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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 of Holiday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 - 비지터 드림 / 4천 자, 오마카세

그날은 비공식적인 휴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미친 듯 비가 퍼부었다. 어지간한 날씨였다면 일정은 당연스레 강행되었겠으나, 함께 밀어닥친 돌풍 탓에 곳곳의 창문이 박살나고 더러는 사람이 차도로 떠밀려 내려가기도 했으므로 모처럼 종일 내근이 결정되었다. 출장 없는 날이라니 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만큼은 모두,가 위에 계신 분에게 내심 은밀한 감사를 올렸을 것이다. 진상이야 뭐 어쨌든. 손바닥만한 창문에마저 전단지를 두껍게 덧대어 사무실 안은 평소보다 어두침침하고 눅눅했다. 어깨너비 정도 되는 좁은 책상에 각자 빠듯하게 똬리를 튼 연장자들은 부동자세로 타자기를 두들기고 있었다. 맞은편 앉은 사람이 담배를 줄창 피워대는 탓에 아편굴처럼 사방에 연기가 한가득이었다. 그의 발치마다 수북이 쌓인 꽁초 더미에서 악취가 났다. 눈이며 코가 따끔거렸다. 지독해. 서류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남자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지던 참에, 맞은편의 그가 때맞추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남자는 표정을 정돈하고 느리게 고개를 든다. 앳된 얼굴을 있는 대로 험악하게 찌푸린 동료, 아니 선배가 고장난 라이터를 저편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챙강, 둔탁한 소리가 말단 직원의 헛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뭉개진다. 성질하고는. 옆자리에서 문서 작업에 열중하던 연장자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 안쪽을 뒤져 그에게 성냥갑 하나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기껏 인사까지 해 놓고도 그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될 법한 짧은 성냥을 화풀이하듯 몇 개 부러뜨린다. 내내 미동도 없던 연장자의 시선이 그제야 언뜻 스쳤다. 작은 나무토막들은 꽁초의 무덤으로 함께 가 쌓였다. 치익. 성냥이 마찰면에 긁히며 마침내 불이 붙는다. 다시금 짙게 피어오르는 연기구름.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자리, 서류가 있는 곳에 눈을 맞춘다. 목이 칼칼했다. 기침을 억지로 삼킨다. 자판을 타건하던 손의 템포가 문득 어긋났다.

여전히 담배가 불편하신가 봅니다. 괜찮습니다, 견딜 만해요. 그러니까 그 견딘다는 부분을 말하는 건데. ……. 타이밍 좋게 또 기침이 올라온다. 입을 꽉 다문 채 말이 없는 남자를 연장자가 흘긋 쳐다보았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시선은 금방 거두어진다. 그 옆자리에서는 여전히 아랑곳도 않은 채 연기를 뻑뻑 피워올리고 있었다. 기실 이 안의 누구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흡연에 열중할 것이었으나 이런 고급품은 흔하게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남자 앞에 앉은 둘이 가만히는 두고 보지 않으리라. 따라서 사무실에 들어찬 연기는 오히려 말단들에게 간접 흡연의 축복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심신이 불쾌한 것은 오로지 남자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담배를 짓이기고 싶었으나 우선 일을 계속해야 했다. 자꾸 머리가 지끈거려 집중이 흩어진다. 남자는 기계적으로 자판을 내리누른다. 새벽 안으로 처리해야 할 명단이 아직도 수십, 수백 개 남아 있었으므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마주 앉은 그 역시 끝도 없는 업무에 이골이 났는지 얼마 안 있어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는 숨소리가 시끄러운 타건음 사이에 끼어 조각난다. 그 규칙적인 호흡과 함께 주변이 매캐해진다. 남자가 건조한 눈을 억지로 깜박이는 사이 누군가의 손,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쥔 손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당연히 연장자의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재차 확인한다. 그는 어렴풋이 웃고 있다. 같이 피우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물론, 제안을 정중히 사양한다. 이제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웬일인지 그는 눈썹을 한번 치켜올렸을 뿐 더 뻗대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목재 책상에 새끼손톱 크기의 둥근 테두리가 검은 낙인처럼 찍혔다. 누구의 눈이 먼저랄 것 없이 비슷한 모양으로 가늘어졌다.

자국이 남았군요. 한두 번도 아닌데 유난이시네요. 업무에 집중하시죠. 주제넘게 충고도 할 줄 아네? 자칫 길어지려는 대화를 연장자가 잘라낸다. 조용히 좀 하지.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 일말의 내색조차 없다. 그게 오히려 남자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남자는 말을 늘이는 대신 힘껏 미소지었다. 순간 꿈틀, 요동치는 얼굴들의 움직임을 놓칠 리 없다. 기묘한 승리감. 하지만 피곤했다. 남자는 다시 타자기에 머리를 처박는다. 또 누군가 한숨을 쉬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는지 창문이 자꾸 덜걱거렸다. 책상이 타들어간 자리가 시선 끝에 자꾸 밟혔다. 흔적을 부여하는 일은 자신의 역할이지 다른 누구의 몫이 아니었을 텐데. 이런 사소한 그을림 따위가 남았다고 해서 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다만 기분이 나빴다. 앙갚음이라도 하고 싶었다. 상당히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우습게도. 찬바람을 좀 쐬고 싶었지만 어디로도 피신할 수 없었다. 비가 그치기 전에는 어림도 없지. 대문도 발코니도 진작 단단히 잠겼을 것이었다. 연기는 그러고도 몇 시간이나 더 자욱했다. 태울 담배가 남아나지 않자 뒤늦게 주변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린 것이 잔여하는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류를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본 탓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 없나, 남자는 생각한다. 영원히 드높을 것만 같던 문서의 탑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풍도 차츰 잦아드는 모양인지, 창문 역시 얌전해진 지 꽤 되었다. 허락을 구한 말단 하나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전단지를 조심스레 뜯어냈다. 금 간 유리창에 맺힌 이슬비가 거미줄 위의 그것 같았다. 보고를 마치고 제자리로 향하는 말단의 발아래에 검은 잉크가 흐릿하게 묻어난다. 바닥 위 이지러지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 온다. 이제 돌아갈 수 있겠네요. 어디로요? 그걸 왜 내게 묻습니까? 농담입니다. 금세 사무적인 태도로 변한 연장자가 남은 종이뭉치를 정리한다. 각 잡힌 소맷단 아래 크고 굳센 손에는 어떤 얼룩 한 점도 없다. 외근을 나가지 않았으니 마땅한 일인가 싶다가도 돌연히 그 모습이 낯설어진다. 이래서야 보통 인간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관찰하는 시선을 감지한 연장자가 눈을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받는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금방 잠잠해진다.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다. 불규칙한 리듬으로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사무실에 붙박여 있던 모두가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퇴근길에 한잔할까요? 가방을 잠근 연장자가 옆자리의 그와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몹시 신나지도 꺼림칙하지도 않은 웃음 어린 표정으로 술은 언제라도 환영이죠, 대답했고 남자는 잠시 고민했다. 오랜만의 비공식 휴일이었으므로 일찍 들어가 잠이라도 더 자는 편이 나을지 몰랐으나 어쩐지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 퇴근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이것이 핑계인지 아닌지는 남자조차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남자는 뒤늦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따라 걷는 걸음이라면 좀 나을지도 몰랐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후회는 어차피 나중의 일이다. 애써 봐야 앞날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말단들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세 사람은 본부 건물 바깥으로 나온다. 차고 습한 공기가 뺨을 스친다. 젖은 땅을 아무렇게나 철벅거리는 이도 있었고 웅덩이를 신중하게 피해 걷는 이도 있었다. 어스레한 새벽빛이 남자의 마른 눈꺼풀을 찔렀다. 곧 다시 땅속으로 들어갈 테니 상관 없지. 아직도 코가 매웠다. 신선한 바람 냄새를 맡자 그제야 입맛이 좀 돌았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매번 들이붓는 이유는 또 뭘까, 상념이 지나간다. 남자는 앞서 걷는 이들을 쫓아 길을 나선다. 골목을 몇 번 돌아 지하로 내려가면 그들이 비밀리에 애용하는 회식 장소가 있었다. 그곳의 창고는 대체 누가 채워 넣는 건지 남자는 가끔 궁금해했으나 그런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잔뜩 마시고 취하면 그만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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