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책사는 얼굴이 없다, 3장(三章)
레오나 킹스카라, 빌 셴하이트 드림
* ‘타마슈나 무이나’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4.
“후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레인트리 마켓을 둘러본 후 엘리펀트 레거시로 출발하려는 순간. 우연의 일치로 이동 수단으로 준비한 버스의 타이어가 터지고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온 일행은 한탄하는 레오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무언가 큰 근심거리라도 있는 걸까. 영 표정이 좋지 않은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자신을 따라온 학우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나는…….”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지.
그에게 찾아온 돌발상황은, 타이어가 터진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레오나 삼촌~!”
애정 가득한 부름 후.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호칭에 모두의 눈이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레오나의 다리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찰싹 달라붙었다.
“윽…….”
순간, 레오나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에 물든다.
피하고 싶은 일을 마주한 그가 소리 없는 한숨을 쉬는 와중. 그림자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호칭을 동시에 중얼거렸다.
“삼촌……?”
레오나와는 그리 닮지 않았지만 같은 핏줄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와 꼬리. 일방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꽤 깊은 친근함에, ‘삼촌’이라는 호칭까지.
빌은 레오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소년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짐작하고 물었다.
“누구니, 이 애는?”
“응? 이 녀석,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영문을 몰라 멀찍이 서 있는 선배들과 달리, 그림은 언젠가 마주친 적 있는 소년을 알아본 듯 아는 척을 해왔다.
그리고 아이렌은…….
“체카야!”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기에, 이름까지 부르며 반겨주었지.
만난 건 딱 한 번뿐이지만 편지와 통화는 몇 번 주고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까. 소년 또한 아이렌을 금방 알아보고 활짝 웃었다.
“숙모!”
아무리 아는 얼굴이 있다 해도 삼촌인 레오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건지, 체카는 레오나에게 바짝 붙은 채 아이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체카를 대신해 기꺼이 먼저 다가가 준 아이렌은 쪼그려 앉아 서로의 시선 높이를 맞추었다.
“잘 지냈나요, 작은 왕자님?”
“응! 숙모, 전에 또 편지 보내줘서 고마워! 오늘은 삼촌이랑 같이 온 거야?”
“그렇지. 잘 아는구나. 역시 체카는 똑똑하네.”
“에헤헤.”
화기애애한 대화를 코앞에서 지켜보는 레오나는 어이없다는 듯 ‘허.’하고 짧게 헛웃음 짓는다.
키파지는 체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줄 의지가 없어 보이는 레오나를 대신해 제 쪽에서 입을 열었다.
“이분은, 제1 왕자 파레나 님의 아드님이신 체카 님입니다.”
파레나라면 분명, 레오나의 형이 아니던가.
설명을 들은 빌은 놀란 얼굴로 레오나에게 물었다.
“형의 아이? 그럼 이 애는 너의…….”
“조카다.”
자신과 체카의 관계를 밝히는 레오나의 눈에는 지긋지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누굴 돌보거나 놀아주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그는, 어린 조카가 대단히 귀찮은 모양이었다.
반면 동생이 많은 카림은 체카가 그저 귀엽기만 한지, 살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와~ 귀여워라! 안녕. 내 이름은 카림 알아짐. 레오나의 친구야.”
“삼촌의 친구! 안녕!”
‘이제 정정할 기력도 없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정해 줘야 하나 감도 오지 않는 레오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 체카는 그간 쌓아온 그리움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삼촌이 돌아온다고 해서, 나, 많이 많~이 기대하고 있었어! 있지, 있지. 나도 데려가 줘!”
“쳇. 들러붙지 마, 성가시게!”
상대가 아직 이렇게나 어린 조카라면 조금은 맞춰 줄 법도 한데, 레오나는 대놓고 싫다는 티를 내며 놀아주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의 동급생들은, 누구도 레오나를 체카로부터 구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 꼴이 재미있다는 듯, 서로 속닥거리며 웃고 있었지.
“레오나가 저렇게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저 녀석 주변을 빙빙 돌며 뛰어다니다니……, 천진난만한 아이인걸. 도저히 레오나의 친척으로 보이지 않아.”
“음, 찌푸리고 있는 레오나랑 비교되어 기묘하구먼.”
빌과 릴리아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건 지금의 레오나에게는 차라리 득인 일이지 않을까. 안 그래도 조카 때문에 머리에 피가 몰려있는 그에겐, 동급생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하필 상대가 조카라서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그는 제 옷을 잡아당기는 체카에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답했다.
“삼촌, 같이 놀자!”
“오늘은 캐치 더 테일 연습, 내일은 대회. 그 뒤엔 바로 학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다. 나도 참 아쉽지만, 너랑 놀아줄 여유는 없어.”
“뭐 하고 놀까? 술래잡기? 숨바꼭질?”
“……내가 말 하는 건 못 들었나, 체카?”
원래 어린애들이란 특정 나이까지는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법임을 알지만, 제 조카는 그 정도가 좀 심하지 않나 싶다. 레오나는 제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조르는 조카에게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술래잡기도 숨바꼭질도 안 해.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그럼 나도 삼촌이랑 같이 갈래!”
상황이 이쯤 되니 키파지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걸까.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노련한 시종장답게 능숙하게 체카를 통제하러 나섰다.
“체카 님, 떼를 쓰시면 안 됩니다.”
“에~!?”
“당신은 이 나라의 왕위계승 후보자. 가벼운 외출 하듯 관광지에 가는 건 허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체카는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아직 아이인 그가 제대로 된 설득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삼촌의 눈치를 보던 체카는 레오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눈치챈 건지 갑자기 아이렌에게 달려갔다.
“숙모, 숙모가 대신 부탁해 줘. 응?”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체카의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런 거였을까. 아이렌은 명확하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잘 알면서도, 분별력 없게도 체카의 편을 들고 말았다.
냅다 제 곁에 다가온 체카를 덥석 안아 올린 아이렌은 망설임 없이 허튼소리를 설득이랍시고 지껄였다.
“키파지 씨. 제가 업고 다닐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게요. 데려가면 안 될까요? 레오나 선배. 괜찮죠?”
당연하지만 그 주장은, 레오나 선에서 정리되었지만 말이다.
“어이, 아이렌. 적어도 3초 정도는 고민하고 말해라.”
“천사가 부탁하는데 3초씩이나 고민하라고요? 그거 법률에 어긋날걸요? 분명 헌법 책 어딘가 위법이라고 적혀있을걸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하아, 네 녀석은 왜 어린 애랑 동물 앞에만 서면 그 똑똑한 머리가 순식간에 고장 나는지 모르겠군.”
이대로라면 아이렌이 체카를 들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아이렌이 워낙 별난 걸 아는 레오나는 상대의 품에서 조카를 빼앗아왔다.
키파지는 레오나에게 체카를 건네받더니, 엄한 표정으로 제가 모시는 이를 꾸짖었다.
“아이렌 님. 너무 응석을 받아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체카 님!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몇 시간이고 노래하게 할 겁니다!”
“그건 싫어!”
키파지의 경고가 제대로 먹힌 건지, 체카는 더는 떼를 쓰지 않았다. 다만 경고 내용이 워낙 특이해서 그런지, 카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노래? 그건 재밌는 일 아냐?”
“재미는 무슨. 키파지가 지정한 고지식하고 따분한 곡을 그저 반복해서 노래하게 시킨다고.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의 아이에겐 울고 싶어지는 벌이 되고 말지.”
“아하!”
레오나의 설명을 들은 빌은 ‘그래서 갑자기 얌전해진 거구나.’라며 웃어버렸다. 아무리 왕족이고, 왕위계승순위가 높다 해도, 결국 눈앞의 아이는 그 나이대 다른 아이들과 똑같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체카 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아, 다들 안녕~!”
그 와중, 귀한 몸이 사라지고 소란이 계속되자 왕궁의 근위병들이 허겁지겁 체카를 찾아 뛰어왔다. 제가 말없이 사라진 게 얼마나 큰 소동이 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체카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해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역시 왕세손의 삶이란 피곤하구나…….”
키파지가 한발 늦게 찾아온 근위병들을 혼내고, 레오나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와중. 여전히 밝게 웃으며 사람들 중심에 있는 체카를 본 아이렌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같은 애틋한 시선과 말투에 다소 황당해진 빌은, 어수선해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아이렌.”
“예?”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왜 저 애가 널 숙모라고 부르는 거지?”
둘이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것도 상당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호칭이 거슬린다. 보통은 ‘누나’라던가 ‘삼촌 친구’ 정도로 불러야 할 텐데, 왜 하필 ‘숙모’란 말인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 볼을 긁적인 아이렌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는데요.”
“뭐?”
“그냥 그렇게 부르길래 내버려 두는 거라…….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될 텐데. 누가 가르쳐 준 호칭인 걸까요?”
저게 지금 대답이라고 하는 말인가.
빌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고 되물었다.
“저기, 숙모라는 건 보통 자기 삼촌의 아내에게 쓰는 말이지 않니?”
“아무래도 그렇죠.”
“너, 레오나랑 결혼했어?”
“아직은 아닌데요.”
아이렌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답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빌과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렌을 보는 카림.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하는지 소리죽여 웃는 릴리아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귀를 의심하는 근위병들. 거기에 헛기침하는 키파지까지.
다행스럽게도 당사자인 레오나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만 치고 말았지만, 어쨌든, 분위기가 좋지 않아진 건 사실이었다. 아이렌은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빌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빌 선배. 이거 농담인 거 아시죠? 표정 좀 푸세요.”
“넌 이 농담이 재미있니? 킹스카라 왕가 궁전에서 그런 말이 나와?”
“하하…….”
농담이라고 확실하게 말했음에도, 근위병들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저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내용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그 대화 내용은 알 것 같다는 게 우습다. 빌은 순식간에 후배의 혼삿길이 막힐 것 같은 위기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채근했다.
“애초에 왜 호칭을 정정하지 않고, 그대로 숙모라 부르게 내버려 둔 거니?”
“그거야 이런 천사 같은 아이의 숙모가 될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 그렇죠. 비록 호칭뿐인 숙모지만요.”
“…….”
그러니까, 레오나 때문이 아니라 체카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는 말인가.
아이렌은 거짓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아마 이 말은 진실일 것이다. 아까 전 체카를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신빙성도 꽤 높았고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건, 레오나가 이걸 가만히 방관했다는 사실이었다.
‘레오나 녀석, 다 알고도 내버려 둔 건가?’
아무리 ‘정정할 기운도 없다.’ 같은 말을 하는 레오나라지만, 아무 여자나 제 예비 신부 취급받는 걸 기뻐하진 않을 터. 빌은 수상한 의도를 감지하고 레오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상대는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조카와 인사할 뿐이었다.
“우으으…… 나중에 또 봐, 삼촌! 꼭 보는 거야!”
“아, 그래. ……나중에 또, 가 있다면 말이지.”
체카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 ‘나중에 또’는 없을 것 같다.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는 레오나를 본 모두는 그리 생각했다.
05.
그날 저녁. 관광지를 다 둘러보고 캐치 더 테일의 연습까지 다 마치고 돌아온 일행은 성대한 바비큐 파티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경기가 있으니 일찍 자야 한다. 오늘은 이리저리 오가느라 바빴고, 늦게 자서 컨디션이 망가지거나 경기장에 지각하면 곤란해지니 지금부터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아이렌은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피곤하긴 하지만 배가 불러 잠이 오지 않는 그는 옷을 챙겨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꼬붕, 어디 가냣?”
피로가 몰려와 침대에 누워 졸던 그림은 파트너의 외출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나갔다 들어오려 했던 아이렌은 비몽사몽 하는 그림을 보더니, 상대의 머리를 아기 재우듯 가볍게 쓰다듬으며 답했다.
“소화가 안 되어서 산책 좀 하고 오게.”
“흐음.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미아가 되면 곤란하니까…….”
“예, 예.”
당장이라도 꿈나라로 끌려갈 것 같은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렌은 잠결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마수 파트너에게 영혼 없이 답하고 방을 나섰다.
시간이 좀 늦어서 그런지, 오가는 이가 없는 복도는 조용했다.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딱히 누군가랑 같이 가고 싶진 않은데.’
아이렌은 잠깐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밤에는 홀로 다니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라는 레오나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일 시합에 나가야 하는 선배들을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은 푹 쉬고 잘 자야 하니까. 잭은 여전히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테니 함께 가자고 할 수 없고, 그림은 졸려 죽으려 하니 깨워서 데리고 다니기 미안하다. 레오나는……, 행사의 중요 인물이니 더더욱 부를 수 없었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하지만 쟈밀 선배는 바쁘시겠지? 아니, 애초에 지금 만나면 카림 선배가 참가하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줘 버릴 수도 있으니, 만나면 안 되려나?’
이래저래 고민해 봐도 안 되는 이유만 떠오른다. 스마트폰의 주소록을 둘러보던 아이렌은 결국 혼자서 호텔 밖으로 나섰다.
“뭐, 죽기야 하겠어. 왕국 근위병인가 뭔가가 수도를 지킨다고 하지 않았나.”
원래도 겁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세계에 와서 너무 많은 위험한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렌은 정말 조금도 겁이 나지 않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키파지가 준비해 준 옷 위에 가벼운 겉옷을 걸친 채 나와서인지, 차가운 밤바람은 괴롭기보다는 시원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와아.”
멀리 놀러 가는 아이처럼 들떠서 밖에 나온 아이렌은 낮과는 다른 거리의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아까보다는 많이 한산해진 거리도, 밤에만 여는 가게들에서 나오는 불빛도, 별빛을 받아 빛나는 분수도, 모두 어둠 아래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이렌은 한적한 거리를 거닐며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왕성의 병사들을 보곤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낮이랑은 분위기가 좀 다르네. 큰길로만 다니는 게 좋긴 하겠어.’
나라의 수도인 만큼 아주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불 꺼진 골목에서는 으슥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아무리 겁이 없다 해도 사지(死地)에 이유 없이 걸어 들어갈 정도로 무모하진 않은 아이렌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로만 돌아다니다가, 이내 분수 근처에 앉았다.
워낙 추위에 약하기 때문일까. 조금 걷는 사이 밤바람에 몸이 차게 식은 그는 양팔을 가볍게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환경을 파괴하면 이런 밤하늘은 보기 힘들겠지.’
아까 전, 키파지와 레오나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아이렌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연이 잘 보존되어있는 이곳의 하늘은 별 수도 많고 밝기도 남달랐지만, 불 꺼진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형용하기 힘든 음울한 분위기는 감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러기 선배도 노을의 초원이 고향이었지.’ ‘선배가 사는 동네는 어떤 분위기려나.’ ‘늘 배고파하신 걸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어느새 팔을 문지르는 반복 동작마저 잊게 했다.
아무리 국토를 개발한다고 해도 여러 이유로 슬럼가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적어도 거리마다 불을 밝히고 건물을 새로 짓는다면 밤에 다니기 위험하다는 말은 돌지 않을 텐데. 호텔과 왕궁이 있는 쪽은 저렇게나 밝은데, 어째서 어두운 거리는 당장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할까.
어딜 보아도 별이 보이는 하늘과 달리 밝기가 다른 땅 위를 훑어보던 아이렌은 제 고향을 떠올렸다. 밤이 되면 눈부신 야경 때문에 별빛이 잘 보이지 않던, 자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을.
“……사실 별들은 자신들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별이 보이지 않아 쓸쓸한 것도 인간, 별을 바라보며 치유 받는 것도 인간. 별은 그저 저 멀리서 빛나고 있을 뿐이니 인간은 인간을 위해 대지에 불을 밝혀야 옳은 게 아닐까.
덩그러니 앉아 별 잡다한 생각을 늘어놓던 아이렌은 헛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자. 내일은 바쁘니까.’
제가 바꿀 수도 없는 일로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그걸 알면서도 잡생각을 멈출 수 없는 아이렌은 잠드는 것으로 생각의 폭주를 멈추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호텔의 정문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아이렌?”
“음?”
이게 무슨 우연인지, 마침 바깥에 나와 있던 레오나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호텔 정원에 있는 야외 테이블 앞에 앉아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그리던 그는 아무리 보아도 동행이 보이지 않는 아이렌의 모습에 미간을 구겼다.
“너, 설마 혼자 나갔다 온 거냐.”
“그런데요?”
“…….”
저 당당한 대답을 보아, 제가 한 행동에 조금의 문제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레오나는 그리 판단하고, 검지를 까딱여 겁이라곤 없는 후배를 불렀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라. 당장.”
‘오.’ 딱 봐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 레오나의 명령에 아이렌은 짧게 탄식했다.
마음 같아선 방까지 그대로 뛰어서 도망가고 싶지만, 제 달리기 실력을 생각하면 그건 쓸데없는 저항이 되리라. 뛰는 속도도 시원찮고 체력은 더 형편없는 아이렌은 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얌전히 레오나에게 다가가 빈자리에 앉았다.
“혹시 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고 한 건 못 들었나?”
“그래서 큰길로만 다녔어요.”
“다 들어놓고도 나갔다?”
“추천하지 않는다는 게 금지한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그런 궤변이나 늘어놓을 거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텐데.’ 레오나는 그리 대꾸하려다가, 언쟁 때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드는 상대 성질을 생각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겁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네 오라비가 알면 밤새 잔소리를 할 거다.”
“전 오빠 없는데요.”
“그 녀석 말이야.”
“빌 선배요?”
레오나는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다. 아이렌은 지금 시간이면 팩을 한 후 잠자리에 들었을 빌을 떠올리곤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제게 늘 잔소리를 하고 몸가짐에 대해 조언하는 빌은 여동생을 챙기는 오빠처럼 보이긴 하지. 하지만 그런 충고라면 에펠이나 다른 폼피오레 후배들에게도 하는 걸로 아는데, 왜 자신만 여동생 취급을 받는단 말인가.
빌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를 오빠로 두고 싶은 건 아닌 아이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부터 빌 선배가 제 오빠가 된 건지……. 아, 생각해보니 레오나 선배가 제일 먼저 그런 소릴 한 거 같은데.”
“그렇게 굴잖아?”
“흐음. 손위 남자 형제가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여기서 제 형제 관계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있을까. 레오나는 더는 그 주제로 말하기 싫다는 듯 능숙하게 대화 주체를 자신에게서 상대에게로 돌렸다.
“넌 아예 없냐, 손위 형제.”
“사촌에 팔촌까지 긁어모아도 제 위엔 아무도 없었거든요. 동생만 가득했죠.”
“그래서 그런 성격인 건가.”
“제 성격이 왜요?”
“남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안절부절못하고 도우러 가잖냐. 꼭 동생에게 문제가 생긴 걸 본 누나처럼 말이지.”
제가 언제 그랬냐, 라고 말하려던 아이렌은 하려던 말의 첫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저 말을 부정하기엔 제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해결한 일이 좀 많은 거 같다. 게다가 평소에도 누가 부탁하면 대부분 들어주고, 제게 생긴 일보다는 남의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곤 했으니 어찌 부정하겠나.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하는 아이렌은 순순히 상대의 말을 인정했다.
“부정은 못 하겠네요.”
“고집부리지 않고 인정하니 다행이군. 그래서, 혼자 나가서 뭘 하셨나?”
“그냥 산책도 좀 하고 별도 보고 그랬어요.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온 건 아니거든요.”
대답을 들은 레오나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구겨진다. 강한 신체 능력도 없고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상대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이 늦은 밤에 혼자 나갔다 왔다는 게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었다.
“별은 여기서도 잘 보이는데, 괜한 짓을 했군.”
“산책이 즐거웠으니 괜한 짓은 아니죠. 그것보다, 여기서도 별 잘 보여요?”
여기나 호텔 밖이나 환경이 그리 다르지 않은데도 이런 말을 하는 건, 분명 말을 돌려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그러는 거겠지. 레오나는 후배의 의도를 금방 눈치챘지만, 은근슬쩍 제 옆으로 다가와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을 보곤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서로의 팔이 딱 붙을 정도로 거리를 좁힌 아이렌은 머리 위의 별에서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비어있는 그의 무릎 위로 슬쩍 올라탔다.
“뭐 하고 계셨어요? 이 늦은 시간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제 위에 앉은 아이렌은 테이블의 종이들을 살펴보며 묻는다.
밤바람에 차가워진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을 느낀 레오나는 느리게 숨을 내뱉고, 쥐고 있던 펜으로 종이를 툭툭 쳤다.
“내일 시합의 작전을 짜고 있었지.”
“오, 멋진 사령관이네요. 이 노력을 우승자들 수업에 쓴다면 키파지 씨가 더 좋아할 것 같지만요.”
“어림도 없지. 그것보다 벌써 그 영감과 친해진 건가?”
“잠깐, 영감이라니…….”
“영감이니까 그리 부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히 문제가 있지.’ 장유유서의 정신이 머릿속 깊게 박힌 아이렌은 그리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자신으로서는 제대로 가늠이 가지 않았기에 굳이 한 소리 얹는 건 참기로 했다.
대신, 그는 아까 전 키파지가 보인 반응에 관해 상대와 상담하는 걸 택했다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요. 키파지 씨, 혹시 저희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오해?”
“그, 뭐랄까. 저보고 선배의 정인이라고 하던데요.”
순간. 무표정하던 레오나의 표정이 아주 짧은 사이에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처음에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고, 마지막으론 우습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쥐고있던 펜을 내려놓고 아이렌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
그 한 마디 한탄에는 그야말로 108가지의 번뇌가 들어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 없이 실실 웃던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렌과 이마를 마주했다.
“그 똑똑한 머리로 모를 리가 없는데, 일부러 묻는 건가?”
“예?”
“내 조카는 널 ‘숙모’라고 부르고, 나는 그걸 말리지도 않아. 그리고 선물은 한사코 거절하던 넌 내가 준 귀걸이를 걸고 오늘 종일 돌아다녔지. 이래놓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라고? 루크 녀석은 널 여우라고 부른다만, 넌 여우짓이랑 별로 안 어울리지 않나?”
제대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아이렌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도 물은 것이다. 대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들이 어떻게 보일지 전부 알면서도 굳이 물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러 여우처럼 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아주 만약에라도 저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확인차 물었을 뿐이지. 문화권마다 연애에 대한 시각이 다르니, 노을의 초원에서는 이 정도 친근함은 친구라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코앞에 있는 조각 같은 얼굴과 은근한 목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토해내 버렸다.
“한 대만 치고 싶다.”
“네 주먹은 아프지도 않을 텐데.”
“알고 있으니까 굳이 상기시켜 주지 마세요.”
안 아플 테니 진짜 한 대만 칠까. 정말 얄미워서 딱 한 대만 치고 싶은데.
레오나의 너른 가슴팍과 제 미약한 주먹을 번갈아 본 아이렌은 치기도 전부터 제 손이 다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고 팔에 힘을 뺐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항복하는 아이렌을 본 그는 우습다는 듯 킥킥거리더니,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한 채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이렇게 내 위에 올라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군. 지금 이 꼴을 본다면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이러는 건 아무도 못 볼 테니 괜찮죠.”
“뻔뻔하기는. 넌 교내에서도 단둘이 있어야만 이러지. 다른 놈들에겐 아무 때나 이러지 않던가?”
“그게 불만이었어요? 그럼 내려갈까요?”
“하, 아주 제멋대로 구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오나는 피식 웃고 있었다. 또박또박 대꾸하는 아이렌의 태도가 가소롭기 짝이 없음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조잘조잘 떠드는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아이렌은 물 흐르듯 다가온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까지 부끄러워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르작거리던 움직임을 뚝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얌전히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런데.
“레오나 님, 갑자기 죄송합니다! 동행분께서 지금…….”
호텔에서 뛰어나온 왕실의 시종이 헐레벌떡 레오나를 향해 다가온다.
‘힉!’ 갑작스러운 제삼자의 등장에 놀란 아이렌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빼고, 얼굴을 가린 채 레오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놀란 건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본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알면 좀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볼일이 있어 온 상대보고 다짜고짜 사라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미 분위기가 깨진 이상 쓸데없이 화내는 건 에너지 낭비임을 아는 레오나는, 품 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한쪽 팔로 몸을 감싸며 물었다.
“……하아, 됐어.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내 동행이 뭘…….”
‘우당탕.’ 그의 말에 답하듯, 릴리아의 방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희미하긴 하지만, 카림의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을 보면…….
“카림, 릴리아. 이 녀석들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레오나가 한탄하듯 중얼거리자, 품 안에 숨어있던 아이렌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얼른 가보죠. 카림 선배는 몰라도, 릴리아 선배가 샤우팅 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할 테니까요.”
“알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렌은 시종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방을 향해 달려가 버렸고, 레오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후 방해꾼에게 경고했다.
“너, 방금 본 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니, 전 방금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과연 정말 비밀을 지킬지, 그게 아니라면 왕가에서 아이렌에 대한 소문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이미 들킨 이상 어쩔 수 없겠지.
키파지에게 목격당하는 것보단 이게 낫다고 생각하기로 한 레오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객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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