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아카

[타키아카]시간과 마음의 상관관계

아카네 첫 사랑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드림주 개인 설정 위주

이전에 작성한 [타키아카]온도와 감정의 상관관계를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4,350자


그때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년 단위의 세월은 네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마저 바래지게 했다. 그러나 그때 그 순간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새벽 어스름에 붉은 기가 막 올라오던 하늘, 막 올라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강, 그리고 잔디를 헤치고 나타난 너. 내 이름도 몰라 네가 다짜고짜 가볍게 던진 인사말에 나는 놀라 흡 숨을 들이마셨다. 물비린내가 섞인 잔디 냄새가 폐부에 가득 찼다. 명랑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너는 내 이름을 물었다. 모로보시 아카네. 익숙한 이름을 말하니 낯선 네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너는 나를 보려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역광 때문에 너를 잘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우마무스메 특유의 큰 귀가 쫑긋거리는 것만은 잘 보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에게 들리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너는 우마무스메도 아닌 내가 우마무스메용 강가 코스를 뛰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매일 이 시간에 뛰는 걸 봤다며, 왜 여길 뛰느냐는 물음에 도둑질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우마무스메가 좋아서, 그들이 뛸 때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어서. 솔직히 말하기엔 부끄러웠고, 능청스럽게 넘길 능력도 그 당시엔 없었다. 허겁지겁 육상부라서 그렇다고 그럴싸한 변명만 집어 던질 뿐이었다. 너는 그것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는 뜬금없이 같이 달리자고 했다. 우마무스메가 인간인 나랑? 반론할 틈도 없이 너는 신호를 외쳤다. 제자리에 서서. 준비. 땅.

얼떨결에 뛰게 된 거라 스타트가 늦었다. 다급하게 자세를 잡아 가는 나를 너는 웃으며 지켜보았다. 나는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거였는데도 너에겐 가벼운 산책이었던 것 같다. 흘끗 훔쳐본 너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으니. 머리카락과 꼬리가 함께 너울 치며, 귀에 달린 장신구가 네 웃음소리와 함께 짤랑거렸다. 이내 너는 허리를 숙이고 힘차게 대지를 박찼다. 네가 자아낸 돌풍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너는 멀리,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소름이 발끝에서부터 쭉 올라왔다. 내가 몇십초는 소요해야 지나가는 거리를 너는 단 몇 초 만에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만. 외치는 내 말도 두고, 소리처럼 빠르게. 안간힘을 다해 네가 남긴 편자 자국을 짓밟아 가며 그 뒤를 쫓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줄일 수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종족 차가 이다지도 벌어져 있었으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질 것 같고, 폐는 너덜너덜했다. 목은 바짝 타 쇳소리만이 났다. 그런 나와 달리 너는 멀쩡히 서서 손을 흔드는 꼴을 보자 내 몸은 허물없이 무너졌다.

내 몸이 이렇게도 둔하고 느려 빠졌던가. 육상부에 들어간 뒤 고작 1년이긴 했지만, 그 안에선 나름 손꼽히고 있었다. 우마무스메를 이 정도라도 뒤쫓아온 것만으로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록을 재보진 않았지만 스타트의 아쉬움만 빼면 좋은 기록일 것 같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내 손끝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덕지덕지 붙여봐도 가려지지 않는 이 비참함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어. 당시 내 질문에 답하듯 어린 나의 외침이 이명처럼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런 어린아이 꿈은 평생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마음은 단순 동경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직접 달려보고, 더 빨라지면 될 거야. 우마무스메의 레이스를 보고, 그들을 응원하면 될 거야. 그렇게 텅 빈 가슴에 조각조각을 주워다 넣었다. 그래도 채워지진 않았다. 달린 후의 개운함도, 신기록의 기쁨도, 레이스 직관의 환희도 온전히 메우지는 못하고, 틈새로 자꾸만 허무함이 새어 나갔다.

이제야 알겠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날 동경한 것은 그때 그 우마무스메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마무스메 그 자체를 동경해 버렸다는 것을. 그렇기에 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한 갈증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달리는가. 내가 달릴 이유는 그 어디에도. 하지만 달리지 않으면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 세상이 소리도 없이 바스러졌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엎어져만 있던 날 일으켜 세운 건 바로 너였다. 남의 속도 모르고 사람을 냅다 번쩍 들어 세워놓고는 하는 소리가 내일 또 같이 달리자는 거였지.

또 달리자고, 같이. 널 따라잡기는커녕 네 근처도 못 가는 나랑. 가볍게 던진 그 말이 나에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지금도 온전히 놓아주지 못하고 각인으로 남은.

그 후 우리는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도, 비유적으로도. 매일 아침 강가 코스를 같이 돌고, 어떻게 하면 중앙에 갈 수 있을지 함께 궁리했다. 트레센에 가고 싶다며 양 뺨을 붉히는 너를 보며 나도 널 따라 트레이너가 되고 싶단 마음을 품은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마무스메인 너와 인간인 나. 학교도, 반도 달라 공유하는 시간이라고는 등교 전 몇 분이 고작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어른들 몰래 비밀작전을 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내 꿈을 너만은, 그래. 너만큼은 나의 편이라는 생각이 몹시 기꺼웠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형편 좋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안 될 거라 말했지만 우리가 바라던 대로 함께 중앙에 갔으니까. 이제 꿈을 펼칠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믿었다. 참으로도 어리고 순수하며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겨우 출발점에 선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새로운 지역, 새로운 관계, 새로운 교육 등. 초반에는 각자 자리 잡는 것으로도 버거워 허덕였다. 고향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서로의 생활이 벌어지니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어 연락만 겨우 할 정도였다. 그저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걸 작은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아니, 아마 위안조차도 되지 못했다. 쟤도 힘드니까 나까지 힘들게 하면 안 돼. 그런 배려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고, 그게 쌓이고 쌓여 균열을 만들어 냈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네 레이스를 직접 보러 간 날, 훌륭한 성적은 내지 못해도 꾸준히 달리던 네가 결국은 대패를 해버린 날. 고생했다거나 다음에 더 열심히 하자는 등 평면적인 말은 오히려 네 마음을 난도질했다. 얼마나 더, 어떻게 더 열심히 해야 하냐는 너의 절규가 우리의 관계를 거칠게 찢어 버렸다.

이젠 다 그만둘 거라며 우는 너의 손을 어찌나 간절하게 잡았는데, 너는 내 손을 상냥하게 감싸며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자신과 달리 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실패해서 상처받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온하게 지내자고.

돌아가자니.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래. 너만은 내게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안 될 거라며 손가락질할 때 내 손을 잡아줬던 네가, 꼭 트레이너가 되라며 응원해 줬던 네가. 너와 달리 아직 제대로 달려보지도 못한 나한테 포기를 운운한단 말인가.

네가 그런 말을 할 만큼 몰려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까. 사실 그게 너의 100% 진심은 아니고 홧김에 말했을 뿐이라는 걸 눈치챘으면 좋았을까. 무수한 의문이 떠올라도 하나의 답으로 종결되어 버린다. 소용없다. 아무런. 애당초 그때의 나는 힘든 너를 받아줄 정도의 여유도 뭣도 없었으니.

내가 네 손을 강하게 뿌리쳤을 때 흔들리던 네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 속에 비친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싫었다. 내 나약함을 너를 통해 보는 것이. 그래서 도망쳤다. 차디찬 현실에 너를 두고 끝도 없는 꿈속으로.

그 후 너에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도 너 못지않게 어리고 지쳐있었으니까. 난 잘못한 거 없다고, 네가 먼저 사과할 때까지 연락 안 하겠다고 오기를 부렸다. 이를 악물고 나 혼자서도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내 길에만 열중했다. 유치한 냉전은 현실에 치이고 밀려 3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네 자퇴 소식과 함께 최악의 마침표가 찍혔다.

뒤늦게 너를 찾아보았지만 너는 이미 중앙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 어떤 미디어에서도 너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알아차리는 게 늦은 탓이었다. TV에서도, 뉴스에서도, 하물며 너의 SNS에서도 네 이별을 고한 곳이 없었다. 연락 하나 없이 도망치다니. 이건 너무나도 비겁하지 않나. 아니,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건 나 아닌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슬펐나? 화가 났나? 비참했나? 그때의 감정을 뭐라 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너와 만나버린 지금의 감정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기분 전환하고 회복할 겸 고향에 내려왔을 뿐인데 설마 너를 만나게 될 줄은. 둘이 친하지 않았냐며 너를 데려온 친구 녀석을 두고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최악이다. 최악인가? 나는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애써 말을 섞어 보아도 가슴 한 편이 울렁거리는 걸 보면 사실은 아니었나? 이별도, 재회도 서로를 껄끄럽게 할 뿐이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않은 편이 좋았나? 그럼 다시 최초의 의문으로 돌아간다. 그때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니겠지. 네가 옆에서 불을 붙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애초에 중앙까지 가지 않았을 테니. 그러니 지금도 밀어내지 못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왜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아 대신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어른이란 울지 못해 술을 마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입이 쓰다. 너무나도 쓰다. 색깔 하나 없는 술 너머 네가 걱정스레 날 내려보고 있었다. 네가 그런 표정도 하게 되다니. 너는 너대로 어른이 다 되어버렸구나. 지금 내 속을 뒤섞는 술처럼 열정도, 꿈도 없는 무색이 되어버렸구나.

아아. 이런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게 맞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자아낸 자기 연민이 너에게 굴절되어 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그때의 마음을 사랑이 아니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애절했다.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확실한 것은 너는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이라는 거다. 인정한다. 나는 너를 차마 잊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첫사랑이란 게 으레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의 청춘의 푸름과 설렘의 분홍빛을 칠해주어 잊지 못하는. 하지만 그뿐이다. 네가 차지하는 영역은 과거 그 한순간뿐.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상체를 세우니 언제부터인지 너는 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내가 혼자 못 돌아갈 것 같으니 집에 연락하려고 잠시 빌렸단다. 내 단축번호 1번이 아직도 집 번호인 줄 알고 1번으로 전화한 모양이다. 뻑뻑해진 눈을 깜박였다. 1번. 지금 1번이면. 내가 멍때리고 있자 핸드폰을 손에 쥐여주길래 자연스럽게 귀에 갖다 댔다.

"아카네 군."

아아. 타키온. 그래, 너다. 지금 내 1번은. 입이 써서 그런지 그 목소리가 달게만 느껴졌다. 네가 늘 마시던 설탕 탄 홍차처럼. 그게 달가워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가 말을 거니 네가 꼬박꼬박 대답해 준다. 내가 널 부르니 너도 나를 불렀다. 그 당연한 수순이 어쩐지 즐거웠다. 함께한 시간 동안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너는 내 부름에 계속 답해주었다.

이제 알겠다. 우마무스메가 되지 못한 내 가슴에 뚫린 구멍은 사실 텅 빈 곳이 아니라 갈증에서 비롯된 욕망이 나오는 곳이었다는 걸. 나는 이것을 꿈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 쏟아내고 있다. 지금까지도. 내 첫사랑을 그걸 버티지 못하고 떠났으나 너는 그게 다냐며, 더 해보라고 외친다. 나보다도 더 탐욕스럽게 허황된 꿈을 추구하는 아이. 네가 남기는 발자취는 마치 환상처럼 무지갯빛으로 찬란하기만 하다.

나는 그런 너의 미래를 한없이 따라가고 싶다. 이 모든 게 찰나임을 알면서도 오만하게 평생 따라갈 수 있다고 답하게 되는 것. 이런 마음을 나는 사랑이라 칭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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