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아카]새치기 견제
아카네가 무리한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백 미포함 9,364자
1월 1일. 새해의 첫날. 이런 뜻깊은 날에 트레센 학원 운동장에서 스톱워치를 손에 쥐었다. 날이 날인 만큼 참배를 다녀온 후에는 좀 쉬며 트레이닝 계획을 다시 볼 계획이었으나, 참 기분 좋게 뒤집어졌다. 참배 중에 나타난 타키온 때문에. 눈 내리는 운동장을 호쾌하게 가로지르는 타키온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옛날에는 타키온이 먼저 트레이닝 하러 가자고 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후우. 깊이 내쉬는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날아간다.
누군가가 들으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타키온은 이제야 출발점에 섰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사린 이전까지와 달리 지금은 플랜A도 성공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이젠 정말로 한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일만 남은 거다. 참 길게 돌아온 만큼 전력으로 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상당히 가파르긴 하지만, 올해는 중거리 G1과 그랑프리 제패를 노리는 로테이션을 짰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계획. 타키온 본인도 동의했고 그의 상태나 자질도 더없이 출중하다. 문제는…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타키온이 골인 지점으로 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스톱워치를 눌렀다.
"후우. 트레이너 군. 이번 기록은 어떻지?"
"응, 오차 범위 안이긴 하지만 방금 전 기록보다도 단축되었어. 오늘 하루 기록 추이를 생각해 보면 단순 우연은 아니겠지. 음, 무척 좋은걸."
"후후, 당연하지. 자, 다음 메뉴를 말해보게."
"날도 춥기도 하니 실내 피트니스 센터로 이동하자. 클래식 때 쌓아온 실적 때문에 앞으로 엄청 마크 당할 테니까. 마군에서도 뻗어 나올 수 있는 파워가 좀 더 있으면 좋겠어."
"좋지. 그럼 이동할까."
"그래."
스톱워치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마치 기다린 것처럼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울었다. 배턴터치처럼 그것을 꺼내 드니 상태 바에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제가 이전에 말한 거 생각해 봤나요?]
와작. 갈무리할 틈도 없이 얼굴이 구겨진다.
"왜 그러지?"
"아, 미안. 잠깐 연락이 와서. 먼저 가 있어. 짐 챙겨서 따라갈게."
여상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타키온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앞장서 걸어갔다. 얇게 깔린 눈에 그녀의 발자국이 흐릿하게 새겨졌다. 한 열 발짝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가뜩이나 타키온의 트레이닝 메뉴와 앞으로의 목표로 머리가 아픈데, 애먼 데에서도 날 찌르고 있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의에서 벗어나진 않되 사실상 거절인 답장을 보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처박았다. 대충 짐을 싸서 양손을 꽉 잡자 나도 모르게 힘을 줬는지 손톱이 손 안쪽을 파고들었다.
묵직하다. 비단 짐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타키온은 순조롭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본래 지닌 재능에 진심으로 트레이닝에 임하며 불씨를 지피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해 가는 타키온을 보며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경기에서 활약하겠어. 약속하지. 네 소원은 이미 성취된 거나 다름없어.」
타키온은 그렇게 선언했다. 그게 허세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새삼스레 타키온의 재능을 체감할수록 내 부족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게 문제다. 트윙클 시리즈는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의 이인삼각. 타키온이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만큼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새 그 사실이 벅차기만 하다. 이 또한 당연하다. 그동안의 나는 트레이너이기 보다는 모르모트에 가까웠으니까. 주니어급과 클래식급 메뉴를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고, 이제 와서 시니어급을 붙잡고 가려니 자꾸만 헛도는 것 같다. 나는 정말 타키온에게 걸맞은 트레이너가 맞을까. 그 초조함이 타인에게도 보일 정도로. 아, 정말 싫다. 이런 내가. 거의 나 자신을 때리다시피 어깨에 짐을 올리고 허리를 들었다. 타키온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타키온. 조심해서 들어가."
짐을 어깨에 올리고 아카네가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시선은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릎은 반대로 학교 건물을 향한 것을 보고 타키온이 눈썹을 움찔했다.
"자네는 또 트레이너실로 가나?"
"응, 할 게 있어서."
"새해 첫날부터 계속 바로 퇴근하지 않고 트레이너실에 있는 것 같다만."
"연초라 그런지 일이 많아서 말이야. 기숙사까지 못 데려다주는 건 미안."
"그건 됐네. 자네가 멋대로 해주던 거였으니."
타키온은 대충 휘젓던 손을 턱 아래에 갖다 대었다. 해가 바뀌었어도 계절은 여전히 겨울. 아직 해가 짧기에 이제야 기숙사 저녁 식사가 시작될 시간에 학교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타키온에게 있어 어둠은 그저 당연한 시간의 형상에 불과했다. 괴한 정도 가볍게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고, 귀신은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기는 바다. 그런 그를 통금이 아니어도 어두울 땐 걱정된다며 굳이 데려다주던 게 자신의 트레이너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신을 먼저 보내고 트레이너실에 박힌다니. 하나둘 조명이 켜지자 자연스레 아카네의 얼굴에도 음영이 졌다. 그 그늘로도 차마 숨겨지지 않을 짙은 색을 보며 타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카네 군. 내일 트레이닝은 쉬는 날이었지?"
"응? 응. 맞긴 한데 왜? 피로가 많이 쌓였어? 아니면 혹시 어디 몸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내일 오전 9시까지 역 앞에서 보도록 하지."
"어?"
"그러면 적당히 하고 들어가게."
"잠깐! 그대로 가지 말고 왜 나오라는 건지는 말해줘!"
"…또 무슨 짐 옮기라는 건 줄 알고 기껏 바이크도 끌고 왔는데."
"음? 짐이라면 아마 생길 걸세. 쇼핑하러 가는 것이니."
"쇼핑 가는 거였냐고! 미리 말 안 해줬잖아!"
평소대로 빽 지르려던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카네 민망스레 목을 매만지며 헛기침할 수록 타키온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하얀 손이 그 뺨에 닿고, 엄지손가락이 거뭇한 눈 밑을 쓸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손길에 아카네가 표정을 꾸며낼 틈도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소리가 잠겼고, 눈빛도 흐려. 이런, 이런. 어제 내가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무리한 적이 몇 번 있긴 하다만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군. 요즘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졸음운전 한 건 아니겠지?"
"자, 잤어.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보험으로 운전 전에 에너지 음료도 마셨으니 괜찮아."
꿈에서 깨어나듯 아카네가 눈을 깜박이며 타키온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목소리가 찢어진 것보다 제 볼이 뜨거운 것이 더 부끄러웠다. 쇼핑센터 쪽으로 몸을 틀어버리며 아카네는 아까보다 조심히 목소리를 꺼냈다.
"그보다 웬일이야? 너 보통 필요한 건 인터넷으로 사잖아."
"옷이나 생필품 등에 한정하면 말이지.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색만 갖추되니 굳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어. 하지만 신발이나 편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레이스에서 어떤 것을 착용하느냐에 따라 기록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공연한 사실. 이미 착용감과 레이스의 결과도 확인된 모델이 있긴 하지만 육체와 마찬가지로 상품도 새로이 변화해 가니 기존 것에 만족해선 안 되겠지. 특히 올해는 더더욱. 이에 연초에 미리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모델을 들이고자 하네. 그런 만큼 나 혼자보다는 자네의 시선으로도 보는 게 좋지."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좀 알아보고 왔을 텐데."
"무얼. 사전 지식이라면 서로 충분히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늘은 관찰과 체험 위주로 같이 알아보자고 부른 것이니 부담 가질 것도 없네."
"그래도."
"이런, 이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닐세. 말하는 걸 잊었을 뿐이지. 그러니 표정 풀게. 가지."
아카네는 자신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타키온을 졸졸 쫓았다. 그 뒤에서 몰래 아카네는 타키온이 했던 것처럼 제 뺨에 손을 대었다. 나 지금 타키온이 언급할 정도의 표정이었나. 손바닥 아래에서 볼 근육이 어색하게 움찔거렸다.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웃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접대의 기본은 미소라며 어릴 때부터 누누이 익혀왔으니. 아까는 실수라고 쳐도 지금은 제대로 웃고 있나? 불안감을 밀어내듯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손을 떼니 이미 눈앞에는 운동화와 편자가 가득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서인지, 피곤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인지 아카네는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이끌어주던 손이 없었더라면 어딘가에 머리를 박았겠단 생각이나 들었다. 타키온은 가게에 도착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아카네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다정함에 아카네는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을 제 주먹을 꽉 쥐어 참았다.
운동화 재질, 스포츠 공학에 의한 설계, 인터뷰 등에 따른 우마무스메의 후기, 타 트레이너의 조언, 마지막으로 실제 착용감까지. 타키온의 말대로 둘 다 사전 지식은 충분했다. 뻑뻑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끄집어내는 게 어려웠을 뿐. 타키온이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때마다 아카네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고 긴 토의가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빈 손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데이터는 충분히 얻었고 구매는 가격, 배송 등에서 인터넷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보고, 들고, 신고. 그러고선 그대로 나가는 것이 눈치가 보였지만 사장은 친절히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눈빛에 호감이 살짝 어린 것에서 아카네는 단순 겉치레가 아니라 팬심으로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비단 이 사람뿐만이 아니다. 잘 보니 주변의 시선들이 이쪽으로 몰려있다. 피곤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소곤거리는 대화에는 간간히 타키온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사적인 시간이라 차마 말걸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흔한 팬서비스나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가는 타키온을 보며 아카네는 새삼 그의 인기를 체감했다. 트레이너로서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입안이 썼다. 이대로 있다간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아카네는 서둘러 타키온의 옆에 바짝 섰다. 반짝거리는 형광이 그의 눈을 찔렀다.
"어, 여기."
"왜 그러지?"
"아, 별거 아냐. 예전에 여기 게임센터에서 너랑 인형 뽑기 했던 게 생각나서. 정확히는 나만 하긴 했지만… 그땐 이제 막 교복 입은 네 인형이 추가된 참이었는데 지금은 종류가 많이 늘어났네."
"아아. 자네가 내 인형 뽑겠다고 난리를 쳤던."
"네가 약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같이 해줄래?!"
"하하! 그건 자주 있던 일인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모처럼 같이 방문한 거니 또 해보는 건 어떤가? 이번엔 약은 없긴 하다만 비교군으로 쓸 수 있을 테니 괜찮겠어."
"그럴까, 온 김에."
딸칵 지갑이 경쾌하게 열리며 아카네가 한쪽에 동전을 쌓아두었다. 비교군으로 쓴다 하였으니 그때와 똑같은 횟수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첫 번째 동전이 달그락거리며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왼손으로 스틱을 움직이고,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른다. 일련의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타키온은 기계 옆에 기대 아카네를 가만히 관찰했다.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자신과 꼭 닮은 인형 하나 뽑겠다고 빛나는 눈을 보는 건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이걸 빛난다고 해선 안 되겠군. 인형 뽑기 창 너머에선 아카네는 인상을 쓴 채 눈을 연신 깜박거리고 있었다. 집게와 인형 사이 초점도 잡지 못한 눈동자가 배회한다. 겨우 인형 하나가 집게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동전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동전을 투입하고서도 집게가 엉뚱한 곳을 내리 찍자 아카네가 인형 뽑기에 이마를 박았다.
"아카네 군."
벌떡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아카네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되네! 하하. 아니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럴지도. 오늘은 실험 관련으로 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응. 볼일은 끝났으니 기숙사로 돌아가자, 타키온."
아카네는 싱긋 웃어버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먼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타키온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도 안 하고. 그제야 뒤에서 아카네를 바라본 타키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똑바르던 그의 걸음걸이가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자, 도착."
"아카네 군, 잠시."
"응? 왜?"
타키온은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손짓했다. 바이크도 제대로 안 세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동을 잠시 끄고 타키온에게 향했다. 순순히 내렸으면서 선바이저를 올리지도 않고 있으니 타키온이 내 헬멧을 손수 벗겨냈다. 엉망으로 눌려있던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붕 떠올랐다.
"아카네 군, 바이크는 여기 주차하고 가도록 하게. 외부 차량 주차에 대해선 내가 생활 반장에게 말해두지."
"내 운전이 그렇게 불안했어?
"잘 도착했으니 나쁘진 않았다고 해야겠지. 다만, 뒤에 있는 날 신경 쓰느라 무사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커. 진짜 문제는 이 이후 혼자 운전할 때가 되겠지."
"그래서 두고 가라는 거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내 상태가 심하긴 한가보다."
한숨을 섞어가며 웃었다. 타키온이 갖고 가버린 헬멧에 한 손을 올리고,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렸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금방 가기도 하고, 정 졸음운전이 걱정되면 에너지 음료라도 하나 더 먹고 갈게."
"갖고 다니는 건가, 그걸."
"1+1 행사 상품이었거든."
"전부 마시진 말고 3분의 1 정도만 마시게."
"알았어, 알았어."
바이크 사이드백에 넣어두었던 에너지 음료를 꺼내고, 캔 마개를 땄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물을 몸속에 흘려보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 플라시보 효과인지 즉각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며 깨어난다. 실수로 음료가 입가를 타고 새어나갔는지 엄지손가락에 이물감이 닿았다. 휴지가 어디 있더라. 태평스레 캔에서 입을 뗐다.
"어."
빨강. 내 머리카락보다 진하고 짙은 액체가 손에 묻어있었다.
"아카네 군! 고개 숙이게!"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목덜미에 닿은 타키온의 손이 이상하리 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와 타키온 사이에 낀 헬멧에는 붉은 반점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내 피인가? 머리를 휘젓는 어지러움도, 속이 뒤집히는 울렁거림도 영 내 감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울어졌다. 헬멧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점멸한다. 타키온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붉은 점이 하얀 어깨에 떨어질 때쯤엔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낯선 천장이다. 웃기게도 이런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맥을 짚고 있는지 왼쪽 손목에서 약한 압박과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질문이 날아올 텐데 조용하기만 하니 영 뻘쭘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실험이나 실수가 아니라 순전히 나 스스로 과로하여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이니. 나름 조절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너무 과신했다. 갑자기 끼어든 스케줄 하나 감당 못 할 줄이야. 눈치가 보여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팔로 눈가를 가리니 옆에서 한숨이 떨어졌다.
"요 며칠 무리하는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내 불찰이 커."
"…아니. 이건 순전히 내가 자기관리 실패한 거잖아. 걱정 끼쳐서 미안."
"대체 뭘 그렇게 하는 거지? 이것 참. 내 실험으로 바빴을 때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특별히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냐. 정말 평범한 일. 자료 조사나 트레이닝 메뉴 정비, 일반 트레이너 업무 같은 거."
"그건 이전에도 해오던 거 아닌가. 그런 걸로 이 지경이 된다고?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테지."
"정말 저게 다야."
"아카네 군. 바른대로 고하게."
타키온이 억지로 내 팔을 잡아치우니 곧장 붉은 시선이 나에게 쏘아졌다. 이마를 찌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문 타키온은 처음 봐서 가슴 한 편이 시큰거렸다.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웃고 싶었으나, 내 몸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눈 밑만 파르르 떨렸다. 결국 항복하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그냥… 내가 조금 초조했나 봐. 그래서 좀 오버해 버렸어."
"대체 무엇이?"
"…타키온."
"말하게."
"최근에 다른 트레이너한테 무슨 컨택 들어오거나 한 거 없지?"
"음?"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였는지 타키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없다만?"
"하… 없으면 다행이긴 한데… 당사자 의사도 확인 안 해보고 그딴 말을 했다, 이거지…"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설명이나 하게."
타키온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미적미적 상체만 일으켰다. 시간을 끄는 게 뻔히 보일 텐데도 내 상태 때문인지 의외로 타키온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순순히 말할 때까지 버틸 셈인 거다, 이거. 목이 타서 마른침을 모아 한 번 삼켰다.
"작년 말에 어떤 트레이너가 나한테 네 이적 제안을 했었어. "
"무슨."
"자, 끝까지 들어봐. 일단 그 제안 고민하느라 이렇게 된 건 아니야. 거절은 했어. 당연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난 널 이적 시킬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만약에 네가 네 발로 이적하겠다고 나서도 한 번은 붙들어 볼 거야, 나는."
"흐음? 겨우 한 번만 붙들 건가?"
"그래도 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 아, 딴 길로 새게 하지 말고. 아무튼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말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서 그만."
"그자가 뭐라고 했지?"
"아그네스 타키온은 나 같은 신입 트레이너가 감당할 수 있는 우마무스메가 아니지 않냐고."
참 이상하게도 이 말을 하면서 난 웃고 있었다. 아무리 환히 웃어 보아도 말 자체가 부드러워질 리 없음을 알면서도. 내가 내 입으로 독을 깨문 기분이다. 속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둑으로는 막아지지 않는다. 잇새로, 손 틈으로 연기처럼 본심이 빠져나간다.
"젠장. 예전에는 괴짜니까 괜히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고 다들 제멋대로 떠들며 내버려두더니 이제 와서 탐이 나나 보지? 그렇지만 제일 화나는 건."
까드득 이가 갈렸다.
"내가 이딴 말을 들을 정도로 트레이너로서 얕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말리며 손톱이 얼굴을 긁는다. 한 번 터진 감정은 주제도 모른 채 부글부글 들끓어 오른다.
"그동안 언론이나 인터넷 댓글이 그런 말을 해도 애써 신경 안 썼는데, 같은 트레이너한테 그딴 평가를 받으니까 주체가 안 되었나 봐. 너무 분해서 뭐라도 조금이라도 더 하려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거야. 그 평가에 스스로 증명을 해버린 셈이지. 나도 나 자신의 어리숙함에 한숨이 나와."
"자네가 좀 서툴긴 하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딱히 날 달래 달라고 한 말은 아니긴 했다. 내가 못 참고 쏟아내었을 뿐, 타키온에게 뭘 바란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에게마저 이런 평가를 받는 건. 힘이 풀려 손이 턱 떨어지며 내 두 눈에 타키온이 비쳤다.
"내가 자네의 첫 번째 우마무스메이니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타키온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붉은 눈동자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어 침침했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착각하지 말게. 그 평가에 대한 증명은 어디까지나 내 레이스로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생각하면. 크큭. 그 평가는 낭설에 지나지 않아. 최근 트레이닝이 순조롭다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렇지만 그건…"
전부 네 재능과 실력이 아니냐는 물음은 중간에 잘라 삼켜버렸다. 지금 그런 걸 재확인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릎을 모아 그 위로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바라도 될까, 타키온에게. 새삼 이러고 있는 내가 참 꼴사나웠다. 그래도 이미 이런 꼴인 김에 조금만 더 부끄러운 짓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욕심은 언어로 피어올랐다.
"…타키온,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
"그래, 물어보게."
"내 트레이닝 메뉴에 불만은 없어?"
"현재로썬 없네. 있어도 피드백하면 바로 고쳐주고 있지 않나."
"모르모트, 아니. 잘못 말했다. 실험 협력자로서는?"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나 최근 들어 연구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 그러나 지금 같은 몸 상태는 곤란해. 물론 이런 상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약도 있지만 그땐 내가 따로 요청할 터이니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안 그래도 그건 반성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트레이닝 외에 각종 생활을 챙기는 건?"
"만족하고 있네. 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정말 좋았는데 없어지니 시간 효율이 떨어지더군. 그건 다시 해줬으면 좋겠어."
"하하. 응, 그건 고려할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에게…"
말하던 도중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내 침에 사레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내내 숨겨두던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에 거부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에너지 음료의 카페인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아직도 속이 메스꺼웠다. 서서히 올라오는 토기를 긴 숨을 통해 뱉어내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으니 그 아래에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모로보시 아카네가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필요해?"
트레이너, 모르모트, 조수 등. 내가 현재 하는 역할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는 많았다. 그 단어들만 나열해서 본다면 그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트레이너는 많고, 모르모트는 항상 타키온이 알아서 찾아다니고 있으며, 그의 두뇌에 조수는 필수적이진 않다. 나, 모로보시 아카네란 존재 자체가 타키온에게 의미가 있는가.
"필요하네."
타키온은 확언했다. 고민하는 시늉조차 없이. 그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러면 됐어."
그에 나도 짧게 대꾸했다. 다른 사람의 평은 필요 없다. 네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벽에 편히 기대었다. 신기하다. 그 어떤 약이나 에너지 음료를 마셨을 때보다 머릿속이 맑게 갠다. 잠을 자듯 색색 숨을 고르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세웠다.
"…아니다. 타키온, 하나만 더. 부탁이 있어."
"뭐지?"
"약 좀 만들어 줘."
"오? 자네가 의뢰하는 건 처음이군. 그래, 무얼 원하지? 자양강장제? 집중력 향상? 아니면 며칠 밤을 새워도 무리 없는 육체? 뭐든 말해보게! 그동안 모르모트이자 트레이너로서 한 일들을 치하하며 어떤 것이든 특별히 대가 없이 만들어 주도록 하지."
"아니, 아니. 은근슬쩍 네가 하고 싶은 거 끼워 넣지 말고. 아마 너라면 금방 만들어 낼 거야.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건만, 장난을 꾀하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벌레 퇴치용이거든."
"후우…"
"여어, 카페! 트레이닝을 끝내고 온 건가! 다음 레이스를 앞두고 트레이닝이 연일 이어지고 있던데 혹시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마침 여기! 카페인을 최대한 배제하여 육체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누적된 피로감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약이!"
"안 마셔요."
"그런가. 뭐어, 이미 2명의 임상실험 결과는 확인했으니 자네에겐 추후 재조정한 것을 부탁하도록 할까."
"그것도 안 마실 거예요…"
오늘도 냉정히 거절하며 자신의 공간에 향하려던 카페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설프게 웃으며 무릎에 덮은 담요를 매만졌다.
"혹시 그 결과라는 게…"
"하하… 안녕, 카페."
나름대로 가렸지만 빛이 담요를 뚫고 나와 살아있는 무드 등이 된 것만 같았다. 심지어 담요 길이가 약간 모자라 발목은 청록색으로 아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트레이닝도 없는데 이 상태로 다른 데 가기도 그래서… 잠깐 실례하고 있었어."
"괜찮으니 편히 계세요…"
누가 봐도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겐 일상이었다. 카페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하며 자신의 소파에 앉았다. 트레이닝이 꽤 힘들었는지 작은 체구가 등받이에 푹 파묻혔다.
"최근엔 트레이닝하더니 또다시 연구인가요…"
"당연하지! 실험과 트레이닝의 비율만 바꾸었을 뿐, 나의 연구는 계속되네! 아무래도 주위에선 연구가 끝났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네만. 하하하! 이토록 연구할 거리가 쌓여있는데 그럴 리가 없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타키온이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몸도, 의자도 회전하는데 붉은 눈은 자꾸만 나에게로 향했다. 마주치는 시선은 나도 즐겁지 않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그냥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2명 마셨다는 건…?"
"아아, 시시한 모르모트가 하나 더 있었지."
"카페가 오기 전에 가버렸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나와 똑같이 빛나는 다리가 운동장을 다급하게 가로 질러가고 있었다. 속이 후련해지니 저절로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음, 이번 약 효과가 좋네."
"하하! 친애하는 모르모트 군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니 말이지.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아. 응… 그런 거였구나…"
카페는 '친구'와 대화하는지 허공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나에게 향한 카페의 눈빛은 어쩐지 타키온을 볼 때와 닮아 있었다. 역시 들켰구나. 멋쩍게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니 카페는 잠시간 나를 보다가 커피를 내리려 일어났다. 달그락거리며 내려온 머그컵이 2개. 타키온은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아마도 하나는 내 것. 카페의 친절함과 함께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즐기며 빛나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한 두 주일 동안, 타키온의 트레이너가 다리가 빛나는 채로 병원을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건 내가 아니었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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