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를 찾는 사람은 많다 (下)
다정의 다정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너 명의 괴한들이 들어와 타냐와 후안을 끌고 갔다. 사실상 무저항 상태나 다름없었던 두 사람은 얌전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커다란 빔프로젝터가 있는 방이었다. 벽에는 평범한 병원과 은행, 공기관 내부, 그리고 공원의 영상 등이 비쳐 있었다.
“자, 좀 생각해봤나?”
“제 대답은 똑같아요.”
“그럴 줄 알았지. 히어로란 작자들은 참 똑같고, 멍청해?”
펑-
“?!”
타냐는 순식간에 터져나가는 공원 시계탑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공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사히 몸을 피하는 모양이었지만, 제 대답 하나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잘 만든 비디오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것도 예상 못 하고 말이야. 선생은 히어로 자리 반납해야 하지 않겠어?”
“터뜨린 건 당신이에요. 애꿎은 히어로한테 책임 전가하지 마세요!”
“어어? 하나 더?”
“···”
“어쨌든 계속 거절당하는 내 맘도 안 좋고 해서, 선택지를 주기로 했어. 당연히 거부권은 없는 거 알지?”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그에 응하겠어요?”
“안 믿으면 저거 다 터뜨리는 거지, 뭐. 어때? 저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리면 히어로들도 수습 못할 테고 말이야~”
아주 무능력해. 그렇지?
타냐는 몇 번이나 발끈했지만, 그에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이를 꽉 무는 것으로 그쳤다. 그에 김이 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 납치범이 턱을 쓸며 화면을 넘겼다. 답지 않게 깔끔한 화면에는 두 개의 버튼이 있었다.
“두 개 중에 선택. 간단하지? 여기 있는 이 혼혈을 재우고 은행에 있는 50명의 사람들을 살리거나, 이 혼혈을 재우지 않고 50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거나!”
“이분을 재우면 어떻게 되는 거죠?”
“죽겠지. 아~주 편안한 얼굴로. 고통도 없이 가는 거야. 얼마나 좋아? -어차피 선생이 직접 죽이라고 하면 절대 안 할 거잖아. 우리가 대신 죽여주는 거지. 선생님은 재울지 말지만 선택하면 된다고?”
“···제가 저분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 50명을 죽이는 거지 뭐.”
납치범은 빙글빙글 웃고, 타냐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어떤 대답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타냐는 제 뒤에서 후안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자신이 희생될 거라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타냐는 눈을 감고야 말았다. 납치범은 그런 타냐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또 다른 선택지는 죽음이야. -자, 한 명을 죽여. 죽이면 50명은 살아남을 거고. 기분이다, 그럼 선생은 스푼으로 고이 모셔다드리지.”
“비겁한 사람. 이런 건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모셔다 준다고?
타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까는 저를 써먹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보내준다는 것도, 그 조건이 하필 저런 양자택일이라는 것도 이상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조건 뭔가 노리는 게 있었다.
“어이, 정말 50명을 죽이게? 사람들이 그대로 있겠어? 그럼 우리랑 평생 같이 일하는 거야. 한 명만 희생시키는 게 선생에게도 나을 텐데. 응?”
[타냐 님, 들리시나요? 들리면 손가락을 꼬아주세요.]
“생각할 시간 같은 건 못 줘. 고상한 척하지 말자고, 우리 히어로님.”
“고상한 척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예요.”
그때, 기묘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특유의 울리는 목소리를 보아 제약 기업인 O사에 소속된 돌고래 혼혈, 데비 같았다. 지난번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소개받았던 경호 인력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타냐는 스푼과 O사에서 타냐의 추적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납치범들이 뒤늦게 부숴 없앴다고 해도 방범 벨이 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타냐는 조금 안도하며 검지와 중지를 꼬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다고 다짐했다.
“하, 그래서 사람을 죽이셨겠다?”
“네?”
“그 뉴스 말이야. 엄마를 자살하게 만들었다지?”
“···”
“선생 때문이 아니라지만, 변명이지. 그걸 누가 믿어? 아직도 히어로 활동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니까.”
“···제가 그렇게 만든 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래도 일반인의 감정을 주무른 건 히어로답지 않은 행동이란 걸 알아요.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맹세한 거고,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약을 지금 악용하는 데에 협력할 것 같나요?”
“자꾸 그러면 폭탄 하나 더 터지는 거고.”
“···제발, 저 병원은 OO 병원이잖아요. 안 그래도 아픈 환자들과 간병인을 대상으로 큰 인명피해가 날 텐데. 측은지심도 없어요?”
[현재 천리안 능력을 쓰고 있는 스푼의 베로 님, 서장 비서이신 귀능 님과 시야 공유 능력의 하비 씨, 그리고 포크 엔터의 루리 씨의 협조를 받고 있습니다.]
아, 시야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나 싶었다.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진 하비가 같이 있어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천리안으로 자신을 찾은 베로와 시야를 공유하고, 그 시야를 다시 데비에게 전달했겠지.
하지만 루리 씨? 타냐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등장하자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문맥상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평소에 연락하던 내담자이긴 하지만 그 외의 관계는 일절 맺지 않았던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없으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저 우체국은 사람이 적으니 우선순위가 아니란 소리지? 아주 재밌네. 5분은 줄게.”
[귀능 씨가 협박 장소가 어디인지 특정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단서를 얻어달라고 하십니다. 그 뒤에 제압을 해야 한다고···. 소리는 제가 들을 테니 언급만 해주시면 됩니다. OO 병원은 이미 전달했습니다.]
“우선순위를 매기는 건 당신들 같은 작자나 하는 짓이에요. 제가 아니어도 이미 히어로들이 모든 장소에 출동해 있을-”
“아-아. 잔소리는 듣기 싫거든? 우린 인원수로 따지는 게 제일 편하다고-”
히어로들도 그게 편하잖아? 몸이 두 개쯤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타냐는 대화를 하면서도 텔레파시를 통해 내려온 지령에 집중했다. 화면에는 OO 병원과 지역을 알 수 없는 우체국, 그리고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인질들이 잡혀 있는 은행이 보였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괜한 조바심이 들었다.
[은행 쪽은 제압 준비 중이니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우체국 측만 알아내 주시면 됩니다.]
“···저흰 언제나, 모든 사람을 구해요. 저 우체국도, E시의 끝에 있는 곳이죠? 저희한테 순간이동 특기자가 없을 것 같나요?”
짝!
“?”
“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조력자가 있었나? 야, 얘한테 알려준 놈 있냐?”
[전달했습니다. 귀능 님이 ‘잘 찍었다’고 전해달라는군요. 루리 씨가 곧 물건을 전달합니다.]
그냥 스푼에서 제일 먼 지역을 찍었을 뿐인데. 졸지에 찍었던 것이 들어맞고, 뺨을 맞은 타냐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하마터면 손으로 볼을 매만질 뻔했다. 그래도 아직 능력에 당한 시늉은 하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타냐는 다시 자리로 가 앉는 납치범의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확실했다. 타냐는 당장 움직일 수 있었다. 타냐를 벽에 딱 붙여 앉혀놓은 납치범들 쪽에서는 죽었다 깨도 모를 사실이었다.
그래, 알고 있는 사람도 몇 없는 타냐의 특기가 있다. 감정을 조절하는 특기 말고 하나 더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보통 특기자의 ‘기’를 차단하는 특기를 가진 사람은 활용이 다양한 법이다. 특기자가 특기를 사용할 수 없게 원천 차단하거나, 자신을 공격하는 특기를 무효화할 수도 있고, 도와주기만 한다면 관련 물품도 생산한다.
하지만 타냐는 방어만 가능하다. 특기자가 특기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도, 이 특기로 물품을 만들지도 못한다. 그냥 딱 자신에게 해가 되는 기만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아, 당연히 해로운가 이로운가의 판단 기준은 타냐가 인식하는 순간, 그때의 판단이고.
그러니까··· 지금처럼 움직임을 막는 종류의 특기는, 타냐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제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런 허접한 능력이 통하는 것은 타냐가 그 특기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까지만. 그 이후는-
[됐습니다. 진입합니다.]
얘기가 달라진다.
“하아, 이제 시간이고 나발이고 됐으니 선택해.”
“무엇을요?”
그때, 타냐의 손에 익숙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늘 갖고 다니는, 스푼에서 지급해준 바로 그것이었다. 그와 함께 온 단도는 부드럽게 청테이프를 갈랐다.
“장난해? 한 마리를 죽이던가, 50명을 죽이라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으면 불꽃놀이 한 번 더 ㅎ-”
탕! 탕, 탕-
타냐는 벌떡 일어나 제일 먼저 납치범의 우두머리에게 총을 쐈다. 타냐가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는지, 납치범들은 픽픽 쓰러져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던 우두머리는 신호 버튼이었는지, 핸드폰 화면을 눌렀지만-
“왜··· 왜 멀쩡한 거야···!”
“진작에 히어로가 진입했으니까 그러죠. -무능력하다고요? 나쁜 짓은 본인이 해놓고 우리 히어로에게 사람을 초월하라고 하지 마, 이 나쁜 놈들!”
타냐는 드물게 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를 발로 찼다. 그리고는 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단풍나무 혼혈, 후안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보니 익숙한 스푼의 사원들이 납치범들을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는 스푼의 힐러인 레인도 있었다.
“레인 씨!”
“타냐쌤! 어디 안 다쳤어? 이 뺨 좀 봐···.”
“전 괜찮은데, 이쪽 분이 조금···.”
“헉, 알았어! 이쪽으로-”
순식간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미 폭탄이 터진 공원의 시계탑은 어쩔 수 없었으나 병원의 폭탄은 성공적으로 해체했고, 우체국과 은행은 시민을 성공적으로 대피시켰다. 내기의 대상이 되었던 단풍나무 혼혈 후안의 안위 역시 무사했다. 테러까지 동원한 납치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이마저도 순간이동 특기가 있는 나가가 아니었다면 우체국은 수습 불가였겠지. 그리고 로비에 있는 개 삼 형제 중 하나인 케르 씨의 후각도 없었다면 폭탄의 탐지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베로 씨의 천리안이 아니었다면….
타냐는 스푼 측에서 몰고 온 검은 밴에 올라타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사사와 약에 악용의 여지가 있다는 대화를 하자마자 그 악용을 노린 납치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불편하게 자고 깨어 보니 폐공장이었다) 밤을 새운 격이라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타냐쌤!”
“아, 루리 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이 총, 루리 씨가 도와준 거 맞죠?”
“당연하죠. 타냐쌤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안 도와주겠어요?”
“···? 알아요?”
“흐흥~ 제가 아니었으면 스푼 쪽에선 감도 못 잡았을걸요?”
“???”
루리는 타냐의 내담자 중 한 명이다.
세크룬과의 일로 몇 번의 입막음과 합의가 있고 나서 활동을 이어 나가는 루리에게, 상담 치료가 필요하다고 결정 내린 유다 사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당연히 입이 무거운 상담사가 필요했고, 마침 스푼 사원들의 상담을 줄여나가고 있던 타냐에게 상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대략 10회차, 즉 10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타냐는 성실하게 루리에게 시간을 내어주었다.
오늘은 11회차, 금요일의 마지막 상담 시간이었다. 루리는 처음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굳이 상담 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상담 회차가 몇 번을 넘어선 지금은 전혀 달랐다. 여타의 내담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상담 선생님인 타냐 앞에서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어서 와요, 루리 씨. 요 며칠간 괜찮았나요?”
“타냐쌤~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요. 저 예능 나온 거 보셨어요?”
“본방은 못 보고, 클립만 조금 봤어요. 루리 씨, 귀엽게 나오셨던데요?”
“그래요? 아직 징그럽다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았는데···.”
“늘 말하지만, 예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걸 알아요.”
루리는 진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괜히 머리카락을 꼬았다. 켕기는 것이 있거나 괜히 부끄러울 때면 으레 하곤 하는 동작이었다. 이번엔 명백히 후자였다. 그저 그런 말들로 넘기기엔 타냐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싫어하는 게 존재하긴 할까?
“쌤, 쌤은 싫어하는 사람 있어요? 싫어하는 유형이라던가.”
루리는 번뜩 든 호기심에,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었다. 정말 궁금했다. 타냐가 별 이유 없이 뭔가를 싫어하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식 정도의 기호라면 몰라도, 사람을?
“네? 그게 궁금해요?”
“네. 쌤은 가만 보면 다 그럴 수 있다~ 넘어가기만 하고, 특별히 나쁘다고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음···. 싫어하는 거랑 나쁜 거랑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왜, 이유 없이 루리 씨를 싫어하고 보는 사람도 있잖아요? 사람은 생각보다 별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곤 한답니다.”
“치, 상담하는 동안 그 말만 열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사실인걸요. 어쨌든 그래서 제가 싫어하는 사람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
“의외네요. 쌤이라면 범죄자가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타냐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이 이상의 대답은 곤란하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루리는 모른 척 짓궂게 일단 더 들려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지는 쪽은 타냐였다. 곧 한숨을 내쉰 타냐는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긁었다.
“도덕도, 법도 규범도, 사람들끼리 정한 규칙이잖아요. 결국 모든 사정을 반영하기엔 좁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딱 갈라서 범죄자라면 미워하고 보진 않아요. 게다가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사정을 멋대로 판단하겠어요. 그래서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제 주변만 챙기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 외에는- 제가 판단할 영역이 아닌 것 같아서.”
“오~”
역시라고 할까, 예상 밖이라고 할까. 제법 철학적인 대답이 돌아온 것에 루리는 잠시 침묵했다. 무거운 대답의 내용이, 그에 대해서 타냐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왔는지가 느껴졌다.
역시 쌤은 이상해. 보통 다른 사람들은 느낌상 싫으면 싫어하고 볼 텐데.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범죄자 정도라면 당연히 쌤도 싫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타냐라면 루리를 아무 이유 없이 싫어할 일이 없고, 세크룬에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앞에서는 몰라도, 뒤에서 루리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질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저를 불태울 뻔했다는 것은 아예 잊은 것 같아. 루리는 그런 타냐의 다정함에 중독되어 가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한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 그럼 얘기를 계속해볼까요? 요즘도 눈은 안 아프죠?”
“그렇다니까요. 타냐쌤은 걱정이 너무 많아.”
“하지만 제가 모르는 아픔이라 더 신경이 쓰이는걸요. 음~ 그럼 안티팬들은요? 예전처럼 신경 쓰이지는 않나요?”
“핸드폰을 잘 안 보려니까 좀 괜찮긴 한데···. 좀 불안한가?”
“아무래도 그렇게 간단히 신경을 끄긴 힘들죠. 핸드폰으로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자꾸 확인하게 되잖아요? 핸드폰으로 만화를 보거나, 소설을 보는 것처럼 신경을 돌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네···.”
자, 그럼 손잡을까요?
상담 시간이라면 으레 한 번씩 있는 시간. 루리는 저항 없이 타냐의 손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스한 햇살 아래에 있는 기분이 드는 것과 동시에 따뜻한 차 내음이 올라왔다.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타냐가 방금 끓인 물에 티백을 넣어준 것이었다. 티백의 글씨를 보니 캐모마일이었다. 루리는 빙그레 웃으며 컵을 감싸 두 손을 녹였다.
“어째 매일 캐모마일인 것 같은데요, 타냐쌤?”
“다른 게 좋아요? 하지만 홍차는 없고, 허브차나 녹차···.”
“에이, 농담이죠. 뭐 어때요? 상담하러 오는 거지, 차 마시러 오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래요. 반도 안 마시고 가는 사람이 많거든요.”
타냐의 해맑은 말에 지레 찔린 사람이 된 루리가 잠시 굳었다가, 되려 능청스럽게 웃었다. 타냐는 그런 루리의 모습마저도 귀여운 동생 보듯이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비슷한 나이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행동을 잠자코 받아들이게 되는 마력이 있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즘 자는 건 어때요? 관련된 약을 연구 중인데, 아직 적당한 게 나오지 않아서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뭐, 일단 오늘은 실패예요 타냐쌤.
‘신경 쓰지 말라’라는 타냐의 당부에도 굳이 그들의 커뮤니티까지 찾아보게 되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런 새벽이었다. 타냐의 말을 어겼다는 것에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새벽 감성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타냐도 이해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
[야 개쩌는 거 가져옴]
요새 나대는 짐승새끼 있는데 ㅎㅇ이라고ㅋㅋㅋ
(링크) 지금 참교육ing ㅇㅇ
이제 거의 다 죽어가서 곧 끝날 것 같은데 보고 싶음 빨리 가라
┕ 보러 갔다가 싸잡혀서 잡혀가는 거 아니냐;;
┕ ㅇㄴ설마 누가 생방송 보다가 잡혀가냐곸ㅋㅋㅋ
┕ 감사 요즘 회사에 나대는 개ㅅㄲ(ㄹㅇ 말 그대로임 ㅅㅂ) 있는데 스트레스 좀 풀어야겠다
그때, 웬 스트리밍 사이트로의 링크가 보였다. 평소라면 보지도 않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첨부된 사진에는 폭행을 당하고 있는 혼혈의 모습이 생생하게 흔들리는 화면으로 찍혀 있었다. 스트리밍 영상을 그대로 캡처한 것으로 보였다. 루리는 범죄의 냄새를 맡자마자 그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자, 잘난 운동가를 혼내주는 건 여기까지. 좋았냐? 아, 아직 나가진 말고.’
‘새끼, 신난 거 봐라.’
‘너네 스푼이라고 들어봤냐? 사복 경찰 같은 건데, 요즘 방송에 많이 뜨는 년 있잖아.’
스푼? 방송에 많이 뜨는?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루리는 반사적으로 손톱을 씹으려던 것을, 타냐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노트북으로 스트리밍 영상을 틀고, 핸드폰으로 타냐에게 연락을 걸었지만 받을 수 없다는 수신음만이 이어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루리는 바로 유다 사장에게 연락했다.
‘히어로란 년이 힘은 X도 없더라. 뭔 자신감으로 혼자 다닌대? 예전에 뉴스 보니까 범죄도 저질렀다더니만.’
‘아니 어쨌든, 우리의 뒷배님이 말하길 그년이 신기한 게 가능하다고 하더라. 사람을 정신적으로 조져버린다며? 그게 더 무섭더라.’
‘그러니까 우리한테 필요한 거 아냐. 그래서 우리가- 짜란,’
‘모셔왔다는 거지. 이 새끼 언제 깨냐?’
[뭐냐, 이 시간에···.]
“사, 사장님. 타냐쌤, 타냐쌤이 납치를,”
[···뭐?]
'야, 넌 이제 카메라 들고 꺼져. 리얼하게 해야 할 거 아냐.'
루리는 다급하게 포크 엔터의 유다 사장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만큼이나, 채팅창의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혼혈을 폭행하는 것은 스포츠처럼 즐겼던 주제에 순혈 인간, 심지어 공인을 납치했다니 위기감이 들었나 보다. 루리 입장에서는 같잖은 일이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이제 와서 발을 빼?
“-루리!”
“사장님!”
“일단 타요. 연락해보니까 스푼도 난리가 아니더라구요.”
“자, 잠깐만요. 노트북 챙기고···.”
결국 그 새벽, 루리는 잠도 자지 못한 채 스푼으로 향했다.
“이게 그 방송?”
“네, 네에···.”
루리는 생각보다 험악한 인상을 갖고 있는 스푼의 서장 때문에 기가 눌렸지만, 생각해 보니 유다 사장과 크게 다르지도 않아 다시 기를 폈다. 이제 보니 유난히 험악해 보이는 건 당장 타냐가 납치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하긴, 타냐쌤 정도라면 스푼에서도 중요도가 굉장히 큰 인물이지 않을까?
루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장실에 모인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폭탄이라니···. 계획을 다 불어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뀽.”
“장소를 찾으면 비행조, 너희들이 가야 한다.”
“야, 우린 이제 가봐도-”
“저, 전 남을 거예요!”
“-못 가겠네요, 사장님.”
“하···.”
루리 자신과 포크 엔터의 유다 사장, 그의 비서인 은비단. 스푼 서장인 다나와 그 비서라는 귀능. 저번에 세크룬의 일로 만났던 사사라는 까마귀 혼혈과, 나가라는 피곤해 보이는 남고생···.
“그럼 타냐 님이 지금 저곳에 납치를···.”
“하비 씨,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하지만 이질적인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거의 쓰러지려 하고 있는 검고 하얀색의 여자와 온통 신비한 푸른색의 색채를 갖고 있는 남자. 그 사람은 가운데에 있는 새하얀 노인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루리는 뉴스에서 저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O기업 대표···?”
“허허,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몰랐어. 유다 사장? 파라메놀 광고는 잘 맡기고 있네.”
“아, 예···. 아울 대표님이야말로 이곳엔 왜···?”
“내 직속 호위 단체에 연락이 와서 말이네. 타냐 선생님께 방범 벨을 드렸었거든.”
“허···?”
루리는 머리 말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뻐끔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인력이었다. 타냐와 대체 무슨 연이 있길래 방범 벨까지 줘가면서 신경을 쓴단 말인가?
“루리 양에겐 감사하고 있네. 방범 벨을 중간에 버렸는지, 위치 추적이 더 되지 않는 참이었거든.”
“어···. 아뇨, 당연히 도와야죠. 제 선생님이기도 한걸요.”
“그래. 나도 그런 거니 알아서 이해하게. 하비, 데비. 소개하게.”
“안녕하세요, 텔레파시 특기자인 데비입니다. 다만, 시야 안에 있는 상대에게만 보내는 것이 가능해서···.”
“시야를 공유하는 특기를 갖고 있는 저와 파트너랍니다~ 전 하비예요!”
“아, 안녕하세요···. 물건을 이동시키는 특기를 가진 루리입니다. 저도 시야 안에 있는 곳으로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럼 인력을 제공해주신 걸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유다, 너도 그런 걸로 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루리는 수많은 인원으로 바글바글해진 서장실 한가운데서 어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귀능은 스트리밍 방송에서 털어내는 그들의 계획을 받아 적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고급 인력들이 몇 추가돼서 다행이라고 뀨뀨거리는 것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결국 타냐가 납치당한 것에 울적하기보다는 구하러 온 사람들로 으쌰으쌰 북적이는 상황이었다. 루리는 그것이 못내 낯설었다.
-짧은 심문 이후 타냐는 4시간 만에 심문실에 등장했다. 의자에 뻣뻣이 굳은 타냐를 앉혀두고 혼혈은 그 옆 땅바닥에 대충 던져놓은 것이 우스웠다. 4시간 동안 꾸준히도 타오르던 채팅의 불판은 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주로 타냐에게 하는 협박하는 방법이 테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범죄라는 얘기를 하며 하나같이 경찰을 부르고 있었다. 진짜 그럴 용기는 없으면서 말이다.
웃기기는, 같은 사람을 폭행한 것부터 아웃인데.
루리는 그런 이들을 비웃으며 스푼이 이끄는 차에 몸을 실었다. 손에는 타냐가 쓸 작은 총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마취탄이 든, 손이 작은 여성에게 딱 맞을 법한 총이었다.
아침에 가까운 새벽이 되어가자, 스푼은 지체없이 직원들을 소환했다. 로비의 보안을 담당하는 눈, 코, 귀의 세쌍둥이부터 의료실과 일반 히어로 전력 일부를. 루리와 외부 인력 두 명을 포함해도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은 각자 폭탄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타냐가 갇힌 폐공장으로 찢어졌다.
“여기서부턴 베로 씨와 제가 천리안으로 주변을 수색합니다. 신호하면 따라오세요.”
귀능과 개 혼혈로 보이는 천리안 특기자가 먼저 앞서 나갔다. 루리는 주책맞게도 무슨 첩보영화를 찍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뺨을 맞던 타냐의 눈물 어린 얼굴을 떠올리며 잠자코 따라 나갔다. 사실 이미 몇 번이나 허탕을 쳐서 질린 것도 있다. 타냐가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폐공장만 몇 개였고, 그중 몇 개를 돌아다녔는지. 보는 것은 두 명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따라다닐 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지쳤다.
“여깁니다.”
“! 하비 씨, 데비 씨, 여기로 와주시죠.”
“자아~ 그럼 제가 이분 시야를 데비에게 공유해주면 되는 거죠?”
계획했던 대로 세 명이 다 함께 서서 벽을 들여다보았다. 데비가 타냐에게 무어라 말을 거는 것이 그대로 들렸다. 상황 설명보다는 보고를 올리는 것에 루리는 잠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으나, 하비는 진작에 쪼개듯이 웃고 있었다. 귀능은 다른 팀과 연락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결국 두 사람은 긴장감도 잊고 조금 웃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이 찾아왔다.
“-루리 씨, 지금!”
“됐습니다. 진입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우와, 스트리밍 방송이라니···. 낌새도 못 느꼈어요.”
“안 그래도 화질이 엄청 구렸어요. 설치형 몰래카메라 정도를 쓴 게 아닐까요? 돈도 없나.”
정말 악질들이라니까.
루리는 분개하며 다시 협박 내용을 떠올렸다. 애초에 그들이 원한 건 타냐 그 자체가 아니라, 타냐의 추락이었다. 만약 타냐가 둘 중에 하나라도 선택했다면 해당 내용은 만천하에 유출되었을 것이고, 타냐는 공격받았겠지.
‘한 명이라서, 게다가 혼혈이니까 더 쉬웠다는 얘기죠? 히어로의 사상이 그래도 되는 건가요? 그럴 줄 몰랐는데 실망이에요.’
‘아니 1명이랑 50명이랑 같아? 머리가 장식이야? 진짜 혼혈 좋아하네. 그래서 걔네들 비위 맞춰주니 좋든?’
···수많은 악플을 본 짬이 있어서일까, 리얼하게 떠오르는 여론에 루리가 다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타냐의 얼굴은 태연할 뿐이었다.
“역시 절 납치한 쪽은 꼬리였나 보네요. 큰일 날 뻔했어요. 감사해요, 루리 씨.”
그리곤 그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루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루리는 도리어 타냐를 도울 일이 있었다는 것이 기분 좋았기 때문에 손사래를 쳤지만, 돌아가자마자 쉴 생각도 없이 뭐라도 보답을 할 기세였다.
그때, 타냐가 멈칫했다.
“아, 후안 씨···.”
“그 단풍나무 혼혈 분이요? 왜요?”
“이제쯤 몸을 추스르셨을 텐데, 한 번 얘기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아···. 저쪽이에요. 다녀올래요?”
“네. 루리 씨, 진짜 감사해요. 이따 다시 올게요. 여기 계셔야 해요?”
결국 타냐는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혼혈을 먼저 찾아 나섰다. 아직 치료받지 않아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한 상태로. 루리는 그것이 못내 껄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냐는 이런 곳에서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가뜩이나 타냐에게 약한 루리가 그런 타냐를 말릴 수 있을 리가···.
“아, 아울 씨. 이번 일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저번처럼 방범 벨을 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루리는 타냐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연을 맺을 수 있었는지를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네? 뒷배가··· 그분이요? 어쩐지, 이번 약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더라니.”
저런 다정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겐 누구나 중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꺼이 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타냐는 바로 그 다정한 사람이었다.
-루리는 어쩌면, 자신은 이미 그 중독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타냐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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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도?
근데 너보단 아닌 듯.
※ 이것이 드림 통합의 날 ※ 날조 100% ※ 내드림 + 남에 드림(ㅋㅋ) 지금 이곳, 이슈가르드의 오래된 술집에는 두 명의 유명인이 앉아 나란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짙은 머리색의 엘레젠과 밝은 머리색의 엘레젠. 오랜 친우 사이에, 서로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그러한 두 남정네들. 다른 이들에게는 유명인이고 동경하는 이들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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