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스토리 드림

왕자의 책사는 얼굴이 없다, 4장(四章) / 完

레오나 킹스카라, 빌 셴하이트 드림


* ‘타마슈나 무이나’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6.

 

캐치 더 테일 경기가 있는 당일.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팀은 우여곡절 끝 결승까지 올라가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빌이 다치는 바람에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3판 2선승제의 시합. 릴리아가 마법을 써 실격당하고, 카림이 이전에 베풀었던 은혜로 부전승을 얻고, 마지막 경기만 남은 그때.

다친 빌을 대신하여서 경기에 나선 것은…….

 

“기다리게 했군. 내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팀의 대장이다.”

 

노을의 초원 제2 왕자이자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팀의 전략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레오나 킹스카라, 그 남자였다.

 

“뭐라고?!”

“!?”

 

그를 알아보지 못한 이들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제삼자의 등장에 놀랐고, 그를 알아본 이들은 ‘저 녀석이 왜 저기 있냐’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키파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레오나를 관찰하다가,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신장, 체격, 걷는 모양새……. 서, 설마!”

 

누가 봐도 알아본 이의 말투다. 아니, 사실 레오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그와 함께한 기간이 제법 있는 이라면 웬만하면 다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아이렌은 뻔뻔하게 경기장에 오른 그를 보며 마른세수를 할 뿐이었다.

 

‘레오나 선배, 대체 어쩔 생각인 거지.’

 

다친 빌이 경기에 나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직접 경기에 나선 게 알려지면? 노을의 초원의 정세는 잘 모르지만, 아마 사소한 스캔들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를 알아보는 이가 몇 없다는 걸까.

상대 팀 선수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큰소리로 따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쪽 팀의 남은 선수 한 명은, 빌 셴하이트였을 터!”

“아까 너희들처럼, 대리선수다. 문제는 없을 텐데?”

“하지만 사전등록되지 않은 선수는 출전할 수 없을 텐데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그래, 저 지적에는 뭐라고 답할 생각인가.

가명을 쓴다든가 하는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참가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면 그대로 실격이니까. 하지만 레오나 쯤 되는 이가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나섰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가면 아래에서 번뜩거리는 상대의 녹안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눈이 마주친 아이렌은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훅 치고 들어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절 보는 거예요, 선배?’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다. 그것도, 제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아이렌은 제 직감이 말하는 바를 무시하려 했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레오나는 자신을 불안한 눈빛으로 보는 상대에게 피식 웃어 보이더니 당당히 제 것이 아닌 이름을 말했다.

 

“아이렌이다.”

“……엑!”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 전원이 이름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이렌은 3초 정도 멍하니 레오나만 바라보는가 싶더니,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구든 좋으니, 지금 제가 환청을 들었다고 말해주실 분?”

 

저 대답을 보아하니 미리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는 건 명확해 보였다.

빌은 넋이 나간 아이렌이 딱하다는 듯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레오나 녀석, 어째서 아이렌의 이름을 말한 거야?”

“확실히……. 선배들 이름을 댈 순 없다 쳐도, 내 이름을 썼어도 됐을 텐데?”

“이 몸 이름도 있고!”

 

잭과 그림은 레오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인생의 경험이 풍부함 릴리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뭐, 레오나도 여러모로 생각하고 한 거겠지.”

“아니, 일단 저랑 상의 되지 않은 명의도용인데요?”

“쿠후후. 그건 레오나 답구먼.”

“웃을 일이 아녜요, 릴리아 선배.”

 

대범한 릴리아와 달리 매사에 신경이 곤두선 아이렌은 예상 밖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다.

그러나 선수 대기석의 혼란과는 비교도 안 될 혼란이 경기장에서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는 제 심란함을 제대로 토로할 수도 없었다.

 

“그런 선수가 등록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어! 이건 규칙 위반이지 않나!”

“그건 이상하군. 저쪽에 계신 키파지 님께 물어보던가?”

 

상대 선수의 항의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린 레오나는 주의를 키파지 쪽으로 돌렸다.

돌발상황에 생각에 잠긴 키파지는 일순 아무 말이 없더니, 이내 천연덕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을 꾸며내 주었다.

 

“……이, 이거야 원! 아이렌 님 아니십니까!”

“아시는 분입니까, 키파지 님?”

“제가 가진 참가신청서에 있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학생입니다. 심판단과 공유하는 걸 잊었군요, 죄송합니다. 이 키파지, 원통한 실수군요.”

 

역시 높으신 분을 오래 모셔왔기 때문일까. 키파지의 얼버무림은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정 같은 건 알 리 없는 체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해서는 안 될 진실을 떠벌리고 있었다.

 

“저기, 키파지. 저거 삼촌이지? 근데 왜 이름은 숙모 이름이야?”

“아, 아닙니다. 체카 님! 저건 아이렌 님입니다!”

“엥? 절대 삼촌인걸! 난 다 안다구!”

“아, 아니. 틀림없이 아이렌 님입니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당사자의 귀까지 닿았다. 얼떨결에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아이렌은 마른세수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에는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어서 모습도 이름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참으로 개탄스러운 상황이었다.

 

‘죽고 싶다.’

 

다소 극단적인 감상을 내놓는 아이렌의 몸이 조금씩 아래로 가라앉는다. 스르륵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인 그의 귀에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걸……. 어쨌든 힘내! 아이렌 삼촌!”

 

저 말을 보아하니 키파지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상황을 설명해 준 모양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린 체카는 정황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겨우 대여섯 된 아이가 나라 사정에 대해 어찌 알겠나. 말이 왕위계승 후보지, 제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번화가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어린애일 뿐인데.

그래서 아이렌은 체카의 저 외침을 탓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잭의 뒤에 숨을 뿐이었다.

 

“아이렌, 뭐 하는 거야?”

“쉿,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러면 내 이름을 팔면서까지 모두를 속이려 한 게 소용없어진다고!”

“뭐? 그, 그럼 어쩌라고?”

“어쨌든, 나는 이러고 있을 테니 시합 끝날 때까지 조용히 해.”

 

‘나 참.’ 입으로는 한탄하면서도 잭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덕분에 그 너른 등 뒤에 제 몸을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된 아이렌은 시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한 채, 소리만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내 이름, 그렇게 중성적이지도 않은데. 아무도 의심 안 하는 거야? 아니, 이득이긴 하지만! 어차피 내 이름 같은 건 주변서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암, 그렇고말고.’

 

머리론 그렇게 생각하지만, 워낙에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과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번갈아드는 와중. 조심스럽게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레오나를 보려는 순간, 뒤에서 경기장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대화가 방심한 아이렌을 습격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긴 한데, 누구더라?”

“이번에 같이 온 사람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긴 했었어. 나도 얼굴은 못 보고 명단만 봤지만.”

“그래? 으음, 그전에도 들어 본 거 같긴 한데.”

 

맙소사, 제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니. 놀랍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미 키파지가 인정한 이상 굳이 일행이라는 걸 더 증명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이거라면 뒷이야기는 덜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 무색하게도, 이후 충격적인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났다!”

“음?”

“분명, 체카 님의 편지 상대 이름이었어. 그, 숙모라고 부르는…….”

“뭐? 숙모라면……. 아니, 누가 봐도 남자인데?”

“그렇지? 으음, 내가 착각한 건가?”

“당연히 착각이겠지! 그냥 비슷한 이름 아냐?”

 

대화는 거기서 얼렁뚱땅 끝났지만, 아이렌은 이미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정신이 아찔해져서 잭의 어깨를 꾹 잡고 무게 중심을 잡은 그는 심호흡하며, 비장하게 다짐했다.

 

‘만약 지고 돌아오면 진짜로 때려야지.’

 

레오나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라도 지고 돌아온다면 제 이름을 빌린값을 등짝 스매싱으로 받아내야지.

그리 결심한 아이렌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07.

 

캐치 더 테일이 끝난 후, 효광의 도시 중심으로 돌아온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의 분위기는 대단히 좋았다.

시합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영광을 얻고, 비록 선수로 나가지는 못했다 해도 자리를 함께한 잭과 그림은 함께 기뻐해 주었고, 레오나는 귀찮은 관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지만……. 딱 한 명, 기분이 저조한 이가 있었다.

 

“아직 토라져 있나, 아이렌?”

“아이렌이라니, 그건 당신 아녜요? 왜 절 보면서 아이렌이라고 하시는지?”

“하. 우습군. 네가 토라질 줄도 알았다니. 이제야 16살 계집애처럼 굴기로 한 건가?”

“제 고향에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겨울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거든요. 어디 이 사바나 기후에도 서리가 내리는지 보실래요?”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 학생들 사이. 아이렌은 무뚝뚝한 얼굴로 옆에서 자신을 놀리는 레오나를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한숨 한 번 쉬고 넘어가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대놓고 따지고 들었을 아이렌이 이렇게 뻗대고 있다니.

보기 드문 광경에 다들 눈치만 보는 와중, 릴리아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걸어왔다.

 

“이런, 아이렌. 그만 레오나를 용서해 주게. 덕분에 캐치 더 테일 우승의 주역이 되지 않았나!”

“저는 영광을 바란 적이 없는데요, 릴리아 선배…….”

“부럽다고, 꼬붕! 나도 맹활약한 선수로 이름 남고 싶었는데!”

“그림, 넌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야?”

 

릴리아의 말에 겨우 기분이 풀릴까 말까 했던 아이렌은 그림의 투정에 욱하여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러모로 유명해지는 것도 사양이고,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제가 했다고 소문나는 상황도 피하고 싶은 그는 지친 얼굴로 한탄했다.

 

“분명 몇몇은 다 알고도 그냥 넘어간 걸 테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제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감출 수 없는 관능적인 매력을 가진 건장한 체격에 운동능력까지 뛰어난 수인족 청년’인 줄 알 거 아니야.”

“아이렌, 레오나 선배를 평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하지만 객관적 사실인데?”

“…….”

 

잭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평소에도 아이렌이 레오나의 얼굴을 고평가하고, 실제로도 레오나는 매우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묘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지금 토라진 거야, 은근슬쩍 돌려서 칭찬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릴리아 선배가 명의도용 한 거라면 나았을 텐데.”

“쿠후후. 하긴 내가 레오나보다는 아이렌과 더 닮았지.”

 

황당해하는 동급생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아이렌은 자신을 위로해준 릴리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릴리아는 골머리 썩는 아이렌이 딱하면서도 묘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으음.’ 릴리아의 말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닮은 점을 찾던 카림은, 악의 하나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닮았다고 하기엔, 릴리아는 아이렌보다 제법 작잖아?”

“키는 클 수 있지만, 작아지진 않잖아요.”

“그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애초에 릴리아와 아이렌은 팔다리가 달리고 눈코입이 붙었다는 것 외엔 별로 닮은 것도 없지 않나.

레오나는 점점 엇나가는 아이렌과 다른 이들의 대화를 보다 못하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 쉬었다.

 

“하아, 언제까지 다 끝난 일로 투덜거릴 거냐, 아이렌. 어차피 매년 있는 캐치 더 테일이다. 일일이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3년만 지나도 그때 나온 ‘아이렌’이 어떻게 생겼나 잊어버릴 거다.”

 

이건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레오나는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매년 하는 행사인데다가 가면도 쓰고 있었으며, 심지어 계속 이곳에 머물지도 않는 외부인인데 그걸 누가 오래 기억하겠나.

하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은 아이렌은 짐짓 못 들은 척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역시 개명해야겠다. 작명은 누구에게 부탁하지? 빌 선배, 혹시 좋은 이름 있을까요?”

“어이. 듣고 있냐, 아이렌?”

“그렇네, 너랑 어울리는 이름이라. 바네사는 어때? 옛날에 유명했던 여배우 이름인데, 너와 어울릴 거 같은걸? 바네사 셴하이트. 그래. 내 성씨랑도 잘 어울리고.”

“이봐 빌, 이제는 오빠 행세를 넘어 아빠 행세까지 하나?”

 

사실 성씨와 이름의 어울림을 고려하는 건 정말 상대를 여동생같이 느끼거나 부성애를 느껴 저러는 게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는 거겠지만, 레오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 욕망을 모른 척했다.

오가는 대화 속 일일이 딴죽을 거는 레오나의 행태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걸까. 어느새 여유로움을 되찾은 아이렌은 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좋아요, 저는 이제 바네사에요. 학교 가자마자 개명했다고 알려야겠네요. 학원장도 받아주겠지.”

“하아…….”

 

드디어 상황이 나아지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레오나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애초에 상대가 아이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래 맞춰주지도 않았을 테니, 어떻게 보면 그의 인내심은 한계까지 버텼다고 봐야 하리라.

뒷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며 ‘쯧’하고 혀를 찬 그는 갑자기 아이렌의 어깨에 팔을 걸쳐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낮게 깐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귀엽게 봐줄 수 있을 때까지만 까불도록 하라고, 아이렌. 내가 울려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 네겐 오히려 그쪽이 득이려나.’ 짓궂은 농담을 하며 웃는 레오나는 즐거워 보였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아이렌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 꼴을 본 빌은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끼곤, 눈을 가늘게 뜨고 동급생을 추궁했다.

 

“레오나, 후배를 협박하는 건 아니겠지?”

“협박이라니. 사과한 건데.”

“어떻게 사과해야 아이렌의 얼굴이 저렇게 되는 거지?”

“감동해서 얼굴이 붉어졌나 보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아이렌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끼어들기도 뭣하겠지.

빌은 얄밉게 웃고 있는 레오나에게 ‘사과 다 했으면 그만 놓아줘라’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경고보다는 카림의 외침이 더 빨랐다.

 

“아, 저기 키파지가 오고 있다고!”

 

왕실에서 하는 행사가 대강이나마 마무리된 걸까. 바쁜 걸음으로 다가온 키파지는 다른 학생들에게 묵례 후 곧장 레오나의 앞에 섰다.

 

“레오나 님, 부디 몇 달 뒤 홀리데이 때는 늦지 않게 오시길 바랍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걸까. 연로한 시종장은 유난히도 피곤해 보였다.

레오나는 여전히 아이렌을 옆에 낀 채, 진즉 예상한 말을 내뱉는 키파지를 내려다보았다.

 

“작별의 인사 대신 잔소리라. 너답군.”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꾹 참는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짐짓 엄한 말투로 말한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가 모시는 이의 옆자리를 지키는 소녀 쪽으로 향한다. 오늘 경기에서 얼굴을 보이진 않았지만 얼떨결에 큰 활약을 한 이의 뺨엔 아직 희미한 붉은 빛이 남아 있었다.

키파지는 얼굴이 상기 된 이유를 굳이 궁금해하지 않고, 정중한 언어로 말을 걸었다.

 

“아이렌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저기…….”

 

혹시 체카가 제 이름을 당분간은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게 해주셨으면 한다. 아니면, 적어도 발신인 이름이 적혀있을 편지라도 어떻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부탁하려 했던 아이렌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키파지의 말에 침묵해 버렸다.

 

“체카 님 앞으로 온 편지는 한 번 열어 본 후론 계속 체카 님 침실의 서랍에 보관 중이고, 그 서랍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아이렌 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곧 잊을 겁니다.”

 

아, 이것이 바로 왕가를 오래 모셔온 집사장의 관록이라는 것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완벽한 일처리를 보이는 키파지에 감동한 아이렌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키파지 씨.”

“뭘요.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하다뇨?”

“그거야……, 흠흠.”

 

차마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잠깐 레오나 쪽을 힐끔 본 키파지는, 인자하지만 비장한 얼굴로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오나 님, 아이렌 님이 다 받아준다고 심술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어이, 키파지. 그 반대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렌 님이 레오나 님께 심술을? 상상도 가지 않는군요.”

“저 녀석은 늘 나를 괴롭힌다고. 러기랑 합세해서 잔소릴 하질 않나, 식물원에 숨어서 잘 때 나타나서 치대질 않나, 밤낮없이 달라붙어서……. 윽!”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레오나의 폭로는 아이렌의 저지로 끊겼다.

상대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는 아이렌은 나중에 혼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 발언을 막아야 한다 생각했기에 냅다 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는 발언은 삼가시지요, 왕자님? 장가 못 가고 싶으세요?”

 

억지로 웃으며 말하는 아이렌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아까 전 사과라 쓰고 경고라 읽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얼굴이 붉어진 그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약한 힘으로 애쓰는 아이렌의 손을 가볍게 치운 레오나는 자유로워진 입으로 한술 더 뜨는 답을 뱉었다.

 

“네가 시집 못 갈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는 딱히 결혼 못 해도 신경 안 쓰니 상관없어요. 만약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면 선배가 데려가야겠지만요?”

“아, 그래? 거참 재밌군.”

 

‘크흠, 흠!’ 제가 모시는 이의 사랑싸움을 보던 키파지는 티가 나게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진짜 하려던 말을 전했다.

 

“아이렌 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레오나 님과 함께 또 방문해 주십시오. 레오나 님이 오기 싫다고 하셔도 잘 구슬려서 모셔오신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습니다.”

“하! 누가 보면 이 녀석이 내 비서인 줄 알겠군.”

“이런. 레오나 님의 책사 아니었습니까? 큰일을 할 왕자에게는 무릇 책사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큰일은 무슨.”

 

어이없다는 듯 웃는 레오나의 눈빛은 묘했다. 저 말이 싫은지, 좋은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눈빛. 짙은 초목의 색을 가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 그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입을 닫았다.

키파지는 문득 눈앞의 장성한 왕자가 7살 꼬마처럼 느껴져 웃어버렸다.

그는 레오나보다 한 뼘 정도 작지만, 서 있는 자태가 제법 꼿꼿한 어린 책사에게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군요, 지금 생각하니 제법 근사하군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제2 왕자의 책사. 그리고 캐치 더 테일 우승의 주역이라.”

“어라, 그렇게 말하니 좀 멋있는데요?”

“얼떨결에 영광스러운 것들을 모두 가지게 되었군요, 아이렌 님.”

 

하지만 분명, 더 추가될 수 있는 칭호가 있을 터.

키파지는 감히 그 칭호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거기에 왕자비까지 된다면, 분명 왕실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될 터. 게다가 인간이라는 점까지 더하면…….”

“예?”

“아뇨. 늙은이의 혼잣말입니다.”

 

하지만 혼잣말치곤 좀 컸던 탓일까. 귀가 좋은 수인족인 레오나는 그 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봐, 아직은 일러.’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그리 말한 레오나가 실소했다.

기어코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 레오나의 고집에, 키파지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분명 레오나랑 빌 양날개 드림인데 어째 빌은 열심히 견제만 한 듯한...

하지만 그렇다고 양날개 아니라고 하기엔 제법 얽히다보니 같이 표기했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함유량이 적은 것 보단, 모르고 먹었다가 탈나는 게 더 무섭다보니...

체카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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