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네프릴

[스네이프 드림] 과제

이 글에는 사회적으로 권장하지 못할만한 설정이 담겨 있습니다.


글에 작성된 나이는 만 기준입니다.
원작 설정상 마법세계에서는 만 17세가 성인, 머글세계에서는 만 18세가 성인입니다.


책상 위에 양피지 뭉치가 위태롭게 쌓여 있다. 잉크 병은 어느새 바닥을 보였는지 깃펜을 넣어보아도 촉이 닿는 소리만 쨍쨍 요란히 울린다. 스네이프는 깃펜을 잠시 내려두고 목이며 어깨며를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뚜둑뚜둑, 여기저기서 업보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과제를 적당히 내 줄 걸 그랬다. 결국 그 많은 학생들의 얼토당토 않은 과제물을 채점할 사람은 학교에 하나뿐인 마법약 교수일텐데 말이다. 이럴 때면 푹신한 소파 생각이 간절하지만, 사무실엔 그저 불편한 나무 의자 뿐이다. 쭈욱 죽 기지개를 켜다가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 두어 개를 발견하곤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러 양피지 탑 위에 마저 얹어 둔다. 

봐야 할 레포트가 한 두개가 아닌데, 이 양피지 하나가 유독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있다. 어디 하나 빼놓은 곳 없이 온갖 문장에 빼곡히 달린 주석에다가 책 반 권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분량까지.

"누가 쓴 거야, 이거."

얹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스네이프는 양피지를 다시 살펴가며 작성자를 찾는다.


마법약 과제

울프스베인 개발의 역사와 현재 -늑대인간 권리 선언을 중심으로-

에이프릴 슈, 슬리데린 8학년


"...슈."

그래. 8학년 중 한 명일거라고 예상했다. 이런 걸 쓸 사람은 많아봐야 두 명이니까. 그리핀도르에 한 명, 슬리데린에 한 명.

"또 어지간히 꼼꼼하게 썼군 그래."

매번 이런 식이다. 마법약 과제를 내 줄 때 마다 워낙 철저하게 해 오기에 마법약을 좋아하는가보다 했고, 어둠의 마법 방어술 과제도 상세하게 작성해 오기에 모든 수업에 성실히 임하는구나 했는데. 글쎄 다른 과목들은 평범하게 우수한 수준으로 해온다지 않은가. 그걸 알게 된 지는 2년도 채 안 됐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도 대략 2년이 안 됐다.

세베루스는 스무 살이나 어린 제자가 대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여신이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단 인기있는 학생이. 굳이 학교에서 제일 깐깐하고 짜증나는 선생을. 내가 일말의 여지라도 남겼던가? 잘라 말하건대 그런 윤리 위원회에 회부될 만한 짓은 지난 17년간의 교직생활에서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회부될 만한 행동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은 인격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사람은 아니므로. 아무튼 그런류의 헛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헛짓?

세베루스는 지난 여름을 떠올린다. 슈를 제 집에 데려온다는 묘책을 짜냈던 날. 참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볼드모트였다. 보호자도 뭣도 없는 열일곱도 안 된 어린애를 근거리에서 싸고돌려면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않았다.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젠장.

스네이프는 눈썹을 찡그리고 미간을 지그시 누른다. 젠장. 젠장 젠장.

위법은 아니었다. 어쨌든 합의는 이루어진 상태였고, 상대는 법적 성인이기는 했으니까. 비록 1분 전까지는 미성년자였다 해도 말이다. 정말 잘도 윤리적인 행동이다.

"...젠장!"

상상만 해도 핏대가 울린다. 대체 왜 그랬지? 아무리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고 해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심지어 선생이라는 작자가! 세베루스는 8개월 전의 자기 자신에게 섹튬셈프라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꽉 쥔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물고 있던 어금니가 버티지 못하고 까드득 소리를 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스네이프는 참았던 숨을 내쉰다.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에이프릴이 인생에 한 번 뿐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교수님께서는 잊어버리셔도 좋다고 말했다지만, 사람이 양심이 있지 아무리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한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시작이다. 틈만나면 스쳐가는 아뜩한 기억에 부끄럽고 화가 나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게 벌써 몇 번 째던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스네이프는 깊게 한숨을 뱉더니 펼쳐져있던 양피지를 말아넣고 책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밀어둔다. 책상 서랍을 뒤적여 새 잉크병을 꺼내 뜯고는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바삐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다른 두루마리를 채점하고 나면 결국엔 이 두루마리를 다시 펴게 될 텐데. 애꿎은 과제물에만 비가 쏟아져 내린다.


사진 출처: Jeff Nelson, https://www.flickr.com/photos/rustyangel/4839598829

출처: https://miyeokayeah.tistory.com/53?category=697691 [빛과 어둠 그 너머] 

-티스토리에 썼던 걸 포스타입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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