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2. 빅터와 나비머핀 (1)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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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달이 또 지났을까, 백모래는 그들을 불러 모았다.

 

“새로운 동료를 구할 거야!”

“? 동료는 여태까지 구해왔잖아요. 또 무슨 특별한 게 있나요?”

 

그리고 그것은 매우…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여태 백모래는 다양한 범죄조직에서 다양한 멤버를 동료로 포섭해왔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설득인지, 폭력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후야였는데, 거의 볼 일은 없지만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유일한 동료였다. …굳이 역할을 따지자면, 운전을 맡은.

 

“당연하지~ 이번에는 범죄자가 아니거든!”

“이번엔 또 무슨 소리죠? 정보는 있고요?”

“당연히 알아봤어! 메두사가 알려줬잖아.”

 

연구소랑 정보를 교환하던 그 사이비 교단 말이야.

아, 메두사는 짧은 침음을 내며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카는 모르는 얘기였기 때문에, 그저 어른들을 올려다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빅터 역시 옆에서 그림이나 끄적이고 있었다 엉망인 크레파스 솜씨가 하얀 도화지 위를 더럽히다시피 하고 있는 데다가… 노랑, 검정, 흰색이 손끝에 물들고 있었다.

 

결국, 오르카는 드물게 먼저 질문했다.

 

“저…. 동료가 더 필요한가요?”

“아, 너희들은 모르지. 거기엔 나이를 어리게 해주는 특기자가 있거든.”

“특기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상처를 정화해줬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을 특기자라고 해. 뭐, 난 정확히 말하자면 체질이지만~”

 

아하,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메두사 님도 옷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었지… 그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특기일 줄은 몰랐다. 오르카는 혹시 제게도 특기가 있나 생각해보았으나 기억나는 게 영 없었기 때문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괜찮아, 오르카. 어떤 사람들은 특정 계기로 능력을 깨우치기도 하니까.”

“메두사 님….”

“-자, 어쨌든!”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백모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실험을 받아서 오래 살잖아.”

“그쵸.”

“근데 랩터는 아니고.”

“그거, 설마….”

“정답!”

 

오르카는 오오, 입을 벌렸다. 하긴, 한쪽이 먼저 죽으면 슬플 것 같긴 했다. 함께 오래오래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게다가 딱히 양심에 찔리지도 않는다. 사이비 교단에서 구해오고, 특기자에게 한 번 부탁해서 될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오르카는 드디어 할 만한 일이 주어졌다는 생각에 새삼 각오를 다졌다.

 

“그 김에 사이비 교단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

백모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메두사는 그게 영 밉상이라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메두사는 가면 갈수록 백모래를 영 구린 눈으로 보는 일이 많아졌다. 사실 오르카도 처음의 살인자라는 이미지가 많이 옅어졌다. 그게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그 자체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인지… 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방법은요?”

“쳐들어간다!”

“이 사람이 진짜,”

 

결국 최초의 주먹이 날아갔다. 때린 메두사도, 바라본 오르카도 흠칫했으나 백모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야야….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에 되레 당황한 건 오르카였다. 물론 메두사도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당황하고 있었고. 그를 앞에 두고 백모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계획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신도로 잠입해서 내부에서 부수는 거지. 특히 오래 살아가는 걸 탐하는 집단에서 난 꽤나 알아주지 않겠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건 모든 인간의 꿈이잖아. 안 그래?

그에 빅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한 말다툼이 한 차례의 주먹질 끝에 마무리되는 모습이 퍽이나 흥미로운 듯했다. 오르카는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으나, 이미 늦은 듯해 보였다.

 

“하아….”

 

메두사가 안도의 한숨인지 한심함의 한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한숨을 깊게 내쉬고, 다시 대화는 재개되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죠?”

“오늘!”

“잠깐 한 번 더 맞죠.”

“잠, 잠깐-”

 

그리고 잠깐 구타 소리. 아까보다 더한 주먹질에 오르카는 빅터의 눈을 가려주었다. 메두사의 심정이 이해가 충분히 이해됐지만, 또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오르카보다 어린아이에게 폭력의 현장을 보여주기는 좀 그랬다. 빅터는 좀 버둥거렸으나, 오르카의 손에 얌전히 잡혀 있었다. 힘으로는 오르카가 이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백모래가 머리에 혹을 네댓 개는 달고 나서야 끝날 수 있었다. 교단의 위치는 알고 있으니 찾아가면 받아줄 거고, 당장 오늘부터 잠입한다는 얘기를 태연하게 이어 나간 백모래는 말이 나온 김에 가자며 바로 길을 나섰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마이페이스였다.

 


 

…그게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오오, 아름다워! 이렇게 선명한 은회안이라니. 이미 있는 흑표범 혼혈에 비해 다른 특징이 없다는 게 아쉽군. 그래도 다 큰 성체라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은 무난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이 범고래는 어떻고? 머리카락에 무늬가 선명해!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겠어. 그래, 그게 중요하지. 어떤 강력한 혼혈인지를 알아보는 것!”

 

다만, 문제가 된 것은 욕심 많은 주교다.

 

“이방인 출신이지만 이 정도면 봐줄 만하지. 곁에서 나를 모시려무나. 아이는 아직 어리니 시중을 들고… 표범 혼혈이랬지? 그럼 힘 좀 쓸 테니 넌 경호로.”

 

이 교단은 한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교단이었다. 주교님이 덕이 높은 자를 우선으로 회춘의 축복을 누리게 해준다고 했던가. 다만 그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때까지 성심성의껏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빅터와 오르카는 애매한 합격점이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것은 일개 장식품의 위치였으니까.

두 사람은 주교가 살갑게 다가와 나눠준 차를 마시며 가만히 평가를 들었다.

 

“경호가 뭐예요?”

“흐음, 정신이 약간 모자란가? 괜찮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니. 이제부터 내가 말할 때까지 절대 입을 열지 말아라. 알았지?”

 

빅터는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카는 조금 발끈했으나, 잠입해 있는 입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될 것 같아 빅터의 손을 꼭 잡았다. 메두사를 두고 온 터라 이 공간에는 주교와 형제, 셋뿐이었다. 물론 문 밖에는 따로 경호가 있는 모양이지만.

아, 백모래는 무사히 간부에게 딸려갔다. 그의 말대로 정화 능력은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 것 같았다. 특기를 말하자마자 특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 그 범위와 강도를 물었으니. 그에 백모래는 당당하게 말했다.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일 거라고. 아마 지금쯤 특기의 실험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실, 오르카는 그걸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아직 백모래의 특기의 대단함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으니까. …아니, 제 썩어들어가는 팔을 치유해준 것은 당연히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로는 정확한 위력을 알 수 없지 않은가. 오르카는 그게 궁금했다.

 

“자, 옆에 서 있으렴. 그래, 그렇게. 나중엔 차를 따라야 한다. 잘 할 수 있겠지? 원래는 미리 교육 받게 해야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네, 네….”

 

고작 열 살배기 어린애한테 뭘 바라는 걸까. 오르카는 몇 가지 차를 따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봤으나 영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주교님. 티오 간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도록 하게.”

 

저 사람들은 주교의 뭘 보고 충성하는 걸까? 오르카는 신앙심의 대단함을 느끼다, 주교의 손짓에 허겁지겁 다가가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에 간부라는 사람이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뱉었다.

 

“오오! 딱 봐도 알겠군요. 범고래 혼혈이 아닙니까?”

“큼, 그렇네.”

“그렇다면 신체 능력도 확실할 테니, 조금만 더 크면 경호로도 쓸 수 있겠군요. 외모도 혼혈답게 출중하고.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허허.”

“별거 아니네. 이들이 스스로 날 모시겠다기에 받아주었을 뿐이지.”

“역시! 모든 이를 감화시키는 주교님답습니다.”

 

양껏 아부하는 간부와 그에 으쓱거리는 주교. 오르카는 처음 보는 관계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게 부패했다는 걸까? 빅터는 그런 대화에 관심이 없었는지, 바닥의 금이나 새고 있었다. 오르카는 심하게 바닥을 노려보는 빅터의 옆구리를 조금 찔렀다.

 

“저,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저희가 선물해드린 혼혈 말입니다.”

“아, 그 나비…. 시종으로 일하고 있네. 날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이 교단원으로서의 최고 기쁨 아니겠는가?”

“아이, 아무렴요.”

 

그때, 그를 제외한 다른 혼혈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그렇게 혼혈을 좋아하는 것치곤 빅터와 오르카 주변에 다른 혼혈이 없었던 것이다. 어딘가 모두 모여있는 걸까? 아님, 이상하지만 파견이라도 간 걸까?

 

“그런데 말이네….”

“예?”

“원래 그렇게 우화가 늦나? 아직도 애벌레 상태라 말이네.”

“아, 그… 나비 생애가 아니라 실제 그 아이의 생애에 맞춰서 변하는 게 아닐지.”

“그렇다면 이제 10년은 더 남은 거 아닌가! 게다가 더 나이가 들면 아름다움이 덜 할 테니….”

 

그 아이도 몇 년 뒤에는 바로 장식장으로 가야겠어.

그에 간부가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나 자신이 주교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불안한 기색이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충심이 아닐 수 없다. 오르카는 그에 신경 쓰기보다는 ‘장식장’이 뭘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어째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빅터가 반대로 오르카를 찔렀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구. 릴. 것. 같. 아.’

 

그런 입 모양으로 똑똑히 말하는 것이다. 오르카는 정말로 피식 웃어버리려는 것을 입을 앙다물고 참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지만 소리 내어 웃는다면 똑똑히 들릴 법한 위치였으니.

빅터는 형을 웃긴 것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오르카는 그걸 귀엽게 보고 넘기기로 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럼, 주교님 다음번에는 저희 보스가…”

“그래, 히어로라고 했던가? 오래 열심히 일해야지. 순번을 앞으로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하!”

“아이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길고 내용을 알 수 없는 대화가 끝난 뒤, 간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침 문을 열고 있던 주교가 그 경망스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가? 교양 없이….”

“주, 주교님, 봐야 할 것이,”

 

그리고 이어지는 속삭임. 눈을 크게 뜬 주교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그 육중한 몸에 걸맞지 않은 속도였다. 오르카는 짧게 감탄했고, 졸지에 둘만 남은 상황에 당황했으나 빅터는 살판났다는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형아, 여기 반짝이는 게 가득해!”

“보석인가 봐.”

“이게 보석이야? 색이 엄청 많아.”

“원래 보석은 종류가 다양하다고 했어. 저게 루비…? 고, 이게 사파이어고, 이게 에메랄드….”

 

주교도 자리에 없고, 딱히 움직이지 말라는 주의도 없었으니 오르카도 슬쩍 빅터의 뒤를 따랐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아이라,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주교의 방은 휘황찬란했다. 좋은 원목으로 깎았을 것이 분명한 가구에, 부드러워 보이는 모피가 깔린 소파, 장식장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가득했다.

 

“이거 가져가면 안 돼?”

“도둑질은 안 돼, 빅터.”

“응.”

 

그 와중에 빅터는 그게 탐이 난 모양이었으나, 오르카는 단호했다. 오르카는 여러 동화책과 소설들을 읽으며 습득한 도덕과 윤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빅터도 동화책에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말을 보긴 했는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돌아보면서 이미 흥미를 잃은 것도 있어 보였다.

결국 재미가 없어진 빅터는 히잉거리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 나 들어갈래!”

“어, 빅ㅌ-”

 

덜컥,

그리고 오르카가 뭐라 막을 새도 없이, 빅터는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유난히 밝은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에 적응하기 위해 실눈을 떠야 했다. 그리고 그에 익숙해졌을 때 보인 것은…

 

“이거, 뭐야?”

“…”

 

새하얀 시체들이었다. …정확히는 혼혈들의.

 

“어머, 오르카?”

 

그때,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본명 신도들의 방에 두고 왔다고 생각한 메두사였다. 대체 홀로 떨어져 있던 사람이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걸까? 그런 생각도 하지 않은 빅터는 냅다 메두사에게 달라붙었다. 오르카도 그를 종종 따라가 메두사 앞에 다가가 섰다.

 

“메두사 님,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몰래 왔지. 그런데 중간에 길을 잃어서. 너희는?”

“나 경호해!”

“뭐야, 그럼 주교도 지금 있어?”

“아니요, 방금 나가서 저희도….”

“아아, 아까 보스 때문에 영 시끌시끌하긴 하더라.”

 

메두사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빅터는 이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고, 오르카는 그에 메두사에게 더 달라붙었다. 이 ‘장식장’의 진열 물품은…

 

박제된 혼혈들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봐서 좋을 풍경은 아니네. 갈까?”

“자는 거 아냐? 깨울까?”

“아냐, 빅터.”

 

이 아이는 ‘죽음’의 개념을 언제 배우는 걸까. 어미의 죽음조차 그저 부재로 깨달은 아이는 아직도 차게 쓰러져 있는 시체와 잠든 실험체를 구분하지 못했다. 종종 동화책이나 어린이용 소설을 읽으며 오르카에게 ‘죽는다는 게 뭐야?’라고 물어보긴 했으나, 오르카처럼 일종의 공포 버튼으로 받아들이진 못했다.

사실, 모르는 게 정상이다. 평범한 어린아이가 죽음을 진실로 받아들일 일이 몇이나 있겠는가. 해봐야 서늘하다는 온도만이 현실적이리라. 오르카는 꾹 눈을 감으며 빅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칭얼거리던 빅터가 그것에 종종 따라왔다.

 

“와, 여기가 주교 방이야? 이거 가져갈까?”

“!”

“아까 형이 도둑질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때, 주교의 방에 들어선 메두사가 제일 먼저 보석에 눈독을 들였다. 바로 몇 분 전에 빅터에게 도둑질은 안 된다며 엄포를 놓았던 오르카는 메두사의 배신에 그저 입을 뻐끔거렸다. 그래도 오르카와 함께 정상인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메두사는 이제 제법 뻔뻔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쁜 놈 거는 그래도 돼. 어차피 얘도 깨끗하게 번 돈이 아닐 거 아냐.”

“더럽게 번 돈이야?”

“그런 거지.”

“더러운 거면 싫은데….”

“더럽게 벌었다는 거지 돈은 깨끗해.”

“그럼 가져가!”

 

메, 메두사 님…. 오르카는 배신당했다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으나 메두사는 얇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곤 하는 말이,

 

“이제 우리 생활비도 슬슬 떨어지는 걸~ 이렇게라도 충당해야지. 어차피 없어질 곳인데?”

 

쾅!

그때, 어디선가 큰 폭음이 터졌다. 딱 봐도 평범치는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게 전투 신호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희희낙락 보석을 챙기던 빅터는 순식간에 튀어 나가는 메두사와 오르카를 따라 뛰어야 했다.

밖에 나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저 앞의 천장이 뚫려 있었다. 그곳으로 보스가 나왔을 것이 눈에 선해 메두사와 눈을 마주친 오르카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앞을 향해 달렸다. 빅터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일반 신도가 여길 어떻게?!”

“앗, 저 혼혈, 잡아!”

“이 이방인들이…!”

 

당연히 특수복을 입은 경비들이 따라왔고, 주교 밑의 신부도 따라왔으며, 일반 신도도 그들을 잡아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말 그대로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얼굴색이 죽은 오르카는,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메두사도 그리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

 

곤란하기보다는, 무언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빅터, 여기서 놀고 있어!”

“나?”

 

뻐억!

“…살살!”

“응!”

 

와.

오르카는 순식간에 신도들을 막아서서는 깔끔하게 명치를 쳐 기절시키는 빅터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평소에 랩터네 아이들과 놀던(?) 게 곧 대련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지. 그 와중에도 사람 제압하는 법만 야무지게 배운 것이, 제법 신경 써준 티가 났다.

그 애들은 오르카가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할 말은 아니다. 어느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성인 남자가 어디 따라가거나 잡혀갈까 봐 사람 제압하는 법만 야무지게 알려주겠는가?

 

앞에서 풍차처럼 사람들을 막아서는 빅터 덕분에 걸러지는 사람들은 그나마 두 사람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점점 빅터와 거리가 벌어졌으나, 곧 저 멀리서 피 칠갑으로 나오는 백모래가 보였기 때문에 더 걱정할 것은 없었다. 백모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를 안고, 머리에 번데기를 달고 있는 소녀를 달고 여전히 뺀질거리는 낯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다시 합류한 네 사람은 넓은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의자를 몇 개나 쌓아두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겁게 장식된 책장이 있어, 문을 든든하게 막아주었으나…

 

“이익,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필 주교가 거기 있을 건 뭔가.

 

“오, 한 명이네. 그냥 죽일까?”

“그냥 눕히고 나가면 되지, 뭘 죽여요, 애들 앞에서.”

“-너흰 누구냐!”

 

하지만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백모래에겐 죽일까 말까 잠시 고민할 대상 정도였던 것이다. 그 긴장감 없는 분위기에, 주교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사납게 물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오르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의 관계성에는 이름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잠시 고민하고 있자, 번데기 소녀가 그들을 영 못 미덥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르카는 반사적으로 백모래를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관계에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백모래였던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한 가지 이름으로 꽉 묶일 수도, 그저 낱알처럼 흩어질 수도 있겠지. 그리고…

 

백모래는 입을 열었다.

 

“우린… 나이프다!”

 

나이프.

 

“왜 하필 나이프예요?!”

 

오르카는 메두사처럼 우스꽝스럽게 지어진 ‘그들’의 이름에 잠시 유감을 표해야 할지, 아니면 드디어 땅에 발이 닿은 느낌을 기꺼워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일단 메두사는 유감이 많아 보였다. 주교 앞이라는 걸 잊고 백모래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것이다. 그에 백모래는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이것들이… 이게 장난을 쳐?!”

“장난 아니고 진심인데. -이제 슬슬 갈까? 빅터, 오르카랑 이 애 좀 챙겨줄래?”

“응!”

 

그들은, 아니, 이제 나이프는 슬슬 뛰어갈 준비를 했다. 백모래와 빅터 둘 다 짐 덩이를 들고 있으니 주교를 쓰러뜨릴 사람은 메두사였다. 그도 인체실험을 받았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 그럴 수 있을 리가. 오르카는 일단 걱정부터 하고 봤다. 그때,

 

“흥, 너희들이 그냥 갈 수 있을까? 보아하니 동료들인 모양인데…. 이 혼혈들은 이미 독약을 먹었거든.”

“!”

“내가 주는 해독제가 아니면 고통스럽게 내장이 썩어 들어갈걸? 내 모든 혼혈들이 그랬거든. 어리석게 탈출을 시도하다 시체로 돌아왔었지….”

 

오르카는 형제를 주교실로 불러 마시게 했던 차를 기억했다. 그때가 분명했다. 오르카는 어린 자신이 훨씬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빅터를 걱정했다. 빅터는 독이라는 소리에 제법 놀랐는지 눈을 떨고 있었다. 죽음에도 눈 깜짝하지 않는 아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나 우스운 일이지만, 상황은 우습지 않았다.

 

“그러니 ‘그걸’ 두고 가면 해독제를 주지.”

 

아니면 혼혈들을 두고 갈 텐가? 내 도망을 위한 자금이 되어야 하거든.

오르카는 반사적으로 빅터를 꼭 끌어안았다. 저를 욕심내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두고 가라 할 줄은 볼랐다. 더 싫은 것은, 백모래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처우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들의 선택대로 되는 일이 없긴 했지만, 이건….

 

메두사 님이랑 헤어지기 싫은데.

 

툭.

그때, 오르카와 빅터의 어깨를 만지고 지나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먼지를 털 듯 가볍고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오르카는 불현듯 그들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그때도 백모래는 자연스럽게 오르카의 팔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썩어 들어가던 팔을 치유했었다. 치유보다는 정화였겠지만, 어쨌든.

 

“정화 끝.”

“…!!”

“이상한 거 주워 먹으면 안 되지, 얘들아.”

“으응….”

 

지금도 그와 같았다.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지만, 뭐든 썩어 들어가게 만드는 부패의 독은 정화로 사라진 것이다. 오르카는 잔뜩 긴장해있던 어깨를 늘어뜨리고, 빅터의 목을 조르다시피 하던 팔에 힘을 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이 사람도 필요하고 이 애들도 다 내 동료라서 말이야. 두고 갈 수가 없겠네.”

 

좀 지나갈게?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흘렀다. 메두사의 눈짓으로 이미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오르카는 뒷장면을 보지 못했으나, 분명 죽었겠지. 집을 구할 때의 장면이 보이듯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나이프였다. 그래, 우리는 범죄조직 나이프다. 이미 이 일에 한배를 탄. 오르카는 빅터가 달려가는 사이에 한참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여태까지는 단순히 살인자와 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함께하던 희생자 셋이었다. 그렇다기엔 그들이 받는 게 많고, 또 그리 무리하는 일도 없었지만.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 기다란 수식어에서 벗어났다. 범죄조직 나이프가 된 것이다. 메두사는 이미 그 손에 피를 묻혔고, 오르카와 빅터 또한 이미 폭력을 휘둘렀다. 빼도 박도 못한 범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살인자가 ‘동료’라고 말했다…. 이게 되돌릴 수 없는 분기점이지 않았을까,

 

주교는 장난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백모래는 분명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메두사와 빅터, 오르카가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메두사의 폭력에도 눈감아 주었겠지. 빅터의 무례도 넘어가 주었겠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미 동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게 묘했다. 오르카는 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도 정을 붙여야 하는 걸까? …오르카는 그걸 판단하기엔 너무 어렸다.

 

“-의문의 조직이 특기자를 데려갔습니다.”

-‘…! -?’

“저희가 개입할 새도 없이 먼저 행동한 터라…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훨씬 전부터 잠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느린 것들! …! 인상착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남자, 그리고 노란 머리의 여자, 그리고… 혼혈로 보이는 강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우두머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동료의 벤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일단 찍어오도록. …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의 박제도 챙기고.’

 

그러니 저 나무 뒤편에서 그들을 찍는 한 요원을 발견하기에도 너무 어릴 수밖에.

 


 

“아, 살겠다! 정말 차가 있어서 다행이었네~ 역시 후야를 영입하길 잘했어.”

“저 그런 용도인가요?”

“물 좀… 줘….”

“응, 누나. 여기 물!”

“…”

 

나이프는 무사히 아지트에 도착했다. 안겨있던 백발의 노인은 어느새 약간의 하늘색 머리를 보이고 있었으나, 소파에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백모래는 피가 찝찝하다며 먼저 씻으러 들어갔고, 메두사는 어리둥절하게 바닥에 앉아 있는 빅터와 오르카를 보며 저도 앉아 통성명을 시도했다.

 

“이름이 뭐야?”

“…세월.”

“어울리는 이름이네. 너는?”

“전 레이디예요!”

“난 메두사라고 해. 여긴 큰 애는 빅터, 작은 아이는 오르카.”

“앙녕!”

“안녕하세요….”

“아까 본 사람은 백모래. 그냥 보스라고 부르면 될 거고….”

“저는 후야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냥 이동 수단 담당이죠.”

 

어쩐지 레이디라는 아이와 빅터는 텐션이 잘 맞는 것 같다. 오르카는 저와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가 힐긋힐긋 빅터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봐도 신기해하다가 식은 얼굴이었다. 빅터가 좀 깨긴 하지…. 날카롭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얼굴에 어린아이의 말투를 쓰고 있으면 역시 괴리감이 든다.

빅터는 언제쯤 제 나이를 찾아갈까? 오르카는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 외견을 봤을 땐 적어도 18살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빅터의 성격을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의 깨방정한 성격이 어디 가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때까지 내가 옆에서 봐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서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우리는…”

“-그건 내가 설명해줄게!”

 

그사이에 씻고 나온 백모래가 소파 정 한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는 바람에 세월이 휘청거렸다. 메두사는 일단 들어나 보겠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았다. 오르카는 이미 들었던 얘기가 나올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기대했다.

 

부디 정상적인 목표가 나오기를.

 

“너흰… 내 사랑을 도와줘야 해!”

“…네?”

 

하지만 백모래의 행동은 오르카의 예상을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고, 백모래는 변하지 않았다. 레이디와 세월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정말 이런 목적으로 모였다고?’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오르카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렸다. 그때, 빅터가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변태야! 그래서 도와줘야 해!”

“비, 빅터?”

 

너무나 직언이었다. 오르카는 심장이 펄떡였고, 백모래는 상처받았단 얼굴로 슬프게 구석에서 훌쩍거렸다. 분명 ‘변태’라는 단어를 달래에게서 배웠던가…. 미처 빅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오르카는 짧은 후회를 남겼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레이디가 묘하게 납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빅터.”

“에,”

 

그때, 웬일로 메두사가 백모래의 편을 들었다.

 

“그런 얘긴 보스 없을 때 해.”

“그게 더 나빠!!”

 

…아니, 편드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의 상황이 시트콤으로 흘러가거나 말거나 메두사는 부가 설명을 계속했다.

 

“보스가 원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젊게 유지시키는 거야. 우린 인체 실험을 받아서 오래 살거든. 딱히 착취하지도 않을 거고, 그냥 딱 한 사람만 담당하면 돼.”

“오, 교단보다 훨씬 나은 거 아냐?”

“…꼭 그렇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은데.”

 

오르카는 교단으로 가기 전에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월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려지는 병.

어쩌면 빅터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빅터는 영원히 어린 시절을 빼앗긴 것, 세월은 병 덕분에 끊임없이 성장이 반대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둘 다 성장을 갈취당했으니까.

게다가 접촉으로 나이를 교환하는 능력. 하지만 하필 일대일만 가능해서 세월은 상대의 나이를 고스란히 떠맡고 다시 병으로 어려지기를 반복해야 했다. 나이를 준 상대는 다시 나이를 받고자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프는 그의 나이조차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중요 서류에서 고스란히 전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뭐, 보장은 없는 게 맞지. 하지만 너희, 그대로 나가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겠어?”

“…”

“세월….”

 

다시 자리로 돌아온 백모래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오르카는 현실적이고도 잔인한 질문에 침중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다시 신분을 찾는 것도 일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증명하는 것도 힘들고, 어려지는 병에 걸린 채로 사는 건 더 힘들다. 나이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건 어떤 것이며, 그렇다면 어떤 상대와 나이를 교환해야 하는지 그로선 알 수 없으니.

 

“그래, 할게.”

“잘 생각했어. 그럼 너희도 이제 나이프의 일원이다!”

 

백모래는 짝짝짝,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레이디는 이 모든 게 불만인 것처럼 보였으나 세월의 의견에 반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결국 나이프의 수뇌부는 정말로 7명이 된 것이다. 이걸로 정말 되는 건가…? 오르카는 빅터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레이디를 빤히 보다, 익숙하게 빅터에게 끌려갔다.

 

“4살? 진짜? 난 6살인데. 누나라고 불러볼래?”

“응! 그럼 누나 형아 동생이야. 형아가 더 나이 많아!”

“오르카랬나, 몇 살인데?”

“8살!”

“…두 살 차이쯤은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저게 무슨 말이지.

오르카는 식은땀을 흘리며 빅터에게 가만히 안겨 있다가, 빅터의 팔을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실 오르카는 아직 비쩍 골아있어서, 나름 밥은 잘 먹고 자란 레이디와 체격이 같거나 오히려 더 작은 면이 있었다. 그래도 친구 대우를 해준다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레이디는 이 일에 끼우지 말아 주세요.”

“응?”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진 평범하게 학교에 가고, 일반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때, 세월의 조건이 뒤를 이어 들려왔다. 오르카는 귀를 쫑긋 세우며 잘 부탁한다며 내밀어 오는 레이디의 손을 잡았다.

 

학교. 그래, 들어본 적은 있다. 그야, 어린이 소설의 많은 배경이 대부분 학교에서 전개되는걸. 하지만 동시에 그와는 전혀 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공간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빅터만 해도 유치원에 갈 나이고, 오르카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오르카는 그들의 특수성을 잘 알았다.

그런데 레이디가 학교라… 부러움인지 걱정인지 모를 감정이 선연히 피어오른 오르카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백모래의 결정이 궁금했다.

 

“보스, 어떡해요? 괜히 학교 다니다가 우리 얘길 하면…. 여기서 학교 오가기도 힘들고요.”

“그것도 그러네. 그렇다고 여길 떠나는 건 곤란해. 내 사랑이 여기 있단 말이야.”

“그럼…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일에 손대지 않는 걸로는,”

“그건 당연히 괜찮지!”

 

의외라고 해야 할지, 간단한 거절이 나오자 오르카는 잠시 레이디의 눈치를 살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어느샌가 빅터의 목마에 올라 높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레이디가 기어 올라가는 것에 빅터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는지, 한껏 흔들어주며 맞춰주었다.

 

텐션이 맞는다고는 생각했는데, 저 정도인가…? 빅터가 4살이고 레이디가 6살인 걸 생각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르카는 저 아이들과 자신의 나이 차가 4살, 2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그냥 보기엔 한 열 살 정도는 차이 나는 것 같은데.

 

…참 애늙은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방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이 큰 산장에는 빈 방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방을 골라잡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오르카도 끌려가 곁에서 터덜터덜 걸었고, 레이디는 창문 위치가 마음에 안 든다, 벽지가 구리다, 냄새가 난다는 갖가지 이유로 까다롭게도 방을 골랐다. 그냥 제일 처음으로 본 방을 제 방 삼아 오르카와 함께 지내고 있는 빅터와는 여러모로 다른 아이였다.

 

“음… 뭐 만족스럽진 않지만. 여기 할래”

“응응, 누나는 이 방! 세월… 할머니? 랑 같이 지내는 거야?”

“푸핫, 그냥 세월이라고 해. 우리처럼 어려졌다 컸다가 하는데 뭘.”

“응!”

 

오르카는 자연스럽게 존대 생략을 허락하는 레이디를 보며 그래도 되는지를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세월에게 가서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은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이미 메두사와 같이 ‘세월 님’ 이라 칭할 생각이었던 오르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지만, 빅터는 다르니 오르카는 빅터를 불렀다.

 

“빅터, 그래도 찾아가서 허락을 받는 게 좋아.”

“? 응!”

“오르카는 깐깐하네-”

“…딱히 그런 건,”

“그럼 나 간다!”

 

그때, 말을 이을 새도 없이 빅터가 달려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쿵쿵쿵, 심상치 않은 것이 1층에 도착해도 가속도가 붙어 한참을 멀리 달려나갈 기색이었다. 오르카는 덩달아 빠르게 계단을 콩콩콩, 따라 내려갔다. 곧 어른들 사이에 거의 뛰어들 듯 구르는 빅터의 모습이 보였다.

 

“?!”

“빅터?!”

“-세월이라고 불러도 돼요?”

“뭐야, 그거 물어보러 온 거야?”

“그거랑, 방이랑!”

 

응? 눈을 빛내는 빅터 앞에서 세월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빅터가 정말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이라고 생각한 건 오르카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세월 옆에서 백모래는 배를 붙잡고 끅끅거렸고, 메두사도 결국 푹 한숨을 쉬며 웃고 말았다. 두 남자애가 내려오는 동안 사뿐사뿐 걸어온 레이디는 어느새 세월 곁에 달라붙으며 말했다.

 

“2층에 우리 방 정했어.”

“2츠응? 내 관절이 다 나간 걸 알면서….”

“그럼 내가 들어다 옮겨줄게요!”

“맞아. 그리고 어차피 방에서만 지낼 거잖아. 노인일 때는 항상 그러면서.”

 

순식간에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세월은 제 곁에 달라붙은 두 아이가 익숙하지 않은지 연신 몸을 빼려했지만, 이미 빅터는 대답을 들은 듯이 그를 홀랑 들어 안았다. 작은 공주님처럼 안긴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럼 갈게요, 세월!”

“말 놔도 되는, 야, 잠깐!”

“빅터, 출발!”

“응, 갈게!”

“야!!”

 

사람이 추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소란스러워질 일인가. 오르카는 결국 로켓처럼 슈웅 달려가버린 빅터를 보내고 메두사 곁에 앉았다. 이젠 메두사도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 확실히 아이가 많으니까 재밌네.”

 

…그러니까, 여기 보육원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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