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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irth

오페라의 유령 - 에릭 드림 / 1만 자, 오마카세

앤을 잃었을 때, 에릭은 이미 한 번 죽었다. 그는 연인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던 순간에 제 호흡 역시 남김없이 소진되어버렸음을 알았다. 구차한 삶을 연명하도록 그를 돕는 것은 여전히 불멸하는 음악뿐이다. 사랑을 잃고도 살아남은 예술이 그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승에 붙들려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노래를 두 손에 건네받을 뮤즈가 없이는 어떤 선율도 아름답지가 않다. 에릭은 이제 어떤 경이도 창조해내지 못한다. 바래지는 악보 뭉치를 끌어안고 서서히 말라 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앤이 떠난 당시의 기억은 파편으로 산산이 흩어져 지금은 잘 복기할 수 없다. 시간은 그로부터 너무 많이, 빠르게 흘렀다. 그저 온기를 모조리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 살갗에서 끼치던 죽음의 냄새만이 아직까지 에릭의 코 끝에 선명하다. 그 지독한 그늘은 남겨진 자의 근처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일렁이는 호수의 물비린내에서, 타는 촛불의 매캐한 연기에서도 에릭은 죽음의 기척을 느꼈다. 바라마지않는 소원이 그토록 가까이에 있는데도 손에 쥘 수는 없는 것이 에릭의 절망이었다. 유독 침잠하는 밤이면 앤의 환영이 나타나 에릭을 붙들었다. 그녀가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시간을 건널 수 있다면 죽음 저편에서도 돌아오는 기적을 마땅히 보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에릭은 부득불 살아가고 있었다. 더없이 헛됨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렇듯 미련한 마음은 곧잘 분노로 치환되고는 하는 것이었으나.

세계의 틈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녀라면 차라리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에릭은 감히 생각한 적 있었다. 확신 없이 영겁의 시간 동안 기다림 속에 고통받느니 그녀의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 또한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며 기쁘게 울겠노라고. 그러나 에릭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연인의 죽음이 그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인간이 이토록 괴로울 수 있음을 뼈저리게 감각하며,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고개를 든 에릭의 앞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이 모든 일이 나쁜 꿈에 불과했던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은 빈자리에는 흙의 냉기만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앤은 분명 죽었다.

그러니 나 역시 죽는 것이 옳을 텐데. 에릭은 매일 아침 눈을 때마다 생각했다. 해가 들지 않는 지하에서라면 아침도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본래 태어나기를 유령이었으므로, 인간 아닌 자의 삶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사랑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비참할 정도로 쉬웠다. 번잡하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모두 잘라내고 추악한 본성에 휩쓸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극장가에 기웃댈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지하 깊숙한 아래에 틀어박혀 에릭은 식사도 수면도 최소한으로 취했다. 갑자기 쓰러져 죽지는 않을 만큼, 딱 그 정도로만. 하지만 죽음과 언제 손을 맞잡게 된들 이 연명에 달리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인간의 삶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테고 그의 끝은 결국 홀로 외로운 채일 것이다.

제 숨이 끊어지는 순간 사랑하는 그녀를 덩달아 죽이게 될까 두려워하던 날도 있었지. 이제는 다 부질없는 고민이다. 에릭이 앤을 뒤따라 가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 때문이었다. 당신의 남은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다는. 그 한 마디 유언은 저주이자 속박이 되었다. 에릭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함께 떠날 수 없다. 긴긴 삶이 그의 몫으로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이 못내 버거웠다.

 

에릭은 먼지 쌓인 피아노의 뚜껑을 손 끝으로 훑어 본다. 희부연 덩어리가 손가락에 묻어난다. 악기를 조율하지 않고 방치한 지도 꽤 오래되었으니 건반을 눌러 봤자 분명 끔찍한 소리를 낼 게 뻔했다. 이대로 아예 내버릴 심산이 아니라면 청소도, 조율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인데.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음악은 다 말라 버리고 없는 것이다. 에릭은 피아노 아래에 기대앉아 고개를 숙인다. 무거운 망토 자락 군데군데가 흙 묻은 자국으로 더럽다. 앤이 봤다면 잔소리를 했겠지. 아니, 애초부터 깔끔을 떠느라 이런 얼룩은 그녀 눈에 띄지도 못했을 것이다. 손질에 신경 쓰지 않아 흐트러진 앞머리가 시야를 가리운다. 그것을 대충 쓸어 넘기며, 에릭은 몇 차례인지도 모를 한숨을 삼킨다. 그는 늘 한결같은 생각으로 바쁘다.

앤이 그리웠다.

시끄럽게 웃으며 조잘대던 목소리도, 조심할 줄을 모르고 폴짝폴짝 뛰어 지하를 누비던 가벼운 발걸음도. 부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 연약하고 작은 몸, 양팔로 끌어안으면 이 품 안에 부족함 없이 들어차던,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아름답고 캄캄한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밤의 우물처럼 깊고 차분한 빛으로 반짝이던 황홀……. 하지만 이제는 그중 어떤 것도 다시 마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매순간마다. 에릭은 다만 비참했다. 신을 저주할 여력조차 없었다. 떠나간 생명을 돌이키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불을 피우지 않은 지하는 냉골이다. 에릭은 추위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는다. 졸음이 꾸벅꾸벅 쏟아진다. 앤이 떠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한 달, 아니면 한 계절? 그것도 아니면 한 해가 지났나. 분명 감각되는 것보다는 덜한 세월일 텐데. 지독한 피로가 에릭을 덮친다.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에릭은 제 튼튼한 육신을 몇 번째인지도 모르고 저주한다. 누구라도 영원히 잠 속을 헤맬 수는 없는 노릇, 이렇게 몇 시간쯤 눈을 붙이고 나면 끝없는 불면의 밤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속한 연인은 꿈에서도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이럴 줄을 알았더라면 당신을 사랑한다고 더 자주 속삭여줄 걸 그랬지. 아니, 당신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빼앗을 것을. 이제 와 어떤 효용도 없는 후회가 에릭의 목을 올가미처럼 죈다. 과도한 스트레스 탓인지 눈이 자꾸 무겁게 감긴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다. 세상 전부가 이대로 멈춰버린다면 정말 좋을 텐데. 당신을 앗아 간 죽음을 잠시나마 안아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당신의 마지막 온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면.

 

에릭!

 

착각일까.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명랑한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스친다. 하지만 에릭은 함부로 반가워하지도, 얼른 눈을 떠 그 기척을 쫓지도 않는다. 어차피 바라보는 순간 사라질 환상이라면 약간의 유예나마 얻는 편이 나았다. 에릭은 돌아온 앤이 제 주변을 걸으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하거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궁금해할지도 모르지. 차게 얼어붙었던 에릭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물든다. 동시에 미약한 바람결이 그의 뺨을 스친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따듯한 온풍이다.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에릭은 충동적으로 눈을 뜬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든다. 그리고 목도하는 것이다. 저만치 호숫가, 모닥불이 놓여 있던 자리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앤을.

 

잘 지냈어요?

 

해사한 낯으로 미소지으며 그녀가 묻는다. 잘 지냈느냐고? 설마 그럴 리가. 당장이라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에릭은 지금 제게 말을 거는 이가 정말로 살아 돌아온 앤인지 아니면 허상에 불과한 환영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상처줄 수는 없는 일인데. 실은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것은 이미 한껏 너덜거리는 제 마음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에릭은 차마 그녀를 만져 확인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에릭의 곁을 스쳐 간 앤은 그에게로 먼저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씨가 다 꺼져 잿더미만 남은 모닥불을 말없이 기웃거리던 앤이, 이제는 주저앉아 떨고 있는 에릭의 눈치를 살핀다. 그제야 에릭은 깨닫는다. 이번의 만남은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적어도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잠에서 깨어나거나 그녀를 만지지 못하고 현실로 내쫓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에릭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연인을 더 오래 기다리게 둘 수는 없다. 에릭은 천천히 바닥을 기어 앤의 발치로 향한다. 지하의 거친 암반이 무릎을 뾰족하게 짓눌렀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앙상한 꼴로 드문드문 타오르는 촛불이 앤의 얼굴을 간신히 비춘다. 죽기 전과 다름이 없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낯설다. 그간 상상 속에서 그녀의 육신은 얼마나 험하게 무너져내렸던가. 앤을 향해 뻗어내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앤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외려 간절히 저를 부르는 에릭에게로 몸을 숙여 다가올 뿐이다. 그녀의 따듯한 피부가 에릭의 손 끝에 닿는다.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온기가 품을 가득 채운다. 에릭은 끝내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운다. 그녀가 숨을 거두었을 때조차 하지 않았던 통곡을 이제야 한다. 내몰린 짐승처럼 한없이 거친 숨으로 헐떡이는 에릭의 등을, 마침내 돌아온 그녀가 안타깝게 토닥인다. 에릭은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더는 남은 슬픔도 없으리라고 믿어왔는데. 앤을 위해 흘릴 눈물은 아직 넘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는 에릭의 귓가에 앤이 나긋나긋 속삭인다. 쉬잇, 괜찮아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 달콤한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온 몸에 급격한 탈력감이 몰아친다. 사지의 힘이 죄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에릭의 눈앞이 깜박이며 점멸한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그녀가 또 사라지고 없을까 겁이 나는데. 걷잡을 수 없는 압력에 휩쓸리듯 에릭은 속절없이 의식을 잃어버린다. 앤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앤은, 죽음에서 돌아온 앤은 잠든 연인을 내려다본다. 이처럼 무방비한 당신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나 생각하면서. 이런 여유를 만끽하는 것은 항상 당신의 몫이었지 싶어 그녀는 괜스레 불퉁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작고 여린 손이 에릭의 상한 뺨을 어루만진다.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은 어떻게 지냈을까. 우리 이제 함께 가자고, 그 말을 내가 기어이 내뱉는다면. 당신은 거절 않고 단숨에 나를 따라 죽음으로 나서려 할 텐데. 그러나 언제고 내가 바랐던 것은 당신의 삶이라서. 그리고 인간은 누구든지 살아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나 없는 동안 당신이 죽음에 임박한 시간을 보냈다면, 마찬가지로 오늘 또한 당신에게 새로운 기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앤은 감긴 채로도 불안하게 요동치는 에릭의 눈꺼풀을 응시한다. 내가 당신 곁의 죽음마저도 모두 거둬 가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하여 새 아침에는 당신이 당신으로서 온전히 거듭날 수 있도록.

에릭은 머잖아 다시 눈을 뜬다.

그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앤은 여과 없이 투명한 시선으로 마주 본다. 에릭은 그 눈 안으로 침잠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재회를 얼마나 갈구했던가. 그녀의 입술이 열려 부드러운 노래 같은 음성을 흘려낸다. 당신의 삶인 내가, 당신을 위해 돌아왔으니…… 오늘이 당신의 새로운 생일이 되겠네요. 에릭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강렬한 조갈로 불타듯 이글거리고 있다. 축하해요, 에릭. 웃음 섞인 말마디가 급하게 겹쳐지는 입술 사이에서 흩어진다. 오랜만에 맞닿은 연인의 입술은 더없이 차갑다. 그러나 에릭은 물러나기는커녕 앤을 더 바투 끌어안는다. 그 손아귀에 앤을 전부 쥐어 으스러뜨릴 것처럼.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허나 어떤 입맞춤도 영원히는 계속될 수 없고. 젖은 입술을 훔치며 앤은 다시 아프게 웃어 보이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시간이 얼마 없다고. 에릭은 저항 없이 물러나 앤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다. 어떤 말을 꺼내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는 좀전의 입맞춤마저도 아직 실감하지 못하겠는데. 도무지 어떤 반응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인지. 에릭의 눈동자가 마구 요동친다. 바깥으로 쏟아져 내릴 듯 뜨겁고 절박하게 흔들리는 금빛 궤적을, 앤은 한참이나 숨죽여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앤은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 그녀의 바람대로 이곳에 남아 남은 삶을 착실히 일구어나갈 것. 이쪽을 선택한다면 그들은 에릭에게 안배된 삶이 다 끝난 후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하나,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돌아갈 것. 그런다면 에릭은 당장 앤을 따라 죽음이라는 호수 깊이로 가라앉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이 죽음이라는 사실보다도 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욕망의 실현이었으므로, 에릭은 선뜻 후자를 택함이 마땅하건만. 그는 서둘러 연인을 따라나서는 대신 조용히 반문한다. 돌아올 말을 뻔히 알면서도 미련스레 되물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돌아간다니 어디로? 당신의 시간으로, 아니면 죽음 저편으로? 앤은 쓴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쉽게 읽어내며, 에릭은 다시금 비참 속에 붙들려 넘어진다. 그녀가 제게 죽음을 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 그녀 또한 슬프고 불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에릭은 연인의 차가운 뺨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얌전히 고개를 기대어 오는 앤의 내리감긴 눈꺼풀이 숨결마다 미약하게 팔랑인다. 장밋빛 뺨도, 붉은 입술도 예전 그대로다. 정말로 마지막 그녀를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까맣고 아름다운 눈동자마저 오히려 그녀를 집어삼킨 죽음의 빛으로 더욱 교교하고 깊어진 듯하다. 한낱 인간이 죽음 뒤에도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나. 눈 앞의 그녀가 정말 제가 사랑하던 앤이 맞을까. 에릭은 이제 와 의문하지만, 허상이라기엔 너무도 공고한 실체가 제 손을 마주 잡아 주고 있었다. 차라리 죽음이 앤의 육신을 입고 저를 마중 나온 것이라면 좋을까. 그녀의 손을 이대로 잡고 떠나간다면 진실된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앤이 저승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서 뒤쫓아 가는 것이 옳으련만.

에릭은 자꾸만 대답을 미룬다. 고개를 한껏 숙이고 몸을 떤다. 저를 만지는 앤의 손길이 이토록 간절할 수가 없어서. 이 찰나에 영영 머무르고 싶기만 해서. 차마 삼키지 못한 눈물이 마른 뺨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린다. 에릭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따르겠소. 그 한 마디에 얼만큼의 간절함이 깃들어 있는지 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에릭의 선택을 대신 할 수 없다. 그것만은 결국 이승에 남겨진 자의 몫이었다. 한참 흐느끼던 에릭이 툭툭 끊어지는 호흡으로 더듬대며 말을 잇는다. 허나 당신은 늘 내게 삶을 강권하지 않았소. 이제 와 내게 선택을 묻는다면, 나는…… 끝맺어지지 못한 문장이 눈물로 녹아내린다. 앤과 함께 보낸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에릭의 뇌리를 스친다. 극장 앞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지독한 사랑에 휩쓸려 속절없이 흘러가던 시간을 내리 겪으며 지금껏 얼마나 행복하고 또한 처참했는지. 그녀를 제 앞에 데려다 놓았고 또 다시 빼앗아 간 야속한 시간과 저주스러운 신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 지르고 싶었으나 이제 와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에릭은 제 품에 겨우 남아 저를 올려다보는 앤의 마지막 가능성을 위태롭게 끌어안는다. 육체를 작동시키는 회로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염없이 울다 보면, 에릭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하나의 진실을.

그들의 이별은 진작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세계를 넘나드는 앤의 기적이 무한정 이어지지 않으리나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에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그랬기에 서로와 마주하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겨 언약의 증표를 나눈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정말로, 죽음이 이토록 빠르게 들이닥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어느 한편의 세계를 버리더라도 더 가까이에서 함께할 것을 그랬지. 그것만이 에릭에게 남은 유일한 후회였다. 에릭은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앤의 머리칼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 넘겨 준다. 앤. 내 사랑, 내 생명. 침통한 목소리가 앤에게 다가간다. 그는 지금 스스로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끝내 이런 인사만은 건네고 싶지 않았는데. 힘겹게 달싹이던 에릭의 입술이 끝내 온전히 열린다. 흩어지는 침음 너머로 울음 섞인 한 마디가 기어코 떨어져 나온다. 내게…… 작별할 기회를 주어 고맙소.

그 말에 앤이 마침내 웃는다.

앤은 팔을 뻗어 에릭을 가득 끌어안는다. 품에 넘치게 들어차는 에릭의 온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는 에릭 역시 그녀의 온기를 느낀다. 귓가에 쏟아지는 그녀의 고백이 곧 흩어질 물거품처럼 아스라하다. 마지막 순간 앤은 쉼없이 애틋하게 속삭인다. 그녀가 에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를 얼마나 오랜 시간 오랜 마음으로 간절히 그리워했는지. 그들을 처음 만나게 한 것이 진정 기적이라면, 만약 그것을 위해 대가로 치러진 것이 그녀의 목숨 일부라면. 자신은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당신을 잠시나마 돌볼 수 있어 기뻤다고……. 조잘대는 앤의 눈가에도 물기가 차오른다. 앤은 몇 번이고 연인의 이름을 부른다. 에릭, 에릭. 당신은 정말 내 세상 전부였어요. 사랑해요, 에릭. 그거 알아요? 사실은 나도……

 

당신과 함께 살고 싶었소.

 

품에 넘치던 온기는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그녀가 처음 찾아들었을 때와 같이, 그녀는 어떤 경고도 없이 떠나가고 없다. 에릭에게 남은 것은 금세 사라져 가는 온기와 그들이 나누어 낀 반지 하나, 그게 전부였다. 에릭은 텅 빈 양팔로 스스로를 끌어안는다. 여전히 멎지 않은 눈물이 괴롭게 몸을 웅크리며 쓰러지는 에릭의 옷깃을 뜨겁게 적신다. 그녀는 왜 항상 멋대로 찾아들었다가 또 사라지는지. 어떤 예고라도 해 주었더라면, 적어도 약간의 유예나마 더 주었더라면. 끝도 없는 욕심이 원망으로 화한다. 억지로 자리를 딛고 일어선 에릭은 삭막한 지하를 돌아본다. 잿더미에 불과한 모닥불과 몽땅해진 촛대들, 엉망으로 망가져 가는 피아노가 눈에 들어온다. 핏발 선 눈으로 그것들을 노려보던 에릭은 떨리는 손을 들어 젖은 눈가를 옷소매로 닦아낸다. 우선 죄 닳아버린 양초들을 새것으로 바꾸어야지. 그다음엔 호숫가에 불을 피우고, 오래 버려 두었던 영혼의 친구를 다시 새것처럼 닦아내고 매만져 불멸의 음악을 피워올리게 하리라. 이 순간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선율은 그의 연인을 애도하기 위해 연주될 것이었다. 애도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며, 또한 그것은 완결된 슬픔이다. 에릭은 제 인생의 거대한 한 장면이 지나갔음을 비로소 감각한다. 어느 것 하나 돌이킬 수 없더라도 그것만큼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었다. 앤과 재회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그의 남은 일이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당신을 조금만 덜 그리워해야지. 당신 생각은 조금만 덜어내고, 건반을 두드리고 오선보를 까맣게 물들이는 데에 정신없이 몰두하며 지내야지. 그렇게 음악으로 쌓아올린 층계들은 결국 나를 당신에게로 이끄는 길이 되어 주리라고. 에릭은 믿는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지하는 에릭의 손끝에서 다시 밝아진다.

그가 띄워 올린 수백 개의 불빛이 한방향으로 일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에릭은 이곳에 갇혀 울던 유령을 이끌어 진짜 삶 속으로 내보내 주었던 연인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바랐던 소망을 대신 이루기 위해서라도 에릭은 삶을 끝까지 계속해야 했다. 그가 스스로 점화한 빛은 다시 꺼지지 않을 것이다. 에릭이 살아가는 한, 결코 두 번 다시는. 그것이 못내 슬프기도 했지만…… 단지 자신의 마지막에 하나 해야 할 일이 에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내주었던 연인을 그때는 스스로 찾아나설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쫓아갈 차례라고, 그리고 당신을 이 손 안에 다시 쥐게 되는 그 날이면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서로의 곁에서 함께하게 될 거라고. 에릭은 몇 번이고 생각을 되새긴다. 그의 거칠어진 손이 먼지 쌓인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젖힌다. 소름 끼치도록 삐걱대는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상앗빛 건반은 의외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을 것처럼 뽀얗고 매끄러운 빛으로 반들거리고 있다. 지금껏 덮어 둔 채로 방치했기 때문이겠지. 에릭은 손을 뻗어 가온도를 길게 눌러 본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음정이 생각보다는 듣기 싫지 않았다. 그제서야 에릭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고인다. 손보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군, 중얼거리면서. 에릭은 아직 축축한 옷소매를 걷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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