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아카

[타키아카]Restart

실험으로 아카네가 어려진 이야기

* 해당 글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캐릭터 '아그네스 타키온'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모로보시 아카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아그네스 타키온' 트레이너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드림주 개인 설정 위주, 이전 글들 보고 마지막에 읽으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공백 미포함 17,225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붉은 단풍잎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자꾸만 머리에 붙는 나뭇잎을 떼어내며 앞서가는 어머니를 훔쳐봤다. 오비가 허리를 조이고 유카타 때문에 보폭이 좁아 걷기가 불편한데도 어머니는 아주 부드럽게 계단을 올라가셨다. 혹여나 놓칠세라 옷자락을 살짝 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로 돌멩이라도 찼던 것인지 무언가가 잘그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풍나무 뒤로 작은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그 앞에 멈추시더니 내 쪽을 돌아보시기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카네."

"네, 어머니."

"보이니?"

흘끗 어머니 안색부터 살폈다. 어머니께선 손님을 대할 때와 똑같이 온화하신 미소를 걸친 채 어디를 가리키고 계셨다.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몸을 바로 했다. 어머니의 손끝을 보자 우리 집과 료칸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기와 위에 붉은 단풍이 소복이 쌓이고, 옆을 지나가는 냇물에도 단풍 몇 개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이곳에서 자라오며 수도 없이 보았을 절경을 새삼스럽게 푸른 눈 안에 담았다.

"아름답지?"

"네. 아름다워요."

"정말로?"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니?"

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머니를 올려다보아도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 바로 무릎을 꿇었다. 바닥은 어느새인가 흙바닥이 아니라 다다미로 바뀌어 있었다. 그 위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후드둑 쏟아졌다. 물방울에 닿은 곳이 짙게 변색되어 간다. 절대, 절대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단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를 본다면, 그 얼굴에 어린 실망과 슬픔을 마주한다면 나는 분명 흔들릴 것이다. 까딱 잘못하여 이 수에 넘어가게 된다면 난 어머니가 가꾸신 화원에서 곱게 피어날 거다. 싫다. 그럴 순 없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다. 그러니 제발. 유독 작아 보이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사이에 이마를 박았다.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있는데, 너는 이 모든 것을 두고 대체 어디에 가겠다고 하는 거니."

참으로 자상하시며 서러운 말씀이었다. 입을 열었지만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쇳소리만이 내 목을 긁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으셨던 건지, 내 침묵 자체가 대답이 되었던 건지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그래. 말려도 할 거라면 해보렴. 지켜보마. 대신 실패하면 바로 돌아와야 한단다."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머니는 나직하게 덧붙이셨다. 이 말씀이 저주였던 건지, 배려였던 건지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단 하나, 그 말을 들은 나는 숨이 턱 막혔다는 것 뿐이다. 하얀 발이 내 옆을 지나간다 싶더니 곧이어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떠난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들이 가슴 속에 응어리졌다.

어머니, 저는 이것들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제가 꿈꾸는 것은 저 멀리에 있습니다. 아무리 억눌러도 이 마음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쫓아가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해보고 싶습니다. 바라시는 딸이 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빈말이어도 좋으니 저를 응원해 주실 순 없으셨나요. 엄마.


"헉…!"

"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이번 약의 부작용은 꽤 심했나 보군."

눈을 떴다. 실제로도 땀을 흘린 건지 등이 축축했다. 신음을 흘리며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방금 그건 꿈? 어린 시절의 꿈은 정말 오랜만이다. 한숨과 함께 이마를 쓸어내리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인지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 근육이 다 땅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간 숨을 고르는 나를 타키온이 여느 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키온…?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약 1시간 정도일세. 약을 먹고 고열, 맥박의 상승과 같은 증상 등이 나타나서 일단 눕혔지."

"…나 괜찮은 거 맞아?!"

"예상 범위의 반응이긴 하네. 정 궁금하면 일어나 보게나. 나도 궁금한 참이니까."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우선 상체부터 일으켰다. 그러자 걸치고 있던 재킷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몸에 딱 맞았던 티도 헐렁하게 늘어지기에 붙잡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손이 헛돌았다. 내려다보니 소매가 손을 반쯤 덮고 있다.

"어, 어라? 잠시만. 옷이…?"

"하하하! 얼굴만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그랬군. 이야~ 이걸 성공이라고 해야 할지, 실패라 해야 할지!"

타키온의 웃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부터 소매에서 완전히 빼냈다. 기분 탓인지 평소 보던 손보다 묘하게 작았다. 오히려 꿈속의 나와 크기가 비슷할 정도였다.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자 하체도 사정은 같았다. 바짓단은 남아도는 데다가 허리가 헐렁해서 일어서기라도 하면 바지가 내려갈 것만 같았다. 분명 내 몸인데도 내 몸이 아니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애꿎은 옷만 꽉 움켜쥐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번 실험은 신체 회복 관련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다만?"

"그렇지만 이건 회복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아카네군?"

내 말을 끊어내며 타키온은 내 옆에 앉았다. 갑자기 무게가 실리자 침대가 삐그덕 울었다. 타키온이 나를 발끝부터 머리까지 살피었다. 진득한 시선에 움찔 몸이 굽어진다.

"「다치기 전의 몸 상태」로, 혹은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설마."

"회복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그 옆에서 나는 무력하게 마른침이나 삼킬 수 밖에 없었다. 타키온이 낮게 웃더니 내 손에 손거울을 쥐여 주었다. 그 속에는 누가 봐도 나와 똑 닮은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렇다면 옛날의 몸 상태, 즉 어려지는 것도 회복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키는 나와 같은 159cm고, 체중은…"

"그건 굳이 말로 안 해도 돼!"

"흠, 이 정도면 한 몇 살쯤으로 돌아간 것 같은가?"

"글쎄. 어디 보자… 키가 7cm 줄어든 거고, 내가 중3인가, 고1에 성장이 멈췄으니까 중학교 1학년 쯤일까."

계산하듯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아카네가 문득 행동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말을 직접 확인하려는지 손거울로 얼굴을 다시 살피기도 했다. 슬쩍슬쩍 움직일 때마다 미처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원래는 머리가 묶었을 때도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데, 이제는 어깨만 겨우 덮고 있었다. 멋쩍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던 아카네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중심을 검지로 콕 찍으며 타키온이 물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 있나?"

"문제야 아주 많지만… 음, 뭐랄까. 보통 영화나 만화 같은 픽션에서 어려진다고 하면 아기나 유치원생이 되던데 지금의 나는 참 애매한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서."

"자네 나이 생각하면 약 10년은 젊어진 건데도 말인가? 욕심도 많군."

"…잠시만. 내 10년 전이 지금 이 모습이라고? 아, 아니야. 10년 전이라고 하면 조금 더 어리고 아기였던 것 같은…"

"그건 한 2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나?"

"그런 사실 굳이 짚지 말아줘! 자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실감했을 때의 충격을 네가 알아?! 너 같은 학생들은 몰라, 이 기분!"

"이런, 이런. 어른의 마음은 잘 모르겠군."

적당히 대꾸하며 타키온은 들고 있던 태블릿에 '약 10년'이란 글자를 적었다. 그 숫자를 노려보던 타키온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펜을 집어넣었다.

"그건 그렇고 약 10년이라니. 신체를 되돌린다는 건 그만큼의 트레이닝 효과도 다시 앗아가는 것이니 약 한 달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만 이건 너무 과하군. 복용량의 문제인가, 아니면 약 자체의 문제인가. 원하는 시기로 맞추기는 생각보다 까다롭겠어."

"그보다 나 돌아갈 수 있어?"

"그럼. 약효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이네. 더군다나 시제품이니까 말이지. 약 3시간 정도일까. 아니지. 내 생각보다 효과가 세게 나왔으니 반비례해서 일찍 끝날 수도 있겠어."

타키온은 중얼중얼 이번 실험에 대한 평가와 이후 예상을 적어 내리더니 이내 씩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저 미소는 설마. 아카네는 파리해진 얼굴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타키온은 태블릿을 내려놓더니 노트북, 웹캠, 스톱워치 등을 익숙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모처럼 좋은 기회이니 이것저것 측정해 보도록 하지! 두뇌는 그대로인 채 동일 인물의 10년 전후 순수 신체 차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니!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자, 잠시만! 이 꼴로?"

"왜 그러지? 사이즈는 맞는 것 같다만."

타키온이 아카네를 위아래로 훑자 아카네는 떨떠름하게 옷깃을 잡았다. 어려진 탓에 원래 본인 옷은 맞지 않고, 그렇다고 새 옷을 사러 갈 겨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타키온의 예비용 체육복을 빌려 입은 참이었다. 키가 비슷해져서 그런지 타키온의 말대로 사이즈는 맞았다. 사이즈는 맞지만… 아카네가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높이가 맞다 보니 태평한 타키온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와 저지를 꾹 내려 버렸다.

"그… 꼬리 구멍이 신경 쓰여서…"

"그게 문제인가?"

"그게 문제냐니… 아니, 아니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한 내가 바보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아카네는 이마를 짚었다. 상대는 그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잘못 산 인간용 바지도 그냥 입고 다니는. 엉덩이와 가까운 등 부근을 드러내 놓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 우마무스메가 알 리가 없었다. 설사 알아도 배려할 리도 없을 테지만. 아카네는 뒷짐을 지며 뻥 뚫려있는 구멍을 따라 동그라미를 덧그렸다. 브이넥 티는 그대로 입고 있으니 맨살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아카네 본인의 기분과 사회적 체면만이 문제일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카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실험의 모르모트, 발광, 모발 색 변화, 담당 우마무스메 대신 달리기 등. 자신의 사회적 체면은 이미 나락에 떨어졌단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꼿꼿하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운동장 써야 하는 측정은 최대한 아무도 없을 때 해줘…"

"흐음? 정 그렇다면 고려해 보지."

적당히 대꾸하며 타키온은 터벅터벅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선 타키온은 출발 신호처럼 긴 옷소매를 힘차게 펄럭였다.

"자, 시작할까!"


"형편없군."

"헉… 허억…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콜록, 콜록!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후우우…"

"그렇지만 보게, 이 기록을! 가장 최근의 자네와 비교하면 몇 초도 아니고 몇 배 차이가 나네! 10년이란 세월, 신체적 차이, 그리고 그동안 나와 트레이닝한 것을 감안해도 차이가 너무 커! 이건 과장 보태서 갓 태어난 수준 아닌가!"

"어흑. 그래. 갓 태어난 사람은 일단 좀 앉아 있을게…"

아카네는 숨을 헐떡거리며 타키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처럼 덜덜 떨렸다. 엄청난 거리를 뛴 것도 아니었다. 평소 타키온이 자주 요구하던 2,000m를 평소보다 느린 페이스로 뛰었을 뿐. 그게 어린 몸에 이렇게까지 안 맞을 줄은 몰랐다. 무슨 인터벌도 아니고 중간중간은 아예 걷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근육을 풀어주려고 다리를 주물러도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기별도 가지 않는다. 근육도, 뭣도 갖추지 못해 볼 품 없는 몸뚱아리. 아카네는 다리를 쭉 펴며 그것을 외면했다. 하늘은 오늘따라 드높기만 했다.

"달려보니까 알겠어.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아무리 많이 쳐도 중학교 1학년인 것 같아. 중학생 때부터는 그래도 육상부 했었으니까 아마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자네 학생 때 육상부였나?"

"응. 딱 부 활동 수준이었지만."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여태 말 안 해준 거지?"

"응? 이거 실험에 필요한 정보 아니지 않아?"

"자네는 나의 제1호 모르모트이지 않은가! 대부분의 실험은 제일 먼저 자네를 통해 검증되니 자네와 관련된 정보는 전부 실험과 관련되어 있네! 정말이지. 자네는 생각보다 본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는 있는가? 아무튼 지금은 그보다."

"흐악?!"

다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아카네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참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어느새인가 쪼그려 앉아 제 다리를 만져 대는 타키온을 보고 또 소리를 지를 뻔했으니.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거침없이 올라오는 손길에 아카네는 확 혀를 깨물고 싶었다.

"확실히 그렇군. 근육이 거의 없어."

"적어도 미리 말하고 만져줄래?!"

"인간은 겨우 이 정도로도 일상생활에 문제없는 건가? 이건 거의 운동을 안 하고 살았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군."

"맞아."

타키온의 손이 떨어진 틈을 타 아카네가 얼른 다리를 접어 올렸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양다리를 끌어안으니 자신의 얄팍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가슴께가 울렁거려 팔 사이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볼이 눌리다 보니 나오는 말들은 전부 어눌해졌다. 그 말투는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과 똑 닮아있었다.

"육상부 들어가기 전까진 운동은 전혀 안 했어. 아마 학교 체육 시간이랑 가끔 집에서 탁구 쳐본 게 고작이었을 거야. 그다지 밖에서 뛰어놀지도 않았으니까."

"왜지?"

빼꼼 눈만 내밀어 보니 곧장 타키온의 시선이 아카네에게 날아들었다. 아주 조금의 악의도 없이 순수한 의문과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어려져서 그럴까. 평소라면 줄줄 나오던 거짓말과 핑계는 어디론가 날아가 있었다. 아카네는 입을 뻐끔거리다 그냥 웃어버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모든 감각이 자신이 알던 것과 묘하게 어긋나는 지금도 이 미소만큼은 아주 익숙했다. 그것이 어쩐지 서글펐다.

"…조금만 쉬었다가 말해도 돼? 나 목말라."

"흐음. 그러도록 하게."

아카네를 내버려두고 타키온은 그 옆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렸다. 새하얀 창에 무미건조한 데이터가 늘어서던 도중, 그 위로 붉은 단풍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타키온은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적어도 그의 시야에서는 단풍나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건지. 단풍잎을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오늘의 날씨 정보를 되짚었다. 벌써 가을도 꽤 깊어졌다. 기온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을 연상시킬 만큼 매서웠다. 이런. 이래서야 몸이 빨리 식어버리겠군. 아카네가 쉬고 싶다고 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타키온은 강경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이만 다음 측정으로 넘어가도록 할까."

타키온이 말을 던졌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침묵을 바람 소리가 메웠다.

"아카네 군?"

타키온이 이름을 불러도 아카네는 멍하니 앉아 허공만 보고 있었다. 불온한 예감에 타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도를 보아하니 거칠었던 호흡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즉, 지쳐서 저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넋이 나가 있는 듯한…

타키온은 턱을 괴고 그를 조용히 관찰했다. 단풍잎이 붉은 머리 위에 안착해도 그는 미동 하나 없었다. 자신의 트레이너는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주변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몸이 묶이는 것도, 제 방 창문이 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럴 때 움직이는 것은 딱 하나, 메트로놈처럼 움직이는 검지 손가락뿐이다. 탁탁 제 손등을 두드리는 박자가 점점 느려지는 걸 보고 있자니 그의 생각을 끊어내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본인의 이야기는 왜 항상 요령 좋게 피해 가는지. 이걸 뒤집어 헤쳐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 마음 그대로 타키온이 아카네의 팔을 붙들어 억지로 몸을 돌리자 화들짝 작은 어깨가 튀어 올랐다.

"아카네 군."

"네?!"

"…네?"

아카네한테서 처음 들어보는 한 음절에 타키온이 답지 않은 반문을 던졌다. 항상 올곧게 자신을 보던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가라앉았던 호흡도 점차 거칠어졌다. 신체를 쓰지 않았으니 감정의 문제다. 두려워하고 있나? 무엇을? 이 의문은 아카네의 질문 하나로 해결되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여긴 어디인가요?"


드르륵. 타키온이 연구실의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단단히 쳤다. 너머에선 트레이닝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운동장과 비교한다면 연구실이 유독 조용한 것은 으레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침묵은 타키온에게도 꽤 낯선 것이었다. 타키온은 살짝 고개만 꺾었다. 기껏 홍차도 내줬건만 아카네는 입도 대지 않고 얌전히 무릎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자세는 꼿꼿하지만 호기심과 불안감을 감출 바가 없는지 눈동자는 연신 바쁘게 돌아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순 연기로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애초에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칠 인물이 아니기도 하다만. 한숨을 삼키며 타키온은 의자를 끌어와 그와 마주 보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어려져 버린 트레이너와.

"자, 그럼 확인을 위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나?"

"아, 네. 저는 모로보시 아카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어, 학교인가요?"

"틀린 대답은 아니군. 여긴 트레센 학원일세. 일단 알아두고 있게나."

"트레센 학원이라면 설마 그…"

"현재 나이는? 몇 학년이지?"

"아, 만 11세.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흐음. 본인 추측이 딱 맞았군. 그럼 가장 최근 기억은?"

"아마… 달리고 있었는데…"

"어디서, 왜 달렸지? 기억나나?"

바로바로 나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본인도 당황스러운지 입이 몇 번이고 열렸다 꾹 다물렸다. 타키온이 대답을 촉구하려 눈짓을 하자 아카네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게… 운동장에서, 누가 시켜서… 아마도, 어머니? 아니, 그렇지만 이런 걸 시키실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

또박또박하던 말이 횡설수설하게 바뀌고, 올바르던 자세도 점차 무너진다. 결국 아카네는 제 양손을 꽉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자네가 죄송할 필요는 없지. 필요한 답변들이었어. 고맙네."

타키온은 의자를 돌려 아카네 대신 모니터와 마주했다. 다시 검토해도 약은 분명 육체에만 영향이 가도록 조합했었다. 실제 본인에게도 가장 최근의 기억은 남아있는 상태이고. 즉, 뇌까지 어려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쳐버린 것인가. 타키온은 우선 침착하게 앞서 측정했던 데이터를 컴퓨터로 옮겼다. 현재 데이터와 비교할수록 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실험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은 항상 타키온에게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혹시 이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걱정이 타키온의 뇌를 장악했다.

곤란하군. 긴 소매가 타키온의 입가를 가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감정적인 동요인가? 내가? 실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측정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대응이 우선이었다. 약효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 타키온은 아카네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대로 약효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해독제를 만들어 일찍 끝내는 게 나은가. 그렇지만 약효가 끝나기 전에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급하게 만든 해독제가 더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이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는가. 아니, 생각을 계속해서 기억이 혼전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차라리 재워두는 게. 사고를 촉진하려 홍차에 손을 뻗자 시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빛이 걸렸다.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타키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뚫어지겠어."

"앗, 죄송해요. 바쁘신 것 같던데 제가 방해를."

"무얼. 그냥 보기만 한 거 아닌가. 괘념치 말게."

타키온의 의자가 다시금 아카네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카네는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에 푸흐흐 웃음이 흘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담당 트레이너와 동일인이라는 인식은 있다. 더군다나 키가 자신과 같으니 물리적 크기도 그리 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리다는 실감이 이리 들다니. 만 11세면 스칼렛 군보다도 어린 건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타키온이 느긋이 서두를 뗐다.

"생각해 보니 나만 질문했군. 정작 궁금한 게 제일 많은 건 자네일 텐데도 말이야. 궁금한 게 있다면 편히 물어보게."

"그러면 저, 그 우마무스메 씨가…"

"아그네스 타키온이다."

"아, 네. 아그네스 타키온 씨가…"

"타키온이라고 불러도 되네."

"…타키온 씨가?"

"그냥 타키온이라고 하게. 자네한테 그렇게 불리는 건 영 어색하니까."

"저, 죄송해요. 남을 부를 때 '씨'를 빼는 건 제가 어색해서…"

"남이라… 하아. 마음대로 하게. 그래서 질문은?"

아까의 자상함은 변덕이었는지 타키온은 손, 정확히는 소매를 휘적거렸다. 달라진 태도에 아카네는 몸을 움츠렸다. 타키온은 조금 뚱해 보이긴 해도 아까처럼 의자를 돌려버리진 않았다. 그럼 물어도 괜찮은 걸까. 분위기를 흘끗 살피다 여태껏 방치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홍차는 미지근하면서도 달콤하고 향긋했다.

"그, 타키온 씨가 지금의 저는 어려진 거라고 하셨었죠? 원래 어른인데 약을 먹고 어려진 거라고."

"그렇지."

"어른인 제가 왜 트레센 학원에 있던 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이유를 아신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자네가 나의 모르모트. 아니, 잘못 말했다. 담당 트레이너이기 때문이지."

"네?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제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자 아카네는 합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미 나간 말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타키온은 의자 손잡이를 힘주어 붙잡았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그야 저는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요."

"흐음?"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타키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업이라. 지난 초여름 잠깐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집이 료칸을 한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거기 주방장이고, 요리를 배웠다고."

"네, 맞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저희 집은 대대로 료칸을 운영하고 있고, 저는 그 후계자예요. 요리도 그 일환 중 하나고, 지금도 일을 계속 배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른인 저는 분명 료칸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데 트레이너라니. 뭔가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지?"

다소 날카롭게 쏘아지는 말에 아카네가 홍차 잔을 꽉 쥐었다. 잔이 흔들리며 손등 위로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산된 실험조차도 아주 약간의 변수만으로 예상 밖의 결과를 낳기 마련이네. 하물며 더 길게 이어지는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무수한 변수를 만나 수도 없이 바뀔 수밖에 없지. 료칸 후계자로 태어났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지금도 당연히 료칸에서 일한다는 결과를 예상하는 건 상당히 편협한 사고라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나의 조건이 필히 확정된 미래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나는 진작에…"

"어… 네?"

"…아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둘까. 아무래도 어린 자네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질문은 없나?"

"음… 저, 그러면…"

물어도 되나. 아까보다 더 가라앉은 것 같은 분위기에 아카네가 연신 눈치를 살폈다. 타키온은 지루한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방향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여러 그래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아카네는 료칸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려야 하는 분위기는 잘 알아채는 편이었다.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뒤에서 대기하는 게 직원의 역할이라고 지겹게 들어왔으니까. 머리가 내린 판단은 간단명료했다. 지금 상대방이 나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거기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사적인 호기심은 접고 일을 하시라며 물러나야만 한다.

하지만. 아카네의 시선이 자꾸만 타키온의 상체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교복 리본을 조이고 있는 편자 모양에. 우마무스메 레이스의 중심. 트레센. 아까 이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얼마나 설렜던가. 우마무스메를 좋아하는 자로서 지금 이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있나? 아니, 못 하지. 아카네는 자문자답을 마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타, 타키온 씨는 여기 트레센 학원의 학생인 거죠?"

"그렇지."

"그러면 레이스에도 나가겠네요?"

"맞네. 이미 데뷔도 한 지 오래지."

"와, 그렇군요! 그러면, 그러면요!"

아카네가 거의 튀어 나갈 것처럼 바짝 몸을 들이댔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덜컹거렸다.

"얼마나 빠른가요?"

탄성 어린 목소리에 타키온이 귀를 바짝 세웠다. 다시금 마주한 눈은 언제 고요했냐는 듯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익숙하디익숙한 빛깔에 타키온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아하하핫!"

"죄, 죄송해요! 역시 무례했죠?"

"아니! 아니야! 오히려 유쾌했어! 잠깐이라도 정말 아카네 군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했던 게 참으로 우스워졌군."

"네…?"

"자네는 참 한결같다는 뜻일세."

타키온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고, 의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다소 과장되게 소매가 크게 펄럭이며 양팔이 펼쳐졌다.

"얼마나 빠르냐고 물었지? 흐음. 뭐라 답해줘야 좋을까. 수상 실적, 구간별 기록 등 답변할 거리는 아주 많네! 하지만. 그렇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질문을 한 거니까 역시 답변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라니요?"

아카네가 자신을 따라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타키온이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타키온은 일부러 바로 말해주지 않고 웃음을 흘리며 시간을 끌었다. 금방이라도 발을 동동거릴 것 같은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타키온은 입을 가리며 잠시 진심으로 웃은 다음, 트레이닝용 신발을 꺼내 흔들었다.

"직접 보도록 하게, 내 달리기를"

찰그랑. 운동화가 떨어지며 편자가 유쾌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노을에 푸른 잔디가 단풍처럼 붉은빛이 물들어 있다. 가을이라 해가 짧은 탓에 하늘의 절반 정도는 벌써 남보랏빛이었다. 이 시간까지 트레이닝하는 학생들을 위해 하나둘 조명이 커지고, 그 아래로 긴 그림자 두 개가 일렁이며 나아갔다. 아카네가 몇 번이고 그냥 객석에 있겠다 손사래 쳤지만 타키온은 굳이 운동장까지 끌고 내려왔다. 그러고선 한 손에는 아예 스톱워치까지 쥐여 주는 게 아닌가. 얼떨떨한 아카네를 잔디밭에 세워두고 타키온은 느긋하게 몸을 풀었다. 잔디, 2,400m, 양호. 다소 어둡고 바람이 불긴 하지만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편자까지 이상이 없단 걸 확인한 타키온이 검지 손가락으로 아카네를 척 가리켰다.

"거기, 그 자리에서 두 눈 똑똑히 뜨고 보고 있게나."

"네, 네!"

씩씩한 대답에 타키온은 한 번 시원스레 웃고 나서 출발 지점에 섰다. 타키온이 자세를 잡자 웃음도, 장난기도, 여유도 한순간에 그 얼굴에서 사라졌다. 진지한 모습에 지켜보던 아카네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일 정도였다.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후 아카네가 신호했다. 어설픈 구령과 다르게 스타트는 매우 날카로웠다.

'빠르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비교가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그것이 빠른지, 느린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압도적인 스피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빠르다는 인식을 준다. 지금 타키온의 달리기가 그야말로 그러했다. 옆에 달리고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네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바람도, 빛도 모두 그의 뒤로 넘어가기에 바빴다.

꿀꺽. 아카네가 침을 삼켰다.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직접 본 횟수가 적을 뿐, 그도 레이스 영상을 찾아보는 팬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아카네 눈에도 현재 타키온이 빠른 페이스로 움직인다는 게 잘 보였다. 각질이 도주인 걸까? 아니면 이 정도 속도로 선행? 혹시 시니어급인지 진작 물어봤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지금 들고 있는 스톱워치로 실시간 기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도저히 저 달리기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빠른 만큼 지켜볼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윽고 타키온이 제4코너를 돌고 가속을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타키온의 달리는 모습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깔끔한 폼, 길게 뻗어가는 팔과 다리, 호선을 그리는 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눈. 붉은 눈은 어둠이 가라앉은 이 세상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더없이 순수하게 광기에 가득 찬 눈빛이 심장에 내리꽂혔다. 그대로 타키온이 결승점을 지나치고, 아카네는 스톱워치의 버튼을 눌렀다.

타키온은 속도를 천천히 죽이며 저 앞까지 간 후에야 겨우 멈추었다. 아직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타키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한 번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른 타키온은 의기양양하게 아카네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눈이 마주치자 아카네는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 역시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자신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뒤쫓고 싶어지는 마음을. 어쩐지 울 것만 같아 제 뺨을 가볍게 쳤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아카네는 활짝 웃으며 타키온을 향해 뛰어갔다.

"타키온 씨!"

"잘 봤는가? 감상은 어떻지?"

"정말, 정말 굉장했어요! 뭐라 말해야 하지… 무척이나 매력적이라고 할까… 끌어당긴다고 해야 하나… 보는 내내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려서… 아무튼 적어도 제가 아는 우마무스메 중에서 제일 빠른 것 같아요!"

"후후, 그런가. 그 눈을 보아하니 좋은 답변이 되었던 것 같군."

"네! 이렇게 굉장한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고…"

조잘조잘 신나게 떠들던 아카네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벙긋거리던 입에선 힘없는 소리가 샜다.

"이런 분의 담당 트레이너라니, 제가…"

"표정이 왜 그러지? 기쁘지 않은가?"

"아, 아뇨! 기쁘지 않다기보다는 실감이 안 나서요. 제가 어려진 게 아니고 그냥 어떤 착오가 있거나 어딘가 이상한 차원으로 와버린 건 아닐까요."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며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가 내려가자 타키온과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아카네는 체육복은 양손으로 구기며 붙잡았다.

"애초에 제가 트레이너가 되었다는 것도 다 꿈속의 이야기 같고…"

"꿈이라."

타키온은 한 번 피식 웃고는 가져왔던 가방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 뒤적이더니 유리끼리 맞부딪히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 번쩍 들어 올렸다. 투명한 플라스크 안에는 청록색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자! 그런 자네에게 아주 딱 맞는 약이 있네! 바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약이지!"

"네?"

"이것만 마시면 트레센 소속 트레이너가 되는 것은 물론, 자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우마무스메를 담당하게 되지! 어디 그뿐일까? 사츠키 상을 포함해 여러 G1 레이스 우승의 영광도 차례차례 자네의 것이 되네! 부작용으로 잠~깐 잠들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애교라고 치게."

"네, 네에?! 아무리 들어도 수상한데요?!"

"믿게."

타키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네와 마주 섰다. 같은 키를 가진 두 사람의 시선이 어떤 방해물 없이 교차했다.

"나를. 그리고 자네 자신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약 뒤에서 타키온은 나긋하게 속삭였다. 악마에게 홀리듯 아카네가 조심히 플라스크를 건네받았다. 출렁거리는 액체를 보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막 받아먹으면 안 된다. 그런 정론 따위는 가슴을 울릴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꾸만 타키온의 달리기를 상기시켰다.

"저는…"

아카네는 약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버리곤 뒷말과 함께 삼켰다. 몇 번 비틀거리다 힘없이 쓰러지는 몸을 타키온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축 늘어진 아카네를 번쩍 들어 올린 타키온은 그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후후후, 자네는 정말 우수한 모르모트야."


봄바람이 벚꽃잎을 싣고 넘실넘실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4월, 벚꽃이 만개할 때 꽃구경을 떠나는 대신 나는 이 거대한 나카야마 경기장에 몸을 욱여넣었다. 클래식 삼 관의 시작, 가장 빠른 말이 이긴다는 사츠키 상. 중학생도 되었으니 레이스를 보러 가자며 힘차게 나섰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부모님 허락, 교통수단 예매, 그리고 실제 이동… 경기장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해서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어머니 말 들을걸… 눈물을 꾹 참고 인파에 휩쓸려 계속 움직였다.

겨우 산 입장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주머니에도 못 넣고 손에 꼭 쥐었다. 자리를 찾아 겨우 앉고 숨을 돌리자 그제야 경기장이 보였다. 커다란 모니터만 아니었다면 너른 들판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잔디밭이 저 멀리 있었다. 분명 인간과 비슷한 크기인 우마무스메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본 건 경기장이랑 가까운 스탠딩이었으니 이렇게 경기장 전체를 보는 건 처음이다. 멀어서 조금 실망했는데 이건 이거대로 좋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우마무스메 이야기만 하는 것도 어쩐지 신기했다. 1번 인기의 최근 경향, 2번 인기의 인터뷰, 3번 인기를 향한 응원. 갖가지 얘기를 훔쳐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곧이어 아나운서의 힘찬 안내와 함께 우마무스메들이 일제히 패덕에 들어갔다. 거대한 모니터에 비친 면면들은 하나 같이 비장하며 멋있었다. 침묵도 잠시. 스타트와 함께 모두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신나기 보다는 거대한 함성에 기가 죽었다. 그래도 열심히 눈으로 그들을 쫓았다. 모두 깔끔한 스타트. 각 우마무스메들이 자신의 각질에 맞게 거리를 잘 유지하며 레이스를 이어 나가는 것 같다. 경기장까지 오는 길은 길고 길었는데, 우마무스메들은 순식간에 제4코너에 진입했다. 각자 스퍼트를 내며 일렬을 이루었던 무리가 뭉쳐진다. 그 사이를 뚫고 한 우마무스메가 따라붙는 후발 주자들과 격차를 벌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을 땐 우마무스메들이 연달아 결승전을 통과하고 있었다. 비디오 판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확한 승리. 함성 속에서 1착한 우마무스메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길게 늘어진 소매가 팔랑팔랑 움직일 때마다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흘러넘치는 감동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트레이너 군."

조금 낯선 호칭인데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곳에서 1착을 했던 우마무스메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라, 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던가? 의문이 들면서도 습관적으로 재킷 깃에 손에 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편자 모양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이건 트레이너 배지. 아, 맞다. 나는 트레이너였다. 그것도 트레센 소속인.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잊고 있었지? 자문에 답할 틈도 없이 어느새 그 우마무스메가 눈앞까지 와있었다. 승부복용 백의가 크게 펄럭이고, 옷에 달린 플라스크 모양 장식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타키온."

자연스럽게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그는 싱긋 웃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으음…"

"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눈을 떴다. 또 꿈이었나. 어린 시절 꿈 자체가 오랜만이었는데, 그걸 하루 만에 연달아 꾸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타키온은 이번에도 옆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몸이 꽤 개운하길래 지체 없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타키온…?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약 1시간 정도일세."

"어라? 이 대화 어쩐지 기시감이… 어, 옷도…"

"약효가 풀리고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어쩔 수 없네. 체육복이어서 그나마 그 정도지."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내 몸부터 살폈다. 일단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옷소매나 바짓단이 내 몸보다 짧아 손목, 발목이 드러나 있다는 정도일까. 타키온이랑 체격 차가 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몸에 꽉 끼거나, 옷이 늘어나진 않으니. 그나저나 잘 빌려 입긴 했는데 내가 입은 걸 돌려줘도 되는 건가. 세탁하고 돌려주면 괜찮은가. 혼자 속으로 끙끙거리는 것도 모르고, 타키온이 태블릿을 들고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아까와 달리 몸은 살피지 않고 시선은 얼굴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나?"

"모로보시 아카네고, 여긴… 네 연구실이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그리고 자네와의 관계는?"

"타키온이잖아. 아그네스 타키온. 그리고 관계는… 일단 정석적인 답변은 트레이너와 담당 우마무스메지."

"호오, 정석적인? 다른 답변도 듣고 싶다만."

"그건 차마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뭐, 상관없지. 그럼 가장 최근 기억은?"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과 달리 타키온은 대답을 보채지도 않고 날 빤히 보기만 했다. 시선을 흘려보내며 약간의 심술을 부렸다.

"…어느 우마무스메한테 넘어가서 이상한 약 먹은 거."

"그렇게 말하면 모르네. 정확히 어떤 약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말하게."

"이상한 우마무스메라는 말은 신경도 안 쓰는구나…"

이마를 짚자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흘러내렸다. 머리 길이 역시 원래대로 돌아와 얼굴은 물론 상체까지 가려졌다.

"하아… 꿈을 이뤄준다는 약이라니 대체 뭐야."

"아하하! 다행히 어려졌을 때 기억은 다 있나 보군. 참고로 말해두네만 그건 필요한 조치였어. 기억이 더 혼전 되기 전에 막아야 했으니."

"그런 것치고는 어린 나랑 꽤 길게 얘기하던데? 무엇보다 꿈을 이뤄준다니, 뭐니… 어린애 놀리는 것도 아니고."

"흔치 않은 기회니 얻을 정보는 얻어야지. 그리고 내가 딱히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않나."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 시절 내가 꿈꾸던 것과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른 걸."

아차. 너무 답지 않은 말을 해버렸단 자각이 올라왔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며 일부러 익살스럽게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런 모르모트 신세가 될 거라곤 어린 나는 꿈에서도 몰랐겠지."

"하하! 그때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진 거라 하게! 가장 가까이에서 우마무스메의 한계를 돌파하는 일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자네도 들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에이, 설마."

"아니, 분명."

타키온의 손끝이 내 턱에 닿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할 바도 없이 확신에 가득 찬 타키온을 마주하니 기껏 자아낸 미소에 쩍 금이 간다.

"나이도, 신체도, 말투도 다 달랐지만 이 광기 어린 눈빛만은 닮아 있었거든."

누가 누굴 보고 하는 소리인지. 광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볼멘소리를 꾹 참았다. 아까 나만을 위해 달릴 때와 똑같은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꽤 버거운 일이었다. 태연한 척도, 가벼운 농담도 이 앞에선 부릴 수 없다. 몸을 뒤로 물려 버려도 타키온은 개의치 않아 하며 웃었다. 내가 진짜 도망칠 리 없다는 걸 잘 안단 듯이.

"그런 눈을 한 주제에 료칸 후계자라니 뭐니 가당치도 않지."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있는 거잖아."

힘 빠진 목소리로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어린 나를 직접 마주한 상대한테서 더 도망치는 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어차피 내 이야기해 주기로 했었고. 어깨에 힘을 빼는 사이 타키온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출한 건가? 생각해 보면 자네가 본가로 돌아가는 것도 잘 못 봤군."

"아니, 그 정도까진 안 갔어. 너한텐 말은 안 했지만 본가에도 몇 번은 갔었고."

"그러면?"

"고집부린 게 아슬아슬하게 통했다고 할까… 트레이너 전문 양성 학교에 들어가는 것까진 어떻게든 허락을 받았어. 대신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돌아오란 조건이 붙긴 했지만."

"흐음. 그래서 그렇게 절박했던 건가? 관계가 형성된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부터 수상한 약 3개를 먹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 말이야. 아하하!"

"뭐어… 그렇다기보다는 그땐 좌우지간 이런 우마무스메를 그냥 보낼 순 없단 생각이었지만 말이야."

스카우트 때가 생각나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타키온을 살폈다. 그때에도, 내가 어려졌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타키온은 생글생글하기만 했다. 내 시선을 느끼고선 타키온이 눈을 끔벅였다.

"왜 그렇게 보지?"

"뭐랄까…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서. 보통은 내가 원래 가업의 후계자였다는 소릴 들으면 아깝다든가, 어리다든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든가. 대충 그런 소릴 듣거든."

"그건 그들이 자네를 잘 몰라서 한 소리겠지."

"응?"

"자네는 참 한결같이, 광기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선택도 기꺼이 저버리고 불길로 뛰어드는 자이지 않나! 자네다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네만?"

"…그거 욕이야?"

"칭찬일세. 이런 모르모트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래…"

"무엇보다."

타키온이 짐짓 다리를 꼬더니 무릎 위에서부터 제 다리를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이윽고 하얀 손이 발목과 발등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자네가 없었다면 이런 현재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구나. 응. 그렇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때는 본인조차 포기하고자 했으나, 기어코 클래식 전선을 뚫고 온 다리를. 너는 이걸 나와 함께 이뤄냈다고 하고 있다. 나는 널 통해 꿈을 꾸고 있던 건데. 네 비밀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그저 가족들에게 받고 싶었던 지지를 너에게 풀었을 뿐인데. 이렇게 비겁한 애정으로 과분한 결과를 받아도 되는 걸까. 울컥 속에서부터 뜨거운 게 올라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자네 우나?"

"아, 안 울어! 그냥 이런 적이 처음이라 조금 감성적으로 되었다고 할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잠시만. 너 지금 뭐 해?"

"모처럼이니 심박수를 체크해 두는 걸세. 고작 손가락 하나이니 신경 쓰지 말고 뭔 생각했는지나 계속 말해보게."

"신경이 안 쓰이겠냐고… 진짜 별거 아니고. 좀 부끄러운 소리이긴 한데."

"서론이 길군. 얼른 말해보게."

"말할 테니까 좀 기다려!"

빽 소리를 질렀지만 덕분에 진정이 좀 된다. 목을 가다듬고 신중히 말을 골랐다.

"내 꿈이나 가업 얘기 나왔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온 건 처음이구나 싶어서. 정작 나 자신조차도 그러질 못했으니까."

"흐음?"

"어린아이의 기세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후회 정말 많이 했거든. 원래 트레이너를 하던 가문도 아니고, 이쪽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으니까. 내 얘기 잘 안 하고 다닌 것도 가업이나 하란 소리에 제대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였어."

내가 생각해도 꼴사나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나와버린걸. 자존심과 오기, 약간의 열정으로 여기까지 온 셈이지. 그 답답한 집에 내 발로 다시 돌아가서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릴 듣는 것만은 죽어도 싫었거든. 무아지경으로 뛰어오다 보니 이렇게 됐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는 나보고 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멋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이랬다.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앞뒤 재지 않고 전력으로 도망쳤을 뿐. 가만히 옆에 개어 놨던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렸다. 깃에 달린 트레이너 배지는 이젠 새것 같은 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사이 많은 것을 이루며, 나는 어른이 되어 있었구나. 그런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참으로 촌스럽고 꼴볼견이게도. 모를 때에는 어쩔 수 없지만, 알아버렸다면 정면으로 마주해야겠지. 눈을 감아버렸던 것들과. 잠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타키온."

"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심장 박동이 불안정해졌다만."

"내가 사실 네 비밀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쩔 거야?"

네 다리 문제를 내가 눈 감고 있었다면. 잔잔하게 덧붙이며 양손을 모았다. 이건 용서를 바라지 않는 고해성사다.

"그랬었나? 언제, 어떻게 알았지?"

"월계배 때. 다른 출전자들 정보 정리한 적 있었잖아. 그때 네 정보도 다시 정리해 보다가 눈치챘어."

"그런가. 하긴 그때 내 태도가 바뀌기도 했고, 카페의 말도 있었으니."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각오했던 분노나 원망은 한 자락도 없었다. 타키온은 내 심박수나 계속 보고 있기만 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끄, 끝이야?"

"끝이냐니.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아, 그렇지. 그때 당시 감정이 어땠는지 알려주면 좋겠군! 내가 내 비밀을 폭로할 때 울었던 자네니까 최초의 감정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하네."

"아니, 아니! 잠시만! 또 연구하려고 하지 말고! 뭐랄까, 뭔가 더… 다른 말이 나와야 하지 않아? 그렇잖아. 나는 트레이너인데도 나는 네 부상 위험을 방치한 셈이라고? 건강이나 컨디션 문제는 따라달라고 부탁까지 한 주제에. 보통이라면 트레이너 실격 사유 아냐?"

"우리한테 '보통'이란 말이 통한 적이 있던가?"

태연자약한 태도에 긴장이 탁 풀렸다. 힘없이 트레이너 배지만 꾹 쥔 채 벽에 기대었다.

"…아니."

"한 보 양보해서 자네 말이 맞다고 치지. 그러면 트레이너에게 신체적 결함을 숨긴 내가 먼저 담당 우마무스메 실격 아닌가? 자네는 왜 알고도 계약 해지를 하거나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지?"

"그건… 화가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손으로 네 달리기를 끝내고 싶지 않아서, 네가 네 선택으로 나아가는 길을 끝까지 보고 싶어서…"

"흠, 그러면 그 당시 느낀 감정은 분노와 죄책감인가. 조금 미안한 짓을 하긴 했군. 그래도 결과론적으론 잘되지 않았는가. 후후, 여기서 만족하기에는 앞으로 갈 길이 한참 멀었다만."

다소 즐거워 보이는 낯으로 타키온은 내 손가락에서 맥박측정기를 제거하고는 그대로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약속한 대로 한계의 '끝'까지 데려가 줄 테니 계속 따라오기나 하게."

"하… 하하하! 응, 그거라면 자신 있지."

망설임도, 두려움도 모르는지 뻔뻔스레 나온 말에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순수한 광기에 물든 눈빛은 스카우트 때와 똑같은데도 어쩐지 이 애도 좀 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포시 타키온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자 타키온이 그대로 잡아당기며 날 일으켜 세웠다. 두 발이 바닥에 닿고 두 다리가 단단히 날 지탱한다.

"…고마워, 타키온."

"뭐가 말인가?"

"그냥, 말하고 싶어져서."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지금 분위기에 휩쓸려 엄청 부끄러운 말 많이 하지 않았나? 어디 덴 것처럼 타키온한테 잡혀있던 손을 팍 떼버리고 양 볼을 감쌌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별말을 다 한다, 진짜! 무슨 약 후유증 있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그 관련으로 말하려던 참이네! 약효가 생각보다 셌으니 돌아온 상태도 확인해 봐야지. 자, 얼른 이리 오게! 신장, 체중, 혈액 등 기초 정보를 다시 측정하도록 하지!"

"아, 알겠어."

입고 있던 저지가 답답하여 재킷부터 걸쳤다. 습관대로 배지를 한 번 만지고 일어나니 그제야 어두컴컴해진 창밖이 보였다. 오늘도 또 통금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게 생겼다. 후지에게 조금 있다가 연락하기로 하며, 제일 먼저 신장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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