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HL]불안과 오해

집이 없어 - 백은영 HL 드림 페어 : P***님 연성 교환 샘플

살아가면서 후회를 참 많이도 했더랬다. 이때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 때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지만, 과거를 반추하며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생각해보면 후회투성이인 인생이었으나, 앞으로 걸어갈 길이 더 많이 남았기에. 홍민재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완벽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한해서는 완벽을 추구한다. 그것이 그녀만의 철학이었다. 특히나 양궁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민재는 제 눈앞에 서 있는 인영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백은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양궁부 동아리실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 펼쳐진 광경이란, 입에 담기도 힘을 정도로 처참했다. 양궁부실 내부에는 쓰러진 의자, 휴지통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다행히 활은 멀쩡했지만 캐비닛이 다 열려있고 옷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이, 누가 봐도 방 안을 뒤진 것 같은 행색이었다.

“너... 뭐야?”

“...”

“이게 뭐야. 너가 한 거야, 백은영?”

애들은 다 어디 갔지. 아, 오늘은 강제 휴식을 취하는 날이라 다들 학교 끝나자마자 집으로 갔었나. 그런데 얘는 왜 여기에 있지. 이 난장판은 다 뭐고. 왜 남의 동아리실에서 지랄이야.

“백은영. 대답 안 해?”

“너 전학 간다며.”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민재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백은영을 향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양궁으로 유명한 학교로의 전학 이야기가 최근에 한 번 나오기는 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홍민재 자신이 전학을 갈 의지가 없었으며, 이곳 한솔고에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그럼, 저 녀석은 자신이 전학 간다는 그 소문 하나로 이 야단법석을 피웠다는 건가? 대체 왜?

“...애도 아니고.”

“뭐?”

“사정에 따라 전학을 갈 수도 있는 거지. 왜 남의 동아리실에서 이 지랄인 건데.”

“우리가 남이었어?”

백은영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슬퍼 보이기도 했고 절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은영이 자리에서 비틀, 일어나더니 민재에게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민재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제게로 다가오는 소년을 마주했다.

“가지 마.”

“......”

“우리, 같이 여기서 졸업하기로 약속했잖아. 응? 민재야.”

은영이 이마를 짚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간이 일그러져 있는 게 썩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방과 후, 오렌지빛 노을이 밝은 빛과 어둠을 공간에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백은영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졌다. 한 발짝. 은영이 걸음을 옮기자 둘 사이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창가 쪽에서 들려온다. 아, 곧 저녁이구나.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걱정하실 텐데...

“...아.”

팔꿈치가 붙잡혔다. 세게 잡지는 않아서 그런지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홍민재는 백은영의 불안을 감지했다. 두려움을 읽어냈다. 맞닿은 피부의 떨림으로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백은영은 지금 자신이 떠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평소답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그냥,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번 스윽 쳐다보고는 구라치지 말라며 한 소리 하고 말았을 텐데. 더위 먹어서 돌아버렸나. 안 그래도 너무 덥다. 선풍기도 꺼져있는데 이렇게 작은 동아리실에 딱 붙어서 실랑이하고 있자니 기절할 것 같았다.

“그만하자. 그냥 너 반응이 짜증 나서 그랬던 거고, 나 전학 안 가.”

“거짓말.”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귀찮아지게.”

“그럼 약속해줘.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줘.”

팔꿈치에 가 있던 손이 스멀스멀 올라와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홍민재는 확신했다. 백은영은 지금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팔을 쓰는 운동을 하는 사람한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슬슬 화가 치미는 것이 느껴져, 심호흡한 후 일부러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말을 덧붙이며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매정하게 백은영을 치고 지나갔다. 

“약속은 무슨. 어차피 내가 먼저 졸업하면 자주 볼일도 없을 텐데. 나보고 2년이나 꿇으라는 것도 아니고... 앗,”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드물게 은영이 목소리를 높이며 지나치려는 민재의 어깨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놀란 그녀가 무어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백은영의 옷자락을 붙잡는 바람에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둘이서 널브러지고 말았다.

“윽... 야, 너 진짜 이게 뭐 하는...”

“홍민재애... 가지 말라고. 나 혼자 두지 말라고오...”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 위로 올라타듯이 넘어진 은영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백은영이 울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살면서 후회를 참 많이 했더랬다. 하지만 이때만큼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줄 알았으면 그냥 잘 달래줄걸. 영원을 약속할 걸 그랬다. 아니, 미래에도 너와 함께할 거라고.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소년을 보고 있으며 천천히 깨달았다. 그리고 납득했다. 키 크고 덩치만 컸지 아직 애였다. 민재는 양손을 들어 엄지로 은영의 눈가를 쓸어 눈물을 훔쳐주었다.

“뚝. 그만 울어. 장난친 거래두.”

“...진짜?”

“이미 3학년인데 전학은 무슨. 여기서 졸업할 거야.”

“흐윽.”

“그리고 너가 여기서 졸업하는 것도 볼 거야.”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그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미와 진배없었다. 말의 의미를 깨달은 은영이 붉어진 눈시울로 제 밑에 깔린 소녀를 내려다봤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더운지 조금 상기된 뺨과 땀에 젖은 흰색 블라우스가 시야에 걸렸다. 은영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이끌리는 대로 가다가 화들짝 놀라 민재의 위에서 벗어났다.

“미안. 무거웠지?”

“어. 돼지야.”

“...”

찌르르─ 밤을 알리는 곤충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서 이젠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고 가는 햇빛을 눈으로 좇았다. 이젠 가야 한다.

“가자.”

“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질러진 동아리실을 서둘러 정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깔린 여름밤이 무겁게 두 사람을 짓눌렀다.

[일반 글 커미션]

오월의 도서관 - 비문학 전집 루펠리언 타입

- 키워드 : 집착 / 어리광 /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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