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꽃이 될 수 없다면 Chapter.1
쟈밀 바이퍼 드림
* ‘아리아브 나리야’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1.
아이렌은 운명을 열렬히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부정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우연도 존재하고 필연도 존재한다. 그러니 그 안에서는 운명이라고 할 만한 일도 존재하지 않겠나.
하지만 오늘의 이 일이 운명이라면, 신이란 참으로 짓궂은 존재가 아닐 수 없으리라. 난감한 얼굴로 스카라비아의 두 사람과 그림을 번갈아 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케이터랑 릴리아에게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을 한 명씩 데려오라고 해야지!”
“뭐라고?!”
“좋아! 얼른 케이터랑 릴리아에게 갔다 올게! 아이렌이랑 그림도 가자!”
“자, 잠깐! 카림!”
쟈밀은 재빨리 뛰어가는 카림과 그림을 잡지 못했다. 카림에게 호명되었음에도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아이렌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찬 쟈밀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은 그저 학원장의 명령에 따라 어둠의 거울 사용 허가 건에 대해 전하러 온 건데, 어쩌다 보니 열사의 나라에서 하는 전통 축제에 함께 가게 되었다. 화려한 불꽃놀이와 이국적인 땅, 그리고 두 사람의 고향이라는 점에 관심이 생겨 덜컥 따라가겠다 하긴 했지만. ‘행사 준비로 바쁠 거라 동행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라며 자신과 그림을 말리던 쟈밀을 보고 있자니 영 신경이 쓰인다.
“……벌써 가 버렸나.”
“카림 선배, 빠르네요.”
“넌 안 가도 되는 건가? 그림은 진작 뛰어갔다만.”
“한숨 쉬는 선배를 두고 제가 어딜 가겠어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진심에 착잡함 가득한 쟈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대체 저 입 안에 든 혀는 칼날인가 깃털인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듣기 좋은 소릴 내뱉는 아이렌을 지그시 노려보던 그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푸념했다.
“결국 6명이나 동행이 늘어버린 건가. 귀찮게 되어버렸군.”
6명 초대할 여유가 있다고 6명 꽉 채워 데려가려는 카림과 한 명이라도 챙길 사람이 적었으면 하는 쟈밀 사이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쟈밀은 그걸 알겠지만, 카림은 아마 그 사실을 모르겠지. 아이렌은 수심에 잠긴 쟈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제 결정이 옳은지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역시 괜히 가겠다고 했나?’
카림은 두 사람에게 열사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으니 꼭 함께 가자고 말했다. 축제를 주관하는 가문의 장남이 기꺼이 한 초대니까 별생각 안 하고 따라나설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아이렌은 실질적인 일은 다 쟈밀이 할 것을 알기에 상념이 끊이지 않았다.
‘나 좋자고 쟈밀 선배를 피곤하게 만든 건 아니려나. 내가 안 간다고 해도 그림 혼자 따라가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외국인 관광객도 올 정도로 크고 유명한 불꽃놀이 대회라면 신경 쓸 일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 그런 번잡한 상황에 자신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쟈밀은 무슨 죄인가.
아짐가의 사용인이 그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정말 곤란하다면 그림이 뭐라 떼를 써도 거절했을 건 안다. 하지만 이토록 곤란해하는 걸 보면 정말 따라가도 아무 상관 없는 건 절대 아니라는 소리이지 않겠나.
지금이라도 카림을 쫓아가 자신과 그림은 가지 않겠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할 때, 쟈밀이 주의를 끌기 위해 슬쩍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이렌, 넌 또 왜 심각한 표정이야?”
“예? 제가요?”
“그래. 방금까진 좋아서 웃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이런, 아무래도 생각에 잠겨있느라 표정 관리는 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이렌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생각을 말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슬그머니 고민하고 있던 걸 털어놓았다.
“그, 여섯이나 따라가는 게 좀 그러면 저는 빠질까요?”
나름 고심하여 꺼낸 말이었지만, 쟈밀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이렌의 말을 듣자마자 척수 반사적으로 이를 꽉 깨문 쟈밀은 팔짱을 끼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너 설마 그 생각 하느라 아무 말도 없었던 거였던 건 아니지?”
“하하.”
“뭘 실없이 웃는 거야…….”
누구는 너무 제 고충을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인데, 이 녀석은 너무 제 고충을 생각해서 문제다.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일 수 있을까? 말문이 막히는 그였다.
쟈밀은 아이렌이 호의로 저런 말을 한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상대가 과하게 눈치 보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 하나 빠진다고 덜 번거로워지지 않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그래도 5명과 6명은 번거로움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걸요.”
“단언하건대 네가 가장 손이 덜 갈 테니까, 그냥 따라와. 애초에 너 없으면 그림의 통제가 더 힘들어진다고.”
먼저 말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뒤에 말한 이유는 자신도 동의한다. 아이렌은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표정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할 말은 많지만 억지로 삼키는 이의 표정은 누구보다 잘 아는 쟈밀은 결국 착잡함을 떨치기 위해 마른세수한 후 좀 더 근본적인 것을 물어봤다.
“혹시 가기 싫은데 카림이 억지로 권한 건가?”
“예? 그럴 리가요! 저야 당연히 가고 싶죠, 선배 고향에 가볼 기회라고요! 제가 왜 싫어하죠?!”
“…….”
이렇게 깜짝 놀라서 언성을 높이는 걸 보니 저 말은 100% 진실이겠지. 혹시 카림이 멋대로 끌어들인 건 아닐까 걱정했던 쟈밀은 그건 아니라는 걸 알고 일단 안심했지만, 답답함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럼 그냥 기뻐해. 괜히 날 신경 쓴다고 이것저것 걱정하지 말고. 번거로운 일에 휘둘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히 자신 때문에 아이렌까지 불편할 이유는 없다. 이러나저러나 제가 겪어야 하는 고충이 같다면, 이왕이면 상대는 즐겁게 지내다 오는 게 좋지 않겠나. 그건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아이렌은 쟈밀의 의중을 눈치챘지만, 순순히 그러겠다 대답하진 못했다.
“선배가 신경 쓰이는 것도 있지만, 좀 더 복잡한 문제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복잡한 문제?”
“네. 선배 때문이라기보단, 제가 문제라고 해야 하나.”
왼쪽 눈을 다 덮는 긴 앞머리를 매만지며 잠깐의 침묵을 가진 아이렌의 고개가 스르륵 내려간다. 의도적인지 무의식적인 건지 시선을 피한 그는 웬만해서는 꺼내놓지 않는 깊은 속내를 입에 담았다.
“선배가 덜 번거롭기 위해선 저도 그림도 가지 않는 게 제일 나은 걸 알고, 그림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지 말라고 호통치는 것 정도는 잘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저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지 않고 있단 말이죠.”
여기까지 말했다면 더는 주워 담을 수도, 잊어달라 할 수도 없다.
제 말이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은 걸 아는 아이렌은 그제야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선배가 더 편할 방법이 뭔지 알면서도 욕심부리는 제가 싫어서 이러는 거예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싶고.”
감추지도 꾸미지도 않는 명확한 대답에 쟈밀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반응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누가 보면 자기가 이 녀석 대신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제게 있어 카림이나 아짐가에 휘둘리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휘두르는 당사자도 아닌 이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가진단 말인가. 게다가 단순히 제게 송구스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사태를 만든 자신을 미워한다고?
대체 아이렌에게 있어서 자신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설탕물 입힌 포도알처럼 달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와 아낌없이 애정의 말을 속삭이는 입술을 떠올린 쟈밀의 두 뺨에 열기가 올랐다.
“……넌 정말 이상한 부분에서 지독할 정도로 정직한 거 알고 있냐?”
“저는 제가 언제나 정직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그래?”
그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 여자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걸 말하지도 않는 게 함정이지.
그러나 오늘은 웬일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말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쟈밀은 그걸 고마워해야 할지 괘씸히 여겨야 할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챙길 사람이 늘어나는 건 번거롭긴 하지만, 어차피 카림이 정한 이상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선배가 말리는 게 안 먹히더라도 제가 거절하면 카림 선배도…….”
“하지만.”
역시 이럴 땐 자신도 똑같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주는 게 맞겠지.
참으로 공평한 대처법을 떠올린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답했다.
“네가 따라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니, 차라리 너만 따라간다면 이렇게 한숨 나오지 않을 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쟈밀을 보다가,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아, 역시 좀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 녀석은 이렇게 웃을 때가 제일 보기 좋다.
쟈밀은 그제야 겨우 올라간 상대의 입꼬리를 보고 안도했다.
“정말요?”
“그래.”
드디어 마음의 짐을 놓은 아이렌은 덥석 쟈밀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럼 제가 가서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손님을 일하게 시킬 순 없지. 그냥 그림만 잘 통제해 줘.”
“헤헤, 네.”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화를 주고받긴 했어도, 속으로는 크게 갈등했던 걸까.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헤실헤실 웃는 아이렌은 애착 인형을 껴안는 아이처럼 한참이나 탄탄한 팔에 매달려 있었다.
02.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열사의 나라로 가는 당일. 아이렌은 거울의 방에서 일어난 뜻밖의 소란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파서 갑자기 오지 못한 릴리아. 그리고 그런 릴리아가 고른 동행자는 다름 아닌 가시의 골짜기 차기 당주인 말레우스 드라코니아. 여기까지만 봐도 무언가 잘못된 게 느껴지지만, 결정적으로 소란스러워진 건 말레우스가 평소 자신을 따르는 종자 중 누구도 데려가지 않고 혼자 일행 사이에 끼여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부터였다.
‘하긴, 솔직히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말레우스 선배는 강하니까 사고를 당하진 않을 듯하지만,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는 사소한 실수가 외교 문제로 번지곤 하는데.’
제게 동행을 권유한 이 없이 혼자 와서 여정에 함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말레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문제 삼으며 동행에 난색을 보이는 쟈밀 때문에 실망하고 있고, 쟈밀은 그런 말레우스를 보며 난처해하고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나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아온 아이렌은 당연하게도 쟈밀을 이해했지만, 차마 대놓고 그를 편들어 주진 못했다.
왜냐하면.
“저기, 멀리서 천둥소리 들리지 않아?”
“내 귀에도 들리는 것 같은데……. 방금까진 맑지 않았어?”
이미 말레우스는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아, 제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무언가가 폭발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렌은 옆에서 하츠라뷸의 3학년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얼빠진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냥 그날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이 사단이 안 났으려나.’
세상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언젠가 제이드가 가르쳐 주었던 말을 늘 마음에 품고 사는 아이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가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것 같아 위장이 쓰려왔다.
만약 자신과 그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말을 전하러 갔다면? 카림이 권유할 때 ‘그냥 둘이서 오붓하게 다녀오세요’라고 단칼에 거절했다면? 그러면 이 난장판은 없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조차 운명이라고 하면, 제가 언젠가 반드시 운명의 신의 명치를 갈겨주리라.
아이렌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며 주먹을 꽉 쥐었다.
“드라코니아 군에게 들은 바로는, 3시간 전부터 여기서 서서 기다렸다고 하더군요.”
“우왓! 말레우스 군,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잖아!”
크로울리의 첨언에 케이터는 리액션까지. 무엇 하나 이 상황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 어색한 분위기에 입을 연 건 모두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이 여정의 총책임자 격 되는 이인 카림이었다.
“저기, 쟈밀. 뭘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친구들에게 태어나 자란 고향에 데려가는 거잖아.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고.”
“그렇지. 그저 학우인 네 고향에 가는 것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카림의 말에 냅다 거드는 말레우스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쟈밀은 이 대화를 충분히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지만, 점점 좋아지지 않는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 아뇨. 문제는 없습니다만…….”
설마 이런 주장에 야무진 쟈밀이 물러설 줄 누가 알았겠나.
같은 부사감으로서 쟈밀의 평소 성격을 잘 아는 트레이는 허탈하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고 해도, 쟈밀이 논파 되고 있다니……. 보기 드문 광경이네.”
“말레우스 군도 카림 군도, 주변의 고생은 알지도 못하고 속 편하다니까~?”
급히 물러서는 쟈밀을 본 하츠라뷸 3학년 콤비는 흥미롭다는 듯 속닥거렸지만, 아이렌은 이걸 조금도 재미있게 여길 수 없었다.
가진 자들은 주변의 고생은 알지 못한다.
케이터의 그 말에 뼛속 깊게 새겨져 있던 반골 기질이 깨어난 아이렌이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툭 던진 말은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지만, 모두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뜬금없는 홍일점의 발언에 모두가 입을 닫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기운을 느낀 그림이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꼬붕?”
“그림, 그냥 난 내버려 두고 너 혼자 다녀올래?”
“뭣?! 갑자기 무슨 소리냣!”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렌의 권유에 그림이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우며 외쳤다.
놀란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카림도, 말레우스도, 하츠라뷸의 두 사람과 크로울리마저도. 모두가 동행을 포기하려는 아이렌을 이상하게 여기며 경악했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는 건 쟈밀 정도였지만, 그 또한 태연한 건 아니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아이렌을 보는 쟈밀은 진심이냐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제게 쏠리는 시선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이렌은 평소보다도 더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왕 릴리아 선배도 없는 김에, 동행이 한 명 더 없어지면 신경 쓸 일도 줄어들겠지. 안 그래도 신경 쓰실 일이 많을 텐데 내 욕심 때문에 쟈밀 선배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어.”
불행하게도 이건 짜증이 나서 홧김에 던진 말이 아니었다. 아이렌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 했으니까.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방금까진 가겠다고 주장하는 사람 때문에 난리였는데, 이젠 가지 않겠다 선언한 이 때문에 난리가 나고 말았다.
이대로 아이렌을 보냈다간 열사의 나라로 가는 이 여정 자체가 수포가 되어버릴 걸 아는 트레이와 케이터는 잽싸게 상대 앞을 막아섰다.
“아이렌, 진정해. 네가 말한 그 이유도 말이 되는 이론은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
“이론까지 갈 것 없는 단순 산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무엇보다 그런 식이면 말레우스 군 때문에 네가 빠진다는 식으로 들리고!”
케이터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무표정한 얼굴에 동요가 일어난 아이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말이 맞긴 하지만, 세상에는 평화를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는 법이었다.
아이렌은 최대한 말을 아껴 거짓말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그냥 제가 부담스러워서 안 가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갑자기 부담스러워진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가는 게 아니었다면 따라갔을 거라는 건 같지 않나?”
“그건…….”
‘그건 그렇죠.’ 그 한마디가 도무지 나오질 않는다.
어느새 당황스러움은 잊고 원망하듯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말레우스 때문에 목이 잠긴 아이렌이 마른침을 삼켰다.
쿵. 번쩍거리는 번갯불과 함께 요란한 천둥소리가 건물 가득 울린다.
기껏 수습되는가 싶던 사태가 한결 더 심각해지자, 이번에도 카림이 기꺼이 나서서 아이렌을 설득하려 했다.
“아이렌, 왜 그래? 어차피 6명 데려갈 수 있는 거였는데 5명이 된 거니까, 자리가 모자라거나 할 일은 없는데!”
“……그건 단순 산수로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응?”
“아녜요, 아무것도.”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냥 제가 빠지도록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안 그래도 예민해진 정신이 삐걱거리는 걸 느낀 아이렌은 이마를 짚고 자기 자신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진정해. 진정해라 아이렌. 너는 쟈밀 선배가 덜 힘들기를 바래서 빠지는 거잖아, 말레우스 선배를 탓하는 것처럼 말하면 안 돼. 말레우스 선배가 저렇게 가고 싶어 하니 차라리 편하게 다녀오시라고 내가 빠지는 거야. 그걸 제발 말로 잘 설명하라고!’
이 이상 늦어지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즉, 더는 말을 다듬을 여유도 없다는 거다.
아이렌은 크게 심호흡 후 제 의견을 목소리로 꺼내려 했지만, 가만히 있던 쟈밀이 그 틈을 파고들어 답했다.
“알겠습니다. 말레우스 선배, 동행하시죠.”
“……응?”
“곧 출발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까 궤변에 밀려 밀려났던 때와는 달리, 참으로 사무적으로 완벽한 태도였다.
능숙히 귀빈을 상대한 쟈밀은 그대로 아이렌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고 어둠의 거울에서 떨어진 구석으로 향했다.
‘어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끌려간 아이렌은 왜 이러냐는 말을 묻기도 전, 냅다 그에게 다그침 당했다.
“제발 너 혼자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는 독단적인 짓 좀 그만두면 안 되겠어? 아무도 너보고 책임지라고 한 적 없다고.”
“아니, 그래도…….”
“그리고 내가 말했지? 괜히 나 생각하느라 골치 썩지 말라고.”
“제가 어떻게 선배 생각을 안 해요? 선배가 힘들어하는 거 싫다고요!”
‘우와~, 맙소사.’ 아이렌의 대답을 들은 케이터가 드라마를 보며 환호하는 시청자 같은 추임새를 넣는다. 놀리려는 의도가 명백한 호응에 멈칫한 쟈밀은 목소리를 조금 더 죽이고 대꾸했다.
“네가 안 가면 부담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30배쯤 더 지칠 뿐이니까 그냥 와. 알겠어? 아니면 힘겹게 선배들 뒷바라지하는 내가 마음 쉴 곳 하나 없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그거, 제가 선배 안식처라는 건가요?”
“뭐?”
아뿔싸. 머리에 열이 올라 혼내다 보니 본심이 나와버렸다.
제 말실수를 인지한 쟈밀은 고장 난 로봇처럼 눈에 띄게 멈칫하더니, 일부러 아이렌의 물음을 회피했다.
“가겠다고 말해, 빨리.”
“선배 정말 귀엽다.”
“아이렌!”
“하하, 네. 갈게요.”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나눈 대화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작진 않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긴장한 채 후배들을 보고 있던 트레이는 드디어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에 안심하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녀석들, 좋을 때네.”
사이가 좋은 건 좋지만, 최강이라 해도 좋을 동급생이 엮인 일에는 제발 간 떨리는 짓은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쟈밀과 아이렌을 보는 말레우스 쪽으로 힐끔 시선을 돌린 트레이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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