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원 서사

과거사부터 첫만남까지

외관적으로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모두 푸르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눈동자에는 붉은 하이라이트가 있습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순한 인상의 미인…인데, 입이 많이 거칠어요! 준수만 합니다. 성격에 좀 하자가 있고 혼자 사는 느낌이라 주변에서 다가오기도 어려워해요.

외동딸. 어릴 때는 제법 풍족하게 사는 편이었습니다. 꽤 어린 시절이었는데도 가족들과 먼 곳으로 해외여행도 다니곤 했어요. 5살 즈음에 프랑스 여행으로 갔던 미술관을 계기로 미술을 하고 싶다! 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어요. 집안도 그 정도는 무리 없이 지원해줄 수 있었거든요! 하나뿐인 딸이 벌써 하고 싶다는 게 생겼다는데 당연히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는 지금이랑 비교하면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아이였어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종이랑 연필을 잡기도 했고요. 피카소라든지 미켈란젤로라든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위대한 꿈 같은 것을 꾼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꾸준했습니다.

이후로 한 번도 꿈이 흔들린 적은 없어요. 오히려 날이 갈수록 확고해져서, 난 미술이 아니면 안 돼! 라고 생각했죠. 그만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이어진 길이 그렇게 탄탄대로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14살이 되었을 때 갑작스럽게 가세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이 하던 사업이 어려워졌거든요. 사업 실패라는 말은 생각보다 무섭게 살림을 위협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던 여원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술을 하고 싶다는 바람대로 예중에 입학했지만, 오래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었지만, 부모님은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하니 서울에 남고, 결국 여원 혼자 부산에 있던 할머니 댁으로 의탁 됐어요. 기껏 합격한 예중인데, 1학년을 마치기 직전에 일반계로 전학을 갔습니다.

부모님은 최대한 여원에게 자세한 상황을 알리지 않으려 했기에 정확히 빚이 얼마나 생기고, 얼마나 위험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다른 하나는 전했습니다. 미술은 그만두어라.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어요. 더 이상 지원해주기가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러나 정여원에게는 빚이 얼마고 하는 것보다 그 말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게 아니면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어떻게 그걸 그만두라고 해?

꿈을 잃었을 때 미래에 대한 공포는 꽤나 크게 다가옵니다. 여원도 다르지 않았어요. 절대 그만둘 수 없다며 필사적으로 설득했어요.

이대로 그만둔다면, 어쩌면 살아갈 의지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았거든요. 며칠을 울면서(어쩌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제발 미술만은 계속하게 해달라고 빌듯이 설득하니 부모님도 별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어떻게든 학원은 계속 다니게 해줬어요. 비록 여원이 어릴 때부터 모아오던 적금을 깼지만요…

결국 정여원의 돈으로 다니게 된 학원이니 상관은 없겠죠. (물론 아니었다면 적금도 빚 갚는 데 쓰였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통장에는 2년 정도 학원에 다닐 수 있는 돈이 생겼고, 여원은 부산에서도 다시 미술학원에 다녔습니다.

그 사이 부모님도 밤낮으로 일하고, 친인척들에게 도움도 받아서 실패로 생긴 빚은 차차 갚아 나갔습니다. 시간은 흘러 여원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예고는 가지 못했어요.

절대로 미술로 대학에 가야 하는데 예고를 못 가다니! 이쯤 좌절하면 마음이 꺾여 포기할 법도 한데, 이미 한 번 독기를 품은 여원은 그럼에도 입시를 계속하기로 합니다. 그만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요…

다만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생활은 하지 못해서 성격이 좀 히스테리 해졌습니다.

성격이 급격히 변한 건 중학교 때였지만요. 당시에는 예민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성격이 조금… 더 나빠졌습니다.

진학한 곳은 지상고. 여원은 입학한 직후부터 재수 없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어요. 일반고라 그림만으로는 안 되니 성적도 챙기고, 그렇다고 그림도 소홀히 할 수 없고.

아침 시간과 점심시간, 학원 가기 전 방과 후에는 미술실에서 살 듯이. 학원에 가서도 그림을 그리고, 쉬는 시간이나 집에 가서는 공부. 당연히 식사도 거르는 때가 많았겠죠! 가뜩이나 마른 체형이던 몸이 더 얇아집니다.

학기 초에 작성하는 자기소개서에는 
취미: 그림
특기: 그림
이라고 쓰지만, 취미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습니다. 즐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정신적으로도 제법 몰려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건강도 그리 좋진 않았겠지만, 오직 정신력 하나로 견뎠어요.

이런 빡빡한 인생을 살고 있던 정여원에게 숨 쉴 구멍을 뚫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원 선생님이었습니다.

여원이 미친 듯이 그림만 그리는 모습을 본 선생님이 `너는 방 안에 처박혀서 그림만 그리지 말고 밖에 나가서 노을 지는 것도 보고 그래라`라고 말하며 학원 밖으로 내보냈어요.

여원은 이럴 시간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어른이 내보내니 일단 나갔죠. 때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정말 노을을 본 지도 오래되었던 것을 떠올렸어요. 계속 방안에만 있었으니까요.

벌써 여름이 다 되어가서 하늘은 높고, 일교차가 큰바람에 쌀쌀한 공기를 맞고.

그러고 보면 아침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라도 사 와서 벤치에 앉아 먹고 나니 어쩐지 눈물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날은 선생님께 말씀드려 학원을 조퇴하고 집에 가서 쉬었습니다. 선생님도 흔쾌히 그러라 했고요.

그 일을 계기로 생활 패턴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조금은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있게 되었고, 주변을 살필 수도 있게 되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이 취미로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림을 즐기면서 그릴 수 있게 됐다는 건 꽤 중요한 변화였어요.

준수와 처음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어요. 완전한 여름이 찾아왔을 무렵, 준수가 전학을 왔거든요. 우연히도 같은 반이었습니다.

평범한 첫인상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화려한 준수의 외모를 보고 여원의 반응도 남들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어요.

존나 잘생겼네…

그게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준수는 정여원의 미적인 이상형이었거든요. 좀 거창하게 말해서 완벽한 이데아라고 할지… 아무튼 얼굴은 잘생긴 애. 이것이 첫인상.

그렇지만 얼빠인 건 아니라서 그 감상 외에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어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어요. 때는 체육 시간, 아직 수업을 받던 성준수는 체육관에서 농구공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 그저 몇 번이고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질 뿐인 그 모습이, 여원에게는 어쩐지 빛나 보였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고.

준수의 모습을 기억해두었던 여원은 반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지고 있던 크로키북에 준수가 농구 하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간략화된 크로키는 당연하게도 동세 중심이라, 세부적인 부분이 부족했어요. 애당초 이 정도는 굳이 준수를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으니, `준수를 그렸다`라고 하기에도 애매했죠.

그 후로도 몇 번 정도 준수의 모습을 보고 그렸지만, 역시 직접 가까이서 보고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게 아니면 만족할 수 없었어요! 결국 여원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쉬는 시간에 대뜸 준수의 책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어요.

친구 없이 지내느라 일상적인 이야기로 다가간 후 조심스레 부탁하는 친화적인 방법 따윈 몰랐기 때문에… 상당히 직설적이었습니다. 본론부터 나갔어요. 네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

준수는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말 한 번 안 섞어본 사람이 갑자기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하면 누가 그러라고 하나요?

준수는 기본적으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연습 때문에 수업도 빠지는 날이 많으니, 정여원은 그저 이름도 모르는 동급생에 불과했어요. 첫인상은 최악이었습니다.

단칼에 거절한 후 황당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생각이었겠지만, 여원은 준수 생각보다 성미가 검질긴 사람이었습니다.

거절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듯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드는 게 아니겠어요! 어설픈 사회성을 발휘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같은 이유를 들지만, 준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사진에 그림에 아주 가지가지 한다! 그런 생각이었죠.

둘 다 그다지 말을 곱고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라서 더 말이 안 통했습니다. 이게 대화를 나누는 건지 싸우는 건지…

결국 두어 번의 쉬는 시간 동안 여원이 설득하려 달려든 후에야 준수는 포기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신경전을 계속할 바에는 그냥 그림 한 번 그리게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요.

결정적으로 준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여원이 `네가 농구 하는 모습이 멋져서 그려보고 싶다`라는 맥락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농구를 좋아하는 준수도 그 말을 듣고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어요. 그리고 멋져 보였다잖아요. 농구 하는 게.

허락은 했지만, 사진은 역시 안 됐습니다. 성준수는 그렇게 마음 넓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애초에 사삿일을 박제 당한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까요. 오늘 처음 말 나눠보는 애한테 그 정도 아량을 베풀 필요도 없고요!

대신 학교가 끝나고 드디어 농구 연습을 하러 갔을 때, 바로 옆에서 보고 그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정여원도 그 정도로 만족했어요. 눈으로 잠깐 포착해서 기억해둔 다음 그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까요.

무엇보다 이번에는 멀리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기에 드디어 얼굴까지 제대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얼마나 큰 발전이던가요.

준수는 여원을 신경 쓰지 않았고, 여원도 마찬가지였어요. 서로 각자 할 일만 했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신경 쓰일 지경이었죠…

학원은 빠져야 했지만, 이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았습니다. 선생님도 여원이가 학원을 빠지다니! 하며 놀랐지만 그 시간에 또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겠죠…

책상도 의자도 없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불편하게 그리는 그림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꼭 이 순간을 위해 그림을 그려왔던 것처럼요. 연필 쥔 손은 오히려 평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성준수를 그려냈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요.

준수는 정여원이 적당히 조금만 그리다 알아서 갈 줄 알았는데, 연습이 다 끝나고 바깥이 어두컴컴해진 뒤에도 남아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진짜 미친 새끼인가?

그렇지만 그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아주 조금 애잔하게도 느껴져서, 아직도 그리냐? 하며 멀리서 말이나 한번 걸어봤습니다.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잠시 준수를 보던 여원은 계속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대답은 하지 않고 도로 고개를 내려 그림을 그렸어요. 그게 어이없게 느껴져서 준수는 얼굴을 찌푸리고 대체 뭘 그리는지 보기나 하자 싶은 심정으로 다가가 노트를 뺏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주합니다. 정성스럽게, 그리고 세심하게 그려진 자신의 슛 동작을요.

기실 그것은 단순히 동작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오롯이 성준수를 그려낸 것이었으니까요. 종이 위로 새겨진 `슛을 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준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성준수는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정성을 들인 그림이 무엇인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미술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농구공만 튀기면서 살아오느라 그림이라고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밖에는 그릴 줄 모르던 그에게 정여원의 그림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홀린 듯이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면, 꼭 자신을 그린 듯한 그림들(당연하게도 성준수가 맞으니까요)이 가볍고 날카롭게 그려져 있었어요. 하나 같이 농구를 하는 포즈였습니다.

그 앞 페이지와, 그 앞 페이지에도.

그림은 계속해서 이어졌어요.

비단 그것이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려낼 수 있는 양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았을 겁니다. 저를 보고 엄청 많이 그린 건 확실해서, 답지 않게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정여원이 도로 노트를 가져갔습니다. 이상하게도 불유쾌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게 해줘서 고마워. 이제 간다, 열심히 해.

그 말을 끝으로 강당을 벗어나려던 정여원을 붙잡은 건 준수의 말이었습니다. 

너 사진 찍고 싶댔지?

본인도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슛을 한 번 쏘려는 것처럼 공을 두어 번 바닥에 튀기고는 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이 조금 커진 여원이 핸드폰을 꺼내 들자 준수도 말을 이었어요.

한 번만 할 거니까 찍으려면 제대로 찍어.

그리고는 하프코트에서 그대로 슛.

셔터 소리 뒤에는 림 안으로 정확하게 공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쩐지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던 그 동작이 끝나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정신없이 연습하느라 흘렸던 땀을 닦아내니, 다시 한번 셔터음이 울렸습니다. 돌아보면 또 정여원이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그게 헛웃음이 나오도록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습니다.

집에 가라.

어.

그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여원은 집으로, 준수는 숙소로 발을 옮겼습니다. 서로가 아로새겨진 첫 만남도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급진적으로 첫인상이 변해버린 준수에게는 그 만남이 더 유별났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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