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빅터와 우유 한 컵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비일상적인 날이었다.
“흐윽, 윽….”
“형, 형아?”
피, 익숙하다. 엉망진창, 실험 중이라면 익숙하다. 쓰러진 사람? 죽어 나가는 실험체 정도야 익숙하다.
하지만 오르카는 숨이 넘어가도록 히끅대며 숨을 참아내야 했다. 저를 꼭 안아 들고 있는 흑표범 혼혈의 품에 파고들며.
그야,
저벅, 저벅, 저벅….
“산 사람이 있었네.”
“메, 메두사 님, 메두사 님….”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단신으로 죽인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압도적인 무력 차는 공포를 불러온다. 지금 곁에 있는 흑표범 혼혈 정도는 되어야 상대가 되겠으나, 그는 아예 상황 파악 자체를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야 당연하다. 고작 4살짜리가 뭘 알고 판단하겠는가. 그는 그 상황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하는 오르카를 따라 몸을 떨고 있었다. 참, 어이가 없게도.
따라서 전력이 되지 못하는 두 실험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 둘을 담당했던 연구원, 메두사밖에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유리 조각을 쥐었으나, 오르카는 알았다. 고작 그걸로는 앞의 사람을 절대 감당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그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과 같이 긴장된 분위기가…
“쫄지 마. 안 죽여.”
“?!”
팅,
…끊겼다.
오르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몸의 떨림이 멈추자 혼혈도 덩달아 눈물을 멈추고 오르카를 살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섬뜩한, 새하얀 머리칼의 남자는 메두사에게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대로 나가도 혼자선 못할 게 너무 많더라고. 날 도와준다면 안 죽일게.”
“도… 돕다니, 뭘요?”
“살 곳을 구하거나, 길을 찾거나, 잡다한 거 뭐든지 다. 하다못해 신문을 읽어주거나.”
‘살 곳’, ‘길’ 메두사가 언젠가 읽어주었던 동화책을 통해 들어보았던 단어들이 오르카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 외의 말은 깊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일단 뭔가 제 역할을 한다면 살려준다는 소리 같았다. 방금까지 살인을 남발하던 살인자가 하는 말이라기엔 굉장히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살려주신다면 뭐, 뭐든 하겠지만… 이 애들은 계속 여기 갇혀 있어서 글도 모르고… 특히 오르카는, 실험 부작용으로 팔이 썩고 있어서 나가봤자,”
“내가 공부 가르쳐주지. 원래 난 선생님이 꿈이었거든. 우리 선생님을 동경해서… 아,”
“…”
“어쨌든 내가 가르쳐줄게. 앞으로 무척 바빠질 것 같거든.”
파앗,
“!”
그때, 그 살인자의 손이 다가와 오르카의 상처를 만졌다. 그 손은 살인자의 것이라기엔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어서, 도리어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 살인자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 말이다. 오르카는 격리실의 모든 연구원이 사람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동화책 속의 말랑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야말로 사람이라면, 저들은 인간의 마음을 잃은 그것일 거라고. 그에 걸맞게, 오르카를 끌고 나가는 그들의 손은 차디찼다. 그중 유일하게 따뜻한 사람은 메두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어딘가 미친 사람의 손이 이렇게나 따뜻할 수가 있나? 이 사람들이 적어도 그 연구원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나?
“가, 감사… 그, 뭐를… 하려고요? 앞으로,”
“내 야망이 얼마나 원대한지 들으면 놀랄 거야. 난 말이지…”
사랑을 할 거야.
오르카의 표정이 공포와 괴리감에 떨고 있던 것에서 황당함과 어이없음으로 거칠게 구겨졌다. 오르카가 기억하는 ‘사랑’은 백설 공주나 개구리 왕자, 신데렐라 정도의 동화책에서나 봤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그 주인공 자리에 예쁘게 피를 묻힌 남성 하나가 낄 자리는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 불가능한 걸,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
오르카나 메두사나 뜬금없는 사랑 놀음에 몸을 굳혔을 때, 네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그에 의외로 말을 꺼낸 것은, 이름이 없어 그들 사이에서 그저 ‘동생’이라고나 불리던 흑표범 혼혈이었다.
“우리… 어디 가?”
분명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모험이며 여행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굳이 예시를 들자면 부모에게 버려져서 마녀의 과자집으로 향하는 헨젤과 그레텔일까. 그 과자집이 상상했던 과자집이 아닐 것임을,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아니, 함정이라는 면으로는 맞을지도.
결국, 메두사는 무거운 결정을 내렸다. 그와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짧은 순간의 판단이었다. 혼혈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오르카는 그것을 덩그러니 안겨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응응, 그럼 이제 가볼까? 이름이 뭐야? 난 백모래.”
“전 메두사예요. 이 애는 오르카. 그리고 이 아이는… 이름이 없어요.”
“애?”
백모래는 덩달아 벌떡 일어난 혼혈을 올려다보며 의문사를 내뱉었다. 어딜 봐도 어린애는 아니었다. 훌쩍 큰 키에 깊은 눈매, 그리고 단단한 근육…. 최소 20대 이상으로 보였다.
“4살이에요.”
“엑, 실험으로?”
“네. 전투에 최적화된 신체를 만든다고… 정신은 그대로지만요.”
건장한 한쪽 팔로 10살쯤 된 어린아이를 가볍게 들고 있으면서도 눈동자나 도록도록 굴리고 있는 혼혈의 행동은 오르카가 봐도 어딘가 좀 어색해 보이긴 했다. 제 나이답기는 하지만, 그걸 다 큰 성인의 몸으로 보자니… 인지부조화가 대단했던 것이다.
“어언…제 가?”
게다가 말도 어눌하다. 발음하는 기관은 정상인데 발음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아 생긴 현상인 것 같았다. 그것에 대충 납득한 백모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다…
“빅터로 하자.”
“네?”
“이름 말이야. 어디 가서 지고 다닐 것 같진 않으니까, 좋네.”
빅터Victor. 승리자. 백모래가 말하니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르카는 꽤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빅터’를 올려다보았다. 실험체의 배를 타고 실험실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그 얼굴 자체는 귀티가 선명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서 패배라고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
그 끝에는 이름으로 타고난 승리가 존재할까?
“이제 갈까?”
“네. …아!”
그때, 이제 막 출발하려던 메두사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던 것을 빅터가 허리를 잡아끌었다. 아까부터 앉아있느라 몰랐는데, 발목이 접질린 모양이었다. 오르카는 걱정스레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메두사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고통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
“누나 아파.”
빅터에게 번쩍 들리고 말았다. 결국 한 팔에 오르카, 한 팔에 메두사를 안게 된 것에 오르카는 기함했으나, 정작 빅터는 끄떡없어 보였다. 오르카는 수치와 당황에 얼굴이 발개진 메두사가 결국 얼굴을 가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백모래가 감탄하며 ‘실험 효과 확실하네.’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어쩐지 그들 사이에 이런 인상이 굳어질 것 같다고, 오르카는 짧게 생각했다.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이것저것 증거 조작을 한 네 사람은 (구)연구소를 불태운 뒤 떠났고, 두 아이는 백모래와 메두사가 모종의 경로로 구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집 안은 기묘하게 조용한 데다 어느 한구석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실험실과 비슷한 냄새였다. 오르카는 어떤 의혹이 슬쩍 싹을 틔우는 것을 느꼈다. 참… 기묘했다.
하지만 빅터는 그걸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흙발로 집에 들어서려는 것을 메두사가 기겁을 하며 닦는 시범을 보여주고서야 제대로 닦고 집 안을 말 그대로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것이다. 오르카는 그에 손을 잡혀 끌려다녀야 했다. 거실부터 안방, 그다음으로 큰 방 두 개, 그리고 두 개의 화장실과 부엌. 2층도 있었다.
“빅터, 불장난은 그만해!”
“이거, 부울… 이야?”
“그래. 누르면 이렇게 불이 꺼지고, 다시 누르면 불이 켜지는 거야.”
“오오오.”
달칵달칵달칵,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빅터.”
아, 덤으로 빅터는 방마다 불장난을 하다 메두사의 엄한 목소리 아래 혼이 나고 말았다. 덕분에 옆에 있던 오르카는 혼나지 않고도 스위치의 기능을 익힐 수 있다.
“그냥 둬, 메두사. 어차피 전기세를 우리가 내는 것도 아닌걸?”
“그렇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하니까요.”
그때, 백모래가 메두사를 말리자 빅터가 눈치를 살피며 슬슬 손을 내렸다. 당장 다시 달려가 부엌을 살필 기색이었다. 아까부터 유난한 관심을 표하던 방이었다. 커다랗고 시원한 상자와, 따뜻한 불이 나오는 판, 이상한 소리가 나는 기계 같은 것들이 이것저것이 늘어놓아져 있는 방은 오르카에게도 신기하긴 했으나….
“메두사가 요리해?”
“이 중에 요리할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혹시 요리할 줄 알아요?”
“아니!”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메두사의 표정이 점점 자유분방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르카는 잠시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백모래의 눈치를 봤다. 혹시 수틀리면 그들을 죽이려 할지도 몰랐으니까…. 또 다른 불장난을 하다 부엌에서 쫓겨나는 빅터는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새였지만.
“자, 빅터. 이거라도 마시면서 가만히 있어. 알았지?”
오르카도.
그때, 메두사가 두 아이를 부르며 우유 한 컵씩을 나눠주었다. 차가운 냉기를 품은 하얀 액체는 두 아이에겐 그나마 익숙한 것이라,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자연스럽게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실험실에서 보급될 때보다 시원하게 마시니 더 맛있는 것 같았다. 빅터는 이미 다 마신 모양이었다.
그리곤…
“빅터?”
“형아, 더 마실래?”
자연스럽게 우유가 든 병을 꿍쳐오는 것이다. 오르카는 그게 그새 어디에서 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그게 안 될 것 같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눈으로 메두사를 찾던 찰나,
챙그랑!
“헉!”
우유를 부으려던 빅터의 손과 오르카의 잔이 요란하게 부딪쳤다. 다행히 깨지진 않았으나 소파 한쪽에 눕듯이 앉아있던 백모래가 놀라 불현듯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우릴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오르카는 그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엉뚱하고 이상한 인간이라는 인상도 잠시, 저를 죽일지도 모르는 살인마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빅터를 등으로 가렸다. 하지만-
풉,
“무서워할 거 없다니까.”
-그래도 좋은 형이네.
남는 것은 짧은 웃음과 의미 모를 칭찬. 분명 나쁜 사람인데, 그런데….
“뭐야, 언제 가져간 거야? 말이라도 하지. 내가 더 안 줄 것 같았어?”
“웅? 그냥.”
“알았어, 알았어. 오르카도 더 마실 거야?”
“아, 네….”
“그래도 거기서 끝이야. 이제 저녁 먹어야 하니까.”
응!
그 잠깐의 대치가 있었단 걸 알기는 하는지. 빅터는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메두사의 쓰다듬을 받았다. 오르카는 어쩐지 힘이 빠져서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으련만.
콰앙,
“빅터!”
딸그락,
“빅터… 또 문손잡이 부쉈어?”
“으응, 일부러, 는 아닌데….”
쨍그랑!
“안 다쳤어? 조심하라니까.”
“와안-전 괜찮아!”
빅터는 난데없는 사고뭉치가 되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단단한 유리 말고는 부술 것도 없던 텅 빈 격리실에서 갑자기 이것저것 장애물이 많은 저택에 들어왔으니. 아니, 그 유리마저도 가볍게 부술 수 있는 빅터였으니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오르카는 이해했다.
“또야? 빅터는 조용할 날이 없네~”
하지만 소파 한 가운데서 어디서 왔는지 모를 고양이나 만지고 있는 백모래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오로지 오르카만의 몫이라….
“응, 여기 어려워.”
“격리실이랑 많이 다르긴 하지. 그때도 부쉈어?”
“? 형아랑 있으니까….”
“오, 사이 좋네.”
자꾸 마음을 졸이게 되는 것이다. 오르카는 이걸로 몇 번째인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메두사를 따라 설거지를 했다. 사실 직접 손에 물을 묻히는 것은 아니고, 그릇을 닦는 정도였지만 그마저 빅터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릇을 씻는 시간보다 깨진 그릇을 수습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게 뻔하니까.
그 와중에 백모래와 빅터는 여유롭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글을 배우고 있기도 했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오르카와는 달리 정말 나이가 어린 빅터는 학습 능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으나, 이미 말을 하니 그마저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빅터가 정말 연구소에 박혀 있던 4살이었다면 당장 유창한 문장을 만드는 것만도 힘들었겠지. 하지만 이미 몸만은 성인인 빅터는 들은 말을 곧잘 따라 하는 천재 아닌 천재였다. 그래서… 백모래는 재미있어했다. 빨리 배우니 가르치는 맛이 있다나.
“…”
사실 그것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는데, 오르카가 빨리 배우는 것에는 공포가 한몫했다는 것이다. 혹시나 빨리 배우지 않으면, 심기를 거슬리면… 따위의 걱정에 다급하게 암기한 것이다. 정작 메두사도 그 백모래 앞에서 긴장을 풀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일은!”
“네?”
“?”
“응? 우리 다른 거 해?”
그런 오르카의 상념이 끝나고 저녁 식사의 뒷정리까지 끝낸 후, 네 사람은 한자리에 모였다. 흔한 풍경이었지만, 백모래가 뭔가 말할 게 있다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셋 중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당연히 남은 하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살인? 강도? 방화? 어느 쪽일지도 모르면서 상상력은 풍부했던 오르카는 제일 먼저 백모래의 살인과, 남의 집을 뺏는 도둑질과, 연구소 때의 방화를 떠올렸다.
“내 사랑을 만나러 갈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소리다.
결국 메두사는 설명을 요구했다.
“사랑… 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요? 이 근처에 있어요?”
“응, 당연히 찾았지! 사실 보자마자 뭐 하는 앤지는 알았어. 군복을 입고 임무를 하고 있었거든.”
애?
오르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백모래의 사랑이라고 했고, 백모래는 어딜 봐도 성인인데… 그 상대에게 ‘애’라는 호칭이 과연 걸맞은가? 나이 차 같은 걸 생각하기엔 아직 어렸던 오르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빅터는 더했다. 그리고 심하게 단순했던 그는…
“애? 몇 살이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에 대한 백모래의 반응은 더 환장이었다. 메두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빅터는 손가락을 씹으며 한참 누나네… 같은 소리를 던졌다.
“음- 한 12살? 사춘기? 쯤 되지 않으려나. 확실한 건 몰라.”
“그… 혹시 제정신이세요?”
-그리고 그것은 메두사가 백모래를 완벽히 하얀 찐따로 보게 된 계기였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만났을 때 얘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그 애는… 사랑할 수밖에 없어.”
아, 너희가 빠지면 안 된다?
오르카는 그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빅터도 뭣도 모르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그에 속이 답답해지는 것은 메두사뿐이었다. …사실 오르카도 정상인 축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고민했다.
“하아, 일단 알았어요. 그런데 장 좀 보고요. 먹을 게 다 떨어져서…. 혹시 현금 있어요?”
“아- 아침부터 가려고 했는데. 응, 현금은 안방 금고에 있을 거야. 옛날 사람이었나 봐. 현금을 모셔 뒀더라고.”
“그럼 점심 먹고 찾아가죠. 과자라도 들고 갈까요? 애면 좋아할 것 같은데.”
“좋은 생각!”
결국 다음 날의 일정은 그렇게 정해졌다. 아침부터 글을 배운 뒤, 적당히 돈을 챙겨 장을 봐오고, 점심을 해먹은 뒤 백모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백모래의 상대를 찾아간다는 게 참 이상하고도 기묘했지만, 오르카는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빅터는 아예 궁금했는지 백모래에게 ‘사랑이 뭐야?’, ‘어떤 사람이야?’ 따위의 질문을 하다 ~위대한 첫 만남의 대서사시~를 듣고 있었다.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고, 그냥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정말로 백모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었다. 오르카에게 백모래는 아직 무서운 살인자였으니까.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애절한 사랑을 받는다고 하면 그래도 마음의 거리가 좁혀질 것 같았다. 아니 뭐, 그래봤자 살인자이긴 하지만….
그런 오르카의 기대 때문일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빅터, 오르카. 이제 장 보러 갈까?”
“저희만 가요?”
“응. 보스가 대체 어디 간 건지 알아야 말이지. 참….”
물론 그 전의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벌써 이 집에 머문 지 일주일. 남아 있던 식자재로 일주일을 어찌저찌 버틴 네 사람은 이제 매끼 참치 캔이나 씹어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된 것이다. 물론 메두사가 하는 밥도 그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쨌든 국물 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그들은 필히 장을 봐야 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시골의 작은 슈퍼마켓. 작긴 해도 살만한 건 다 있었다. 메두사는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고, 과자를 고르라며 오르카와 빅터를 풀어주었다.
물론 오르카에겐 어려운 숙제였다. 그들에게 과자래 봐야, 집에 조금 남아있던 작은 박스 몇 개뿐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떤 맛이 나는지 알고 고르겠는가?
“형아, 형아는 뭐 할래?”
“으음, 잘 몰라서.”
“나도 못 고르겠어….”
“포장지가 예쁜 걸로 고를까.”
…따위의 대화를 나누며 난감해할 수밖에.
“거, 형제인가?”
“맞아요!”
“…네.”
그때,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 둘을 형제라 이르며 손짓했다. 그에 오르카는 멈칫했지만, 빅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두사에게 ‘형제’라는 개념을 배운 뒤로 늘 멋대로 오르카를 형이라 부르는 빅터다웠다.
사실, 오르카도 그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다 믿는 것과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 오르카는 그냥, 어제 배운 높임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빅터에게 감탄이나 하기로 했다.
“동생이 부끄럼이 많구만. 여기 와서 과자라도 먹을텨?”
“네!”
그래도 되나?
오르카는 잠시 진짜 그래도 되는지 눈치를 보다가 빅터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작은 몸은 커다란 성인의 몸에 달랑 들려갈 수밖에 없었다….
평상 위는 깔끔했다. 시골 특유의 나무 향과 함께 은박 돗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사실 낮술을 자시고 있던 노인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독해 다른 냄새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 오징어 냄새는 잘 나더라. 어쨌든 모두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 건 확실했다. 옆에 있던 빅터가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잘 나지도 않는 냄새를 애써 맡아보고 있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얼큰히 취했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노인은 가판대에서 자꾸만 뭘 꺼내고 있었다.
“요 며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름은 뭐여?”
“빅터요!”
“…오르카요.”
“빅, 뭐? 요즘 애들 이름은 참 모르겠다니까. 됐고 이거나 좀 골라 먹으라. 뭘 어떻게 살았길래 이렇게 다 큰 애가 과자도 모르고 살어.”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살았습니다… 라는 대답을 할까 싶어, 오르카는 빅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빅터는 그랬던 자신의 위치와 과거를 헤아릴 정도로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안심하기도 잠시, 그 뒤로 아찔한 질답이 계속되었다.
“부모는?”
“없어요!”
“챙겨주는 사람은, 그것도 없나?”
“있어요! 지금 장 보러 왔어요!”
그 과정에서 오르카는 메두사가 조금 보고 싶어졌고,
“느 학교는 다녔나?”
“아니요!”
“그럼, 거, 홈스쿨-링? 그거냐?”
“몰라요! 집에서 배워요!”
“그럼 맞네.”
이제 노인은 빅터를 조금 안쓰러운, 뭔가 모자라는 애로 보는 기색이었다.
“여기 이사 온 지는 좀 됐나?”
“어… 일주일?”
“얼마 안 됐네. 일 없으면 종종 오라. 동생이랑 같이. 으이?”
“네!”
빅터는 아직도 노인이 말하는 ‘동생’이 오르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기색이었다. 오르카 역시 그것을 정정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과자를 씹었다. 눈치를 보아, 메두사는 가판대 앞에서 무슨 채소가 있니 없니를 따지며 열심히 식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오르카는 차라리 그쪽으로 갈까 싶어 연신 그를 흘끗거렸다.
“무어, 저 아가씨한테 가고 싶디? 얼른 가봐라. 가서 이 과자 꼭 사달라고 하고, 응?”
“그, 감사… 합니다.”
“인사도 잘하네.”
“!”
저를 향해 뻗어오는 커다랗고 거친 손에, 오르카는 잠시 움찔했다. 그것이 호의만을 품고 다가오는 것이 낯설었고, 고운 손의 연구원들이나 굳은살 박인 군인들의 손과는 달리 나이를 거칠게 먹은 황갈색 손이 어쩌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에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더 조심스럽게 다가와 오르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충격이었다. 오르카는 ‘바깥’의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질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모든 게 따가웠다. 그야, 오르카에게 유일한 바깥사람은 메두사였고, 그마저도 백모래가 들어섰으나 선득한 공포 역시 가져다주었으니. 다짜고짜 저를 부른 노인의 앞에서 바짝 긴장해있지 않은 빅터가 이상한 경우였다.
아니, 이상하지도 않지. 어린아이는 감정에 순수하다. 그것은 곁에서 봐온 오르카가 잘 알았다. 악의에는 무서워서 울었고, 아프면 아프다고 울었다. 체념이나 절망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이, 감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반응했다. 그러니 지금 다가오는 호의에도 그저 좋다고 헤벌레, 경계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것이다.
“역시 여기 있었네.”
“…보스?”
“선생님!”
“형씨가 여 아이 보호자요?”
그런 상념에 젖어있을 찰나, 대뜸 백모래가 등장했다. 수업 뒤부터 자리에 없어 먼저 나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찾아온 모양이었다. 오르카는 이걸 반가워해야 할지, 떨떠름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 그런 걱정과는 달리, 백모래와 노인은 멀쩡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가씨는 안에서 장을 보고 있던데. 안사람인가?”
“아- 안사람은 아니죠.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 그럼 뭐야. 거, 양다리?”
“아니, 그냥 좀- 도와주는 사이겠죠? 제가 돕고, 메두사는 또 저를 도와주고.”
“맞아요! 선생님 도와줘요!”
“그럼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아뇨, 같이 살죠.”
“?”
“형이랑 저랑, 선생님이랑 누나랑 같이 살아요!”
아니, ‘멀쩡하게’가 맞나?
오르카는 이미 저희를 비정상 가족으로 정의내린 듯한 노인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메두사에게 뛰어갔다. 딱히 사정을 둘러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모래, 그리고 그냥 해맑은 빅터는 환상의 조합이자 환장의 조합이었다.
마침 빅터와 오르카를 찾고 있었는지 과자 가판대를 둘러보던 메두사와 바로 마주칠 수 있었던 오르카는, 셔츠를 잡아 매달리다시피 하며 말했다.
“보스가왔는데어떤할아버지랑빅터랑말하는데말하는게좀…”
“잠깐, 오르카, 누가 왔다고?”
“보스요….”
“너까지 보스라고 부를 필요는 없는데.”
그래서 어디라고?
결국 과자를 종류별로 쓸어 담다시피 한 메두사는 빠르게 결제를 마치고 밖으로 향했다. 백모래가 노인을 죽이는 사태가 발발하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에 한숨을 쉬어야 할까. 오르카는 머리를 부여잡은 메두사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어? 메두사! 당연히 따라왔지~ 설마 나만 두고 가려던 거야?”
“그냥 집에 있지 그랬어요. 어차피 들렀다 갈 텐데.”
“하지만 얘네들은 과자도 제대로 못 고를걸. 나름 도와주러 온 건데.”
아차, 그제야 놓친 점을 발견한 메두사가 오르카를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올렸다. 오르카는 그 짧은 시선에 당황과 미안함이 왔다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은데, 별거 아닌데. 오히려 과자를 고르기는커녕 얻어먹기나 하고 있었던 터라 양심이란 것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 메두사는 벌려진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일단 가요. -할아버지, 애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아이, 잘 왔소. 젊은 처자가 그렇게 살면 안 돼. 애가 둘이나 딸렸으면 좀 괜찮은 남자를 잡아야지.”
“에, 별로 바라지도 않고 그래도 저 정도면 괜찮-”
“괜찮기는 무어가! 작은 애는 아까 손 올리니까 움찔하더만, 네가 한 짓 아냐?!”
큰 소리가 나자, 빅터는 움찔하더니 슬쩍 오르카 곁에 숨었다. 숨는다고 숨어질 크기가 아닌지라 결국 쭈그려 앉은 다 큰 성인의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쳐 주자고, 오르카는 생각하며 등 뒤로 그를 숨겨주었다. 앞에서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자자- 진정하시고. 애들은 전에 있던 곳이 안 좋은 데라서 그래요. 지금은 잘 지내려고 하고 있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고….”
“거, 됐소. 앞으로 애들 잘 챙겨주기나 하라고. 애가 못 먹어서 비쩍 골았더만. 내가 지켜볼라니까.”
“하하…”
메두사는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종결지었다. 장 본 물건은 빅터가 들고, 메두사는 오르카와 빅터의 손을 한 쪽씩 잡아주고…. 그렇게 짐을 추스른 뒤 노인에게 인사한 세 사람과 헐렁하게 먼저 앞서 걸어간 한 사람이 기묘한 일행을 이루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하… 거길 이제 어떻게 가요. 보스, 대체 말을 어떻게 했길래 저러는 거래요?”
“몰라, 난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러던데?”
“그 솔직하게 가 문제죠! 우리 중에 솔직하게 말하고 다녀서 될 사람이 어디 있는데요.”
“하지만, 나 거짓말 못하고- 귀찮잖아.”
문제가 되면 죽이면 되는걸.
그 대사 한 줄로 순식간에 차가운 분위기가 지나갔다. 메두사는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오르카 역시 침을 삼켰다. 빅터만 그사이에 껴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커다란 은회안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나도 그러고 싶다, 고 오르카는 잠시 생각했다.
“뭐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널 보고 싶어서….”
으웩, 보라색의 고양이 혼혈 여자애와 백모래가 만나는 장면을 보며 헛구역질하는 메두사 옆에서, 오르카도 덩달아 얼굴색이 죽었다. 과장해서 오르카 나이대쯤인 여자애를 좋아하는 백모래라니, 이걸로 백모래는 두 사람에게서 이상함을 +1 스텟 얻었다.
“잘 부탁한다고? 이건 과자? 그래, 받아주지!”
“응!”
“이름이 뭐야?”
“빅터! 누나는?”
“뭐야, 왜 누나래? 우리가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 와중에 메두사가 떠넘긴 과자를 잔뜩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간 빅터는 의문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야, 12~14살 나이대의 청소년에게 다 큰 성인이 형, 누나라고 부르는 건 이질감이 들겠지. 오르카는 그가 조금 걱정됐다.
백모래가 설명하기로, 이곳은 용병부대였다. 퇴직한 용병이 사 모은 혼혈들로 구성된. 그러니까… ‘대장’ 밑에서 굴려지고 있는 작고 어린 나이의 혼혈 용병 부대라는 소리다. 오르카는 혼혈을 대상으로 실험하던 연구소와 비슷한 곳이 또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그래도 연구소보다는 사정이 낫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백모래의 사랑이 연구소의 소장을 죽인 거랬지.
혼혈을 착취하는 소장을 죽인 것이 또 다른 착취 조직인 용병 부대의 혼혈 용병이라는 것이 기묘하다. 혼혈이 내린 형벌 같으면서도, 정작 그 형벌조차 결코 자유롭지 않지 않은가. 그쯤 생각이 진행되었을 때, 오르카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메두사의 손을 놓고 빅터에게 다가갔다. 빅터에 대해 해명할 생각이었다.
“형, 누나가… 맞아요. 빅터는 4살이에요.”
“뭐? 이렇게 큰데?”
“아, 그 연구소에서 왔다고 했지? 신기하네.”
“몸만 자란 거야? 아님 정신이 오락가락한 거야? 신기하네.”
“확실히 XX년생입니다….”
호박색 눈자위의 눈에 아래 뱀 비늘이 있는 혼혈, 무당벌레 혼혈, 다람쥐 혼혈… 아주 다양한 혼혈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언뜻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오르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이 용병대의 대장이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누구야?”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소개. 연구소 출신이고, 최근에 탈출했고, 같은 동료인 메두사, 오르카, 빅터… 많고 지루한 대화 동안 빅터는 아이들 사이에 낑겨 있었다. 지루한 어른들의 얘기 같은 것보단 같은 애들 사이에 낑겨 있는 게 더 좋은 모양이었다.
“야, 저 형아 나만 좀 이상한 거 같냐?”
“어. 암만 봐도 사랑에 빠진 눈이야.”
“맞아, 선생님은 저 누나를 사랑해서 찾아온 거랬어!”
“변태네 변태.”
“사랑하면 변태야?”
“아니, 얘 진짜 4살이야?”
실험은 뻥이고 좀 모자란 20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에, 오르카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를 흘긋거렸다.
“형아? 여기 와!”
그때, 몸이 훅 들려지는 감각과 함께 오르카가 하늘을 날아 아이들 사이에 안착했다. 오르카는 이제 하도 익숙한 감각에 그저 포기하고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렇게 홀랑 내려놓아진 오르카는 대뜸 귀여움을 받아야 했다.
“너 눈 되게 귀엽다.”
뱀 특유의 가느다란 동공과 빨간색 흰자위를 갖고 있는 뱀 혼혈, 아스퍼가 말했다.
“범고래 무늬 나만 귀여워?”
무당벌레 장신구를 달고 있는 무당벌레 혼혈, 당아가 말했다.
“스텔만큼 귀여운 애는 처음인 것 같은데.”
“야, 우리가 타깃 말고 또 만난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래?”
이어서 마지막으로 다람쥐 혼혈, 달래까지… 오르카는 예상치 못한 호의에 화들짝 놀라 빅터 뒤로 숨고 말았다.
“난 안 귀여워?!”
그리고 정말 억울하다는 듯한 빅터의 외침. 결국 다 함께 푸하하하- 웃는 소리가 산턱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둥, 너도 귀엽다는 둥의 달램을 받고 나서야 빅터는 불만스레 입술을 비죽이던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간에, 빅터와 오르카는 제법 아이들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함께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며 손을 끌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어른 셋과 혼혈 아이 하나는 계속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분의 반가움과, 두 사람분의 아슬아슬한 사회생활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근데 저 누나 이름은 뭐야?”
“아, 쟤?”
“랩터야, 랩터. 여기 스텔이랑은 남매!”
“남매? 남자 형제?”
“푸… 푸흡,”
아, 랩터구나. 그래, 랩터….
오르카는 어쩐지 그 이름을 아주 오랫동안 곱씹고 있어야 했다. 백모래의 사랑. 메두사와 빅터, 오르카가 살아남은 이유이자 의무. 그렇다면 이 네 사람의 관계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오르카는 그들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만 같은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목숨을 가지고 위협한 관계라는 게 그렇다. 어떻게 정이 자라고 신뢰가 오가는 관계를 쌓겠는가. 오르카는 앞으로 그럴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사랑이 순탄치만은 않다면, 또 다를 얘기지만.
“오르카, 뭐 해! 술래는 빅터야!”
“나 백까지 세면 돼?”
“응응, 범위는 이 공터 주변인 거다?”
“못 찾겠다 꾀꼬리! 기억했지?”
아, 오르카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후다닥 달려갔다. 숨바꼭질만 몇 판을 했는지, 그 바람에 아까까지의 생각은 휘발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몸집이 커서 금방 발견되고야 마는 빅터는 깍두기 신세가 되었다. 오르카는 빅터를 내내 끌고 다니며 숲을 휘적였고….
그런 날은 계속되었다. 아주 길게.
그렇게 지나간 몇 달, 일상이 정착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지나갔다.
“잘 있었어? 이거 선물이야.”
“모래 오빠? 이런 거 없어도 된다니까.”
오전 중에는 백모래에게 수업을 받는다. 아직도 빅터의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도리어 오르카가 왜 백모래를 ‘보스’라 부르는지 알 수 없다는 투로 물어본 적이 있으나… 오르카는 차마 그가 선생님보다는 우리의 목숨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메두사 님이… 그렇게 불러서.’
정도의 대답을 할 수밖에.
“자자, 그럼 빅터 차례!”
“나 이번엔 맞춘다!”
“그래그래~”
아, 말을 잇자면… 오후에는 랩터네를 찾아와 아이들과 노는 시간을 가진다. …사실 랩터와 백모래가 놀고, 나머지 애들끼리 뭉쳐있는 시간이지만. 그사이에 낀 메두사는 이제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있다면, 용병 아이들의 노는 방식이 제법 거칠다는 것이다.
피슉, 탁!
“오! 이번엔 제법 가까웠다.”
“이제 잘하는데, 빅터?”
“그치~?”
훈련, 대련, 또 훈련, 하다가 수다를 떨거나 숨바꼭질. 이게 아이들의 일과 전부였다. 아, 가끔 책을 읽는 걸 빼먹었던가? 스텔과 빅터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아이들이 유일하게 가만히 있는 시간이었다. 유일하게 랩터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
하지만…
“…”
그럴 때면 백모래의 섬뜩한 오렌지빛 눈과 마주쳐야 했다. 오르카는 다시 한 번 마주친 눈을 보며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곤 고개를 돌렸다. 빅터는 아예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마침 눈이 마주친 아스퍼가 오르카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무슨 일… 빅터?”
“여기 와서 너도 낙서해. 애들 다 하고 있어.”
“이거 유성이라는데….”
“에이, 지우는 거야 다 있지. 나중에 우리가 지워주면 돼!”
이미 빅터의 얼굴은 콧물 자국이며, 눈탱이 밤탱이 같은 것들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곳곳에는 ‘바보’, ‘혼혈 아님’, ‘잠탱이’ 같은 말도 쓰여 있었다. 강권에 못 이겨 검은색 유성펜을 손에 든 오르카의 손이 허망하게 공중을 맴돌았다. 혼혈이 아니라는 게 아이들 사이에서 장난스런 욕임은 둘째 치고, 바보 멍청이 같은 욕을 오르카가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오르카가 쓰고 만 것은 고작 한 마디였다. 그마저 빅터가 매번 듣고 싶어 했던 말을.
‘귀여워’
“너도 엔간히 팔불출이다 야….”
그것에 달래가 질색하자, 조금 머쓱해진 오르카는 펜을 내려놓았다. 더 쓸 말도 없었고, 쓸 마음도 없으니 더 이상 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에 당아가 훌쩍 펜을 가져가 나비를 그리고는 빨간색 펜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칠도 한다.
나중에 씻을 때 꽤 힘들겠다. 그리고 그걸 씻어주는 것은 높은 확률로 오르카가 될 것이다. 결국 왁! 하는 소리와 함께 깨어난 빅터와, 와르르 웃고 마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르카는 먼저 세정제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르카, 이거 찾아?”
“아, 네…. …!”
그때 마주친 것은 랩터였다. 어쩌다 단둘이 남게 된 오르카는 잠시 주변에 백모래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살펴야 했다. 그마저도 참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랩터 역시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꼬았다.
“뭘 그렇게 긴장해?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자, 이거 찾는 거 맞지?”
“…감사합니다.”
문득, 오르카는 제 행동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랩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린 것만 몇 번인가. 제 친구들과는 퍽 친하게 어울리는데 랩터만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겐 꽤나 불편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생각의 가지가 나아간 오르카는, 소중하게 세정제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뭐? 뭐가?”
“보스의 상대… 라는 생각에, 조금. 어색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그 말에, 랩터는 얼굴이 펑!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아니, 그건! …같은 소리를 해도 그리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 역시 랩터도 영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역시 우리가 백모래에게 붙어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지금도 받고만 있고….
-맙소사, 그래. 그들은 백모래가 힘쓰는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교육만 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 새삼스러운 사실에, 오르카는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하니 섰다. 머릿속에 남아도는 생각의 대부분은 ‘이제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정도였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애초에 목숨을 위협해서 그들을 데려온 것 치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집안일 정도? 그마저도 그들이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차라리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 있을 바에는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얘!”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나 빅터나, 가만 보면 생각이 너무 많다니까. 얼른 가야지.”
이제 나랑 어색하게 지내지 말기다?
그에 오르카는 어색하게 고래를 끄덕이며 랩터의 뒤를 따라갔다. 나가보니 빅터가 후다닥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 팔에 잡혀 있는 애들을 보니… 즐기고 있었다. 빅터 딴에는 잡고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겐 그저 놀이기구처럼 느껴진 듯했다. 꺄륵거리는 소리가 바위투성이의 공터를 울렸다.
어쩐지 도망갈 길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재밌겠다! 빅터, 나도 해줘!”
“…재밌어?”
이게 아닌데,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빅터의 얼굴에는 아직도 낙서가 남아있는 바람에 영 우스꽝스러워서, 오르카는 한숨만 나왔다. 그 사이에 빅터는 이미 랩터를 한쪽 어깨에 들고 나르고 있었다. 교대하듯 내려온 아스퍼는 푸핫, 웃으며 오르카의 어깨를 탁탁 쳤다.
“네 동생 진짜 재밌다. 너랑 다르게 말이야.”
“…너무 괴롭히진 말아 주세요.”
“야, 우리가 뭘? 빅터도 다 재미있다고 어울리는데 말이야.”
“그건, 알지만….”
빅터!
어깨를 으쓱인 오르카는 아스퍼를 뒤로 하고 소리 높여 빅터를 불렀다.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빅터가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일 정도였다. 표범은 고양잇과가 아니던가? 잠시 생각이 딴 곳으로 샜으나, 일단은….
“자, 여기 대야.”
“빅터, 이거 얼굴 밑에 들고 있어.”
“으응….”
“나 참, 이렇게 도와줄 거면 왜 낙서한 거야?”
“랩터, 뭘 모르는구나? 원래 알면서 다 하는 거야.”
빅터의 얼굴에 수놓아진 낙서를 지워야 했다. 오르카는 거품 낸 세정제를 몇 번이나 빅터의 얼굴에 펴 발랐다. 물이 떨어지도록 대야를 밑에 놓기는 했으나,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고 투명한 잉크는 어쩔 수 없어, 하얀 후드를 적시고야 말았다. 오르카는 잠시 메두사를 걱정해야 했다….
“옷이 다 젖었네.”
“우리 옷은 안 맞을 텐데. 어떡하지?”
“…대장 옷은 어때?”
“아뇨, 그렇게까진…. 그냥 가도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두고 보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푹 젖은 옷을 입은 빅터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대장 옷도 우리가 빨지 않느냐. 그래도 들키면 어떡할 거냐. 남은 옷은 넉넉하니 괜찮을 거다…. 따위의 얘기를 하던 찰나, 결국 먼저 뛰쳐나간 달래가 그들과 같은 디자인의 군복을 가져왔다. 당연히 사이즈가 훨씬 컸다.
“자! 이거 입고 집에 가. 그러다 감기 걸려.”
사실, 몸 자체는 건장한 성인 그 자체인 빅터라 그리 쉽게 감기에 걸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이들은 다정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빅터는 ‘정말로’ 4 살배기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게 왜인지 신기해서, 오르카는 그들 곁에 섞여 빅터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야 말았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대장은 우리 옷 한 벌 사라져도 신경 하나 안 쓸걸?”
“잃어버린 줄 알고 새로 사거나 하겠지~”
“…뭐, 괜찮을 거야. 들키면 뭐 그깟 거 성질 좀 받아주면 되겠지.”
그래서 랩터가 뭔가 감당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오르카는 눈치채지 못하고야 말았다.
다음날 아이들의 얼굴이 깔끔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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