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아카

[타키아카]이유, 이해, 이어

트레이너실 에어컨이 고장나서 (구)과학준비실에서 지내는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6,947자


눈이 뻑뻑하다. 피곤이 쌓인 걸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덥다. 어라. 왜 덥지? 여긴 트레이너실인데. 실내인데. 왜 덥지. 눈동자를 굴렸다. 낡은 에어컨이 송풍구를 열어놓고 윙윙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작동하는데. 고장 났나? 덥다는 걸 인식하니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목말라. 물. 컵을 보니 언제 다 마셨는지 텅 비어 있다.

"모르모트 군?"

아. 타키온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땀 몇 방울이 책상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어지럽다. 도로 의자 위에 앉아버렸다. 이상하다. 몸이 무겁다. 시야가 흔들린다. 정신이 점멸한다.

마지막으로 본 건 나에게 뛰어오는 타키온이었다.


"에어컨 고장…?"

"응, 트레이너실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일하느라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거든. 창문도 열지 않고 그냥 일하고 있다가 그만…"

(구)과학준비실, 현 타키온의 연구실이자 카페의 공간에서 다소곳이 앉아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이곳에 있는 침대에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왜 (구)과학준비실에 침대가 있는지 신경 쓰였지만 일단 뒤로 미뤘다. 당장 바로 앞에 카페의 당황스러운 눈빛이 있었으니까. 항상 그건 타키온 몫이어서 강 건너 불구경만 했는데. 하긴 나 같아도 갑자기 다른 트레이너가 내 공간에 퍼지러져 있는 걸 보면 당황할 것 같다. 슬쩍 눈치를 보니 카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내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이해해 줬구나. 다행이다. 역시 착하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타키온이 의자를 드르륵 요란스럽게 끌며 나타났다.

"하하하! 한 번 몰입하면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니까, 자네는! 덕분에 고생만 했지 뭔가. 트레이너실에 갔더니 더위 먹고 쓰러져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왜 양호실이 아니라 여기로…"

"당연히 여기가 더 가깝고, 활용할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지."

"혹시 그 와중에 뭘 했어?"

"인간과 우마무스메가 다른 동물들보다 오래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땀을 흘려 신체가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지. 그건 달리 말해 체온이 스태미나 증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뜻이지! 눈앞에 체온 조절에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겠는가!"

"몸은 괜찮으신가요…?"

"음. 응, 일단 몸이 빛나진 않네."

"항상 내 약의 부작용이 빛나는 건 줄 아는 건가."

타키온은 히죽 웃더니 나에게 수분 보충이나 하라며 잔 하나를 내밀었다. 잔도, 색도, 향도 평범한 홍차다. 상대가 타키온만 아니라면 넙죽 먹었을 텐데. 솔직히 타키온한테 뭔가를 받아먹는 건 두렵다. 눈동자를 데굴 굴리니 타키온은 그저 평소대로 웃고 있어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 어차피 내게 거부권은 없었지. 잔을 받아 조심스럽게 한 모금 삼켰다. 냉침한 건지 냉기가 몸에 스며든다. 이제야 정신이 제대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입안에 향을 머금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얼그레이인가. 몸에 무슨 반응도, 옆에 타키온이 무어라 덧붙이는 설명도 없다. 정말 평범한 홍차인 모양이다. 그때 찬 바람이 앞머리를 간질였다. 고개를 드니 최신식으로 보이는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시원하네, 여기는."

"온도 때문에 약이 변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지."

타키온은 태연하게 답하며 홍차에 각설탕을 떨어트렸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각설탕을 아연하게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과학준비실은 문 쪽이 카페, 창문 쪽은 타키온이 쓰고 있었다. 간결하게 좋아하는 물품을 정리한 카페와 달리 타키온은 책상, 실험대 등 큰 가구도 모자라 각종 실험 용품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정리하면 노트북 하나 더 놓을 자리는 될 것 같은데. 계산기처럼 찻잔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시선 끝에 '여름합숙'이라고 미리 적어놓은 화이트보드가 걸렸다.

"있잖아, 혹시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까?"

툭 던지듯 말하자 둘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나는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여름 합숙 갈 때까지만'이야. 여름 합숙 때 학생들이 없으니 그때 에어컨 포함해서 시설을 전반적으로 점검한다고 했거든. 얼마 안 남았다 보니 당장 트레이너실 에어컨 수리가 안 될 것 같아서."

"왜 내가 아니고 카페를 보며 말하고 있는 건가?"

"타키온, 네가 거절하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야. 거기다 여기 처음에는 카페에게 배정되었던 공간이라며."

"나에게도 배정된 공간이니 나한테도 허락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알겠어. 그래서 허가 유무는?"

"모르모트 군에게 오늘과 같은 이상이 발생하면 곤란해. 거기다 왔다 갔다 하거나 연락할 시간이 줄어 빠른 실험이 가능하니 좋지."

"그럴 줄 알았어."

일단 2명 중 1명은 통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카페에게 눈짓했다. 카페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아요. 모로보시 선생님은 타키온 씨와 다르게 이곳을 조심스레 써주실 것 같으니까."

"고마워!"

"어이, 카페~ 나와 다르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내가 얼마나 이 공간을 애지중지하는지 아는가?"

"본인 자리부터 치우고 그런 말 해주세요…"

"일단 그거부터 해야겠네. 으챠."

"아앗! 그쪽에 있는 건 귀중한 시료이니 조심하게!"

내가 적당히 치우려고 팔을 걷자 타키온이 황급히 일어났다. 그런 것치곤 말만 하고 치우는 건 다 내가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간제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제 도시락까지 안 싸주셔도 되는데…"

"평소 신세 지는 것도 있고, 2인분에서 3인분으로 늘리는 게 큰 일은 아니니까."

자, 얼른. 팔 떨어진다. 장난스레 말하니 카페는 그제야 조심스레 도시락을 받았다. 타키온은 그 옆에서 익숙하게 받고 벌써 젓가락을 꺼내고 있었다. (구)과학준비실에서 지내게 된 첫날.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답례할 겸 아침 식사에 카페를 초대했다. 아니, 여긴 원래 카페의 공간이니 초대했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카페는 우리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싱긋 웃으며 그의 잔에 시원한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평소에도 같이 식사하나요?"

"응. 트레이너실에서 같이 먹어. 카페테리아가 하지 않을 때 한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젠 매일이네."

"트레이너가 왜 식사까지…"

"실험하다 식사를 잊어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 것보다는 낫더라고…"

"하긴… 그런 적 있죠…"

"너 카페한테도 연락한 적 있어?"

"자네가 트레이너가 되기 전까진 그랬지."

"…카페,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

"…네."

도시락 한 번이면 될까. 역시 커피 원두라도 한 번 구해봐야 하나. 끙끙거리며 밥을 입속에 넣었다. 역시 아침에 먹는 밥이 지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제일 맛있다. 고슬고슬한 밥알과 렌틸콩을 입안에서 굴리며 파를 넣은 계란말이를 베어 물었다. 카페에겐 별 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3인분 양이 양이라 조금 급하게 만들었는데 다행히 잘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가 관건이지만. 먼저 타키온을 보니 평소와 똑같다. 바로 먹지 않고 메뉴를 살피며 영양 밸런스를 계산 중인 것 같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합격이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번 무슨 쪽지 시험을 보는 기분이다. 넘어갔으니 됐다. 타키온은 음식을 갈아 먹을 정도로 맛을 따지는 타입이 아니니. 문제는 이쪽이다. 이제 막 함박스테이크를 들어 올린 카페를 살폈다. 평소 커핑 실력을 보면 아마도 미식가. 괜찮을까. 다행히 입맛에 맞는지 카페 표정이 미미하게 밝아진 것 같다.

"맛있어…"

"다행이네."

"트레이너 군~ 이건 쓴맛이 나서 별로네. 다음엔 빼주게나."

"영양 밸런스. 안 그래도 쓸 까봐 함박 스테이크 안에 넣어줬잖아. 그 정도는 참아."

타키온이 짐짓 눈을 흘기며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타키온이 맛을 따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 요리 덕분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쁘면서도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황급히 함박스테이크를 크게 베어 물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요리는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음, 응. 아버지한테서. 집이 료칸을 하는데 거기 주방장이시거든."

"호오, 그랬나?"

"당신의 트레이너면서… 몰랐던 건가요…"

"실험에 필요한 데이터가 아닌데 내가 꼭 알아야 하나?"

"괜찮아, 괜찮아. 원래 가족 얘기는 잘 안 하거든. 아, 그보다 어제 도시락 재료 사러 상점가에 갔었는데 곧 추첨 이벤트 한다고 하더라"

그 뒤로도 대화를 쭉 이어갔다. 주로 나와 타키온이 떠들고 카페가 간단히 반응하는 식으로. 그러고 보니 알고 지낸 지 꽤 됐지만 타키온과 이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적 딱히 없는 것 같다. 툭 하면 실험, 연구, 레이스로 흘러갔으니까. 지금은 안 그러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니지만. 혼자 본인의 이론을 줄줄 읊는 타키온을 보다 조용히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각 도시락에 든 것도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수업 가볼게요."

"응, 나중에 보자."

"조심히 가게나."

"잠깐. 타키온 너는?"

타키온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 가겠단 뜻이다. 나와 카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가 떠난 이후 (구)과학준비실은 제법 조용했다. 나도, 타키온도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은 타입이다 보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적어도 나는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서늘한 기온, 나름 익숙한 장소, 쌓여있는 일. 집중하기 좋은 환경임이 분명한데도. 의자에 눕듯이 등을 기대니 끼익 소리가 났다. 그대로 고개만 틀어 타키온을 훔쳐봤다. 집중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명확했다. 이 녀석. 타키온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분산되어 버린다. 갑자기 이상한 약을 먹인다든지, 운동장을 달리라고 오라고 한다든지 그런 일만 겪어서 그럴까. 조마조마해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타키온은 다리를 끌어안듯이 의자에 앉은 채로 손가락과 눈동자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만 하는 타키온을 이렇게 가만히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찬찬히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집중하고 있는지 두 귀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귀에 걸린 육각형, 아니 무슨 분자랬나. 아무튼 귀장식이 미동도 안 할 정도였다. 귀와 똑같은 색의 머리는 잘 보니 길이가 제각기였다. 머리는 직접 자른다고 했던가. 거기에 직모라 심하지 않을 뿐이지 머리가 꽤 뻗쳐있다. 빗어보고 싶은데 물어보면 거절하려나. 시선을 내리며 생각을 떨쳐냈다. 머리가 얼굴을 거의 덮고 있었지만 그사이에 드러난 눈만큼은 잘 보였다. 부드럽게 내려간 눈꼬리. 입을 다물고 있으니 유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레이스 중에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도 지금은 붉은빛만 유지한 채 제법 차분하다. 옆에서 보니 속눈썹도 은근히 길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끝이 팔랑거린다.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뭔가 생각하는지 긴 소매가 늘어진 손으로 턱을 괴고 있어 입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잘 보니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다.

"…뚫어지겠어."

흠칫 놀라 내 어깨가 튀었다. 눈동자만 굴려 그런 날 본 타키온이 낮게 쿡쿡 웃었다. 아, 너무 오래 봤나.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니 타키온이 아예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다리는 의자에서 내려 꼬면서.

"미안, 방해했어?"

"보기만 했으니 방해라고 하기는 어렵군. 너와 내 사이가 아닌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히 하도록 해."

"아냐. 그냥 연구만 하는 모습은 별로 본 적 없었던 것 같아서 보고 있던 것뿐이었어. 보통은 먹거나 달리거나 했잖아."

"흐음. 나로서는 앉아만 있는 날 관찰하는 것보다는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데 말이지. 들어보게.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최근 발표한 이 논문을 기반으로 하여 우마무스메의 관절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아, 일해야지. 일~ 일~"

"어이, 무시하지 말게나."

괜한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일하는 척하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자네는 왜 트레이너가 된 거지?"

그 순간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손이 뚝 멈췄다. 고장난 로봇처럼 드드득 목이 돌아간다. 타키온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 그대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자못 당황스러워 마른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별일이네. 네가 그런 걸 묻고."

"작은 호기심일세. 트레이너의 유대감 덕분에 이겼다는 인터뷰 수가 꽤 있다는 게 생각나서 말이지. 트레이닝, 지도… 다른 요인들이 있는데도 굳이 '유대'를 꼽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게 나에게도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그러려면 우선 트레이너 군을 좀 더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지."

"그렇구나… 그래도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우리 나름 유대감 있지 않아…?"

"후후, 뭘 그렇게 자신 없게 말하는가. 뭐, 그게 아니더라도 트레이너 군이 가진 우마무스메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광기 수준인 것에도 쭉 의문은 있었어. 아무렴! 담당 우마무스메의 식사, 실험에 어울리는 모르모트가 또 있을까!"

"사실이긴 한데 그걸 네가 말하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아무튼 결론적으로 너에 대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일에 집중하긴 글렀다. 타키온을 보지 않은 채 딴청 부리듯 근처에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검지로 튕기자 엄지 위에서 펜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예전에 네가 받은 팬레터 기억해? 어린아이가 보냈던."

"아아. 나처럼 달리고 싶다고 했던 거 말인가."

"나도 그런 거야."

잠시 말을 끊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동시에 내 손 위에서 돌아가던 펜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다.'"

이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모두가 웃으며 넘겼던 어린아이의 꿈. 어쩐지 목이 막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우마무스메의 레이스를 처음 보고 그런 꿈을 품었지. 근데 그렇게 될 순 없잖아? 그래서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트레이너가 되었다~ 이런 거야. 별거 없지?"

그랬더니 VR 속에서라도 우마무스메로 만들어주는 우마무스메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농담을 덧붙였다. 하하 웃는 소리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영 어색했다. 어쩔 수 없다. 다 큰 성인이 어린 시절 꿈을 얘기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민망한 일인 걸 이제 알아 버렸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아닌가. 따가운 건가. 이건, 시선이다. 참지 못하고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호선을 그리는 입이었다.

"그래서 날 선택한 거군?"

마주한 타키온은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어린 시절 꿈을 얘기했을 때 이런 반응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라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다는 이 앞에 우마무스메를 탐구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하하! 과연 그런 거였군. 그래서 그렇게까지. 그 광기도 이해가 가."

"어?"

"자네의 행동 원리도 알 것 같군. 흠, 이 정도면 내 생각보다 꽤 유의미한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니, 잠, 잠시만. 상상 이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와서 좀 당황스럽거든? 내 얘기에 그렇게 웃을 만한 게 있었어?"

타키온이 잠시 조용히 나를 살폈다. 타키온의 반응은 물론 현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한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타키온은 그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세간의 표현을 빌려볼까. 그러니까 트레이너 군은 나에게 꿈을 맡겼다는 소리 아닌가."

턱 말이 막혔다. 타키온치고 상당히 서정적인 표현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순간적으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곡을 푹 찔린 걸까. 순순히 인정하기엔 가슴이 일렁거렸다. 말없이 입만 벙긋거리니 타키온이 짧은 침묵을 깼다.

"그 말인즉, 모르모트로서 나를 떠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거지! 이야, 이야. 앞으로 좀 더 다양한 걸 해봐도 괜찮겠어."

"뭐!? 이 이상 더?!"

"흠, 그렇다면 이럴 때가 아니군.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다고 했나? 그렇다면 가장 큰 차이는 역시 각력인가. 그렇다면 잠시 초심으로 돌아가 봐도 괜찮겠어.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갑자기 어디 가는데?"

타키온은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짜고짜 혼자 남겨진 나는 멍하니 타키온이 열고 간 창문이나 볼 수밖에 없었다. 왜 문 두고 창문으로, 아까 관절 유연성 뭐라 했던 건 어쩌고. 뭐라 하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이마를 짚었다. 그보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자신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바보 아냐…"

그냥 문득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불안해졌다면 말로 할 것이지. 한숨 섞인 말을 내뱉다 말고 피식 웃어버렸다. 타키온이 지금까지보다 더 뭔갈 시도하고자 한다면, 내 건강과 시간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퍽 웃겨서.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쭉 켠 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얼른 일을 끝내두자. 타키온이 돌아왔을 때 지체 없이 실험에 어울릴 수 있도록.


"그동안 고마웠어."

"조심히 가세요…"

"이러니까 나 퇴직하는 것 같네."

가볍게 웃으며 묵직한 상자를 안듯이 들었다. 분명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노트북 하나가 고작이었는데, 얼마나 지냈다고 가져온 개인용품이 이만큼이었다. 빠진 건 없겠지. 눈으로 상자 위를 훑으며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찻잔 가득히 각설탕을 쌓아 올린 타키온이 날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모르모트 군."

"응?"

" 컵은 두고 가게."

"왜?"

"어차피 여기 또 올 거 아닌가."

아주 당연한 걸 말한다는 태도에 기가 차면서도 기꺼웠다.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상자를 잠시 무릎으로 받쳤다. 그리고선 맨 위에 있던 스테인리스 머그잔을 내가 쓰던 자리 쪽에 내려놓았다.

"그러네. 카페가 주는 커피도 또 마시고 싶고."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에요."

"하아? 여기까지 와서 커피 같은 거나 먹을 셈인가? 어차피 자네는 내 홍차 우리게 될 텐데 그걸 같이 먹으면 되지 않은가! 저번에 별생각 없이 자네 잔에 든 거 먹었더니 그게 커피였을 땐 정말 끔찍했어."

"그러니까 애초에 내 컵에 왜 손댔어."

"목이 말랐는데 내 잔은 비어있었거든. 다시 타달라 하기엔 자네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당연히 그 잔엔 홍차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뭔가."

"그럴 땐 좀 알아서 타 먹으란 말이야! 아무튼."

상자를 다시금 제대로 들고, 팔꿈치로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쳐도 미소를 유지하며 잠깐 뒤를 돌았다. 타키온은 타키온의 공간에서, 카페는 카페의 공간에서 나를 조용히 배웅해 주고 있었다.

"그럼 여름 합숙 때 보자."

"네… 여름 합숙 때 봬요."

"체육복 챙기는 거 잊어버리지 말게나."

"네, 네. 여름합숙 때도 내가 뛰는 거구나."

대충 대답하며 한 발짝 내디뎠다. 드르륵.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꽤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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