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황혼녘

실리지 않은 인터뷰

사이퍼즈 릭 톰슨 드림

1

μετα δε το παραδοθηναι τον ιωαννην ηλθεν ο ιησους εις την γαλιλαιαν κηρυσσων το ευαγγελιον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 και λεγων οτι πεπληρωται ο καιρος και ηγγικε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μετανοειτε και πιστευετε εν τω ευαγγελιω (ΚΑΤΑ ΜΑΡΚΟΝ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2

렌 스트리트 7번지에는 색이 다른 문이 세 개 달려 있었다. 쨍한 푸른색, 파르스름한 흑색, 그리고 벽돌색에 가까운 붉은색. 말인즉슨 서로 현관을 공유하지 않는 가구 수가 최소 셋이라는 뜻이었다. 암만 서로 벽을 맞대고 살아간대도 번지수 하나당 한 가구가 자리잡는 게 보통인 동네에서는 제법 눈에 띄는 형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 그 집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세계 대전과 대공황이 두 차례에 걸쳐 할퀴고 지나간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무관심이란 일종의 시민의식이자 덕목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런던 자체가 아직 전쟁의 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기도 했다. 유럽 전역으로 모자라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까지도 집어삼킬 뻔했던 대전은 끝났을지언정, 각지에서 국지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능력자 전쟁은 기실 진행 중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비능력자들이 전투를 목도할 일은 없었다. 그 중 대부분은 안개에 둘러싸인 이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참호와 포격과 전투식량으로 쌓아올려진 그들의 전쟁은 끝이 난 지도 어언 십 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런던의 선량한 - 그리고 능력자가 아닌 - 시민들은 원한다면 저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끄고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허나 안개가 아무리 짙은들 전란이 몰고 다니는 특유의 어두움을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무관심은 여전히 유효한 방어 기제로서 사람들의 뇌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렌 스트리트 7B번지에 사는 사람들은 이 기묘한 시민의식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부부 같아 보였다. 눈치가 좀 있는 관찰자라면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아,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나 보다, 류의 간략한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그러나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래층에 사는) 선량한 이웃이 알아차린다면 당장 짐을 챙겨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 할지를 고민한대도 이상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비단 7B번지의 그들이 능력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런던은 분명 꽉 막혔지만 능력자들을 무턱대고 배제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전쟁 속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였고, 그들의 이웃은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심약했다. 그래서 7B번지의 부부는 그들 스스로를 겹겹이 싸인 비밀 안으로 밀어넣어야만 했다.

그리고 클리브 스테플은 지금 막 그 비밀의 심부로 걸어들어갈 허락을 따낸 참이었다. 아마 내 기자 생활을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고 그는 생각한다. 세인트 앤드류스 가든스를 등지고, 7B라고 쓰여 있는 새까만 대문 앞에 서서, 굴뚝새wren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노커를 꼭 쥔 채로.

3

아, 왔어요? 들어와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그이는 지금 없어요. 아마 짐작했겠지만……. 퇴근하려면 아직 멀었거든요.

보통 열한 시쯤 들어오신다고 안 그랬나요?

맞아요. 그리고 아직도 일곱 시간쯤 남았죠. 이럴 때면 확 시간을 당겨 버리고 싶다니까. 애플파이 괜찮죠?

4

7B번지의 티 타임에 초대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클리브 스테플은 확실히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자그만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찻잔을 받아드는 것은 늘 어느 정도의 용기를 요구하긴 했다. 처음으로 이곳에 초대받아서 차를 마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 - 아, 정수리에 맹렬하게도 내리꽂히던 빈티지 찻잔이여 - 언제고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낸동 소파 끄트머리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던 젊은 기자는, 집주인에게서 애정 어린 핀잔을 듣고서야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댄다. 대강 벗어 놓은 코트가 등 뒤에서 맥없이 사부작거린다. 

저런, 구겨지잖아. 이리 줘요. 저쪽에다가 걸어 놓을 테니까. 말과 동시에 코트를 뺏어 든 여자가 문간의 옷걸이로 걸어가는 동안 클리브는 소파에 반쯤 파묻힌 채 실내를 둘러본다. 이미 몇 번이고 방문한 적 있는 집이었지만, 눈에 차는 전경이 또 엄청나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평일 이 시간에 온 적이 있었나? 자문한 기자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이 시간은 고사하고 평일에도 들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 그는 여자보다 그의 남편 쪽을 먼저 알았고,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단 둘이 차를 마실 정도로 친해진 지는 정말 오래되지 않은 터였다. 그마저도 7C번지 쪽의 도움이 컸고 말이다.

"차는 그냥 평소에 마시던 걸로 괜찮아요?"

"예, 뭐든……."

찻상을 준비하는 집주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기자는 이내 맞은편의 방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마른 풀꽃을 엮어 만든 리스가 달린, 아마도 침실일 방문을 보다가, 고개를 조금 더 꺾어 그 다음 문으로, 또 그 다음 문으로. 그리고 나서는 햇살이 들이치는 창틀로. 한 바퀴를 아주 돌고 나면 새삼 놀랍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방 둘에 욕실 하나, 창문 두 개짜리 거실과 주방으로 구성된 플랫flat은 그 안에 기거하는 능력들의 크기에 비하면 턱없이 평범하다.

7B번지의 부부는 양쪽 모두 능력자였다. 아내 쪽 - 이 집의 주인이자 오늘의 인터뷰 대상 - 은 그 정체가 드러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서도, 진행 중인 전쟁에서는 둘 중 어느 쪽의 존재감도 간과할 수 없었다. 남자는 공간을 뛰어넘었고 여자는 시간을 매만졌다. 그들의 존재만으로 엎어진 작전과 그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립할 수 있었던 작전들만 해도 아마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그들은 둘 중 단 한 쪽만으로도 불가능을 가능의 범주로 끌어 오는 패였다. 상식 있는 지휘관이라면 그들을 빼놓고 방정식을 세우는 정신나간 짓 같은 건 하지 않을 터였다. 그 둘을 한데 두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누가 달걀을 한 바구니에 전부 몰아 둔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함께였고 그러기를 고집했다. 다름아닌 이 집에서. 방 두 개에 자그만 욕실 하나가 딸린 지극히 평범한 플랫에서,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한 부부인 양 일상을 꾸려나갔다. 이 동거가 전술 면에서 결코 현명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자명했다. 허나 누구도 감히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일차로는 애초에 그 남자 없이는 그 여자가 이 전쟁에 뛰어들었을 리 없었으리라는 명제가 대안타리우스 연합 안에서 공공연히 퍼진 진리였기 때문이었겠으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상임을 클리브 스테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미래를 엮어 둔다는, 지극히 당연했던 일마저도 지나치게 불안해진 시대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위태로운 행복이나마 영위해 보려는 어떤 발악에 가까운 행위를 함부로 꺾으려고 들 이는 많지 않았다. 비밀로 겹겹이 둘러싸인 조그만 플랫은 (보기 드물게도) 행복으로 채워진 비눗방울과도 같아서 말 한 마디로도 손쉽게 박살날 테였지만, 무관심과 삭막함으로 점철된 전장에서 일종의 환기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몇 없었고 짐작하는 이들은 넘쳤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때로는 짐작 선에서 머무를 때 가장 아름다운 것도 있는 법이었다.

"클리브."

"……."

"클리브!"

"ㅇ,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인터뷰 하겠다고 불러 놓고선,"

"아, 잠깐 다른 기사 생각을 좀……. 잠시만, 수첩만 꺼내고 바로 들어가죠."

5

클로드 코르뷔지에, 코드네임 카이로스καιρος……. 이거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일 텐데, 내 입으로 굳이 말해야 하나요?

형식상의 절차에 가까우니까요, 미스 코르뷔지에.

그건 알지만 낯간지러운 건 어쩔 수 없어서. 그리고 클로드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요.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코드네임 카이로스, 나이는 세지 않은 지 좀 돼서 모르겠고, 누가 물어볼 때는 대충 스물일곱이라고 하고 다녀요. 국적은 영국. 이름이 이래서 종종 프랑스인으로 오해도 받지만 서류 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고……. 키는 마지막으로 쟀을 때 168cm였어요. 등록도 그렇게 돼 있을 거고. 소속 없음, 체중도 말해야 하나? 이건 알아서 조회해 보시든가 하시고. 아마 약간 바뀌긴 했을 거야.

직업은요?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죠. 주로 프랑스어와 영어를 많이 다뤄요. 요전까지는 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일했었고요……. 퇴직 사유는 아마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그 이야기는 이따가 조금 더 해 보도록 하죠. 그럼……. 시작할까요?

6

한편 렌 스트리트 7B번지의 집주인은 그의 손님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긴장하고 있었다. 비단 집에 손님이 와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꼭 지금처럼 혼란한 시국 속이 아니더라도, 시간 속의 방랑자는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자는 생각해왔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여자는 그간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활용해 왔고 그만큼 다채로운 순간들을 살아왔다. 시간의 주박에서 한 발을 빼고 나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은 여자의 걸음걸음을 시시각각 변하는 노을만큼이나 풍요로운 색으로 물들여놓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 역설적이게도 - 그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오롯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거기에 시선을 뺏기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지만큼이나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 둘의 교집합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지만 덮어 놓고 주변인들을 시험하기에 여자는 너무 신중했다.

허면 지금의 이 인터뷰는 어떻게 된 것이냐. 여자가 그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것이 불안한 침묵보다 나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 역시 사람이었다. 그를 길러낸 이가 사람이었고, 그가 매일같이 부대끼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굿간에서 자란 고양이마냥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꼴이라고 하더라도 끼어 있는 것은 끼어 있는 것이었고, 혼자만의 비밀은 다만 고독만을 더 짙게 드리울 뿐이었으며, 곁에 둔 이들이 자신을 알아 주기 바라는 것은 그다지 별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클리브 스테플은 이미 여자의 능력을 겪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왕 엎질러진 물인 것, 여지를 조금 더 내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7

무슨 이야기를 해 보면 좋을까요?

당신과 관련된 얘기라면 아무거나 괜찮아요. 거기서부터 시작해나가면 되니까.

음,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내 능력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죠? 릭이 공간을 뛰어넘을 줄 안다면, 나는 시간을 뛰어넘을 줄 알아요. 애석하게도 누굴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만요. 그이하고는 같이 프랑스에 다녀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어딜 데리고 가 줄 순 없겠네. 그러니 믿는 건 당신 자유예요.

하하....... 이미 겪어 알고 있는걸요. 기억이 좀 흐릿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는 좀 흐린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보기 썩 좋은 꼴은 아니었거든요, 잘 해결됐으니 망정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 그런데…….

응?

시간을 뛰어넘는 것과 멈추고 되감는 것은 다르지 않나요? 제가 알기로 당신의 능력은— 오, 이런.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었을까요?

아뇨, 예리한 지적이에요. 이걸 기사로 쓴다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이건 적당히 듣고 흘리는 걸로 해 줘요.

물론입니다.

뛰어넘는 것과 되감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예요. 관점의 차이니까. 나도 그 뒷면을 들여다볼 생각을 한 지가 얼마 안 됐고. 그래서 종종……. 엄밀한 어휘 사용을 빠뜨리곤 한답니다. 애초에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할 일은 더 적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될까요?

그래요.

혹시 당신이 “뒷면을 들여다보게” 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8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글쎄. 그것은 아마도 아니다. 던져진 질문에 답이 되어 줄, 날카롭고 명확하게 떨어지는 문장을 찾아내기 직전에 주어지는 잠깐, 아주 잠깐의 찰나에도 여자는 쉬이 침잠한다. 들이치는 기억에 순순히 떠밀려 흘러간다. 특별한 계기라는 말에 선명하게 살아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자 했던 결심을 뒤틀고 안온한 일상을 흔들어 놓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고 또 언제를 살아가든 간에, 가장 날카로운 검으로 베어 낸 것처럼 유리되어 보존될 순간.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그 한때. 

바로 그때, 그곳에, 석양이 집어삼킨 도시의 꼭대기에, 아스라이 - 그러나 분명히 - 머무는 몇 마디 말이 있다. 켜켜이 쌓인 상처가 있고 그를 악의 없이 헤집는 눈길이 있다. 가을 바람에 섞여 이지러지는 한숨과 노을빛 뺨이, 손끝에 걸린 머리칼과 턱끝에 고이는 직감이 있다. 거역할 수 없음에도 기꺼운 명이 있다.

계기라면 다만 그것, 그 기억뿐이었다. 회상만으로도 여자를 잔잔히 미소 짓게 하는 것. 물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남자는 아직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렴풋이 갈피 정도는 잡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완전히 알게 되까지는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그는 상처도 한숨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붉어진 뺨은 노을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언젠가는 그가, 그 말이 여자에게 어떤 무게로 와 닿았는지를 가늠하게 될 날이 올까? 그거야말로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흘러드는 생각을 곱씹는 내내 여자는 미소를 띠고 있다. 그가 어느 해질녘에 그랬듯이. 말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지만 대답은 이미 충분하다. 클로드 코르뷔지에가 릭 톰슨의 곁에 머물 때, 그의 친애해 마지않는 여행자에게 손을 뻗을 때, 개인의 이해利害나 거창한 대의 따위에는 한 점 미련도 없다는 듯이 웃을 때 - 그래, 꼭 지금처럼 - 언뜻언뜻 드러나는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 사이코메트리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젊은 기자는 그제야 이유 모를 긴장감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애정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생생히 목도할 때 찾아드는 일종의 경외에 가까운 감각이다. 결론이 남과 동시에 희미하게 머물던 위화감은 사라지고, 수첩 위를 바삐 달리던 펜 또한 자리에 멈춘다. 인터뷰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 대화가 지면에 실리는 일은 아마 없을 터였다. 클리브 스테플은 사려 깊은 인간이었고 비밀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행복을 부득불 깨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행복이 좋은 친구의 것이라면 더더욱. 런던 능력자의 삼 할이 그 집에 주목하고 있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애정을 글로 옮겨 놓는다고 한들, 직접 목격하지 않는다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터인데.

그래서 그는 그냥, 여자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애플파이와 블랙 커피로 꾸며진 티타임을 만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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