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설탕절임

제비꽃 설탕절임 1

말려서 박제한 추억같은 이야기를 적어요

저 너머로 저무는 해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서글픔보다는 후련함을. 분함보다는 즐거움을. 눈물보다는 땀방울을 담아서. 도쿄 체육관 너머로는 느릿느릿 땅거미가 드리워진다. 그해의 나는 그런 것들이 아주 좋았다. 코트 위로 박차는 배구화 소리, 이쪽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들. 다음에 또 보자, 하고 흔드는 손. 그래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아, 그래. 나는 정말로, 정말로 이 이야기를 좋아해.

종종 이 세상을 들여다볼 때면 반짝 얼린 사탕 조각을 깨물어 먹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혀를 베는 아릿한 통증과 시린 아픔, 동시에 눈물이 날 정도로 달콤한 기분. 서운함과 경쾌함이 공존하는.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이건 아주 긴 서사의 마지막 장. 배구로 따지면 3세트 매치 포인트. 혀끝에서 녹아내린 사탕은 이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다. 이제는 정말로 끝까지 거의 다 와버렸네, 그렇게 생각할 즈음의 일이다.

“치이.”

나는 오래된 소꿉친구에게서 난데없는 고백을 받았다. 음, 그날의 기억은 이런 것들로 표상된다. 노을. 새빨간 져지 옷자락. 내 손목을 감싸쥔 손의 온기.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이 순간 낯설어진 친구의 얼굴. 비스듬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좋아해.”

그리고, 내 인생의 장르를 180도 바꿔 놓을 고백.

혀 안쪽에서 굴리던 사탕 조각에서는 상상도 못한 맛이 났다. 내가 익히 알고,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향과 맛. 분명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입 안쪽에 아주 길게 들러붙어 껄쩍지근하고 매캐할 정도의 단맛을 냈다. 와삭, 이 사이로 깨문 사탕 조각이 터져나간다. 세계가 부서지듯이, 잘게 파편이 튄다. 멍하니 생각했다.

…음, 어라.

이거 혹시, 장르는 순정만화?


내가 발을 딛고 선 땅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직조한’ 세계란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정확히 열 살 때의 일이다.

이 세계의 장르를 따지자면 청춘 학원 스포츠. 분류는 점프 만화. 말하자면 세계 저 바깥에서 누가 섬세한 펜선으로 그려나가고 있는 세계가 나에게는 길을 딛고 선 땅, 나에게 웃으며 손을 뻗어 주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 모서리에 조금 기스가 난 부엌 식탁, 내 방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소녀 순정만화 잡지의 87페이지였던 셈이다.

그 시절 나는 소심하고 맹한 옆집 꼬마와 제법 자주 어울려 놀았다. 테츠로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또래 친구라곤 별로 없었다. 어렸을 땐 정말로 겁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는 차츰차츰 성격이 밝아졌다. 그 무렵부터 공놀이를 하겠다고 공을 끌어안고 동네를 쏘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나도 같이 놀자고 우리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게 기점이었다.

치이 쨩. 오늘은 배구하러 갈 거야. 내가 가르쳐 줄게! 그렇게 들뜬 얼굴을 하고 배구공을 든 채로 내 방으로 들어온 테츠로를 본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붕 뜨듯 감각에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문간에 서서 옆집 켄마도 같이 한대, 올 거지? 하고 묻는 목소리는 아득하도록 멀게 느껴졌다. 딛고 있는 세상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비명을 먼저 질렀다. 주위가 붕 도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넘어지거나 쓰러졌을지도 모르고. 어질한 시야 가운데 테츠로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가 배구공을 내려놓고 급하게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 번 도리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싫어, 저리 가, 거짓말, 안 할 거야. 뭐 그런 말들 중 하나였겠지. 이제 와서 중요한 단어의 나열은 아니다.

내 격렬한 거부에 테츠로는 다소 충격받은 듯 무슨 일 있어? 미안, 나중에 올게, 하면서 움츠러든 기색으로 내 방을 떠났다. 아마 그날은 배구공을 내 방에 떨어뜨리고 갔으니 어차피 제대로 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함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우는 나를 다정하게 달래며 테츠 군한테 사과해야지, 상처받았을 거란다.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훌쩍거리며 중얼거리지 못한 말을 삼켰다.

거짓말, 거짓말. 걔가 상처받았을 리 없잖아. 엄마, 걔는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야. 누군가 만들어 낸 만화 캐릭터에 불과해. 상처받았을까? 무언갈 느낄 수 있긴 했을까? 그치만 걔는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부품에 불과해. 그리고 아마, 어쩌면 엄마도 그럴지도 몰라. 그리고 나도 그럴지도 몰라. 이 세계 자체가 그렇게 짜여져 버렸을지도 몰라.

엄마, 나는 그게 무서워. 어떡하지? 나는 테츠로가 누군지 알아. 어떤 만화에 나왔는지도 알아. 그 만화의 끝은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지만, 그리고 나서 다시 태어나버린 이 세상이 하나의 이야기고 만화 속이라는 사실도 알아. 방금 그걸 알아버렸어.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엄마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며 도리질을 치기만 했다. 사과 안 할래, 안 할 거야, 하는 말만 반복했다. 얘가 왜 이럴까, 하는 엄마의 난감한 목소리를 귀로 똑똑히 새기며. 내가 붙잡은 엄마의 옷자락이 새하얀 만회 용지로 변해버릴까 두렵다는 양 꾹 움켜쥐었다.

그 나이의 나는 동네 이곳저곳 바깥으로 쏘다니는 일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날 이후로는 관두게 되었다. 내가 관찰하지 못한 세계 바깥이 선명하고 진짜같고 만질 수 있고 감촉이 느껴지는 세상이 아니라, 흰 종이와 여백을 채우는 검은 잉크 선이었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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