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연애는 언제나 재미가 있다
트레이 클로버 드림
* 24년도 트레이 생일 기념 글
“아이렌, 트레이 선배 생일선물 준비했어?”
아이렌은 속삭임이라기엔 크고 일반 대화라기엔 작은 목소리에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대단히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듯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말을 거는 에이스의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자기 생일선물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묘하게 들뜬 고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은 아이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준비하긴 했는데, 마음에 들어 하실지는 모르겠네.”
“헤에, 뭐 샀는데?”
“비밀이야.”
“엥, 왜~? 나한테는 알려줘도 되잖아.”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에이스는 기어이 대답을 들어야겠는지 집요하게도 물어온다. 이렇게까지 물어보는 걸 보면, 어쩌면 아직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뒤늦게 시장조사를 나선 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알려준다고 해가 될 것도 없으니 말해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제 왼쪽에서 조용히 걷던 듀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는 에이스, 넌 뭘 준비했는데?”
“알아서 뭐 하게?”
“뭐야. 너도 안 알려주면서 아이렌에게는 알려달라고 하는 거냐.”
“아이렌에겐 알려줄 수 있지. 근데 넌 싫어.”
“뭐?!”
아. 이럴 수가. 이 녀석들은 또 싸우는 건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답할 걸 그랬다.
곤란하다는 듯 웃은 아이렌은 양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조금 앞장서서 걷고 있는 그림에게 말을 돌렸다.
“저 둘이 싸우는 힘을 동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마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꼬붕, 그거 농담이냣?”
“글쎄다.”
물론 농담이지만, 솔직히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이 없진 않다. 에이스와 듀스는 하루에도 자잘하게 서너 번 언쟁하니까, 그걸 정말 에너지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경제적이겠나.
“어라.”
시답잖은 생각을 즐기며 걸어가던 아이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익숙하지 않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기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이 아닌 듯한데. 복장도 이 학교 교복이 아니고, 무엇보다 여자이지 않나.
‘외부인이 어쩌다가 여기에?’
누군가를 만나러 온 건가. 아니면 학원장의 손님일까.
가만히 서서 상황을 파악하는 아이렌을 뒤늦게 눈치챈 에이스와 듀스도 이내 멈춰서더니, 함께 낯선 이를 주시했다.
“어? 저 사람이 입은 옷, 코벤 교복 아냐?”
“그러게. 손님인가?”
코벤이라면, 분명 유명한 마법사 양성 학교인 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말하는 거겠지. 듣자 하니 현자의 섬과는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여학교라던데,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걸까.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이곳의 상식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름 주워들은 게 많은 아이렌은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키 크다. 못해도 175cm는 될 거 같은데. 머리도 엄청 길고……, 관리 힘들겠다.’
그런데 뭘까. 이 기시감은. 분명 자신은 학교 밖 인연은 생길 일이 없는데, 왜 저 사람을 어디서 본 거 같을까?
그때. 낯선 이를 구경하던 한 마리와 세 사람 중, 에이스가 불쑥 소리쳤다.
“아, 저 사람!”
“응? 왜 그래, 에이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트레이 선배 여자친구야!”
“어?”
듀스와 그림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아이렌의 반응은 달랐다. 방금까지 느끼던 기시감이 어디서 왔는지,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언제였더라. 아이렌은 맞팔로우 중인 트레이의 SNS 계정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라 어떤 사이인지 물어봤고, 케이터가 당사자를 대신하여 여자친구라 말한 건 들었는데……. 그런 중요한 정보를 까먹고 있었다니. 이제라도 떠올려서 다행일 뿐이었다.
“가서 말 걸어볼까?”
“그래도 되는 거야?”
“딱히 죄짓는 건 아니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에이스와 듀스가 자기들끼리 떠드는 사이. 상대가 자꾸 한 자리에서 주변을 살피는 게 신경 쓰이던 아이렌은 성큼 낯선 이에게 다가갔다. 일면식도 없는 이와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를 구경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혹시 길 찾는 중이세요?”
‘어어.’ 뜻밖에도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아이렌 때문에, 말 걸 타이밍만 보고 있던 두 소년과 그림도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따라간다.
자신을 향해 다가온 무리를 슬쩍 곁눈질로 본 외부인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대들은 하츠라뷸 학생인가?”
“네, 이 녀석들은 빼고요.”
“음, 그래 보이네.”
짙은 분홍색 눈동자는 에이스가 가리킨 그림과 아이렌을 순서대로 훑어보더니, 제비꽃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그대가 소문의 감독생인가 보군.”
“예? 절 아세요?”
“지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네. 마법도 못 쓰고 여학생이지만 학교 측 실수로 입학한 학생이 있다고.”
그 지인이라는 건, 역시 트레이겠지.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만 직접 사실을 묻는 이는 없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외부인은 단도직입적으로 제 목적을 밝혔다.
“혹시 도서관이 어디인지 아는가? 거기서 지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길을 잘 몰라서 말이네.”
“어, 도서관이라면 저희가 안내해 줄게요! 여기서 그렇게 안 멀거든요!”
“음, 고맙군.”
이번에도 선뜻 대꾸한 건 에이스 쪽이었다.
듀스는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인 상대의 태도가 수상하다 생각한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에이스, 너 웬일로 좋은 일을 하냐.”
“뭐냐, 그 ‘웬일로’는? 선배 여자친구가 곤란해하면 도와줄 수도 있지.”
아니. 절대 그게 전부는 아닐 거다. 분명 선배의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나서는 거겠지.
아이렌은 에이스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굳이 그걸 비난하진 않았다. 의도가 어쨌든, 행동은 선하지 않나. 그리고 요령좋은 에이스라면 조심성 없이 무례하게 굴지도 않을 테니 괜찮다.
그리 생각한 아이렌의 기대에 부응하듯, 에이스는 앞장서서 도서관으로 가는 동안 특별히 수다스럽게 굴지 않았다.
“카티!”
그리고 도서관의 코앞까지 왔을 때.
미리 근처에 나와 있었던 트레이가, 제 애인을 알아보고 후다닥 뛰어왔다.
아, 저 다급함을 보라.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향해 뛰어가는 부모 같지 않은가.
예상보다 격렬한 선배의 반응에 1학년들이 멈칫한 사이, 두 연인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진짜로 왔어? 다음에 보내줘도 된다니까…….”
“그럴 순 없지. 내 실수로 엉뚱한 걸 보내지 않았나. 내 물건도 가져갈 겸, 생일선물도 주려고 온 거니 괘념치 말게.”
“으음…….”
곤란하다는 듯 웃은 트레이는 목 뒤를 긁적였다.
이미 둘만의 세계에 빠진 선배들에겐 자신들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듀스는 붉은 기가 도는 트레이의 귀를 보곤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클로버 선배, 말은 저러시면서도 좋아하고 있네.”
“그거야 좋겠지. 여자친구가 와준 건데.”
“음, 트레이 녀석도 솔직하군.”
이 녀석들, 완전히 선배 연애를 구경거리로 보고 있군.
아이렌은 듣는 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수군거리는 동급생들에게서 슬쩍 떨어졌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은 무관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트레이는 제 여자친구를 보느라 후배들의 행동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지금 관심사는, 제 앞에 들이밀어 진 애정 담긴 선물뿐이었다.
“여기, 생일 축하하네. 올해는 직접 얼굴 보고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군.”
“확실히, 미들 스쿨 이후론 생일마다 얼굴 보긴 힘들어졌으니까.”
아직 제 졸업까지는 1년 남았으니, 얼굴 보기 힘든 시기는 더 길어지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숨이 턱 막히는지, 트레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답답함은 잠깐일 뿐. 금방 미소를 되찾은 트레이는 선물을 고쳐 들었다.
“아, 네 물건은 방에 있는데……. 잠깐 기다려 줄래? 내가 금방 가져올게.”
“음. 나는 괜찮으니 서두르지 말게.”
“멀리서 온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데, 안 서두를 수가 있겠냐고.”
그제야 한결 편하게 웃은 그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다 말고, 급히 멈춰서서 물었다.
“언제까지 돌아가야 해?”
“글쎄다. 밤 10시쯤?”
“그렇게 늦게 돌아가도 돼?”
“아무래도 코벤은 기숙사가 학년별로 나뉘어 있다 보니, 늦게 들어온다고 눈치 주는 이가 없거든.”
“하하, 그건 부럽네.”
아마 코벤에도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사용하는 마법의 거울처럼 특별한 이동 수단이 있을 테니, 실제로 오가는 것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을 거다. 그렇다 해도 너무 늦게 보내 줄 수는 없는 법. 머리를 열심히 굴려 시간을 쪼개보던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물었다.
“그럼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갈래?”
“그래도 되나? 부사감은 할 일이 많다 들었는데.”
“괜찮아. 다들 이해해 줄 거야. 저녁만 먹고 돌아오지 뭐. 다녀올게.”
툭툭. 가볍게 연인의 등을 두드려 준 트레이는 기숙사로 향하다가, 가는 길에 우두커니 서있는 슬쩍 후배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너희들,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상대가 되어줄래?”
그의 제안에 네 쌍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분명 부끄러워하며 모른 척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동무가 되어달라니. 오래 사귄 사이라서 딱히 감출 것도 없다는 걸까.
에이스는 제 예상보다 더 재미있게 돌아가는 상황에 짓궂게 웃었다.
“선배 여자친구랑 이야기해도 되나요?”
“에이스, 그거 놀리는 거지?”
“아니, 설마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발뺌하는 후배의 모습에도, 트레이는 웃어 보일 뿐이다. 아무래도 여자친구를 만나 기분이 좋은 그에겐 이 정도 놀림은 아무 타격도 없는 모양이었다.
“너희,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된다.”
지켜지지 않을 경고를 한 트레이가 기숙사 쪽으로 뛰어가자, 놀랍게도 여자친구 쪽이 먼저 무리로 다가왔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뒷짐을 진 이방인은, 태연하게 연인의 후배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들이 트레이 후배들이라는 거지?”
“예! 에이스 트라폴라 입니다!”
“듀스 스페이드입니다. 안녕하세요.”
다른 기숙사 선배도 아니고 제 기숙사 부사감의 애인이라 그런가, 역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자니 조금은 긴장된다.
에이스와 듀스가 이름을 밝히며 고개를 까딱이자, 상대도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해왔다.
“나는 카타리나 아르길레라고 하네. 도와줘서 고맙군. 덕분에 트레이와 빨리 만날 수 있었어.”
“에이, 뭘요! 그럼 카타리나 선배라고 부를게요!”
통성명까지 하고 나자 긴장이 풀린 걸까. 에이스는 금방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해 조잘조잘 떠들어댄다. 트레이와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무슨 선물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코벤에서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까지 왔느냐 등등. 토크쇼 진행자처럼 끝없이 질문하는 에이스를 보던 아이렌은 그림에게 귓속말했다.
“저거, 충분히 쓸데없는 소리지?”
“음. 나중에 트레이에게 이르고, 케이크라도 얻어먹자고!”
아니. 난 이를 생각은 없는데.
그림의 말에 혼잣말로 중얼거린 아이렌은 곧 트레이의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나 기억해내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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