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2월 편
러기 붓치 드림
* 트친이랑 1년 장기 프로젝트(https://1yearcollabo2.creatorlink.net) 하는데 써서 냈습니다.
“으음…….”
날씨가 쌀쌀한 밸런타인데이 오전. 제 방에 틀어박힌 러기 붓치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심각한 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거였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도넛을 먹으며 고민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냥 신경을 꺼버리기엔 꽤 진지한 문제였지.
손에 묻은 설탕을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 먹은 그는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과 고소함에 헛웃음이 터졌다.
‘곤란하네여, 진짜.’
제가 먹을 걸 받고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이래서 나이 지긋하게 먹은 영감님들이 사랑은 달콤해도 인생의 발목을 잡느니 어쩌니 하며 꼬맹이들에게 잔소리해댄 걸까.
러기는 아직 다섯 개나 남은 도넛 중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이걸 만들어 선물해준 이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 아니,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간. 아이렌은 살그머니 사바나클로 기숙사로 와 제게 수제 도넛을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주고 갔다.
‘원래는 초콜릿을 줘야 하지만, 그것만으론 배가 다 안 찰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킥킥 웃는 얼굴은 어찌나 얄궂고 사랑스럽던지. 선물용 상자를 꽉 채우는 도넛들은 대부분 초콜릿이나 설탕으로 장식되어있어, 기념일의 의미와 만복감을 둘 다 만족시켜줄 수 있어 보였다.
‘다른 사람에겐 안 줬겠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나 이른 시간에 와 제게만 몰래 준 거라면 이건 ‘특별한 밸런타인데이 선물’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초콜릿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마 이것보단 양도 적고 평범한 초콜릿을 받았겠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신에게만 몰래 선물을 전달해 줄 필요가 있었겠나. 그냥 다 같이 모여있을 때 나눠주고 가면 그만인데.
특별취급 받는 건 기쁜 일이다. 심지어 먹을 걸로 편애받는 건 사양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도 이렇게나 고민이 되는 건, 뭐라도 보답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겠지. 다른 이라면 모를까, 아이렌에게 받은 호의엔 작게나마 보답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다 먹고 생각해봐야 하나.”
애초에 보답을 바라고 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니.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걸 선물 받았다면 그냥 감사하게 먹어 치우고 금방 잊어버릴 텐데 말이다.
“밸런타인이라…….”
그러고 보니 학교 밖 상점에서 밸런타인데이라고 이것저것 팔던데, 뭔가 사러 가볼까.
가만히 앉아있어 봐야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화이트초콜릿 위에 스프링클을 뿌린 도넛을 마지막 한 입까지 먹어 치운 그는 시원하게 우유를 들이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렌 군!”
그날 저녁. 겨우 아이렌에게 줄 선물을 마련한 러기는 후다닥 고물 기숙사로 달려갔다.
다급한 부름에 현관으로 나온 아이렌은 앞치마 차림으로 상대를 맞이해 주었다. 보아하니, 곧 있을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먹을 걸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러기 선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혼자 있슴까?”
“예? 어, 안에 그림이랑 고스트들이 있긴 하죠?”
“혼자라는 거네여.”
아무래도 날이 날이다 보니 다른 녀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렌에게 관심 있는 녀석이 어디 한둘이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러기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등 뒤에 감추어 두었던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여.”
“예?”
“밸런타인데이 선물임다. 그, 별거 아니지만!”
기념일이라고 꽃을 할인해 팔던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렇다고 해도 풍성하고 비싼 꽃다발을 사진 못했지만, 원래 선물이라는 건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장미 몇 송이와 안개꽃, 그리고 이름 모르는 몇몇 작은 꽃으로 구성된 꽃다발은 흰색 포장지와 보라색 리본으로 장식되어있었다.
넘겨받은 꽃다발을 구경하다가 제 눈동자 색을 꼭 닮은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상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러기는 아침에 받은 선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도넛 잘 먹었슴다. 엄청 맛있더라고여.”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이제 가야지. 마음 같아선 좀 더 떠들고 오고 싶지만, 낮 동안 잠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탓에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얼른 사바나클로 기숙사로 가서 밥을 챙겨 먹고, 한숨 푹 자야지.
쑥스러움과 배고픔에 얼른 자리를 뜨고 싶어진 러기는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러기 선배!”
뛰는 건지 걷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속도로 얼마나 걸었을까.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걸까. 목소리와 함께 가까워져 오는 빠른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러기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대로 입을 닫아야 했다. 아이렌의 입술이, 예고도 없이 제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챙겨줘서 고마워요. 선배가 최고예요.”
기습같이 입을 맞춘 아이렌은 귓가에 그 말만 남기더니, 꽃다발을 안은 채 고물 기숙사 안으로 돌아갔다.
상대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어 붙어있던 러기는 숨을 참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진짜 곤란한 사람이라니까.”
하지만 그런 점이 아이렌의 매력 아니겠는가. 상냥하지만 지독하고 달콤하지만 씁쓸한. 마치 초콜릿 같은 사람.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꽃다발을 줄 때 키스할 걸 그랬다. 다음에는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은 러기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등으로 훔치며 실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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