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당한 것은 누구인가
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그래서, 이게 그 거짓말의 결과군요.”
“뭐, 미리 받은 셈 치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생일까지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으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레오나 선배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고 반쯤 식은 커피만 홀짝거렸다.
하여간. 곤란할 때가 되면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의 전매특허 같은 거라지만, 대뜸 사람을 데려왔으면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나는 부탁하면 그냥 들어주는 사람인데, 왜 다들 자꾸 사람을 속이려고 하냔 말이다. 아무리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이라고 하지만, 그건 속는 사람 입장은 생각하지 않은 격언이라고.
‘뭐,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화낼 이유는 없다. 원래라면 모처럼 한가한 주말을 맞아 기숙사 청소나 한 후 책을 읽거나 낮잠이나 잘 예정이었던 나를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와주지 않았나. 사실 얻어먹는 처지라 가격표는 보지 않고 레오나 선배가 주문하게 했지만, 나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다. 가게 내부와 다른 손님들의 복장만 봐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겠는데, 굳이 가격표까지 볼 필요가 있겠나.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은혜도 모르고 거짓말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입에 올린 건……. 저 선배가 갑자기 나를 이 레스토랑에 데려온 이유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리 집안 행사 가기 싫어도 상의도 없이 저를 팔아먹어도 되는 거예요? 애초에 제 생일이라 데이트해야 한다고 불참하는 걸 받아들이던가요?”
“키파지가 별말 안 하던데. 네게 안부나 전해달라더군.”
“……진짜예요?”
“글쎄다? 아니라 해도 이미 불참한 걸 어쩌겠어?”
그건 그렇다. 일단 키파지 씨와 측근들이 저 변명을 받아주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행사 당일인 오늘 고향에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여길 온 이상, 인제 와서 시시콜콜 따지는 건 피곤할 뿐이겠지.
그래. 그러니까 더는 따지지 말자. 허튼짓에 에너지를 쏟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리 결심한 나는 디저트로 나온 이름 모를 작은 케이크를 디저트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초콜릿과 라즈베리 잼의 상큼함은, 복잡한 머릿속을 다스리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하, 그렇게 맛있냐.”
“예?”
“방금까지는 그렇게 심통이 나 있던 얼굴이, 케이크 한입으로 풀리길래.”
“…….”
그래. 솔직히 맛있다. 하지만, 그렇게 얼굴에 티가 많이 났나?
일부러 민망한 사실을 지적하는 꼴이 얄미워 가만히 쳐다보자,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본인 몫의 케이크까지 내게 내밀었다.
“그렇게 좋으면 더 먹던가. 나는 단건 됐어.”
“그러면 디저트는 하나만 달라고 해도 됐을 텐데.”
“네가 먹으면 되는데, 굳이 왜? 넌 이런 거 좋아하잖냐.”
어라, 이거. 일부러 날 위해서 두 개 시켰다는 건가.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면 기껏 내 앞에 놓인 두 번째 케이크가 모래가 될지도 모른다. 원래 강자는 약자를 놀려도 되는 법이지만, 약자가 잘못 이를 드러냈다가는 그대로 잇몸만 남게 되는 법이지. 다행스럽게도 주제 파악 하나는 잘하는 나는 선배의 말을 되짚는 대신 포크질 세 번이면 사라지는 케이크들을 먹어 치웠다.
여전히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의 커피를 느긋하게 마시고 있는 레오나 선배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밥은 맛있었냐.”
“죽기 전에 밥을 먹는다면 여기 밥으로 먹어야지 싶을 정도의 식사였습니다.”
“하, 말은 잘하는군.”
황당하다는 듯 반응하고는 있지만, 부드럽게 휘는 눈썹을 보니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겨우 잔을 다 비운 선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가지. 그나저나 넌 커피를 무슨 물처럼 마시냐.”
“케이크랑 먹다 보니 금방 마신 거죠. 그리고 선배가 천천히 마시는 것 아닐까요? 그거에요? 그, 뜨거운 거 못 마시는……. 고양이 혀?”
“딱히 그렇진 않다만.”
‘그럼 사자 혀인가요?’라고 하면……. 분위기가 싸해지겠지? 본능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아재 개그를 필사적으로 억누른 나는 얌전히 선배의 뒤를 따랐다.
자, 그럼. 우리는 이대로 돌아가는 걸까. 사실 이 동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냅다 선배가 ‘밥 먹으러 가자’라고 해서 끌려온 거라 이후론 뭘 어쩔 생각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키파치 씨에겐 내 생일이라 데이트간다고 했다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지 않나. 내 생일은 보름도 넘게 남았고, 이건 데이트도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 데이트는 맞나?’
사람마다 데이트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보통 단둘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건 데이트라고 하긴 하지. 이제 이 이후 영화 보고 쇼핑하고 카페까지 가면 딱 정석적인 데이트인데. 물론, 집에 가서 누워있는 게 제일 좋다고 하는 레오나 선배가 이 코스를 따라갈 리는 없지만…….
“어이, 아이렌.”
“네?”
“너 이거 입어봐라.”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지.
바닥만 보며 걷다 말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언제 거기까지 간 건지 근처 가게의 옷걸이에서 겉옷 하나를 들고 나를 보고 있는 레오나 선배가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무슨 사람이 순간이동처럼 움직이네. 그나저나 저 겉옷, 디자인을 보면 남녀공용 코트 같긴 한데……. 나보고 입어라고?
“갑자기 왜…….”
“너 아까 밥 먹다가도 몇 번이나 팔 문지르면서 부스럭거렸잖냐. 추워서 그런 거 아니냐?”
아니. 그걸 다 보고 있었나. 역시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까, 관찰력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추워한다고 옷을 사 주는 건, 그, 뭐랄까. 좀 지나치지 않나? 단골 음식점이 멀어서 속상하다고 하니 집 근처에 단골 음식점 2호점 입점시켜주는 재벌 2세냐고.
‘맞다, 이 사람 재벌보다 더한 사람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레오나 선배 지갑 사정으로 치면 저 코트는 아무리 비싸 봐야 목마르다니 음료수 사 주는 정도의 금액밖에 안 될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 편해지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챙겨주다니. 이래서야 아까 식당에서 거짓말한 걸로 뭐라고 한 게 민망해지잖아.
“괜찮아요. 그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되세요.”
“미리 받는 생일선물인 셈 치라고. 오늘은 네 생일로 데이트 나온 거니까.”
“그게 그렇게……. 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지금 데이트가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는 말에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자, 레오나 선배는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려 웃어 보였다.
“이러면 거짓말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표정 펴고, 이거나 입어보라고.”
“…….”
나 참. 언제부터 그렇게 정직하게 살았다고, 이렇게 챙겨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줄 아는 사람은 없고, 그 웃는 얼굴이 3초 이상 보고 있으면 눈이 멀 것만 같은 미남의 얼굴이라면 쌓아 두었던 화도 사라지는 법이지. 애초에 그리 화가 난 적도 없었던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옷을 받아들었다.
“그럼 데이트니까,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영화 보고 가요.”
“웬 영화……. 뭐,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거니 상관없나. 뭘 보게?”
“잠깐. 설마 영화 보다가 잘 건 아니죠?”
“재미없으면 그냥 잘 건데.”
이거 안 되겠네. 절대 못 자게 시종일관 폭발음이 들리는 액션 영화로 골라야겠다.
매주 어떤 영화가 개봉하는지 정도는 꿰고 있는 나는 지금 상영 중인 영화 중 가장 시끄러울 것 같은 영화를 추리면서 옷을 입어보았다.
선배가 골라 준 옷은 내게는 조금 컸지만, 제법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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