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불청객
잭 하울 드림
* 24년도 잭 생일 기념 글.
“잭, 벌써 자?”
10월 11이 끝나기까지 3시간 정도 남았을 즈음. 자기 전 씻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잭은 복도에서 들린 목소리를 듣고 우뚝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아이렌인데. 그 녀석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밝은 대낮에 있는 거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잘 준비하는 밤인데.
제 귀가 잘못된 거기를 바라며 뒤를 돌아본 그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상대를 발견하고 한숨 쉬었다. 아이렌에겐 아직 잘 시간이 아닌 걸까. 교복 차림으로 서 있는 상대의 얼굴에선 졸음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넌 대체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면 안 돼? 너희 기숙사에도 통금시간이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
잭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원래 아이렌은 묘한 포인트에서 겁이 없고, 모종의 사건 때문에 사바나클로 기숙사에 머문 적이 있어서 여길 익숙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역시 이 시간에 남자들 뿐인 기숙사를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이 학교 학생들이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도련님들처럼 신사적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아니라 레오나 씨가 뭐라고 해도 안 듣겠지.’
그러니 뭐가 중요한지 일일이 설명하는 건 그만두자. 안 되는 일은 빠르게 접어두기로 한 그는 일단 아이렌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원하는 바를 이루면 떠날테니, 입씨름 하는 쪽보다 이게 더 나은 방법이지 않은가.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냥. 생일도 거의 끝나가니까 한 번 더 축하해 줄까 해서.”
“그것뿐이야?”
“응.”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들고 나갈 걸 그랬다. 상대의 마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아이렌의 안전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겠나.
잭은 다소 허무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긴 하지만, 얼른 돌아가서 자라고. 늦잠 자도 나는 모른다.”
“내일 휴일인데?”
“휴일이라고 늦잠을 잘 수는 없지.”
“와, 모범생 발언이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아이렌은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따지고 보면 본인도 모범생이면서, 어째서 저런 반응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잭은 그리 생각하며 또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늘 성실하게 도서관서 예습과 복습을 하는 아이렌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진심으로 상대가 왜 저런 농담을 하나 알 수 없었다. 다른 불성실한 녀석들이야 성실하다거나 모범적이란 말을 비난처럼 쓰긴 해도, 잠까지 줄여가며 숙제하는 당사자가 모범생을 우스개 소리로 쓰는 건 이상하지 않나. 애초에, 일찍 자는 게 모범생인지도 모르겠고.
“그러고 보니, 잭네 방은 가 본 적이 없네.”
잭이 심란해하는 중.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아이렌이 커다란 몸 뒤로 슬쩍 보이는 방문 틈 사이를 힐끔거린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눈치챈 후, 은근슬쩍 꼬리로 슬쩍 문을 밀어 닫으며 대꾸했다.
“다른 녀석들 방은 가 본 적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 레오나 씨 방을 말한 건가?”
“레오나 선배 방도 가봤고, 다른 사람 방도 가봤지. 플로이드 선배랑 제이드 선배 방이라던가.”
“뭐?”
거긴 왜. 아니, 가서 뭘 한 거지.
어쩐지 건전한 상상은 되지 않는 탓에 절로 볼이 뜨거워진 잭은, 어느새 아이렌의 대화 흐름에 완전히 말려들어 있었다.
“맞아, 내가 준 선물 써봤어? 그, 침구에 뿌리는 편백수 방향제.”
“아니, 아직.”
“흠. 그럼 내가 뿌려주고 갈게.”
“뭐? 아니, 아이렌!”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걸까. 아이렌은 당당하게 그의 등 뒤로 슥 돌아 들어가 문을 연다.
잠자리에 들 준비에 한창이던 잭의 룸메이트들은 성큼성큼 들어오는 아이렌과 그 뒤를 급히 쫓아오는 잭을 보곤, 짓궂게 웃었다.
“잭, 설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희들?!”
아마 고지식한 잭은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수록 오히려 더 놀리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겠지. 아이렌은 룸메이트들의 반응에 소리 죽여 웃곤, 구석에 놓인 제 선물을 챙겨 들었다. 향균 작용이 있다고 잘 알려진 그 방향제는 천연 제품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병부터 분무기 부분까지 모두 초록색으로 만들어 져 있었다.
“어디 보자…….”
칙칙. 침구가 잘 정리된 잭의 침대를 향해 방향제를 뿌리자, 희미한 풀냄새 같은 게 은은하게 방에 퍼진다. 그건 인간인 아이렌에겐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옅은 자연의 향이었지만, 방 안의 다른 수인들에겐 딱 적당한 정도의 향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오’하는 작은 감탄이 튀어나왔다.
“자, 됐다. 수인들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향이라던데, 한번 누워봐.”
제 할 일을 마친 아이렌은 뿌듯해하며 침대 위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아,이러다간 아예 침대에 드러눕겠다. 그런 생각이 불쑥 든 잭은 아이렌의 손에서 선물을 뺏은 후 강제로 상대를 일으켜 세웠다.
“알겠으니 이만 가.”
“어? 잭, 왜 자꾸 쫓아내려는 거야?”
“아니, 이 시간에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에 여자애가 있으면 쫓아내는 게 당연하지!”
이 당연한 걸 결국 말해야 한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어쩌겠나. 분명히 이 계집애는 ‘내가 왜 너흴 무서워해야 하냐’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러는 걸 텐데. 단단한 돌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아이렌은 딱 그 정도 위기감만 자신들에게 느끼는 거겠지.
정말이지, 왜 이렇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아이렌이 마법을 못 쓸 뿐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체격 차이나 힘 차이라는 게 있지 않나. 만약 누가 작정하고 해코지라도 한다면, 자신은 신경 쓰여서 잠도 설칠 것 같은데.
잭은 심란한 마음을 품은 채 그대로 아이렌을 밖으로 끌고 가려다가, 방 앞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너, 여기서 뭐 하냐?”
하도 시끄러워서 직접 와 본 걸까. 자다 깬 듯 편안한 차림으로 나온 레오나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자신과 아이렌을 번갈아 본다.
‘이건, 오해받을 수도 있겠는데.’ 잭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혀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전혀 긴장감이 없어 보이는 아이렌은 가볍게 고개 숙여 레오나에게 인사할 뿐이다. 명백하게 대조되는 반응에, 레오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당황하는 쪽으로 향했다.
“잭, 너…….”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는 말은 있어도, 성실한 늑대가 먼저 사고를 친다는 말은 없지 않던가.
그런 식으로 한마디 하려던 레오나는 과한 곤란함으로 완전히 굳어버린 잭을 보고 입을 닫았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아이렌이 아무 자각 없이 선을 마구 넘어댄 모양이다. 두 후배의 성격이나 관계에 대해 잘 아는 레오나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곤, 냅다 아이렌을 낚아채 둘러업었다.
“누가 보면 내 기숙사 소속인 줄 알겠군. 그만 가지 그러나, 아이렌.”
“예? 아니, 어디로요?”
“어디긴, 자러 가야지. 꼬맹이는 잘 시간이다.”
“전 다 컸어요.”
“아, 그래.”
레오나에게 잡혀가는 건데도, 아이렌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어찌 되었든 상대를 보낸다는 임무를 완수한 잭은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려, 그대로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고 보니, 한 번 더 축하해주니 어쩌니 해놓고 딱히 축하해 주지도 않았잖아?’
아니, 물론 낮에 축하 인사와 함께 선물을 받았으니 상관은 없지만.
방금 10분 사이에 있었던 일 때문에 수명이 10년쯤 줄어든 거 같은 잭은 터덜터덜 방향제 향이 가득한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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