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HBD]
타키온이 아카네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Restart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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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 혹은 0시. 초침 한 번으로 서로 다른 시간과 날짜가 공존하고 변하는 시간. 시계처럼 아카네의 핸드폰이 12번 울렸다. 11월 29일. 그의 생일을 맞아 축하의 말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걸 알림 삼아 깨어나듯 책에서 눈을 뗀 아카네가 슬며시 웃었다. 월말에 가깝다 보니 쌓여가는 생일 메시지를 보다 보면 올해도 괜찮게 보냈다는 감상이 들었다. 아카네는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스마트폰을 챙겨 침대로 향했다. 형광등은 끄고, 협탁에 올려둔 향초에 불을 붙였다. 빛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을 즐기며 침대에 앉아 아카네는 뒤늦게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동기, 고향 친구, 가족… 역순으로 쌓여있는 이름들을 쭉 내리던 엄지손가락이 일순 멈추었다. 타키온. 자신의 담당 우마무스메. 제일 먼저 연락을 해줬구나. 아카네는 아무도 보지 않건만 히죽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아카네 군, 일어나는 대로 곧장 연구실로 오게나.]
김빠지는 소리가 나며 촛불이 흔들렸다.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아카네는 그 짧은 문장을 연거푸 읽었다. 11시 59분. 다시 보니 어제 온 거였다. 날짜가 다르니 생일 축하가 아니라고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최근 타키온은 어떤 연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날짜가 바뀌었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그래도 안 챙겨준 적은 없었는데. 답장하려던 엄지손가락이 자꾸만 허공을 맴돌았다.
“나 왜 이래. 유치하게, 진짜…”
[알았어. 이따 보자.]
짧은 답을 남기고 아카네는 촛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방을 뒤덮고, 옅은 향기만이 그 곁에 남았다. 더듬거리며 아카네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겨울용이라 두툼한데도 차갑기만 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핸드폰이 울렸지만 아카네는 눈을 꼭 감았다. 일어나는 대로. 그 말이 평소보다 일찍 오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기에. 어쩐지 잠이 오진 않았지만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하네.]
그 때문에 타키온의 생일 축하를 몇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한 아카네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서 오게나, 아카네 군! 기다리고 있었네!”
“어, 어. 안녕, 타키온. 그런데…”
아카네는 말을 끊고 발 폭을 크게 벌려 성큼성큼 타키온에게 다가갔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를 의자에 앉은 채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아침부터 이상하리만치 텐션이 높다. 실험이나 연구가 잘 풀렸을 때 타키온이 혼자 신나 하는 건 곧잘 있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에 아카네가 허리를 숙여 찬찬히 타키온을 살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선명히 보였다.
“…타키온 혹시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글쎄. 자네에게 연락하고 나갔으니 12시는 넘었겠군.”
“뭐? 통금에 걸리지 않게 내가 바래다줬는데도 굳이 여기 다시 돌아와서 밤을 새웠다고?”
“어쩔 수 없었네. 시간이 촉박했거든. 소위 말하는 서프라이즈를 위해선 자네에게도 감춰야 했고. 하하! 아마 오늘이 자네의 짧은 인생 중 가장 특별한 생일이 될 걸세! 내 장담하지!”
“나보다 어린 너한테 짧은 인생 소리 들어도 말이지… 그래서? 뭘 준비했는데?”
타키온의 입꼬리가 기고만장하게 올라가고, 그에 반비례해서 아카네의 눈썹이 처졌다. 타키온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다. 주춤 오른발이 뒤로 빠질 때 타키온이 불쑥 플라스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모로보시 아카네 생일 기념 육체 개조 실험일세!”
“평소에 늘 하던 거잖아!”
“아니! 무슨 소리인가! 다르네!”
진짜 억울한지 타키온은 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벌려져 있던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타키온이 아카네의 손을 붙잡았다. 뿌리칠 겨를도, 마음도 없이 서로의 손이 얽히며 플라스크가 아카네 손에 쥐어졌다.
“이건 바로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니까.”
타키온의 말에 아카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켰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에서 도망치듯 시선을 그대로 내리자 플라스크에 자신의 눈이 비쳤다. 투명하고 붉은 액체 때문에 자신의 눈도 꼭 타키온과 똑같아진 것 같았다. 플라스크 병을 조심히 들고 아카네가 반걸음 물러섰다. 약물이 아카네의 맘 따라 일렁거렸다. 아카네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일부러 무심한 목소리를 냈다.
“어… 숙면할 수 있는 약이야?”
“그러면 그냥 평범한 수면제 아닌가!”
“그렇지만 예전에 어려졌을 때 그 소리 듣고 먹은 약이 수면제였잖아.”
“오늘 건 그때와 차원이 다르네! 자자, 어서 쭉 들이키게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데…”
아카네가 와인처럼 플라스크를 부드럽게 돌렸다. 약에서부터 올라오는 달큰한 향기가 아카네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타키온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떠드는 걸 좋아하는지라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약에 대한 설명은 꼭 따라왔다. 그런 타키온이 꿈을 이룬다는 추상적인 말만 하고 그 뒤가 없다니. 아카네는 불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차가운 플라스크 표면을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어차피 자신에게 안 마신다는 선택지란 없다. 잠시 멈춰있던 아카네는 이내 각오를 굳히고 약물을 들이켰다. 달콤한 향과 다르게 식도가 다 화끈거렸다.
“으, 뭔가 엄청 독한 과일주를 먹은 것 같네.”
“그런가. 자! 다 마셨으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눕게!”
“누워? 왜?”
“곧 알게 될 걸세.”
타키온이 간이침대를 자진해서 펼치고는 그 위를 탕탕 두드렸다. 영 불길한 것을 다 보겠다는 것처럼 아카네는 표정을 구기면서도 얌전히 그 위에 누웠다. 아예 담요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통에 접힌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뭔데, 대체… 뭐라도 좀 알려줘…”
“후후, 모처럼의 서프라이즈인데 그럴 순 없지! 즐거움으로 남겨두게.”
“아니, 내가 아는 서프라이즈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무섭… 컥!”
쿵. 뇌와 심장이 동시에 울렸다. 위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들끓더니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카네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손으로 심장 부근을 쥐어뜯으려 하자 타키온이 그 손을 붙잡고 강제로 떼어냈다. 다른 쪽 손가락으로 손목을 지그시 누르는 걸 보니 이 와중에 맥을 짚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시야만은 또렷했다. 타키온은 다소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아카네를 진득이 관찰하고 있었다. 붉은 눈 한 가운데에 박힌 동공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머리카락 한 올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여 무서울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정보의 양에 아카네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다른 감각들이 선명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간이침대가 삐그덕 울고, 입에는 단맛이 여전히 감도며, 부유하는 공기 중에선 겨울 특유의 찬 내가 났다. 그리고 타키온의 손은 따뜻했다. 아카네는 끓는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발끝으로 침대를 긁었다.
“흠. 전신에 작용하는 약인 만큼 이번 것도 부작용이 크군. 맥박 상승, 과호흡, 미열… 근육 수축에 따라 통각도 있나 보군. 이런, 이건 좀 미안하게 됐네, 아카네군.”
“타, 타키온…!”
“그래. 여기 있네.”
이제 맥은 잴 필요가 없는지 타키온이 손목에서 손을 떼고 아카네의 이마를 쓸었다.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손길이 부드러웠다. 타키온은 땀을 훔쳐내며 아카네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댔다. 그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닿아 아카네가 움찔거리자 타키온은 낮게 웃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게나.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 질 걸세.”
이상한 일이었다. 온몸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그 속삭임이 마법이라도 되었는지 아카네는 천천히 수면 아래로 빠져들었다.
“아카네 군. 아카네 군!”
“으윽…”
“얼른 일어나게! 일생 최대의 순간을 그냥 누워서 보낼 셈인가!”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불평은 됐으니 이거나 보게나! 자!”
갑작스레 날아든 빛에 아카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막았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그의 눈앞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다. 형광등 빛이 거울에 반사된 모양이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에게서 거울을 받아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몸부림쳐서 그런지 단정히 묶었던 머리는 풀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머리핀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간 뒤였다. 땀 때문에 엉망진창 얼굴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꼴을 보니 한숨이 새 나갔다.
“뭘 보라는 거야… 엉망인 내 꼴?”
아카네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당연히 귀에 걸쳐져야 할 것이 손을 떼자마자 스르륵 떨어졌다. 당황한 손이 볼 뒤를 계속 더듬었다. 없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어?”
“후후, 내가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타키온은 손거울을 다시 빼앗아 들더니 조금 멀리서 아카네를 비추었다. 아까와 똑같이 빛이 반사되었지만, 아까와 달리 아카네는 눈을 가리거니 감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자기 머리 위에서 작긴 해도 우마무스메와 똑같이 생긴 귀가 달려 있었으니까. 아카네는 손을 들어 자신의 귀 같은 것을 만졌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동시에 어설픈 손길에 간지럽다. 꿈이라고 하기엔 손과 귀 양쪽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촉감에 아카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 설마. 내 꿈이라고 했던 게…”
“실험은 성공일세! 인간이 우마무스메가 되는 약이기에 사전 실험을 할 수 없는 점이 위험 요인이었는데 다행히 잘 되었어. 자, 어서 감상을 말해보도록 하게. 지금 기분이 어떻지?”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지금 자네의 평생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그 반응은 뭔가?! 좀 더 다른 게 있을 것 아닌가. 감격스럽다든가, 두근두근 이라든가. 짧고 가벼운 어휘라도 괜찮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나는걸…”
거울 속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카네는 엉망으로 묶여있던 머리를 풀어 헤쳤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 내리는 내내 귀가 위아래로 쫑긋거렸다. 움직이는 감각은 들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있어 보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니 영 어색하기만 했다. 설마 꼬리도? 문득 든 생각에 아카네는 담요를 걷고 조심스레 발바닥을 바닥에 댔다. 타키온도 어서 일어나라는 건지 옆으로 피해주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느낌은 의외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등에 손을 대자 꼬리가 바지를 약간 아래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솟아있었다. 손이 닿자 놀란 꼬리가 바짝 섰다. 좀 전에 빗던 머리카락과 감촉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아카네는 떫은 미소를 지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푼 후, 발 앞꿈치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편자도, 신발도 없는 발로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쉰 아카네가 타키온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달려봐야 뭐라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 아하하하! 그런가! 그렇군! 자네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타키온은 웃음을 흩뿌리며 연구실 구석으로 가더니 신발 두 켤레를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신발 사이즈 다를 텐데 일부러 빌려온 걸까. 제대로 절차 밟고 빌려온 거 맞을까. 또 다른 불안이 아카네의 마음속에 싹텄지만, 바닥을 두드리는 편자 소리에 날아갔다. 딱 봐도 자기 발에 맞는 운동화가 발 바로 앞에 있었다. 흘끔 타키온을 보자 그는 먼저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고 있었다. 아카네가 머뭇거리며 발을 들자 그를 향해 하얀 손가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펼쳐졌다.
“달리러 가지, 함께.”
11월 29일. 지금 당장은 해가 있긴 하지만 전날 눈이 왔기에 잔디 상태는 불량. 심지어 4시경에 비나 눈이 예상되어 있어 다들 야외 트레이닝은 피해 실내로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한산한 운동장을 두 우마무스메가 가로질렀다. 어울리지 않게 체육복에 달린 트레이너 배지가 약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잔디에 쌓인 눈보다도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둘의 뺨만은 불그스름했다.
“트윙클 시리즈에서의 첫날. VR에서 자네가 잠재 뇌 기능을 반영한 우마무스메의 육체를 조작한 적이 있었지. 몇 년 전의 데이터라 현재의 자네와 차이가 있을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후 재측정하면 될 테니 큰 문제는 안 되려나. VR로 구현한 신체와 약물로 재현한 신체의 차이는 어떠할 지 이 또한 흥미롭군!”
“생일 축하니, 내 꿈이니 했지만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내 귀중한 시간을 들여 어떻게든 자네의 생일날 완성을 시켰건만!”
“아, 알았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달리면 돼?”
“기본적인 신체 기능 측정은 했지만, 자네의 달리기가 어느 정도일 지는 나로서도 미지수이네. 더군다나 현재까지와 다른 육체를 쓰는 만큼 처음에 무리하면 부상 위험도 높아. 잔디 상태도 좋지 않으니 말이지. 그러니 일단 차분하게 갈까. 우선 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따라서 뛰어보게. 서서히 속도를 높일 것이니. 자네 상태를 확인한 후에 거리를 지정하여 기록을 측정하지.”
“알았어.”
“심전위, 심박, 호흡, 근전위 측정·기록! 하하하! 자네 지금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 건가. 뛰기도 전에 심장이 엄청 뛰고 있군!”
“그런 건 말로 안 해도 알아…”
아카네는 민망스레 양 뺨을 감싸면서도 착실히 자세를 잡았다. 아카네가 타키온의 실험에 참여한 것도 3년 차. 어설프게 허둥지둥 달리던 초반과 다르게 이제는 제법 각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타키온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발목을 풀어주고 타키온이 그 옆에 섰다. 아카네는 시선은 정확히 타키온의 옆얼굴에 꽂혀 있었다. 언제나 혼자 여유로운 척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그의 인상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아카네는 타키온의 달리기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많이 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표정을 이렇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짝 선 눈썹을 마음속으로 덧그리며 아카네가 숨을 삼켰다.
사전에 정해준 시작 구호는 없었다. 그럼에도 둘 다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타키온이 한 번 턱을 당겼을 때. 둘은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타키온이 능숙하게 코스를 잡고, 아카네는 그 등을 바라보는 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우선 1마신 차. 하얗기만 하던 운동장에 둘의 편자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처음에는 인간이어도 따라 잡을 수 있는 속도로 느긋이. 반 바퀴를 돌았을 때 타키온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이 정도는 일상이라는 것처럼 차분히 따라오는 아카네를 보고 히죽 웃더니 단숨에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우마무스메의 평균 속도까지. 점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아카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빠르다. 아카네가 우마무스메로서 달리게 된 첫 감상은 그게 다였다. 심지어 생략된 주어는 타키온이었다. 일단은 같은 우마무스메일 터인데도 차이가 왜 이리 극심한지. 타키온이 흩뿌리는 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카네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과 우마무스메의 달리는 자세엔 차이가 있다. 꼿꼿하게 축을 세우는 인간과 달리 우마무스메는 상체가 쏟아질 듯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숙인다. 이론은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아카네는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꼿꼿했던 허리가 점차 앞으로 기울어졌다. 어설프게 폼을 따라 한 것이니 타키온처럼 깔끔하진 않다. 그럼에도 확연하게 속도가 달라졌다.
“와!”
저절로 아카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VR에서의 경험은 실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폼을 바꾸자마자 다리에 실리는 부하가 묵직해지고,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아카네의 뒤로 넘어간다. 옅은 햇빛, 편자 소리, 주위 풍경, 차디찬 공기, 잔디 냄새… 유일하게 타키온의 등만이 저 앞에 있었다.
“어이! 아카네군! 여전히 느리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려줘!”
“싫네. 알아서 따라오게나.”
“하하! 진짜 못 말리겠다니까!”
호쾌한 웃음소리에 타키온은 뒤로 시선을 던졌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보이는 거라곤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뿐이었다. 힘든 것인지 아카네는 지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을 제대로 안 보면 다칠 텐데. 우려심에 타키온이 입을 연 순간 고개가 홱 들렸다. 아카네는 웃고 있었다.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푸른 눈은 스카우트를 한 날과 똑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보며 타키온은 따라 웃었다. 그러고선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더욱 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보일수록 무아몽중으로 목표만을 쫓는 게 바로 모로보시 아카네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멀리멀리 달려 나갔다.
한 2,000m를 돌파하자 타키온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아카네는 타키온을 보고 급하게 멈추었다. 정확히는 멈추려다가 눈에 미끄러져 그대로 엎어졌다. 타키온은 눈대중으로 자신과 아카네의 거리를 짐작했다. 약 7마신 차. 타키온이 선 채로 턱을 짚는 사이, 아카네가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질척한 흙이 그의 팔다리에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화려하게 넘어졌군. 다친 데는 없나?”
“헉… 헉… 응…”
“흠. 신체 능력은 그때 당시 VR에서 구현한 것보다 떨어지는군. 지금은 데뷔를 앞둔, 아니지. 이제 겨우 데뷔를 한 우마무스메 정도인가. VR에서는 나이를 감안해서 계산했으나, 실제 육체는 막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거기서 차이가 발생한 걸 수도 있겠어. 좋아. 아카네 군 다음은…”
타키온의 말을 끊은 것은 그 어떤 말도, 불청객도 아니었다. 조용히 서 있는 아카네의 모습이었다. 아카네는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과 운동장에 남은 편자 자국을 마냥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펴보거나,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기도 했다. 흥분으로 거칠어졌던 호흡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건지. 타키온은 당장 지금 기분이 어떤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그가 이토록 즐거워하는 건 처음 보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아카네의 반응을 관찰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카네가 먼저 타키온에게 뛰어갔으니. 그녀는 본인 얼굴에 흙이 묻은 지도 모르고 방긋 웃었다.
“타키온!”
“말해보게.”
“이거, 엄청나다.”
“후후, 그런가.”
“정말…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왜 우마무스메에게 달리기가 본능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이렇게나 빠른데 달리지 않는 게 이상하지. 우리가 쫓는 「한계의 너머」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실감이 나. 아아, 이런 생각 따위 다 제쳐두고 지금 내 감정만 말해보자면…”
아카네는 잠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살포시 눈을 감자 방금 뛸 때 본 풍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두근두근 손 아래에선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닐세. 현실이지.”
볼에 닿는 감촉에 아카네는 번뜩 눈을 떴다. 타키온이 자신 못지않게 들뜬 표정으로 제 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꼬집기라도 할 심산인가. 피하지도 않고 타키온이 무엇을 할지 기다리고 있으려니 타키온은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쓱 훑고 곧장 손을 뗐다. 엄지손가락에는 거무죽죽한 흙이 묻어있었다.
“이번엔 레이스처럼 뛰어보도록 하지. 거리는… 그래, 1,600m로 할까.”
“마일? 너하곤 안 맞는 거리잖아.”
“자네한테 맞춘 거니까 말이지. 중거리는 인간 몸으로도 뛰어 봤으니 나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네는 더 짧은 거리가 맞을 것 같네. 내가 앞서서 뛸 테니 그 뒤에서 페이스를 잡게. 마지막에는 나를 따라잡겠다는 심산으로 뛰게나.”
“알겠어.”
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그 누구도 조금만 더 쉬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겨우 예열이 된 양 굴었다. 둘은 목을 꺾거나 어깨를 돌리는 식으로 각자 몸을 풀며 다시금 출발선에 섰다.
“제자리에 서서.”
몸풀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타키온이 준비 신호를 던졌다. 비록 연습이지만 레이스. 그 실감이 들기 시작하며 아카네의 전신에 긴장에 뻗어 나갔다. 오른발이 더 뒤로 빠지며 땅이 얕게 패였다. 타키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흔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준비 땅. 둘 다 동시에 달려 나가서 깔끔한 스타트를 끊었다.
선두에 선 것은 이번에도 타키온이었다. 능숙하게 안쪽 코스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타키온의 시야각에선 머리카락 한 올 발견되지 않았다. 타키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바로 내 뒤에 있나. 아카네는 가까운 거리 탓에 자꾸만 날아드는 흙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트레이닝은 본의 아니게 꾸준히 하고 있으나, 타키온이 확언한 대로 현역에 견줄 신체 능력은 없다. 항상 혼자 뛰기만 했으니 레이스 경험도, 깔끔한 폼도 없다. 그나마 자신 있게 내놓을 거라고는 트레이너로서 가진 지식뿐. 아카네는 상체를 서서히 숙이면서도 눈은 앞에 고정했다. 타키온이 그를 떨쳐내기 위해 좌우로 움직여도 봤지만, 아카네는 끈질기게 그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집요함에 타키온이 남몰래 웃었다.
마지막 코너. 타키온이 인코스로 가파르게 코너를 파고든 반면, 아카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아웃코스로 밀려났다. 멀어져 가는 붉은 머리칼을 훔쳐본 타키온이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 적성에 비해 확연히 짧은 거리라 속도가 제대로 나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이걸로 충분할 터였다. 아카네를 이기는 데에는.
“흐아압!!!“
괴성과 함께 바람이 나부꼈다. 아웃코스로 밀려난 대로 아카네는 올곧게 직선 코스로 달려들었다. 타키온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오느라 남은 체력은 얼마 없을 텐데 그마저도 모조리 불사르겠다는 각오로 대지를 박찼다. 코너에서 벌어진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4마신에서 3마신, 3마신에서 2마신.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타키온은 작은 전율을 느꼈다. 여유 부리다간 정말로 진다. 그런 확신이 머리를 강타했다. 2마신에서 1마신, 그리고 종국에 아카네는 타키온과 나란히 섰다. 그대로 둘이 얽히듯이 골인. 카메라 판독이 불가한 상황이지만 둘 다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스태미나가 떨어진 아카네가 허리를 펴고 말았고 근소한 차이로 타키온이 이겼다는 것을. 타키온은 먼저 주저앉은 아카네를 두고 조금 더 멀어져서야 겨우 멈추었다. 그는 즐겁게 두 팔을 펼쳤다.
“아하하하! 정말 굉장하군, 자네는! 아무리 내 적성에 맞지 않은 거리고, 내가 봐주었다고 해도 이쪽은 현역인데!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따라잡는다고? 이것 참! 그 몰입과 광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능만 하다면 자네의 뇌를 열어보고 싶은 지경인걸!”
지금쯤 농담이라도 끔찍한 소리는 말라는 잔소리나, 흥분으로 가득 찬 웃음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정적만이 타키온을 감싸자 그는 몸을 틀었다. 자신보다 큰 아카네가 바로 보이지 않아 시선을 내려보니 아카네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스태미나가 떨어져서 지친 건가. 그렇다 하기에는 무언가가 이상했다. 둥글게 말린 어깨가 들썽거리고 있다. 타키온은 한 발짝씩 아카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다리를 가리고 있던 등을 지나치자 그제야 발이 보였다. 떨리는 양손으로 감싸 쥔 발이. 설마. 섬뜩 불온한 예감이 타키온의 뇌를 치고 지나갔다. 말 대신 입김만이 타키온의 입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타키온.”
시린 고요를 깨트린 건 청아한 목소리였다. 아카네는 허리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폈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있던 그녀가 짝다리를 짚은 것을 보고 타키온은 입을 다물었다. 온전히 지면을 닿지 않은 다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내 아카네가 주먹을 꽉 쥐더니 이제껏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실험 중단해 줘.”
“발등 골절이래.”
아카네는 태연하게 보고했다. 왼쪽 발에는 구두나 운동화도 아니고, 반깁스를 신고. 그는 목발도 없이 절뚝거리며 걸어와 대기실에 있던 타키온 옆에 털썩 앉았다. 아카네에게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 타키온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인간으로 돌아와도 뼈가 붙진 않는구나. 뭐, 당연한가.”
“정확히 어느 정도 부상이지? 회복까지 걸리는 기간은?”
“어… 5중골이었나? 아무튼 외곽 뼈에 금이 갔고, 일단 수술할 필요는 없대. 치료는 아마 4주에서 8주? 한동안 많이 부을 거니 다음 주에 부기 빠지고 다시 보자고 하시더라고. 통깁스로 바꿀 수도 있는데,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바로 조치했으니 반깁스로 쭉 갈 수도 있어.”
“그렇군.”
타키온은 딱 한 마디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타키온의 성격상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번 건 단순 사고에 가까운데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아카네는 멀쩡한 다리를 흔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날이 추우니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으려나.”
“지금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인가?”
타키온이 으르렁거리며 아카네의 어깨를 붙들었다. 파고드는 통각에 아카네가 인상을 쓰자 타키온은 곧장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 틈 사이로 엿보이는 붉은 눈은 침잠하고 있었다.
“자네가 아무리 우마무스메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실제 육체를 쓰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는 걸 간과했어. 자네에게 우마무스메의 육체란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 아닌가. 힘을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감각이 아예 무지하지. 어린 우마무스메들에게 달리기 전 먼저 힘을 다루는 법부터 가르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다짜고짜 레이스를 했다니. 이래선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여 주었던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그 칼이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하지만 상대는 성인인데. 떠오른 반박에 타키온은 손을 내렸다. 자신보다 큰 트레이너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네 설마 알고도 일부러…”
“아냐, 아냐!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뭐… 마지막 스퍼트하려고 발을 딛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런데 대체 왜 도중에 멈추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달렸지?”
“그야 당연히.”
또렷한 눈동자가 데굴 굴러 타키온을 고스란히 담았다.
“널 따라잡는다.”
타키온은 그 눈동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크기 때문일까. 위에서 비친 자신은 어쩐지 작아 보였다. 이내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멈출 수가 없었어. 멈출 만큼 심한 부상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네 옆에 서고 싶었거든. 이렇게 너랑 뛸 일도, 네 달리기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거의 없잖아. 이번 약효는 한 시간이었나? 짧았네. 정말.”
반쯤 중얼거리던 아카네는 돌연 두 손을 활짝 펴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튼 이건 흔히 있는 사고고, 따지자면 내가 자초한 일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해. 한동안 실험 참여가 어렵겠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돌아가서 밥 먹고 케이크나 먹자. 미리 사둔 게 있거든. 내 방에 가서 같이 먹자.”
먼저 일어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아카네를 보고 타키온은 기가 차 한숨을 뱉었다. 지금 그런 다리를 하고서 누굴 일으켜 주겠다는 건지. 타키온이 손을 잡지도 않고 알아서 일어나자 아카네는 민망하게 손을 뒤로 감추었다. 타키온은 그런 아카네 앞에 서더니 등을 보이게 쪼그려 앉았다.
“뭐야?”
“업히게.”
“아니, 그럴 필요는…”
“잔말 말고. 이럴 때는 내가 자네를 돌봐야 하지 않겠나.”
타키온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아 아카네는 어쩔 수 없이 등에 제 몸을 기대고 목에 팔을 감았다. 이렇게 맞닿고 있으니 평소 티 나지 않았던 서로의 체격 차가 실감이 났다. 그 정도야 우마무스메에겐 우스울 지경이라 타키온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정신으로 업혀있는 아카네만 죽을 맛이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타키온 목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정도를 모르고 움직이는 것 같으니 내가 통제해야겠어. 정말이지. 뇌가 위험하단 판단을 했으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으윽… 나도 반성하고 있어…”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아카네의 맨 귀를 매만졌다. 어깨 너머로 앞을 훔쳐보니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온 거리가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만큼 색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생일 케이크 촛불도 못 붙였는데 크리스마스 조명을 먼저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카네는 타키온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허리를 쭉 폈다. 머리 위에 있는 귀에 입을 가까이 댈 순 없었지만 말을 전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타키온.”
“왜 그러지?”
“고마워.”
“…”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을 보냈어.”
“자네는 정말…”
타키온은 뭐라 하려다가 그저 아카네의 다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반깁스가 달랑거리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카네 군은 실험 참여가 어렵다고 했지만, 아무튼 몸만 안 쓰면 되지 않나? 신체 회복력, 골밀도 등 여러 수식을 머릿속으로 늘어놓으면서도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건넸다.
“친애하는 모르모트를 위해 준비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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