. 근데 너는 지금 너무 문학적이야. 마치 오천만 인구 가운데 떡하니 외계인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쥐가 손을 뻗어 그의 털을 쓰다듬었다. 쥐의 중지는 연필을 자주, 오래 잡았기 때문에 조금 휘어 있다. “나는 거북스럽다면 차라리 그것이 거북하다….”

그는 그 정체 모를 감정의 선결을 따지지 않고, 대신 질문했다.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말해 준 적 없는데.”

“있는데.”

“없어요.”

“있어.”

“없어요.”

쥐는 제 머리를 새끼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그러더니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흐음, 소리를 내며 천장만 본다.

재은. 윤효숙 씨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한 자, 아버지에게서 한 자 가져와서 지은 이름. 예스맨의 입에서 더이상 그 이름이 부드럽게 굴려지지 않고, 재은이 가족들의 번호로 오는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을 시점에서 남한테 자신을 소개할 때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도 자신에게 이름이 있음을 잊어버릴 때가 있을 정도였다.

“고지서로.”

“알려 준 게 아니잖아요. 훔쳐 본 거지.”

“증거 수집. 증거 수집.”

“언제?”

“언제더라. 너네 집 갔을 때. 식탁 위에 있던데. 수도 요금.”

왜요, 하고 물으려고 했다.

유선 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쥐가 느긋하게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시골쥐 탐정사무소입니다.” 상대는 어제의 남고생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의뢰 취소할게요. 알고 보니까 집안에 있더라고요. “그래요?” 네 상상도 못했는데 책꽂이 뒤에 숨어 있었어요 친구한테 꼬리가 깔려서 놀랐나 봐요 “그랬구나. 어쩐지 제보에 통일성이 없더라구. 통일성이.” 네 죄송했습니다.

쥐의 입에서 그래도 선결제금 환불은 안 돼요 우리 쪽 사정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그 맹랑한 남학생은 환불을 요구한 모양이었다.

그는 쥐가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서류철에 있던 종이를 하나씩 뜯은 다음 동그랗게 구겨서 에폭시로 마감된 바닥으로 던졌다.

쥐가 좋아하는 구사노 마사무네는 일견 온후한 인상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예민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침착한 눈은 신경질적으로 보이다가도 천진하게 느껴진다. 여전히 그런 눈과 소년 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섬세한 고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그래보았자 화면으로 지켜보며 내린 감상일 뿐이다. 어떤 남자인지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은 사람의 인간성을 알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왜 쥐가 그 보컬에게 그렇게 매진하는지, 이 정도는 언젠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병아리가 되더니.” 전화를 마친 쥐는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고양이 하는 짓을 하네.” 쥐는 그 종이뭉치들을 치워주지 않았고, 그는 병아리 날개로 빗자루를 쥐고 비질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쥐는 종종 그를 재은아 하고 불렀다. 쥐가 재은에게 말을 놓은 것은 얼굴을 익히고 얼마 안 된 시점에서였으나, 말투가 친근해진 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후였다. 그러나 재은은 쥐의 집에 갈 기회가 없었고, 그의 명의로 온 요금 고지서를 보게 될 일도 없었다.

작가님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그냥 어나 저기로 호명을 대신했다. 여전히, 작가님을 예스맨이나 선배라고 부르게 될까 봐 부리를 종종 다물어야만 했다.


사무소 이름에는 쥐가 들어가지만, 탐정은 쥐가 아니라 그였다. 처음 쥐가 그에게 맡긴 임무는 이른바 작가 보조라는 것이었다. 필요한 자료를 모아서 인쇄하고, 인쇄물을 철하고, 요점에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작품을 읽고 중간중간 조언을 하고, 출판사와 소통을 하는 것.

출판사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개중에 가장 중요했다. 쥐의 세밀한 우울을 이해해 주는 것은 몇몇 시인과 그가 알고 지내는 얼마의 청소년 문학 작가들뿐이었다. 짧은 인생, 익힌 기술은 얼마 없으나 쥐의 거친 말을 다듬는 데에는 선수가 되었다.

쥐가 탐정이 되어야겠다고 말한 것은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그런데 주어가 쥐 자신이 아니고 그였다.

“다른 일 좀 줄여줄게. 탐정 일도 병행해.” 날씨가 너무 추워서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었다. 그 무렵에는 수년째 반복된 라니냐에 의해 며칠 연속으로 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돌고 있었다. 사무소는 난방비를 아끼느라 히터도 틀어놓지 않았고, 쥐는 핫팩과 롱패딩으로 애써 겨울을 나고 있었다. “머리 멀쩡하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진심요?”

“그 고딩 같은 말투 언제 고칠 거니?”

“진짜입니까?”

쥐는 가타부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증명하는 남자였다. 쥐가 학원에 등록해 줬다. 몇십 시간 교육도 받고 시험도 봤다. 몇 달 만에 탐정 자격증을 땄다.

시험 문제는 상식선에서 나왔으므로 자격증을 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실전이다. 공중파 취재 프로그램에 거절당한 의뢰들이 시골쥐 탐정 사무소를 향했다. 보통 핵심은 층간소음, 아니면 치정. 사랑은 뭘까. 그는 자주 혼잣말로 물었고 쥐는 네가 요코야마 히데오한테 하는 거, 라고 대답했다. 그런 진부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랑은 뭘까. 그 혼잣말은 이후 이러한 형태의 질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게 소설에 도움이 되나요?”

“월급 꼬박꼬박 주잖아.”

“죽을 뻔했는데요.”

“과장은.” 쥐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최근에 예스이십사에서, 내 글, 현장감이 있다는 리뷰가 달렸더라고. 평균 별점이 얼만 줄 알아? 오 점이야, 오 점. 파이브스타. 앤솔러지에 글 써달라는 청탁도 들어오고 있어. 내 작가 인생 오 년에서 지금이 최고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그는 울상을 짓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어떻게 알고 전화하는 것인지, 시골쥐 탐정 사무소에는 물밀듯이 의뢰가 밀려들었다. 마사무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사무실 가운데 소파에는 깡마른 중년 여성이 앉기도, 드러난 목덜미에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젊은 남성이 앉기도, 쇠약해져서 부축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는 노년의 여성이 앉기도 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하고 물으면 가지각색의 대답이 나왔다. “교통사고 대신 내기도 하시나요?” “수능 예상 문제 좀 뽑아 주실래요.” “윗집에서 자꾸 바퀴벌레가 내려오는데 뭔가 숨겨놓은 거 아닐까요.” “울산 어디에 카리브해 해적이 숨겨논 보물이 있다는데….” 대한민국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보통의 사람조차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하곤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관둘래요.”

언젠가의 밤에 쥐에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쥐는 무알콜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쥐포를 질근거리며 툭 대답했다.

“월세 살잖아.”

그는 쥐가 쥐포를 먹다니,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승진 취소라도 해 주세요.”

“탐정은 싫다?”

“거창하다는 거예요. 저는 예컨대 아리스가와 아리스 정도 위치면 만족해요.”

“너 그 시리즈 안 읽었니? 작가 쪽이 아리스가와야.” 쥐가 무알콜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트린 뒤 쓰레기통에 던졌다. “단편이라도 한 편 쓰고 와서 말해. 그런 얘기는.” 왓슨 얘기를 할 걸 그랬나. 아니지. 왓슨도 글을 잘 썼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곁들일 글도 겨우 쓰는 그로서는 턱도 없다.

탐정의 자긍심이란 걸 교육 시간에 배웠다. 사용할 수 있는 조사 방법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조사 방법도 배웠는데, 탐정 일을 시작한 후부터는 후자의 방법만 죽어라 쓰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의문이 들 무렵 쥐에게서 월급이 입금되었다. 가끔 보너스도. 물질만능주의가 이래서 무섭구나. 듣다 보면 나에게도 물질이 전부가 되니까. 그는 입금액을 헤아리면서 생각했고 동시에 자신이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물질이 전부 파이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쥐의 다감한 눈빛을 떠올리면서 뼈저리게 자각하고는 했다. 들떴을 때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주절거리는 습관, 자주 쥐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날씨와 관련된 어휘들, 그에게만은 보여 주는 미지근한 상냥함.

그러나 그의 원활한 직장생활을 저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정 활동 전반에 걸쳐 자행되는 불법이 아니라, 쥐의 휜 손가락과 손가락에 밴 굳은살과 이른바 순수 문학에 대한 무지와 싫은 것은 싫다고 분명히 말하는 명쾌함과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 하고 질문을 통하여 긋는 선과 같은 것들이었다. 요컨대 그는 예스할 일에는 예스, 노할 일에는 노,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병아리는 위장이 힘드네.” 쥐가 기지개를 켰다. 며칠에 걸친 미행의 끝이었다.

아내를 의심한 남편의 의뢰로, 아내가 자신이 직장에 있는 시간에 어디를 가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목적지는 제빵하우스. 둘의 결혼기념일이 가까운 것을 보아 이 사건의 결말은 아동용 학습 만화에나 나올 법한 뻔한 반전이다. 

병아리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쥐는 필명과는 다르게 고양이를 닮았다. 이전에 발레를 했다고 했던가. 몸 선이 우아하고, 대답이 늦어지면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지금처럼. 

“몸이 몇 배로 불었으니까요.”

병아리가 된 후로는 얼굴빛을 감추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괜찮아. 귀여워.” 조류를 귀여워하다니, 보기 드문 사람이다. 몇 번을 보아도 대책 없이 커다란 머리나 노란빛의 털 같은 것에 그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근데 힘도 좀 세졌어?”

“솜뭉치죠. 부피만 커졌지. 곡물이랑 멸치만 먹어서 비리비리해졌어요.”

“쓸데없다, 여러모로.” 쥐가 제빵하우스를 뒤에 두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제빵하우스 옆 주차장에 소나타를 세워 두었다. 쥐가 탐문 조사를 할 때 애용하는 차량으로, 이름은 엔젤리나다. 엔젤리나는 사랑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수년에 걸친 거친 운행으로 숨넘어가기 직전인 상태를 자랑한다.

“언제는 귀엽다면서요.”

“귀여움이 쓸모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 명탐정의 필수 요소 중 하나가 체력과 힘이야. 셜록 홈스도 수사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몸으로 뛰었고, 아케치 고고로도 육탄전에서 밀리진 않았어. 필립 말로는 말할 것도 없지.”

“말로 할 것도 없다 이겁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쥐가 입을 앙다물었다. 제법 센스 있는 멘트였다고 생각했는데, 고상한 추리소설 작가 스타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쥐의 짜증스러운 시선을 무시하며 뻘쭘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요.”

“응.”

“혹시 외계인이에요?”

익숙하게 소나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던 쥐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더블유엘엠이요. 울프-룬드-마크멜로테.”

“너도 보면 사고방식이 희한해.”

이제 안전벨트쯤은 스스로 착용할 수 있다. 쥐는 묘하게 흐뭇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몸을 비스듬히 등받이에 기댔다. 둥글둥글한 몸은 벨트의 속박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는 허리를 혹사할 필요가 있었다.

“조사해 봤는데, 거기에는 무거운 원소들이 적대요. 그러니까 수소랑 헬륨이 바뀔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는 거죠. 그런 곳에 외계인이 있을 리 없어요.”

“사전 조사가 부족했네. 적당히 기억나는 은하 이름 아무거나 댄 건데.” 시동 걸린 차체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스피커에서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재즈가 흘러나온다. 쥐가 실실대며 말했다. “작가 실격이다. 작가 실격.”

“이번 작품에서는 범인이 외계인이라면서요. 그런 걸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고들 하죠.”

“어.”

“몇 번 읽어 봤는데 저랑 안 맞아요. 중력을 거스르고요. 트릭에 타임머신이 나오고요. 초능력이 나오면 마음이 식어요.” 이게 다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의 고전 추리 소설을 필두로, 시마다 소지와 기시 유스케 같은 작가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본격 추리물로 재은을 훈련한 예스맨의 탓이다.

“그래. 그럼 특수 미스터리는 도전하지 말까?”

“그게 아니고요. 작가님이 외계인이면 안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재밌어지지 않나.”

“재미고 뭐고요. 논리적이지 않다고요.” 특수 설정 미스터리의 백미는 판타지적 설정에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거기, 그 시작점에서부터 걸린다. 판타지적 설정을 넣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설정 없이도 납득할 수 있는 사건 풀이를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싶어진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병아리는 논리적이니?”

“이것도 사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라는 것을 자각하고서 그는 물었다. “외계인이십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는 건지 어쩐 건지, 저 말만으로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난번, 남자친구가 외계인이라고 했던 여자의 경우를 생각한다. 분명 양다리를 걸쳤든지 사기꾼인 배후가 있든지 할 줄 알았는데, 쥐가 수집한 자료 속에서 본 그 여자의 남자친구는 생각보다 견실한 인상이었다.

바보같은 여자.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지만, 마음 한구석의 그 자신은 어느새 여자의 열성적인 믿음에 동화되어 있다. 그렇게 선한 눈을 한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는 누군가를 배신했을 리 없다고, 차라리 외계인인 쪽이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진작에 쫓아냈어야 한다. 그랬다면 외계인이세요 하는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생각나는 거 있다.”

“예?”

“제목이 거머리 유니언이었던가. 일본 소설이었는데. 한 남자가 살인죄 누명으로 쫓기는 과정에서 여자를 만나. 이끌리면서도 의심하는데 왜냐면 이 여자가 수상한 구석이 있거든. 어느 날 여자는 자기 입으로 남자가 상상했던 시나리오를 설명하지. 내가 그 사람을 죽이고 당신을 살인자로 몰았어. 당신이 자수하도록 유혹한 거야. 마치 그 시나리오가 사실인 것처럼.”

“저도 읽었어요.” 꽤 흥미진진했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개였다면, 손꼽힐 만한 팜므파탈 소설이 되었으리라.

“그래. 그 여자 입에서 나온 전개로 흘러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아. 남자가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데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어. 그냥 우연히, 우연히 평범한 사람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거고, 허무하게도 그 여자는 정말 남자를 사랑했을 뿐인 거고….”

진실한 사랑을 허무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청소년 시절 염세주의에 빠져 있던 예스맨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팜므파탈 소설의 짜릿함에 빠져 있다가, 실은 장르가 휴먼드라마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공통 속성 때문에 쥐와 이런 사이로나마 지내는 것이다. 쥐의 초기작에서는 연민을 없애려는 강박마저 느껴진다. 어떤 독자의 말마따나(쥐는 그 리뷰를 읽고, 이걸 쓴 독자의 독은 읽을 독이 아니라 독 독이라고 격분했다) 쿨해 보이려고 안달이 난 서술, 사람의 선택에서 일정한 원리를 찾아내려고 하다가 결국 다다르는 두루뭉술한 결론, 이것도 하려고 하고 저것도 하려고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그는 쥐의 본질이 아무래도 이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쥐가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뭘까. 소나타는 제빵하우스 근처의 교각을 빠져나와, 한적한 시공 도로를 달린다. 그는 보드라운 날개를 들어 조수석 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막았다. 눈이 부셨다.

“사랑이 허무한가요?”

“네가 요코야마 히데오 백날 사랑해 보라구. 그쪽에서 사인본 하나 보내 주나.”

“어떤 애정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경우도 있는 거예요.” 그는 쥐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간에, 이 세계의 장르가 로맨스라면 말이지? 내가 외계인이었으면 재밌겠다. 너만 보고 우주 저편에서 지구로 착륙한 거야.”

“그런 소설 이미 있어요. 한국에.”

정세랑, 하고 말해 주었지만 쥐는 고개를 저었다. 읽어보지 못한 모양이다.  “이미 있으면 약간 방향을 틀어야지.” 쥐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림막을 내렸다. 베디베로 선글라스도 챙겨 썼다. 비대한 렌즈 때문에 괴상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렌즈 모양이 외계인 선글라스와 약간 닮기도 했다. “내 남자친구가 외계인이었다. 나와 사랑에 빠져 지구로 착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외계인이 날 사랑할 리가?”

“오.” 그런 전개라면 장르가 달라져 버린다. 더는 로맨스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외계인이라서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지, 남자 쪽을 지구인으로 치환하면 조금도 새롭지 않다.

창밖으로는 파랗다고 느껴질 만큼 푸르른 녹음이 흩어진다. 외계인 로맨스 구상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쥐는 고민할 때 그렇게 하듯이 핸들 위에 얹은 오른손 검지로 톡톡 소리를 낸다. “분명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하던 차에, 우연히 집안의 족보를 보게 된 나. 알고 보니 외계인 집안과 우리 집안은 끈질긴 악연으로 엮여 있었고…. 어때?”

아니, 그래도 우주적인 난관까지 감수할 만큼 나에게 집착하는 남자와의 연애라면? 스펙이 우주적인데 나에게만 꽂혀 있다면? 충분히 무섭다. 다른 행성으로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다. 까딱하다간 내 목숨뿐 아니라 전 지구인의 목숨이 날아간다.

“조금….” 그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병아리가 된 후로 잘 돌아가지 않는 짱구를 굴리며 날개로 내비게이션의 먼지를 털었다. “조금 피상적이네요. 아직 디벨롭 단계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외계인 출신 은하는 더블유엘엠입니까?”

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엔쥐씨. 엔쥐씨는 어때. 쥐가 들어가니까 라임도 좋고.” 처음에는 주유소를 찾는 줄 알고 내비에 찍으려고 했다. 그다음에는 혹시 게임 회사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도 은하 이름이에요?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봐요.”

“사이언스타임즈에 다 나와.” 쥐는 여러 개의 과학 웹사이트에서 뉴스레터를 구독했다. 메일함 앱에 새빨간 숫자가 뜨면 그것을 없애야만 성이 차는 강박. 그 강박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쥐가 평균적인 상식 수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애초부터 알았죠.”

“뭐가.”

“병아리가 사람이 된 케이스는 없다는 거요.”

음악이 바뀌었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온다. 사무실에서도 몇 차례 들었던 곡이다. 체리. 벚나무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96년도에 발매된 스피츠의 싱글을 지칭한다. 그의 휴대폰 벨소리이기도 하다. 쥐가 그를 돌아보았다. 렌즈 표면에 병아리의 모습을 한 자신이 비친다.

“사람이 병아리 된 케이스는 뭐 있니.” 이 대화는, 쥐와 그 사이에서만 통하는 농담에 속한다. “동물이 사람 된 경우, 보긴 봤어. 전래동화에서. 멀리 가면 단군신화서부터….”

쥐와 그는 동시에 냉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은 움직이지 않는 웃음 끝에 떫은 침묵이 남았다.

“계속 이 꼴로 살 수는 없을 텐데 말이에요.”

“왜? 귀여워.”

“보는 입장에서야 그렇겠죠. 씻는 거랑 이것저것… 복잡해요.” 그리고 작가님도 그랬잖아요, 쓸모없다고. 뒷말은 삼켰다.

“하기야 독자로서의 나도 바라는 건 리얼리즘이지.” 쥐가 새끼손가락으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추어올렸다. “이 현상이 당혹스럽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러니까 얼른 돌아오는 게 어때.”

리얼리즘 같은 문학 사조는 알지 못한다. “지금 이건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묻고 있는데 쥐가 검지를 궁글려 딱밤을 날렸다. 아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마를 문지르는 그에게 쥐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현상의 현이랑 현실의 현이 같은데.”

“뭐가요.”

“여기에는 원리가 없잖니.”

“추리소설 작가는 다 이렇습니까?” 그는 조금 분해져서 말한다. “본론은 생략하고 결론만 얘기하고요. 현학적인 말로 에두르고요. 막힌다 싶으면 무작정 논리만 들이대고요.”

쥐는 그런 버릇이 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생각이나 기분이 있으면 적당히 추상적인 말로 그것을 둘러서 내놓는다. 그 뒤로는 캐물어도 소용없다. 방금의 문장들에도 알맹이라고는 없다. 설명하기 귀찮아졌거나, 혹은 켕기는 게 있는 것이다.

정말로 외계인이라거나.

뭔가 알고 있다거나.

“내가 아는 한 다 그래.”

“또 누가 그러는데요?”

“아는 추리소설 작가가 나 하나뿐이라서.”

쥐는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제풀에 웃었다.

이제 차량은 금남 IC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시간 조금 더 지나면 남양주에 도착할 것이다. 남양주에서 춘천, 서울에서 춘천. 비슷비슷한 거리지만, 어느 쪽이든 며칠에 한 번씩 오가기는 부담스럽다.

“그 여자요.”

“응?”

“결혼 기념일 케이크를 만들러 서울에서 춘천까지 온다는 게 말이 돼요?”

“솔직히 말할까. 말이 안 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동시에 말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지. 남편한테 최고의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느라 왕복 서너 시간 거리를 왔다갔다할 만큼 우직한 아내일 뿐이라는 결말을 바라는 마음도.”

쥐에게서 돈키호테같이 맹목적인 낭만을 발견할 때면 조금 당황스러워진다. 사람은 다면적인 존재이지만, 쥐는 냉소적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원리원칙 운운하는 남자가 너무 가변적인 것 아닌가.

“소설에서야 애정 관계 얽히면 재밌지. 현실은 달라. 세상은 더 맥빠지고 허무해질 필요가 있어. 백오십 데시벨짜리 진폭이거든. 귀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라고.”

대사에 어울리게, 쥐는 귀를 기울여야 겨우 음절을 분리해낼 수 있도록 소리를 줄인다.

쥐한테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로맨틱한 일본어다. 일본어는 모르지만, 체리의 가사라면 안다.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츠의 가사는 난해하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진창에 떨어져 있는 식이다. 이런 밴드를 좋아하니까 백오십 데시벨짜리 진폭 같은 말을 일상 대화에서 쓰는 것이다.

백오십 데시벨의 진폭. 그 단어를 음미하고 있자니 쥐가 체리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따라 불렀다. 그는 쥐를 보았다. 쥐의 목소리는 유난히 어리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노래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데, 몸을 꼿꼿하게 세워서 그 동작마저 세련되게 느껴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중지가 휘었다. 저런 손은 본 적이 없다. 체한 것 같은 감각이 엄습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에게도 있었다. 탐정, 추리, 미스터리. 꿈결 같은 어휘에서 멀었던 때. 당장 코앞에 닥친 중간과 기말을 걱정하고 점심 메뉴에 일희일비하던 십대 초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돈도 공부머리도 없는데 가오만 있었다.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뒀을 때였다. 전폭적인 지원이 과분한 형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와 언니의 고성이 오가는 집에서는 놓았던 공부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근처 도서관 일반열람실에 학교 끝나자마자 뛰어들어가길 수 개월. 한 살 연상이던 같은 학교 선배와 얼굴을 익혔다. 동그랗게 뜬 눈, 코는 촉촉했고 모두에게 살가웠다. 그렇지만 몸동작이 세련되었다거나 태도가 조심스럽다는 면에서는 고양이를 닮았다.

예스맨이었다.

그는 줄곧 열람실 24번에 앉았다.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기 때문에 그 숫자가 특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스맨이 23번에 앉은 것은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예스맨이 재은을 힐끔대기 시작한 것은 재은이 예스맨이 가방을 엎었을 때 물건을 주워 준 이후의 일이었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던 예스맨이 23번에 정착한 것은 자판기 앞에서 예스맨과 사담을 나누던 재은이 무심코 예스맨의 몫까지 음료를 뽑은 다음날의 일이었다.

예스맨은 끊임없이 재은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것은 고양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재은은 고양이도 좋아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고양이를 닮은 한 살 많은 남자는 더욱 좋아하지 않았으며, 최근 공부가 잘 되지 않아 걱정이 산더미 같았으므로 적당히 대답했다.

“공부 괜찮아?”

“할 만해요.”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예스의 괜찮다야, 노의 괜찮다야.”

그런 대화가 석 달 동안 반복되었고, 결국 재은은 싫다는 얘기예요가 아니라 괜찮다고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나중에 예스맨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재은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거절을 못 하는 사람도 자신 말고는 재은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세 달이라니!” 질린다는 표정을 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예스맨은 그러나 곧 재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지금 너 내 옆에 앉아 있잖아. 세상 일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밤하늘처럼 빛나는 까만 눈으로 재은을 올려다보면서.

예스맨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재은은 거절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걸음이 우아한 사람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할 때 늘 루틴을 백 단위로 세었으므로 백 일간 싫다고 해도 물러나지 않으면, 그때는 한 번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심산이었다.

예스맨은 무엇을 부탁해도 수락해서 예스맨이었다. 예스맨은 생긴 것도 멀쩡하고 예의도 발랐는데 남녀 모두에게 두루 인기가 없었다. 한 가지 원인이 오지랖 넓은 성격이었다. 사랑에 목마른 나머지 남의 개인구역을 일상적으로 침범하곤 마는데, 그것은 강아지에게는 허락되는 미덕이나 인간에게 권장되는 특성은 아니다. 둘째 이유는 예스맨이 이른바 순수 문학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예스맨에게서는 그 정열적인 성정과 화창한 웃음으로 감출 수 없는 명백한 우울이 풍겼다.

재은은 문학을 잘 몰랐다. 틈이 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공 들고 뛰쳐나가는 종류의 학생이었다. 천성이 무뎌서 예스맨의 시그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하고, 알아챈 사실이지만, 예스맨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 주변에 사람이 없는 두 번째 원인이, 재은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 하는 것을, 현상을, 결과를.

나중의 이야기지만, 재은은 그렇기 때문에 예스맨이 마음에 들어한 대상이 언제부터 그 현상에서 자신으로 옮겨 왔는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것이지만, 왜 나를 좋아하냐고 묻기가 멋쩍어서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졸업하고 나서도 예스맨은 재은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 레파토리는 날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날씨에 따라

뭐해 오늘 맑다 날 좋은데 놀러라도 가지.

미세먼지 심하더라 마스크 챙겨.

폭염이래 조심해라 운동한다고 공원 돌아다니다가 저번처럼 쓰러지지 말고.

천고마비라고 알아? 알아둬 이 정도는 상식으로 통하니까.(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지점이지만 그는 실제로 천고마비란 말을 살면서 그때 처음 보았다. 혹은 이전에도 보았지만 무심한 눈길로 교과서의 수많은 단어들의 목적지였던 머릿속 수챗구멍으로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너는 봄웜임 가을웜임?

이제 입춘은 입춘인가봐.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데 일반론엔 오류가 많은 것 같아.

오늘 낙엽 밟음 (사진)

이제 슬슬 패딩으로 넘어갈 때 된 듯?

한 해가 벌써 끝났다….

로 분화되었다. 그런 문자들에 재은은 답장하지 않거나 인터넷에서 저장한 시나 문학 구절을 보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예스맨이 이미 읽었거나 혹은 경멸하는 글이었다. 예스맨과의 대화 도중에는 재미없는 농담과 해진 겨울 이불같은 거짓말이 팝콘처럼 튀어올랐다. 꼬박꼬박 재미없다고 지적했는데도 예스맨은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고 성가신 남자였다. 예스맨이 백 번째 연락을 주던 날 체념했다. 뭐 하고 있냐는 질문에 선배 생각이요,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백 번이란 횟수를 세려면 그 대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초년생이 된 재은은 24절기의 이름을 전부 외웠다. 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곡우입하소만망종하지소서대서입추처서백로추분한로상강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 해가 제일 높은 것이 하지, 가장 낮은 것이 동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 보통 10월쯤부터 붕어빵 가게가 보이기 시작함. 4도쯤부터는 패딩을 입으라고 알려준 것도 인터넷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예스맨이었다.

어느 순간 재은은 예스맨과 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황금 같은 주말을 내가 왜 이 사람과 보내고 있지. 스스로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예스맨의 끈질김에 나의 체육인 자아가 나도 모르는 사이 감동했나 보다. 그렇게 납득시켰다.

“저는 선배님 좋아하지 않아요.” 어느 날, 18000원어치쯤 되는 청년다방 떡볶이를 앞에 두고 말했다. 꼬박꼬박 더치페이를 주장해도 예스맨은 자기가 한 살 위니까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한 살 위라고 해 봤자 5개월, 일수로 따지면 150일에 불과하다. 그깟 5개월은 재은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호의를 어중간하게 받아 두면, 양쪽 모두에게 괴로울 뿐이다. 실제로 자신이 예스맨의 입장에 처한 적이 있으므로 알고 있다. 이런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요. 충고 하나 하는데요. 다른 여자한테 이십사절기로 연락하면 경칩에서 차단당해요.”

“송금 잘만 되던데?”

“그게 아니고요.” 

“경칩에서 차단하겠다 싶으면 안 해.” 떡볶이 국물이 바글바글 소리를 내며 끓었다. 예스맨은 불을 줄이고 재은의 앞접시를 들었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거야, 나도.” 돌아온 앞접시는 빨간 국물과 떡과 치즈 토핑과 김말이와 고구마튀김과 대파 조금을 이고 있었다. 그 균일한 한 접시. 예스맨은 재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떡볶이를 내민다.

“먹어.”

예스맨은 속눈썹이 길었다. 눈매가 또렷하고 입술 모양이 예뻤다. 하필 이 시점에 이런 게 눈에 들어오다니. 재은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말했다. “싫다면요.”

얼굴에 구멍이 뚫릴까봐 두려워지는 일직선의 시선. 재은은 한 번도 예스맨이 부족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입술이 마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예스맨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스맨 앞에서는 자신이 덩그러니 버려진 느낌이 든다. 손을 붙잡아야 한다고 머릿속의 자신에게 재촉당하고 만다. 거절을 하고 나서 후회하게 되고 만다.

“내가 좀 아쉬워지겠지.”

다름아닌 청년다방 떡볶이의 균일한 한 접시가 재은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정말로 누울 자리인 것은 아닐까? 재은을 쓰고 등호를 그리고 누울 자리를 쓰면, 그 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예스맨은 나를 누울 자리로 생각했는가. 예스맨을 만날 때마다 궁금한 것이 생겼고, 재은은 호기심은 해결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좀?”

“살짝은.”

그 당당한 태도가 분했다. 자신이 끌려다니는 것에도 이골이 났다. 그래서 접시를 받았다. 예스맨이 웃었다. 눈이 가늘어지고 눈밑에 애교살이 생겼다. 떡볶이는 아직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볼이 발갰다. 그날 떡볶이는 재은이 샀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사리를 잔뜩 추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스맨은 열 번 못 되게 재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는 불평했다. 무릇 남자는 정신이 건강한 게 제일인데, 그 애는 눈빛이 어둡다고. 재은은 예쁘기만 하던데요, 눈, 하고 대답했다가 등을 맞았다. 어머니는 예스맨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스맨도 그것을 알았다. “우리 부모님 때문이지.” 재은은 예스맨의 머리카락을 검지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대답했다. “선배한테는 잘못 없어.”

“너 진짜 센스 없다.”

“엉?”

“그럴 땐 우리 엄마 사실 오빠 안 싫어해, 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게 보통 아니야?”

그렇지만 그건 거짓말이잖아. 재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고 예스맨은 방금 전 재은이 헝클어트린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은 채로 눈에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는 예스맨을 달래 주느라 재은은 꽤 진땀을 뺐다. 그때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지, 재은은 아직도 정답을 모른다.

어머니는 언젠가 예스맨이 재은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 했다. 재은이 분명 상처를 입을 것이며, 이미 마음이 상했을 때 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했다.

재은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예스맨과 만난 이후로 실제로 근손실이 온 것이다. 일할 때도 몸을 꽤 쓰는 편인데 지방 비율이 늘어난 데에는 분명히 예스맨이 먹이는 온갖 종류의 탄수화물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열량 덩어리들의 영향이 있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재은은 후회하는 대신 운동 시간을 늘렸다.

그즈음부터 예스맨은 이른바 순수문학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민음사의 세로로 긴 판형, 을유문화사의 갈색 하드커버, 문학동네의 검은 표지. 그런 일관된 것들을 크기도 판형도 두께도 표지도 다른 온갖 동네의 미스 추가 채웠다. 미스터리-스릴러-추릴러, 이것을 줄여 예스맨은 미스. 추라고 불렀다. 

서점을 들렀다가 벤치에 앉은 예스맨은, 책날개에 실린 딘 쿤츠의 눈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람의 관심사야 인생을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휴먼드라마에서 왜 스릴러처럼 오싹한 장르로 급커브를 틀었느냐는 질문에 예스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들의 불행을 조금 합법적으로 관람하는 거 아닐까.”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조금 합법적으로. 그런 말은 내가 아는 한 어법에 안 맞는데.”

“언어의 세계란 게 그래. 개척하는 거지.”

“살아 있는 작가가 쓴 글은 안 읽는 줄 알았어.”

평생 동안 예스맨은 나보코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만 읽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스 추로 전향한 다음, 예스맨은 적극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소설에 스마트폰이 나온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예스맨이 오른손에 쥔 매직 뚜껑을 닫았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책을 백팔십도 돌린다. 그러더니 다시 닫았던 뚜껑을 열었다. 유성 매직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

“이런 건 싫어?”

“응?”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한다거나… 활자 속 재앙을 통해 자신의 안정을 확신하는 사람들.”

“아무래도 싫지.” 재은은 딘 쿤츠를 판다로 만드는 예스맨을 보면서, 저러면 알라딘에 팔 수 없는데, 하고 미묘한 초조감을 느꼈다. “근데 상관없잖아. 선배 친구 중에는 그런 사람 없을 거 아니야. 다들 시만 읽는다며. 이큐도 높다면서.”

예스맨은 딘 쿤츠에게 콧수염을 더했다. 그런 다음 내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딘 쿤츠라는 한글을 썼다. 정직한 세 글자 밑에 사랑을 담아 반점이 있다. 서점에서부터 발전시켜 온 아이디어다. 딘 쿤츠가 서명한 책 가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예스맨은 그럼 내가 사인해 줄게, 하고 말했다. 유치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장난의 밀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재은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

“만약을 가정한 거지. 재은이 너, 아직 살 날 한참 남았는데,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스릴러를 읽는 사람들 만날 수 있거든 충분히.” 파란색 표지가 위로 가게 해서 예스맨은 재은에게 딘 쿤츠를 건넸다. 책 한 권. 코발트블루 표지 커버 하나. 콧수염 판다가 된 딘 쿤츠. “선물이야.”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남자. 그 남자가 성가신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본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면 되는데, 자신이 고양이도 아니면서 눈으로만 말하려고 한다.

확인받으려는 것이 역력한 시선. 그때 절감했다. 처음부터 부족하고 아쉬운 쪽은 예스맨이 맞았구나. 예스맨은 단지 내 앞에서 자신의 갈망을 어설프게 감췄을 뿐이구나. 그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만 것이다. 하기야, 원래부터 잘 속았다. 둔감한 편이다.

“미스 추한테 인공호흡이라도 받았어?”

“…그런 셈이지.”

“선배는 싫지 않아.”

알아들었으면서 왜 모르는 척 하느냐고 예스맨이 투정을 부렸다. 재은은 애매하게 웃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의 떡볶이 그릇을 받아 들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떡볶이뿐 아니라 붕어빵이며 와플이며 탕후루며 알차게도 얻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회색 말풍선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이 받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예스맨이 재은의 집안 살림을 싸들고 도망가도 뭐라고 비난할 자격이 없게 되고 말았다.

성실하다고만 생각했던 남자의 어리광을 받아 주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은은 예스맨에 대한 원색적인 모욕을 듣지 않을 수 없어서 괴로웠다. 아마 어머니가 그렇게 밤낮으로 예스맨 욕을 하지 않았다면 예스맨과 더 자주 싸웠을 것이다. 어쩌면 진작에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언급한 모든 것들, 예스맨의 집안 사정, 유년기, 정서, 생김. 그 모든 것들 때문에 재은은 자신에게 어린애처럼 매달려오는 예스맨을 참아낼 당위를 얻었다. 

예스맨은 얼마 후, 미스 추 중에서도 추, 특히나 본격 추리 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재은은 따지자면 사회파가 좋았다. 예스맨이 200페이지쯤 읽고 소파에 던져둔 64를 읽은 것이 처음이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을 전부 찾아 읽었다. 예스맨의 책장에는 하지만 64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너무 감성적이지 않아?” 예스맨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예스맨 자신은 재은이 좋아하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재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기를 요구했다. 둘이 공유하는 취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재은은 아무래도 좋았다. 예스맨은 그러니까 달리기 같은 남자였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신 1분에 170회씩 심장이 펌프질하는 소리가 선명히 들린다. 몸 속 곳곳의 모세혈관까지 피가 전달되는 감각은 그때밖에 누릴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 평온한 호흡 정도야,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건 값싼 대가였다. 예스맨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번도 예스맨을 참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예스맨의 책장과 예스이십사-알라딘-교보문고 장바구니는 쥐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예스맨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웃으면 기분이 상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만 이 년이 걸린 재은이 쥐의 작업실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깨달을 정도로.

하지만 예스맨은 구사노 마사무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본 노래를 듣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예스맨은 1970년대에서 90년대 재즈를 좋아했다. 예스맨과 음악 취향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예스맨과 가던 서점에서 자주 틀던 엘라 피츠제럴드의 재즈 몇 곡은 재은도 알았다. 그리고 피츠제럴드는 한 명이 아니다. 엘라도 있고 스콧도 있다. 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것이 요점이다.

입자가 있으면 반입자도 있다. 예스맨이 있으면 노맨도 있다. 재은이 있다면 아마 은재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과학은 우주의 비대칭성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인간은 우주의 규칙을 이해할 수 없다. 예스맨 앞에서 재은은 절박하게 노맨의 존재를 떠올렸다. 우주처럼 거창한 존재는 아니지만, 태양처럼 찬란하지도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재은이 예스맨의 위성이었다는 것이다. 별이 폭발하면 위성은 삼켜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별이 아니었고 예스맨도 태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재은은 멀쩡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예스맨이 소개해 준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과 시마다 소지와 기시 유스케를 붙들고. 가끔은 그 목록에 구라치 준이나 오사카 게이키치 같은 작가들을 추가해 가면서. 그러니까 미스 추, 개중에서 본격 추리가 그의 인생이 지속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물론 본격 추리물을 읽을 때 그는 병아리가 아니었다. 병아리가 되고 나서는 추리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병아리 키우는 법을 찾아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멸치 가루를 쥐가 가져다 주어서 평소에 먹는 곡물에 섞어 먹었다. 칼슘이던가? 들어가니까 힘이 나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두뇌는 둔감하다. 기시 유스케의 트릭을 따라가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입자와 반입자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예스맨과 노맨은 질량조차 동일하지 않다. 아무리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해 보아도, 예스맨은 추리 소설이란 장르와 수많은 대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펜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것은 늦은 저녁이다. 며칠 전 쥐에게 선물 받은 강아지 샴푸로 몸을 감고 선풍기로 몸을 말렸다. 강아지 샴푸를 쓰는 것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향이 강하다. 물로 확실히 헹궜는데도 강한 인공 향료 냄새가 퍼진다. 빗질을 할 때는 고양이빗을 쓴다. 처음에는 병아리의 삶에 완전히 적응해 버릴까봐 겁이 났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본격 추리물을 이해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바짝 말린 날개로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이 깨졌던 날, 쥐와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샀다. 알림창에 쥐가 보낸 메시지가 보인다. 노래를 추천하는 것이다. 늘 그렇듯 스포티파이 링크를 보내 두었으므로, 이제 아무 음악앱도 결제해서 사용하지 않는 그는 1분 미리듣기로 들을 수밖에는 없다.

그가 한동안 유튜브 프리미엄을 쓰던 시절, 그는 유튜브 재생목록에 수천 개의 팝송을 차곡차곡 담아 놓았다. 예스맨은 그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아는 남한테 의탁하지 않는 게 베스트야. 그렇지만 사람인 이상 아예 의존하지 않을 수는 없지. 정 그렇다면 차라리 분산투자를 해.

재은은 자아 같은 것을 잘 생각하지 않았다. 대답이 궁했으므로 예스맨의 후드 소매만 만지작거렸고, 예스맨은 계속 말했다.

너는 유튜브 뮤직만 쓰잖아…. 정성껏 모은 음악들이 손짓 몇 번으로 삭제될 수 있다구. 너 그런 거 되게 싫어하잖아. 네 기록이 의지와 관계없이 사라져 버리는 거. 그래서 플레이리스트에 매달리게 되는 거야. 멜론과 애플 뮤직과 스포티파이를 같이 쓰면 두렵지 않지. 나의 취향이란 고유한 속성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고. 나는 내가 네 전부가 되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날의 예스맨은 마치 몇 년 후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사람처럼 초연해 보였다. 재은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예스맨이 자신이 재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예스맨의 손목을 잡았다. 예스맨은 재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분산 투자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예스맨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주식도 풀매수가 기본인데.

안 된다니까.

바람이라도 필까? 그렇게 말했더니 예스맨이 말문이 막힌다는 얼굴로 손깍지를 풀었다.

돌았어? 이게 어떻게 그 얘기가 돼.

농담이야, 농담.

재은은 뻘쭘히 예스맨의 손을 다시 제쪽으로 가져왔다.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려던 것인데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웃음기가 없었던 것이 잘못일까. 그만큼, 나는 한 사람만 본다, 그 얘기지. 더듬더듬 덧붙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할 농담이 있고 못 할 농담이 있지.

그 후로는 싸웠기 때문에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다. 조목조목 따져본다면 사건의 발단이 예스맨의 지극한 순정이었으므로 사랑스러운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스맨은 이별 얘기에 무척 민감했다. 싸우다가 헤어지자고 하는 드라마 속 커플을 보면 진저리를 쳤다.

너는 나 질려도 절대 저렇게 말하지는 마.

그는 저 배우는 단지 온화하게 헤어지자고 제안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헤어지자고 하면 예스로 대답해야 별명값 하는 거 아닌가 하고도 생각했지만 역시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좌우간 그런 식으로 예스맨과 다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예스맨의 화를 돋우기를 미루지 않았다. 예스맨이 잊어버릴 것 같다 싶으면 한번씩 괜찮은 여자 없어, 직장에는? 따위의 농담을 했다. 예스맨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그 질문을 콕 집어냈다. 꼭 그런 식으로 얘길 해야 해?

그럼 어떤 식으로 해.

내가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상한 남자였다. 마늘 안 먹는 것도, 사람 만나는 거 안 좋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미래에 헤어질 의도가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싫다, 는 논리는 이해할 수 앖었다.

헤어지잔 농담은 헤어진다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죽어도 헤어질 의사가 없는 사람만이 그따위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미래 계획에는 언제나 예스맨의 자리가 있었다. 묫자리도 자신의 것과 예스맨의 것을 함께 알아볼 작정이었다.

정작 먼저 종결 없는 이별을 고한 쪽은 슬슬 딴 여자 알아보지 그래 같은 농담에 바락바락 화를 내던 예스맨이란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 역시 자신의 논리가 옳았고, 예스맨은 틀렸다. 어머니가 옳았고,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손깍지를 껴 본 지도 몇 년이 흘렀다.

날개는 둔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쥐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쯤은 몇 번 해 봤다. 소리내어 말하면 알아서 글자로 변환이 된다니. 좋은 기능이다.

얼마 전 쥐가 설정해 주었다. 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많다. 깨닫고 나니 새삼스레 입이 썼다. 쥐가 지구를 침략한다고 마음 먹으면, 첫번째 척결 대상은 날지도 못하고 그릇만 깨먹는 자신이 될 것이다.

[혹시 부자세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작가님: [새벽 세 시에 문자 보내는 거 그렇게 예의바른 행동은 아닌 것 같아.]

껄끄럽지 않다. 어차피 새벽까지 잠들지 않는 것이 쥐의 루틴이다. 해부학 책이나 예술 분야 책을 뒤적이고 있었을 터다. 그러고 보니 외계인 탐정 소설? 잘 되어가고 있으려나. 얼마 전 시놉시스를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을 거절했다. 병아리의 눈은 쉽게 피로해져서, 이전처럼 오랫동안 스크린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쥐의 묘하게 시무룩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쥐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끝나?

예, 하고 되물었더니 덧붙였다. 병아리 생활.

저도 모르죠.

왜 네가 몰라. 네가 병아리인데.

지친 시야에 방금 도착한 따끈한 메세지 박스가 깜빡거린다. 이내 수십 개의 말풍선이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가 액정 바깥으로 날아간다. 특수 효과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무심코 뺙,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작가님: [질문도 부자세요가 뭐니 부자세요가.]

작가님: [부자 되세요도 아니고.]

작가라서 그런 걸까. 평상시에도 말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메신저로 얘기할 때는 유난히 시끄러워지는 느낌이다. 너무 많은 블루라이트와 새까맣고 빽빽한 활자는 병아리 안구 건강에 좋지 않다. 한 마디를 열 배로 받아치는 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 보냈다.

부자세요 하고 질문한 것은, 예스맨이 따지자면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전에 쥐에게 자신의 첫사랑은 중산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산층과 부자는 다르다. 외계 출신이면서도 지구에서 정식 작가로 등단까지 한 쥐가 이런 명확한 단어의 의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다.

작가님: [갑자기 그건 왜?]

[그냥요]

작가님: [나 시계 차잖아.]

[네]

작가님: [어디 건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어?]

작가님: [주변 사람한테 신경을 좀 써.]

작가님: [필립 파텍이잖아.]

[필링 피랍 립 립 필립 파텍이 누군데요]

음성인식 서비스에 개선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저 주변 사람 작가 님밖에 없습니다]

대답이 오지 않길래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직접 검색했다. 필립 파텍. 파텍필립 시계의 모든 것. 가장 인기 있는 모델. 파텍필립 노틸러스. 최저가.

최저가?

반점 때문에 헷갈려서 가격을 다섯 번 다시 읽었다. 백만이 아니라 천만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다섯 번 확인했다.

[진짜요]

억양을 올려도 물음표는 삽입되지 않는다. 소리내서 물음표, 하고 부호 이름을 말해주어야 하는 모양이다.

[진심요 물음표] 수정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보내 버렸다. 문장부호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는 삽입되지 않는구나. 맥락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포기하기로 했다.

[거짓말 아니고요]

작가님: [검색했니?]

작가님: [진짜지 그럼.]

이런. 밤낮으로 놀고 먹으면서 부수가 잘 안 나와도 늘 여유로운 낯을 하길래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다. 선물이라고 주는 것들이 나중에 보면 다 브랜드 제품이어서 허세가 심하다고도 생각했다. 그게 집안 재력에서 나온 아우라였다니.

그렇다면 쥐는 몇백만원짜리 시계를 턱턱 차고 다니는 부호라는 말이 된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그는 심각한 얼굴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몸을 굴릴 때마다 인공적인 라벤더향이 진동한다. 그런 부호와는 지금처럼 친밀하게 지낼 수 없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남자에게 귀여움받고 싶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상대 쪽에서 말을 편하게 하라고 연거푸 권하는데도 하십시오체를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경우였다. 여러모로 쥐에게 그는 예외를 두었고, 그래서 사랑을 어떠한 예외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했다. 그러면서도 당사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 기묘한 특별 취급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바탕에 예스맨이 있다는 것은 너무 명백해서, 스스로를 속일 수조차 없다. 쥐가 아닌 노맨을 이제 그는 상상할 수 없었다.

작가님: [근데 짭이야.]

허망해졌다.

애초에 뭘 기대하고 질문했던 것인가. 쥐가 자신은 예스맨과 다르다고 확정지어주지 않아도, 쥐가 예스맨과 별개의 인격체임은 그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 왜 말하지 않아도 기분을 알아주지 않느냐며 귀여운 화를 내던 사람은 이제 없다. 쥐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대신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웬 같지도 않은 괴상한 탐정 사무소에 내리꽂아 버린다.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번쩍 들었다. 액정 필름에 스크래치도 안 난 핸드폰, 당연히 던질 수는 없다. 침대에 풀썩 내리꽂았다가 다시 들었다. 재미없는 농담에 매번 속고 만다. 예스맨과 똑같다. 아, 그는 신음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또 예스맨과 쥐의 공통점을 찾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아요]

작가님: [웃기라고 한 말 아닌데]

작가님: [너 마음 편해지라고 한 말이야.]

[자세요]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것과 동시에 전화가 울렸다. 거기에 뜬 이름은 낯익은 것이다. 윤효숙. 병아리가 된 후로는 세 번째로 보는 이름이다.

쥐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름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개통할 때, 직원은 전화번호를 바꿀 것이냐고 물었다. 바꾸지 못했다.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방을 정리하고 예스맨의 물건을 모조리 버렸다. 논리적으로, 사용할 사람이 없는 물건은 사라지는 것이 정해진 미래라고 생각했다. 견딜 예스맨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럴 것 같았단 말에 대꾸할 농담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회사를 그만두고 누워만 있었다. 천장을 보면 예스맨이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을지 한참 생각했는데, 머릿속의 예스맨은 대답이 매번 바뀌었다. 그는 예스맨의 죽음보다도 이제 자신이 예스맨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예스맨이 싫어하는 부분을 이제는 절대로 고칠 수 없을 것이었다.

한 번도 어머니가 미웠던 적은 없다. 어쨌든 자신을 낳아 주었고, 어렸을 때는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고달픈 역사는 한 사람의 인간성을 바꿔 놓고는 한다. 어머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스맨의 체향을 잊어버리게 된 후부터 어머니가 미워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이사한 곳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밤낮없이 알바를 뛰며 근근이 살아갈 때는 괜찮았다. 어머니의 이름을 보아도 눈 감자마자 잠에 들었다. 어머니 혼자 살기에는 그 집이 너무 넓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불면증이 생긴 것은 쥐를 만나고 난 후였다. 그러나 쥐를 비난할 수는 없다.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쥐 덕분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쥐가 그의 손에 미스 추를 돌려준 장본인인 것이다. 예스맨을 만났을 때도 시기가 절묘했다. 예스맨이 도와줄까, 하고 물어주지 않았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이 많다는 면도 같구나. 메시지 끝은 항상 마침표로 끝내는 것도. 텍스트에서 맞춤법을 꼬박꼬박 맞추는 점도. 물론 예스맨은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았다.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엎어졌다. 곧 숨이 막혀 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 오는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다른 사람에게 예스맨을 겹쳐 보고, 실존하는 세계에서 얼굴을 돌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재은은 낮의 하늘을 보면서도 우주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잠이 오지 않았다. 강아지 샴푸 냄새가 아직도 공기 중을 떠돌았다. 불행한 일이다.


병아리가 된 지 5개월하고도 12일이 지났다. 한 달을 30일로 계산했을 때의 결과값이다. 봄에서 한여름이 된 것이다. 한편 좋아하던 남자의 기일까지는 두 달 정도가 남았다. 

쥐가 시장조사를 명목으로 서점에 끌고 간 것은 그가 매일 밤 털을 빗질해 최고의 보드라움을 자랑하는 시점이었다. 안겨 오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엉덩이도 흔들어 가면서 그는 재롱을 떨었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애가 근데 앞이 보여요 하고 눈을 찌르려고 했을 때는 위기였지만. 그런 그의 날개를 잡고 일본 소설 쪽으로 끌고 온 쥐가 말했다.

“수치심이 없어? 예전에는 부끄럼 많이 타더니.”

쥐의 오른 손목에 매달린 가짜 파텍 필립이 그늘진 서점 안에서 햇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병아리 엉덩이를 흔들 때보다 쥐의 그 말을 듣는 것이 더욱 수치스럽다.

“분위기, 분위기를 타서.” 얼굴이 빨개질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러지 말란 게 아니고, 보기 좋아서.”

평소에는 추리 소설 신간만 챙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산대로 직행하는 쥐답지 않게, 쥐가 에세이 항목으로 갔다. 쥐의 파리한 안색은 파스텔톤 표지 옆에서 더욱 빛을 바랬다. 쥐는 퇴사에 관한 에세이 한 권(어째서, 그는 생각했다)과 범죄 관련 논픽션(그럼 그렇지! 쥐다운 선택지였다)을 집어 들어 그의 품에 안긴 책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기왕에 에세이 사는 거요. 좀 검증된 작가 글을 고르죠. 검색도 해 보고.”

“나도 검증된 작가는 아닌데.”

다년간의 경험으로 아는 것인데, 이럴 때는 대답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예스맨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떠올리면서 최대한 문제의 여지가 없는 답변을 선택한다. “작가님한테 뭐라는 건 아니고요.”

“뭐, 누구의 말이나 잠깐 정도는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으니까.”

이상한 말이다. 쥐는 평소 토크쇼도 보지 않는다. 뉴스에 나오는 인터뷰도 싫어했다. 자신이 평생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말에는 한계가 있는데, 정돈되지 않은 남의 발화를 들으면 너무 피로해져서 집필 활동에 필요한 인간의 말을 들을 여유가 남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언젠가는 그럼 제가 말하는 건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너는 삐약거리니까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그때는 제 꼴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평균적으로 얼마 정도요?”

“십 분.” 쥐가 책 뒤표지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직종이 색다르다거나 자료 조사에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고 듣겠지만 말이야.”

쥐가 책을 들었다 놨다 할 때마다 민트 향이 난다. 근처에서 디퓨저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수 쪽은 원래도 잘 몰랐지만, 요즘 들어선 질색하게 되었다. 특히 민트 향은 최악이다. 코가 간질간질하고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 부리를 뒤틀며 그는 말했다.

“생각보다 너그러우시네요.” 반어법인데 쥐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귀여워하고 있어.”

“뭘요?”

“너. 그리고 사람일 때도 충분히 귀여워했어.” 또 그 이상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흐흥, 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럴 때면 짜증이 나서 볼을 꼬집어 주고 싶다. “그나저나 이렇게 서서 얘기하면 기분이 묘하단 말이지.”

“뭐가요?”

“목소리는 달라지지 않아서 착각이 들어.”

“병아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요.”

“착각까지야 아닌가. 하여튼.”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사람일 때와 똑같이 부려먹고 있으니까. 물론 그때보다 세심히 챙겨주기야 하지만. 책을 받친 날개가 저릿했다. 진짜 병아리와 동일한 구조의 날개였다면 진작에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무슨 읽지도 않는 에세이를 세 권이나 산다는 말인가. 빨리 계산하고 차로나 가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계속할 작정이야? 병아리 놀이.”

“사실 전 병아리인 거 아닐까요?” 처음에는 사람으로 돌아갔을 때 근육이 다 빠져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지금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정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재은아.”

“예.” 쥐에게 한두 번 이름이 불리는 것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놀란다.

“자기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마. 그렇게까지 고뇌할 만한 건 아니거든.”

고뇌했기 때문에 본인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 자신도 예스맨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에 약 이십삼 년간 짧은 흔적과 오염을 남겼다 사라진 생명체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적으로 봤을 때 고도로 균형잡힌 불균형의 산물이므로, 그에게는 예스맨이 몹시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외계인이냐는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선, 작가님은.”

“고민한 적이 없다면 쉽게 대답했겠지.”

예스맨은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을 대입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다른 남자를 보며 진지하게, 사실 예스맨이 죽지 않은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고민한 게 실수였던 걸까요?”

쥐가 계산대 앞에 섰다. 쥐 앞으로 두어 명이 서 있었지만 금세 줄어들어, 쥐의 차례가 되었다. 쥐가 턱짓했고, 그는 계산대 위에 자신의 날개를 내려놓았다. 책에 깔릴 뻔한 것을 쥐가 책을 살짝 들어올려 막아 주었다. 단발머리를 한 직원은 쥐와 그 편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책 바코드를 찍는다. 포인트 적립하시겠어요 같은 질문도 묻지 않는다. 쥐는 일직선으로 난 직원의 가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계속 말했잖아. 넌 병아리 아니라니까.”

“그럼 이 현상을 설명할 원리는요.”

“원리는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해요?”

카드를 내밀며 쥐는 말했다.

“결말.” 직원이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쥐는 영수증으로 카드를 둘둘 감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계산대 위에 쌓아올려진 책 탑을 껴안아 들었다.

“벤 다인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추리 소설이 인생을 전부 반영하는 건 아니야. 그건 설계된 세계니까 탐정이 나와서 단서 잡아서 풀어가는 거지. 이 세상은 너무 넓어서 70억 인구가 하나씩 흘리기만 해도 70억 개의 단서가 생기거든. 그중에 하나를 고르기도 쉽지 않은데 코발트블루 실마리의 끝을 잡아내기는 더욱 어렵겠지.”

“추리 소설에서는 범인을 찾잖아요. 우리는 뭘 찾죠.” 그는 70억 개의 꼬리를 밟는 상상을 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을 찾고 나면, 저한테는 뭐가 남죠.” 하루에 1000개를 밟아도 70억이면 700만 일이 걸린다. 대체 어떻게 결말을 찾아내란 말인가.

“너는 굳이 찾지 않아도 돼. 내가 말한 결말은 그런 게 아냐. 터진 쓰레기 봉투는 테이프로 구멍 막으면 되는 거지. 굳이 새로 사다가 옮겨 담을 필요는 없다구.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그는 쥐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서점의 조명빛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형체를 잃고 뭉그러진다. “인디고블루도 상관없어. 어쨌든 파랑이면 되는 거야.” 쥐는 마치 그를 세뇌하듯, 절박하게 말했다.

어떤 깨달음은 머릿속에 안개처럼 맴돌다가 주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형체를 되찾는다. 오래 전 예스맨에게 손목이 잡혔을 때처럼 깨닫는다. 이번에도 강가에서 건져진 사람이 자신이다. 모르는 척하는 행인1이 자신의 배역이다. 그는 양쪽에서 팔이 잡힌 사람처럼 난감하게 답한다. “그렇습니까.” 이거,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제 몸이 찢어지게 생겼다.

그리고 쥐는 너무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결말이다. 언젠가부터 쥐는 마치 이 현상의 결말에 대한 결정권이 그에게 있단 것처럼 말했다. 언젠가부터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감사합니다, 쥐가 그렇게 말하며 직원에게서 카드와 열 권이 넘는 책을 포장한 박스를 받아들었다. 서점을 빠져나온 둘은 일전의 그랜저에 올라탔다. 언제나처럼 쥐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가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닫고 난 다음에야 운전석으로 돌아간다.

“한 가지 가설을 세웠어요. 웃길 수도 있는데.”

“얘기해.”

“일본 소설이었는데요. 주인공이 아내랑 잘 살아요. 이 남자는 아내를 되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죽어 버려요. 일 년 후엔가, 남자가 아내랑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요. 혈연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생판 남인데 외모는 물론이고 말투랑 행동거지도 똑같아요. 입자랑 반입자처럼. 어떻게 된 건지 아세요?”

“그거 나도 알아. 성형수술이란 현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개지. 남자를 스토킹하던 여자가 남자 아내를 흉내낸 거잖아. 색다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지만 심리 묘사가 기분 나빴지. 그 기분 나쁜 묘사 하나 때문에 이야미스로 분류됐잖니. 이야미스 전문가들은 불만이 많았겠지만.” 쥐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그런 소설도 읽었구나, 네가.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나보코프 그런 것만 읽는 줄 알았는데.”

명색이 탐정인데 자신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 이제껏 우리가 신본격 흐름에 대해 나눈 대화는 다 무엇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매니아라고 추켜세워 준 사람은 본인이다. 따지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오늘 쥐는 라디오를 틀지 않았다. 스피츠의 음악도 없다. 차 내부는 고요하다.

“현실성이 있나요? 그런 트릭은.”

“트릭이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글쎄. 나는 성형 쪽은 잘 몰라서. 하지만 어떤 사람의 얼굴과 똑같게 변형시키는 레벨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경지 아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운전을 할 때 쥐는 시선을 잘 돌리지 않는다. 원래 자동차의 왼쪽 앞좌석은 늘 그의 몫이었다. 사람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운전석은 그의 자리가 될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내내 쥐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기억 속의 예스맨과 대조할 기회를 그는 병아리가 되고 나서야 얻었다. “저도 의료 기술 쪽은 잘 모르지만요.”

“아무튼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소설에 몰입이 잘 안 됐어. 이야기 전개도 내 취향은 아니고. 별을 주자면 오 점 만점에 삼 점?”

“하지만.”

“응.”

“외계인의 성형은 사람의 성형보다 훨씬 고차원적이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꼭 닮게 외양을 변형하는 것이 우리로 따지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쉬운 일인 외계 종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블유엘엠이나 엔쥐씨 같은 은하 이름은 그 외계인에게 신촌 홍대 같은 지명이나 마찬가지일 거고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쥐가 운전대를 잡았던 오른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거렸다. 순간 차체가 휘청 흔들린 것도 같았다. 지금 말을 꺼내기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동시에 지금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서점에서 그의 집까지는 십여 분이 걸린다. 담판을 낸다면 지금이 좋다.

“전제부터가 말이지. 외계인이 있어야 말이 되는데, 그것부터 증명하면 대답할게.”

“그렇다면 작가님은 원래 그렇게 생겼습니까?”

“그럼.” 대답이 평소보다 살짝 늦게 나왔다. “성장기에 외양이 좀 변하는 건, 전부 마찬가지일 거고.”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건 아무런 상관도 없나요?”

“지갑만 들춰봐도 알 수 있어. 네가 알기 싫은 거 아냐.”

수동적인 대답이지만, 그럼과 똑같은 무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코끝을 내려다보는 시선 처리나 셔츠를 만지작거리는 손은 아무렴 상관없다. 매일같이 연필을 잡는 손. 중지에 툭 튀어나와 있는 굳은살. 소극적인 부정이라도 부정은 부정이다.

쥐의 얼굴.

예스맨을 본떠 만든 석고상 같은 민낯. 처음 보았을 때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중에는 숨겨진 쌍둥이 동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많은 부분이 닮아 있어서,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일자리 제의에 멍한 얼굴로 네, 네 하고 응했다. 나중에 계약서를 친구에게 보여주니 넌 무슨 이런 종신 노예 계약서에 서명을 했니 하고 일침했다. 그러나 쥐는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되 노예처럼 다루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종신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쥐가 눈을 찡그린다.

“모르겠어.” 쥐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일본에서는 스피츠 노래로 이상한 해석 엄청 많은 거 알아?”

“아니요.”

“너는 태양은 스토커고.”

왜 하필 예시가 그런 것이란 말인가. 네 시간 자면서 일했을 적의 행적을 괜히 되짚게 된다.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으므로, 오며가며 쥐를 보았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어, 그는 부리를 달싹였다. “희한하네요….”

“그밖에도 많은데 별로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아. 그런 가설이 떠돌아다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쥐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내려앉았다가 뜨이면 어두운 눈동자가 있다. 어머니 윤효숙 씨라면 질색했을 암울한 눈빛은 그가 병아리가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거울 앞에 서면 늘상 찾을 수 있는 눈빛과 동일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 눈이 그를 곁눈질한다. 운전할 때는 앞을 보라고 따지고 싶어진다.

“어떤 해석이든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돼. 무섭긴 뭐가 무서워? 적어도 그 노래는, 너는 태양은 사랑스러운 노래라구. 금기를 연상하지 않아도 가엾게 느껴지는 노래, 스피츠 노래 중엔 드물어. 나는 구사노 마사무네가 면전에 대고 그 노래가 스토커 얘기라고 설명해 줘도 믿지 않겠어.”

작사가 본인의 말이라면 믿어도 괜찮을 텐데. “언제는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면서요.”

“멜로디에 가사를 맞추는 사람인걸. 상상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일 테니까. 작사가는 시인에 가깝잖아. 독자로서 나는 심상을 느낄 수밖에 없어. 남의 글을 자기 논리에 억지로 끼워넣는 건 폭력적이고 촌스럽고 그래.”

외계인이 아니라면 노맨. 태양이 아니라면 달. 그렇다면 노맨을 만나는 것은 재은이 아니라 은재여야 말이 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만나면 소멸하듯이 노맨과 재은이 만나도 사라져야 말이 된다. 하지만 그는 노맨을 만났고 사라지지 않았다. 추리소설에서는 설명해야 하는 특수현상이다. 재은이 아니라 그가 되었기 때문인가? 그러나 노맨은 그를 재은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이 불균형은 작가님이 노맨이 아니라 외계인이어야만 해소가 되는데.

“그러니까 조금 적당히 굽혀주면 안 돼?” 쥐가 핸들을 잡고 그렇게 물었다. 마주친 눈은 작고 귀여운 동물의 눈과 닮아 있었다. 무력하게 도움을 바라는 성가신 눈빛. 예스맨이 이런 눈을 할 때면 달래 달라는 것이었다. “세계의 논리나, 인생의 장르 같은 거 그만 생각하고.”

“모든 게 설명될 수 있다고 한 건 작가님이에요.”

“내가 그만해 달라구 애원하고 있잖아.” 애원이라니. 진심인지 아닌지, 표정 없는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는 너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비논리적이라고 했으면서. 분위기에 취해서 떠들어댄 말 같은 건 심상만 느껴도 괜찮잖아. 대충 이런 느낌인가, 하고 푸르른 해변가 같은 것을 그린 다음에 얄팍한 논법에 꿰맞춘 도시전설은 던져버리란 말이야. 마음 가는 대로 아무거나 선택하라고, 결말 같은 건….” 그렇지만 그는 쥐의 그 말이, 말하자면 요점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떴다.

서점에 있지 않았나?

꿈을 꾼 것일까. 아니, 아니지. 여자를 쫓았고, 남편에게 아내의 사랑을 설명하고, 쥐의 낭만을 되짚고, 한가한 탐정사무소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쥐를 지켜 보았고.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갔다. 쥐의 작업실 근처, 앞마당에 벚나무가 심어진 서점.

이상하게도, 서점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곧장 곯아떨어졌다.

날개가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조금 길어졌나. 가늘어졌고. 익숙하던 보송한 노란색 털도 전부 사라졌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평소처럼 일으켰다가 실수로 앞구르기를 하고 말았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머리부터 척추를 찧었다. 몇 년만 나이가 더 들었어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척추의 고통으로 예감했다.

돌아왔구나. 나의 만성편두통, 일자거북목, 척추측만증. 탐정과 작가 보조라는 사랑스러운 직책이 달리기로 단련된 건강했던 몸에 가져다 준 모든 것들. 뇌주름에 끼었던 안개가 전부 흩어진 듯, 머릿속이 말끔하다. 일단은 자신의 배며 팔을 더듬거렸다. 근손실이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지나치게 명쾌한 정신에, 그는 얼떨떨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난 몇 달간 쥐와 나눈 대화들이 전부 헛소리로 느껴진다. 진실은 이것이다. 예스맨은 죽었다. 쥐는 노맨이 아니라 외계인이다. 그나저나 외계인에게까지 사랑받다니, 스피츠는 정말 대단한 밴드구나.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벨소리. 전화가 오고 있는 것이다. 구사노 마사무네는 사랑한다는 말 잘 안 해. 체리는 특별한 노래지. 쥐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시인은 못 될 거야. 그렇게도 말했다.

그는 더듬더듬 핸드폰을 잡았다. 다섯 손가락을 전부 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 헉 소리를 내면서. 창밖이 어둑하다. 시간은 저녁 일곱 시 오십 분. 추리 소설에서라면 수상한 전화를 받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가 사는 세계의 장르는 미스 추가 아닌 모양이다. 정말로 로맨스인 걸까.

“안녕.”

“어떻게 알았어요?”

“뭘.” 쥐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도로 사람이라도 된 거야?” 달콤한 외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스마트폰 액정을 그는 어쩔 수 없이 바라본다. 입을 한심하게 벌리고. 그는 아, 하고 목소리를 내어 본다. 병아리였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조금 가라앉은 느낌은 있다. “작가님.” 그렇게 부르자 쥐는 응? 하고 대답해 온다.

“마감이 삼 개월 남았던가요. 이제 시력 돌아왔으니까 내일부로 찾아가서 점검하겠습니다.”

“끊어도 되니?”

쥐가 쓴 특수 설정 미스터리를 그는 나름대로 고대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고생했다. 첫 번째 독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들키면 모든 것이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쥐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쥐는 관찰력이 좋고, 그를 오랫동안 보아 왔으며, 추리 소설 작가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마음 가는 대로, 따위의 말을 운운한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셈이다.

“이름 얘기하고 끊어 주세요.”

“이름이라니.”

처음, 쥐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순간부터. 쥐가 예스맨의 반입자를 자처한 순간부터. 그가 쥐와 예스맨 사이 놓인 다리의 미세한 균열을 무시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름 따위야 사실 무의미하다. 독자적인 명사는 없다. 정성껏 지은 이름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변소란 의미일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이름처럼 거창한 것 말고, 무작위로 생성된 아이디가 적당하다고 이제까지는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님 이름이요. 언제까지나 저기요, 작가님 하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구사노 마사무네.”

“일본인이었어요?”

“뻥이야.”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전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구라치 준과 오사카 게이키치 다음에 쥐를 올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외국 밴드 보컬 이름을 올릴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이 탐정이었음을 상기해낸다. 텅텅 빈 탐정사무소의 스케줄표를 생각한다. 남자친구가 외계인인 것도, 고양이가 탁자인지 책꽂이 아래인지 들어간 것도, 아내가 케이크 만들러 간 것도 밝혀냈다. 그렇다면 쥐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는 다시 쥐에게 전화를 걸었다. 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리 사과해 둘 게 있어서요.”

“상관없어.”

들어 보지도 않고요. 그렇게 물었더니 쥐는 답했다. 나, 꽤 오래 기다렸어. 그렇다면 들려 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비겁하다는 자각은 있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감각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수사를 바라는 오만한 조수가 있다. 제발 자신을 알아 달라고 몇 년 동안 시위한 것에 더해 말도 안 되는 사고까지 쳤다. 이 정도면 백 일은 물론이고 천 일도 더 지났을 것이다. 그가 결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일수는 충분히 만족시킨 셈이다. 외계인을 이 이상 괴롭혔다간 다음번에는 병아리가 아니라 바퀴벌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좋은 탐정은 몸을 쓴다고 쥐는 말했다. 예스맨의 데이터는 기다렸어, 라는 말이 즉 빨리 와 줘, 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쥐가 충분히 귀여워해 주었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욕실 문을 열었다. 도중 새끼발가락을 문턱에 찧었다. 노랗고 부드러운 털뭉치의 모습이 비치던 거울에, 이제는 누군가를 상처줄 것이 분명한 사람의 눈이 보였다. 새끼발가락을 싸쥐고 아파하고 있는 사람의 눈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그는 방을 나갔다. 인간의 다리에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골목으로 나왔을 때는 뛰고 있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