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아카

[타키아카]온도와 감정의 상관관계

취한 아카네가 타키온과 전화한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새치기 견제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6,923자


아카네 군이 본가로 내려갔다. 나에게 사전 보고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나 혼자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먼저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묻긴 했겠다만. 아카네 군은 지난번 쓰러지고선 본인도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잠시 재정비하고 오겠다고 했다. 집에 간다고 해결이 되는가. 이동에 따라 피로감이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나. 나로서는 의문투성이였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보내주었다. 자연스럽게 트레이닝도 잠시 정지. 자율 트레이닝이나 실험은 편하게 하라고 했다. 아마 본인도 말하면서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 말하면 내가 실험이나 할 거라는 걸. 그러니 그 뒤에 트레이너실에 먹을 거 남겨두었다는 말을 덧붙인 거겠지.

아카네 군이 없는 트레이너실 문을 열었다. 햇볕을 받아 먼지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사람 하나 없다고 공기가 꿉꿉하게 느껴져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열까 하다가 관두었다. 트레이너실에 비치되어 있던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안쪽에 있는 반찬통 3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용기가 투명해 내용물이 바로 보였다. 샐러드인가. 옆에는 당근 드레싱 통도 함께였다. 좀 더 제대로 된 식사 메뉴일 줄 알았다만. 하나만 꺼내어 투명한 통 너머를 이리저리 살폈다. 양상추, 채 썬 당근, 옥수수콘, 닭가슴살, 병아리콩, 삶은 달걀 따위가 통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한 면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갈아 먹지 말고 제대로 씹어 먹어.]

웃음이 나왔다. 너는 내가 전자레인지 등에 음식을 데워 먹을 위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한 거였군. 하나를 챙겨 아카네 군이 늘 있던 책상에 앉았다. 관점이 바뀌니 익숙했던 트레이너실도 다시 보인다. 참고 서적과 개인 파일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 끝엔 나와 닮은 인형이 3체 놓여 있었다. 2개는 내가 있을 때 뽑은 거니 나머지 하나는 기어코 따로 뽑은 건가. 내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는 아카네 군의 눈높이와 맞는 곳에 쭉 늘어져 있었다. 그 이력을 하나하나 훑으며 뚜껑을 열었다. 색색깔의 샐러드를 감추듯이 주황색 드레싱을 그 위에 뿌렸다. 포크를 통에 깊이 꽂고선 그대로 입에 집어넣으니 와삭 소리가 났다.

“차가워."

온도가 이렇게까지 미각에 영향을 끼치는 거였나. 드레싱을 잔뜩 뿌렸음에도 양상추도, 당근도 그다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란 참으로 귀찮은 행위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한다.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전 식사에 대한 기억을 반추해 볼 수록 흐뭇하게 날 바라보던 네 얼굴만 떠올랐다. 제대로 씹어 먹으라는 네 필체가 함께 메아리쳐서 맛도 없는 샐러드를 꾸역꾸역 먹어 치우고 있었다. 텅 빈 통은 그대로 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떴다.


눈을 문지르다 문득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이리 눈이 뻑뻑하나 했더니 앞에 있는 모니터 말고는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있었다. 카페는… 오늘은 트레이닝을 안 하는 날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샤커 군이라도 부르는 것을. 어느 누구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채 연구에만 온전히 몰두한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아카네 군이든, 카페든 누군가가 중간중간 집중을 깨뜨려 주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바깥 역시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다. 쨍한 조명들 아래,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인영이 몇 명 있는 것을 보아하니 통금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항상 이 시간쯤 아카네 군이 데리러 왔으니 생체리듬상 자연스럽게 주의가 흐트러진 모양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할까. 누구와 달리 바이크가 없긴 하지만 달리는 속력은 비슷하니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야 통금에 걸리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아직 하던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 가닥은 어느 정도 잡아두긴 했지만, 연구란 답을 직접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에 얼마나 걸릴 지도 미지수다. 진행한 것이 있으니 계속 끝까지 가볼 것인가, 흐름이 끊긴 김에 우선 돌아가고 추후를 도모할 것인가.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홍차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식어버린 지 오래된 홍차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아 마른 입술만 겨우 축였다.

그러고 보니 후지 군과 아카네 군은 서로 연락하던 사이였지. 통금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카네 군에게 연락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곤란하군.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곤란해? 어째서? 아카네 군을 따라 하듯 검지손가락으로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후지 군의 연락을 받으면 아카네 군은 분명 나에게 연락을 할 거고, 그건 연구에 방해되니까. 바로 타당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게 문제라면 스마트폰을 꺼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건 또 내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책상 한쪽에 뒤집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상단 바에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또 연구 중?]

도착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3시간 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방금 집에 도착했다거나 밥 먹었냐는 등 별 볼 일 없는 내용이 쌓여 있었다. 한참 동안 답장이 없으니 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관둔 모양이다. 방해라고 생각한 걸까. 딱히 그렇지 않은데도.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껴 턱을 괴었다. 일단 답장이라도 해둘까. 액정에 막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을 때 돌연 화면이 검게 변하며 ‘모로보시 아카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에 눈썹이 움찔거린다. 여성, 20대, 다소 가벼운 톤, 불명확한 발음. 파편적인 정보나 줍는 대신 바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지?”

“응? 어? 어… 모로보시 네 아니에요?”

“모로보시는 이 핸드폰 주인일 텐데.”

“그건 그렇긴 한데 그…”

“뭐해?”

“아니, 너희 집에 미리 연락해 두려다가.”

스마트폰을 얼굴에서 뗐는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너 단축번호 1번 너네 집 번호 아니었냐는 질문만 희미하게 들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노이즈가 끼어든다 싶더니 이내 청아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여보세요?”

“아카네 군.”

“타키온?”

이름 뒤에 딸꾹질이 덧붙었다. 목소리도 묘하게 늘어지고 있어 한 번 찌푸려진 눈썹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어라?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 있어?”

“전화한 건 내가 아니다만.”

“으음? 내가 전화했던가?”

“자네도 아니… 잠시만, 지금 술 마신 건가?”

“으응. 조금. 친구 만나서. 오랜만에.”

어절이 뚝뚝 끊기고, 어순이 뒤죽박죽 섞인다. 대화에 맥락이 잘 잡히지 않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취했군. 헛숨이 터졌다. 아카네 군이 술을 마시긴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본인 방 냉장고에 맥주 캔이 있는 걸 보고 물은 적이 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거고, 평소엔 실험에 영향이 없도록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고 했던가. 여름 합숙 때 다른 트레이너들과 회식도 했던 것 같은데 주량이 좋은 건지, 알아서 조절한 건지 멀쩡하게 두 다리로 취한 이를 챙기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비록 목소리 뿐이어도 분명 흥미로워야 할 터인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나에게 연락이 더하지 않았던 게 단순히 친구를 만나 술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타키온.”

“왜 그러지?”

“응. 타키온.”

“왜 자꾸 부르는 거지? 이게 술주정이라는 건가? 멀쩡히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정말이지. 재정비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알코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진 않을텐데? 이래선 상태가 더 나빠질 것 같다만. 일단…”

“푸흐흐."

“갑자기 왜 웃지? 이것도 술 때문인가?”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아.”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이 꾹 다물렸다. 조용해진 나와 다르게 아카네 군은 자꾸 웃음을 흘렸다.

“이상해. 오랜만 같아. 엊그제 봤는데.”

“후후, 그렇군.”

취하면 웃는 타입인 건가. 새로운 정보를 뇌 속에 입력하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모니터에 떠오른 문자열은 잠시 뒤로 하고 의자를 돌려 창문을 마주 보았다. 이제 보니 밤하늘에 상현달이 떠 있었다.

“타키온, 밥은?”

“먹었네. 자네가 트레이너실에 남겨둔 것.”

“맛있었어?”

“먹을 만했네.”

“으응. 별로였구나. 지금 어디야?”

“연구실이지.”

“그렇구나. 음. 어? 통금 아직?”

“얼마 안 남긴 했네.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다만 슬슬 정리하도록 할까.”

"응. 착하다아."

웃음을 참으려 입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릴 때도 못 들어본 칭찬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그 아카네 군이 뇌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순순히 답해줄 것 같다. 좋아, 무엇을 물어볼까. 즐거워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틈을 타 상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전화를 왜 했지?”

“전화한 건 자네가 아니라… 흠, 아니지. 글쎄. 왜일 것 같나? 생각해 보게.”

“음… 보고 싶어서?”

졸린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수화기 너머, 몇 km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입가에 있던 손은 점차 올라가 눈을 덮었다. 혀가 달싹거리다가 무의미하게 너를 불렀다.

“…아카네 군.”

“응…”

“아카네.”

“…으응?”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부르면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참 너다웠다. 무엇을 물어볼까, 골똘히 궁리한 게 허무할 정도로 아주 사소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몇 시쯤에 돌아오지?”

“어… 아마도…”

기어가는 목소리로도 너는 충실히 대답했다. 이내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나고, 주변에서 연신 네 이름을 불러댔다.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동으로 의자가 두어 번 회전했다. 펼쳐두었던 논문과 자료 창을 하나하나 지우고 노트북을 종료하자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한 나 자신이 퍽 낯설었다.


지쳤다. 처진 어깨를 타고 가방이 미끄러져 바닥에 쿵 떨어졌다. 뭘 이렇게 많이 넣어준 건지. 신발만 벗고 현관에 걸터앉아 가방을 열었다. 나는 내 가방에 이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녹차, 와사비, 소금, 기념품용 쿠키…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평소 신세 지는 사람들에게 드리라며 부모님께서 꾸역꾸역 넣어주셨다. 앞으로도 오래 일하려면 주변 사람을 잘 챙겨야 한다나, 뭐라나. 바로 정리할 힘이 안 나 쭉 늘어놓고 팔짱 끼고 바라보았다. 이걸 그냥 이대로 드릴 수도 없으니 쇼핑백이라도 사서 담고, 드리러 다닐 걸 생각하면… 심지어 대부분 식품류라 미룰 수도 없다. 이마를 짚다가 피식 웃음이 샜다. 집을 나오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야 내가 트레이너로서 있어도 된다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러셨듯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이 예전과는 다르게 들린다. 가업이나 이으라는 게 아니라, 집이니까 말 그대로 편히 오라고. 지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쌓여있던 하소연도 실컷 했고. 덕분에 숙취로 속은 좀 쓰렸지만 나름 괜찮은 대가였다. 이쪽에 있는 지인들은 다 동종업계라 언제, 어떻게 당사자 귀에 들어갈지 몰라 뒷담화 같은 건 꿈도 못 꾸니 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니 더 삽질할 것도 없다. 얼마 전에 타키온 실험으로 한 트레이너가 못 볼 꼴도 당했으니 이젠 저번과 같이 불미스러운 일은 없겠지.

마음 편히 굳은 어깨를 휘휘 돌리다가 문득 창문에 눈길이 갔다. 며칠 사람 없었다고 묘하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환기부터 할까. 내려둔 가방을 슬쩍 발로 밀어두고 창가로 갔다.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여어, 아카네 군! 슬슬 도착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타이밍이 좋았군.”

“타, 타키…!!!”

합. 비명이 터져 나오기 전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도 트레이너 기숙사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은 금물. 당연히 담당 우마무스메도 포함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내 담당 우마무스메께서는 오늘도 당당하게 창을 넘어 들어오셨다. 어벙하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날 두고 타키온은 위아래로 나를 살폈다.

“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안색이나 표정이 꽤 좋아졌군, 그래. 의외로 그 재정비란 것을 제대로 한 모양이야. 흐음, 숙취라고 하는 것도 딱히 없는 것 같고.”

“그야 숙취해소제도 먹고 식사도 제대로 했으니까… 그보다 왜 왔어? 지금 실험은 좀 곤란한데.”

“실험은 안 하네. 체내에 알코올이 남아있는 모르모트에게 실험할 것도 없네.”

손을 휘적거리며 타키온은 태연하게 내 방을 가로질러 식탁까지 갔다. 의자를 끌어 거기에 척 앉더니 아예 다리까지 꼬았다.

“아카네 군.”

“응.”

“배고프네.”

“…응?”

“빨리 밥을 차리게나.”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망히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타키온이 앉아 있는 의자를 붙들었다.

“가, 갑자기? 겨우 그거 때문에 온 거야?”

“갑자기라니.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지 않나? 어차피 자네도 식사는 해야 할 거고.”

“아니, 그 말에 틀린 건 없지만 내가 지적하는 게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 대충 먹으려고 했는데…”

“대충도 상관없네. 난 지금 배가 고프니까. 자. 빠~알~리, 빠~알~리!”

“으윽! 알겠어! 그렇게 보채지 말고 좀 기다려 봐!”

타키온과 2년 넘게 함께 하며 알게 된 건 타키온이 먹을 것을 보챌 땐 그냥 빨리 줘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짐 정리는 우선 미뤄두고 냉장고부터 열었다. 오늘 장을 보려고 했던 터라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 있는 거라도 대충 긁어모으고 도마와 칼을 꺼냈다. 뒤에서 느긋하게 콧노래나 부르는 게 얄미웠다.

당장 만들라고 하니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있는 것을 다 썰고, 즉석밥을 넣어 볶고, 케첩 같은 양념을 버무리고. 그릇 위에서 밥 모양을 잡으며 타키온의 눈치를 살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 불안하게 하는 것도 재능이다. 한숨과 함께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자 살짝 묵은 먼지 냄새를 고소한 향이 밀어낸다. 계란을 적당량 붓고 젓가락을 대려던 차에 타키온이 언제 다가왔는지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대충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손님은 손님인데 어떻게 그래. 뭐어, 있는 거 적당히 볶은 거니 대충이긴 해. 오늘은 피드백도 안 받을 거야.”

대화는 받아주면서도 시선은 프라이팬에 고정, 살살 움직이며 젓가락으로 계란을 돌렸다. 얘기하는 사이 꽤 익어버렸는지 회오리가 되려다가 쭉 찢어져 버려서 어쩔 수 없이 내 그릇에 올렸다. 다 됐으면 얼른 달라며 칭얼거리는 타키온을 슬쩍 밀어내며 다시 심기일전. 살살 돌린 끝에 이번엔 그래도 볼만하게 되었다. 그대로 남은 그릇에 올리고, 잘 된 오므라이스를 타키온의 손 위에도 올려주었다. 답지 않게 타키온은 그걸 멀뚱히 바라보았다.

“따뜻하군.”

“그렇지? 방금 막 해서 맛도 괜찮을 거야. 도시락은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앉으라며 식탁 의자를 빼주니 별말 없이 총총 걸어와 앉는다. 왜 갑자기 얌전해졌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게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몫과 소스를 챙겨 식탁에 마주 앉으며 표정을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밥 한 숟갈 먹고는 기분 좋게 웃기까지 한다. 뭐지. 진짜 배고플 뿐이었나.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흐뭇하게 보고 있으려니 눈이 딱 마주쳤다. 기분 탓인지 타키온의 미소가 더 깊게 팼다.

“아카네 군.”

“응?”

“보고 싶던 이를 실제로 봤는데 얼마나 좋은가?”

“콜록!”

내 침에 사레가 걸려 기침이 터졌다. 눈물이 찔끔 나고 삽시간에 얼굴 온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냉수를 들이켜 속을 식히고는 주먹으로 작게 식탁을 내리쳤다.

“술 취한 사람이 한 말 가지고 놀리지 마!”

“호오, 말하는 걸 보니 취했을 때 기억은 있나 보군. 아무튼 대답해 보게. 좋은가, 싫은가?”

“놀리는 건 싫어!”

“놀리는 건? 다른 건 좋다는 걸로 해석해도 되는가?”

“아, 제발! 타키온!”

“아하하! 아, 이럴 때 심박수를 체크해야 했는데 서둘러 오느라 장치를 두고 왔군. 내가 이런 실수를.”

“정말 다행이다, 안 가져와서!”

더는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입에 밥을 마구 밀어 넣었다. 이 와중에 볶음밥이 고슬고슬한 게 맛있었다. 배고픈 줄 알았더니 타키온은 먹다 말고 숟가락도 내려놓은 채 턱을 괴고선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내 눈, 뺨, 턱을 차례차례 훑고 지나간다. 체할 것 같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못 참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타키온이 낮게 웃었다.

“취했을 때 자네는 고분고분 대답해서 좋았는데 아쉽군. 나중에 자네가 술 마시는 것 좀 보여주겠나?”

“안돼! 담당 우마무스메 앞에서 술 마시는 트레이너가 어디 있어!”

“흐음. 하긴 술이랑 학생이 같이 있는 거니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겠군. 그렇다면 내가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가 되어서야 볼 수 있나. 이런, 이런. 번거롭군.”

타키온이 술을 마셔도 괜찮은 시기. 번뜩 든 생각에 고개가 빳빳해졌다. 붉은 눈빛을 한 번 받고는 천천히 그를 살폈다. 항상 같이 있어서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타키온도 많이 바뀌었다. 약간 차분해진 외관이라든가, 분위기, 언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체가. 실험과 트레이닝으로 쉼 없이 쌓아온 만큼 처음엔 얇아 보이기만 했던 몸도 나름 탄탄해졌다. 처음. 그때가 타키온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였는데 어느새 3년 차다. 그러니 타키온의 나이도 벌써. 갑작스레 세월이 체감되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렇구나. 얼마 안 남았구나. 타키온이 어른이 되는 때가.

“그때가 오면 내가 한잔 사줘도 돼?”

취한 듯이 속내가 입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티가 나지 않도록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술이 싫으면 안 마셔도 괜찮으니까 옆에서 상대는 해줘.”

“흐음. 술이라는 것 자체가 내키진 않는다만. 단 것도 있다고 들었고, 자네가 주는 것이라면 괜찮겠지. 마음대로 하게.”

“단 술에 상대가 너라… 도무지 취할 것 같지 않은 조합이네.”

“뭐라고? 그럼 기껏 상대해 주는 의미가 없지 않나!”

“애초에 그걸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난 취한 건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그럴수록 내 호기심이 자극된다는 걸 모르겠는가? 그럼 나중에 도수 높은 술 선물해 주도록 하지! 자네는 내가 주는 건 마셔주니까!”

“선물 예고가 무슨 협박처럼 들리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시덥지 않다 못 해 유치하기도 한 대화를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계란지단을 덮어서 그럴까. 밥은 생각보다도 오래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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