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5. 빅터와 초코칩쿠키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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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헬기다!”

 

끝내준다!

빅터는 집에 돌아오자 보이는 커다란 헬기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며 폴짝 뛰었다. 오르카는 그 전에 빅터의 품에서 내려온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서서 헬기를 구경했다. 빅터의 장래 희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이전엔 자동차가 주인공인 만화영화에 나오는 스포츠카였다.

그런데 (원래도 조촐한 나이프이긴 하지만)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나와 있는 인원은 적었다. 운전자로 보이는 라드, 그리고 나이프 원년 멤버 4명이 끝. 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인가 싶었다.

 

“보스, 우리만 가는 거야?”

“응, 5인승이거든!”

 

…그런데 이런 단순한 이유일 줄은.

오르카는 기대한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헬기에 올랐다. 운전석 바로 옆이 백모래의 자리, 3개의 뒷좌석에는 오르카가 메두사와 빅터 사이에 앉았다. 위험한데다 작다는 이유였다. 내부가 좁은 헬기의 내부는 그렇게 앉고도 갑갑하게 느껴질 만큼 좁았다.

 

하지만 이미 헬기는 이륙했고, 백모래는 뒤늦게 설명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

“랩터를 찾으러 갈 거야~”

“진짜?!”

 

빅터가 과하게 놀랐다. 오르카는 랩터를 걱정하는 게 뻔히 눈에 보이는 빅터의 태도를 혹시나 백모래가 눈치채고 언짢아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저 태연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눈감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그래, C국에 있을 때 정보를 얻었잖아? 그 재활시설 근처에 집을 얻었거든. 뭐, 소문의 그 흉산이랑 가깝긴 한데-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지. 그래서 거기서 며칠 머무르면서 랩터를 찾을 거야. -아, 당연히 잠입해서!”

“보스답지 않게 준비가 나름 되어 있네요.”

“너무해, 메두사~”

 

그 짧은 설명을 마지막으로, 영양가 있는 대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 오르카는 빅터와 함께 멍하니 창밖을 구경했다. 이렇게 높은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장난감 모형처럼 멀어지며 결국 먼 잔상만 남기고야 마는데, 그 속도가 순식간이라 마치 파도치는 모습 같았다.

 

그나저나, 랩터라.

오르카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백모래의 사랑이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이미 틀어진 관계. 이미 이 사랑은 험난한 과정에 진입했다. 솔직히 희망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이제 나이프는 ‘정말로’ 백모래의 사랑을 전력으로 도와야 할 처지였다.

오르카 개인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좀 더 진심을 까보자면, 이 정도의 집착을 받는 랩터가 불쌍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앞세워 백모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힘은 없다.

 

오르카는 그보다도 자신과 빅터의 안위가 우선이었으니까.

 

“아~ 뻐근해.”

 

그렇게 몇 시간을 날았을까, 앉아있는 내내 자세가 불편했는지 메두사는 내리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며 투덜거렸다. 다섯 사람은 산 중턱의 빈 공터에 헬기를 대어놓고 집 앞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빅터는 거의 다 감긴 눈을 연신 비비며 메두사에게 팔을 걸치며 기댔다가 밀쳐졌다. 무겁다는 이유였다.

 

“힝….”

“그나저나 보스, 생필품은 있는 거죠?”

“물론이지. 전에 살던 사람들 게 그대로 있는걸.”

 

아, 그 말은 전에 살던 사람들은 다 죽였다는 소리다.

오르카는 그 말 속의 함의를 본능적으로 눈치채고선 코를 킁킁거렸다. 어쩐지 혈향이 풍기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듯 아주 희미하긴 했지만. 실제로 빅터는 피 냄새를 의혹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에, 오르카는 부러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숲에 들어온 시간은 아주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바로 잘 준비를 해야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욕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잠입 일정을 조율했다. 그 와중에도 빅터는 내내 졸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걱정이었으나, 어차피 백모래와 함께할 거라면 혼자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애써 마음을 놓았다.

조는 간단했다. 환자 역할의 오르카와 그 보호자 역할의 메두사. 새로 파견된 재활치료사 백모래와 그 견습생 빅터, 그리고 다른 환자의 가족인 척 행세하며 대놓고 환자들을 살피며 돌아볼 라드까지. 거대한 재활 치료시설을 제대로 둘러보겠다는 작정이 눈에 띄는 인선이었다.

 

그보다, 환자 행세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오르카가 걱정할 때였다.

 

“아, 오르카랑 메두사는 우리랑 동행해야 해. 내가 데려온 걸로 해야 하니까. 안 그럼 진료받다가 바로 걸린다?”

“정말 적응 안 되네요. 솔직히 보스가 짠 계획 아니죠?”

“어떻게 알았어? 록산느가 짜 준 계획인데.”

 

에휴.

이제는 익숙한 메두사의 한숨 소리가 유난히 선연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절레절레 저어지는 고개는 덤이었다. 백모래는 드물게 내가 뭘!하고 발끈했으나 그에 공감해주는 이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빅터가 사라졌다.

 

“메, 메두사 님.”

“응? 왜 그래, 오르카.”

“빅터가….”

 

오르카는 아침잠이 많은 빅터를 깨우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빅터가 먼저 일어날 때가 있기도 해서 처음 빈 침대를 맞이했을 때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 온 집안을 아무리 뒤져봐도,

 

-빅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객실, 클리어. 부엌, 클리어. 거실, 클리어. 벽장, 클리어. 지하실, 클리어. 마당, 클리어.

 

“그냥 잠깐 나간 거 아냐?”

“보스 말이 맞아. 잠깐 아침 산책 갔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빅터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아이는 아니었다. 조름이 심하긴 해도 그 모든 일탈이 예상 밖을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나이프에게 빅터는 때 되면 사라지고, 때 되면 나타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 ‘때’를 지키지 않고 여태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꽤나 큰일이었다. 그에 먼저 말문을 튼 건 백모래였다.

 

“위험한데….”

“뭔데요, 보스?”

“여기 흉산의 소문이 안 좋다고 했잖아. 그게 사람이 연속으로 실종되어서 그런 거거든.”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뻑, 박터지는 소리와 함께 백모래의 목이 꺾였다. 오르카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빅터가 실종인 게 흉산 탓이면, 빅터가 단순히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귀신이나 영적인 존재의 영향일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지금 이 인원 중에는 그런 쪽으로 감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나 백모래가 빅터를 포기하자는 말을 할까 봐, 오르카는 바짝 긴장했다. 백모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점점 더 심상치 않은 내용을 띠고 있었다.

 

“저 산에도 원래 여기랑 비슷한 쌍둥이 산장이 있었대. 그런데 거기 살던 가족이 한 명씩 사라진 거지.”

“아, 뻔한 얘기는 극혐인데.”

“수색조도 하나씩 사라지고… 산장의 모습도 조금씩 기괴해지고… 그런데 이제 어느 순간 다 목을 맨 채로 발견된 거야. 사라진 시기 제각각인데, 한번에 그렇게 발견된 거지.”

“으으, 오싹한데요 보스. 빅터 진짜 괜찮을까요?”

 

라드의 너스레에 백모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쩐지 태연한 태도라서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제스쳐였다. 오르카는 목을 맨 시체로 등장할 빅터를 상상하며 어깨를 떨었다. 농담으로라도 연상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모래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쯤이면 오르카의 반응을 즐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최근엔 산장에 하얀 귀신이 나돌아 다닌다고도 하더라고.”

“보, 보스… 빅터를 구해야….”

“응? 오르카, 겁먹었어?”

 

오르카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 오르카가 두려운 건 귀신 얘기가 아니라 빅터의 안부였으니까. 그가 혹시나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백모래는 그런 오르카를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와 같이 따스한 온기였다.

 

“일단 다 같이 잠입하자. 빅터는 내가 슬쩍 나와서 찾아볼 테니까.”

 

-혹시 알아? 내가 귀신도 정화할 수 있을는지.

어쩐지 매우 신빙성 있어 보이는 소리에, 오르카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산책을 나온 빅터는, 단순히 길을 잃은 게 맞았다.

 

“여기 어디더라….”

 

다만, 이미 흉산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

빅터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듯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빅터 자신의 방향 감각에는 문제가 없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빅터의 경로를 비틀고 있었다. 그것도 전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그 끝에 범의 아가리가 존재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아직 흉산의 소문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냥 조금 안 좋은 소문이 있나 보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채, 다만 헤매며 초조해할 뿐이다.

 

“아침 시간인데. 아, 배고파.”

 

빅터는 결국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그리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서 봉지 하나를 꺼냈다. 마일로에게 나눠주고 남은 초코칩쿠키 봉지였다. 대충 후드 속에 넣어둔 채 이리저리 졸고 돌아다니느라 거의 가루가 되어 있는 쿠키는 그냥 보기에도, 먹기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빅터는 먹을 게 없었다. 당장 산장의 나이프가 그를 걱정할 것도 걱정이었지만, 제 배고픔 역시 문제였기 때문에 와삭거리며 손으로 주워 먹었다. 곧 손이 기름기로 반질해졌다. 짙은 버터와 초코향, 그리고-

 

혈향.

 

오싹, 소름이 돋은 빅터는 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와지끈, 하고 꺾인 나무의 단면에서 줄줄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공포영화 속에서나 봤던 장면에, 빅터는 이곳이 그 흉산凶山임을 실감했다. 지금은 느긋하게 앉아서 쿠키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로 봉투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은 빅터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까와 같았다.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몇 번이나 같은 곳으로 유도당하는 것에, 빅터는 짜증을 내며 멈춰서고 말았다. 그렇게 그가 마침내, 더 뛰기를 포기한 순간, 뒤에서 범의 입을 가장한 이형의 존재가 쩌억, 입을 벌렸다.

 

팡-

“뭐야?”

“-헤이즈 형?”

 

그것이 끼에에- 하며 단말마를 뱉는 것을 듣지 못한 빅터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웬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헤이즈를 바라보았다. 특이하게도 새까만 색을 가진 배트에는 몇 개의 부적이 붙어 있었는데, 그 끝에 희뿌연 김이 일고 있었다.

 

효과일까? 신기해!

그 와중에도 쓸데없는 생각을 한 빅터는 헤이즈가 묘한 얼굴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수상하다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음, 몇 달 만이지? 아니다, 일 년만인가?”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 크네.”

“응? 응. 내가 크긴 하지?”

“언어구사력는 여전하지만.”

“…?”

 

빅터는 그제야 손바닥에 주먹을 통, 올렸다. 생각해보니 헤이즈는 빅터의 작은 분신밖에 본 적이 없었다! 제 원래 모습에 면역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한 빅터는 더 본격적으로 치근대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곳을 오랫동안 헤매다 겨우 아는 얼굴을 만난 반가움의 의미였다. 헤이즈는 영 귀찮다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쳐내지 않는 것에 빅터는 희희낙락하며 열심히 말을 걸었다. 짝짜꿍이 맞지 않는 대화 정도야 빅터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조금 무시당하는 것 정도는 아무래도 타격이 없다는 소리다.

 

“어쩌다 여기까지…. 일단 따라와.”

“응!”

“정확히 내 발자국만 밟, 아니다. 부적을, 하, 이거 비싼 건데.”

“응?”

 

난데없이 부적을 받은 빅터는 비싼 거라는 말에 일단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대충 넣어두었다. 고이 보관할 달리 좋은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는지, 헤이즈는 뭐라 잔소리하려던 말을 꺼내려다, 한숨과 함께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거의 없는 우거진 숲부터 작은 잔디로 길이 트여있는 곳, 그리고 마침내 잘 다져진 흙길로 나왔을 즈음, 안개가 부자연스럽게 걷혔다. 그러자 빅터는 자신이 나이프가 머물기로 한, 지난밤을 보낸 산장과 아주 흡사해 보이는 모양의 낡은 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와아-! 마법이야?”

“영감이라는 게 없구만. 영능력이라는 거다.”

“영감? 나 아는데!”

“?”

“Inspiration!”

“하….”

 

헤이즈는 빅터의 대답에 차마 더 대답하지 못하고 푹, 한숨을 쉬었다. 답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에 빅터는 볼을 부풀렸으나, 뭐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눈보다 코가 먼저 익숙한 향기를 잡아챘다. 아는 사람의 향이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바로-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 빅터?”

 

랩터.

 

“랩터 누나!”

“우아아?”

“스텔은 여전히 작네! 언제 크는 거야?”

“너, 너….”

 

빅터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환히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는 랩터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스텔을 마냥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재회, 그것이 빅터의 가슴을 마냥 부풀어 오르게 했다.

하지만 랩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가움은 한순간의 이채로 빛나고,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빅터에게서 스텔을 멀찍이 두는 것이다. 그리고는 물었다.

 

“나이프가 근처에 있는 거야? 헤이즈, 넌 무슨 생각으로 얘를-”

“진정해, 랩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나이프가 날 어디까지 쫓아왔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음….”

 

결국엔 랩터가 헤이즈와 대거리를 하며 투닥이는 것에, 빅터는 짧은 침음을 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자신이 불화의 원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싫었고, 랩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나마 모양이 성한 것을 골라내고는…

 

“이거, 먹을래? 내가 만든 건데.”

 

두 사람 사이에 내밀었다. 반질해진 두 손으로 아주 공손하게.

 

“…”

“…”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었다. 빅터치고는 아주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걔네는 아주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내가 영능력자인 건 몰랐을 테니까. 잘 됐지 뭐.”

“맞아! 사실 난 진짜로 랩터 누나를 찾을까 봐 걱정 많이 했, 냠.”

 

빅터는 헤이즈가 차려준 시리얼을 와삭와삭 씹어먹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백모래가 어떤 조직에서 랩터의 흔적을 찾았으며, 그를 따라 국경을 넘었다고. 그리고 헬기를 구해 여기까지 온 상황….

여러모로 헤이즈의 존재가 랩터에겐 다행이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백모래의 예상 속 허점을 제대로 짚었으니 말이다.

 

“빅터 너, 내가 여기 있단 걸 알리지는 않을 거지?”

“응, 누나! 그니까 도망쳐!”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전에 했던 대사랑 똑같잖아.”

 

풋, 빅터는 결국 랩터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이 어지간히 뿌듯했는지, 연신 스텔과 헤이즈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다. 시리얼을 국물까지 마신 덕에 하얗게 우유 거품이 묻은 채로. 그게 더 우습다는 것을 본인만 몰랐다.

그래도 빅터는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으니까. 랩터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고작 일 년 전의 추억과 향기가 새록새록했다. 랩터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 그럼 저런 표정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누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재활?”

“…뭐, 이것도 일종의 재활이지.”

“?”

 

하지만 누나는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빅터는 조금 실례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감을 잡지 못한 모양새에, 랩터는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싸우는 거 말이야. 이 몸으로 싸우는 데에 적응해야지.”

“아!”

“말 나온 김에 한 판 해볼래?”

 

빅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랩터의 재활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도와주고 싶기도 했고, 랩터와 오랜만에 대련하는 것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랩터는 아이들 중에서도 빅터와 유일하게 호각을 이루던 좋은 대련 상대였다. 휠체어에 오르면서 전투 스타일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오랜만의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대련에 빅터는 잔뜩 들떴다.

 

“자- 그럼,”

 

심판은 헤이즈가 맡았다. 룰은 한 명이라도 유효타를 3회 넣은 쪽이 이기는 것으로. 빅터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시작!”

 

그렇게 두 사람이 부딪혔다. 랩터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방향을 꺾어 빅터의 주먹을 피했다. 아래서 위로 향하는 주먹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자, 곧 날카로운 반격의 타이밍이었다. 초반이라 방심하고 있던 빅터는 랩터의 검에 허무하게 겨드랑이를 내줘야 했다.

 

“1타. 너무 방심하는 거 아ㄴ, 윽!”

“나도 1타!”

 

하지만 빅터도 가만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휠체어가 그 높이 자체를 줄일 순 없다는 점을 이용해 딱 그 정도 높이의 발차기로 랩터의 어깨를 스쳤던 것이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휠체어 통째로 날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 후는 둘 중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빅터는 검의 사정 범위 밖에 있기 위해 함부로 거리를 좁히지 않았고, 랩터는 애매한 거리에 접근해 빅터가 발차기를 날리기 전에 검으로 견제했다. 날카로운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훙- 소리가 나는 주먹을 검 면으로 막아내고는 아슬하게 중심을 잡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빠르게 다시 1타를 주고받고 나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툭….

“빅터, 승리.”

 

마침내 휠체어의 뒤를 점하는 것에 성공한 빅터의 승리였다.

 

“으-와!”

 

오랜만에 재미있었다는 얼굴로, 빅터는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반면에 그 옆에 선 랩터의 얼굴은 씁쓸했다. 예전 같지 않은 몸에 대한 새삼스러운 실망일까, 혹은 열등감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이너스적 감정이 슬슬 떠오르는 것을 눈치챈 빅터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걸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싸우려고 하는 거야?”

“뭐? 당연하지.”

 

백모래를 죽여야 하니까.

짧게 이어지는 뒷말을 듣고서야, 빅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납득이 되는 이유였던 것이다. 랩터는 가족을 죽인 백모래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고,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그것을 굳이 손수해야 하는지는 조금, 알 수 없었으나 최대한 공감하고 싶은 마음으로 빅터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할 수 있을 거야!”

“…안 막는 거야?”

“형, 말했잖아. 나도 보스가 무섭단 말이야.”

 

랩터와 헤이즈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의사 교환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빅터는 멀뚱히 앉아서 두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

 

“있잖아, 빅터.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리고 그것은 생각도 못 한 제안.

 

빅터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만큼 상상해본 적이 없는 얘기였다. 빅터는 기억 속의 아주 초반부터 나이프였고, 나이프에서 벗어나는 상상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부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뭐, 뭐?”

 

그래서 아주 바보 같은 대답밖엔 할 수 없었다. 사실 충격에 절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랩터가 이해한다는 듯이 부연설명을 더했다.

 

“네가 어렸을 때부터 나이프에서 컸다는 걸 알아. 어렵긴 하겠지만… 너도 그놈이랑은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네가 오면 랩터 혼자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형은?”

“난 뭐… 돈 주면 하겠지만.”

 

빅터는 돈을 주는 대로 하겠다는 헤이즈의 말에 표정이 아리송해졌으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건을 가릴 게 너무 많았다. 주된 이유는 빅터가 좋아하는 가족들이었다.

 

“난… 가족이 나이프에 있어.”

“오르카? 걔도 같이 와도 좋고. 걔도 백모래는 무서워하는 눈치던데.”

“형아랑, 메두사 누나랑, 레이디 누나랑, 세월….”

“어디까지 나오는 거야.”

 

이 정도면 나이프 전체가 그냥 가족 아니냐며 헤이즈가 질렸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맞는 소리였다. 빅터에겐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었다. 메두사와 오르카는 첫 기억부터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이었고, 레이디와 세월은 처음으로 직접 구해온 사람이었다. 라드는 재밌었고, 가리는 안 그런 척 능력 있었고, 록산느도, 뭐, 나름 친절하고….

그냥,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됐다. 빅터는 그냥 그들이 좋았다. ‘나이프’라 이름 붙인 사람들에게 이미 정을 붙인 걸 어쩌겠는가. 사실은 빅터야말로 나이프에 제일 소속감을 많이 가진 멤버일지도 몰랐다.

 

“…그 사람들이 나보다 좋아?”

 

그래서, 빅터는 그 유치한 질문에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차마 감히 가늠할 수 없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 무게를 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랬다. 그래서 허겁지겁 대답했다.

 

“그건 아냐! 그건 아닌데,”

“아닌데?”

“마음에 걸려서, 두고 오기가 싫어서….”

 

결국 그게 그거 아니냐며, 랩터가 한쪽 눈썹을 마뜩잖게 들어 올린다. 빅터는 그 눈빛에 꿰인 것마냥 쩔쩔매며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헤이즈는 그 옆에서 관전자처럼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옆의 배트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대답 여하에 따라 그의 처분이 결정될지도 몰랐다.

 

“어차피 다들 똑같은 범죄자 아닌가.”

 

그때, 빅터의 가슴을 찌른 것은 너무나 사실인 말. 반쯤은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자, 빅터는 차마 대꾸도 못 하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메두사가 몸에서 뱀을 꺼내 어떤 히어로를 죽음으로 인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방울져 내리는 시야 속에서 오르카가 주먹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밀수를 자랑스럽게 입에 담던 라드가 떠올랐다. 도청이 특기인 가리, 국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록산느….

다들, 나쁘단 걸 알면서도 빅터에겐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빅터를 더욱 괴롭게 했다. 어쩐지 그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떳떳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면 백모래는?

좋아했던 사람. 하지만 무서워진 사람, 하지만 잘해주는 사람. 그에 도리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 나쁜데, 나를 죽이지 않아서…

 

안심해버리고는.

 

“좋아, 그럼 짧게 다시 물어볼게.”

 

나야, 백모래야?

“그야 당연히 랩터 누나지! 하지만…”

 

빅터는 이번에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이프는 빅터에게 가족이지만, 그 나이프야말로 곧 백모래나 다름없다는 것을. 애초에 백모래는 싫고 나이프는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스텐스를 취한 것부터 문제였다는 것을. 그래, 이미 빅터는 애정에 잘 길들여진 아이였고, 가족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나이프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백모래가 있어도 좋았다. 아니, 백모래가 필요했다. 랩터가 그를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빅터는 백모래를 적으로 돌리기에 이미 조금은 정이 붙었고, 몇 배는 더욱 두려워했다. 그것이 그를 적으로 돌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미안… 나, 모르겠어.”

 

역시 안 될 것 같아.

빅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누나한테 해가 되는 일은 안 할게. 오늘 일도 말 안 할게.”

“그 새끼가 살아있는 게 지금 나한테 위협인데, 지금 장난해?”

 

랩터의 까맣기만 한 눈에서 안광이 사라지고, 눈매가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빅터는 그것이 무섭고 또 미안해서,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랩터와 다르게 복수를 포기하고 안주를 선택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 우유부단한 선택을 랩터는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헤이즈는 고개를 돌렸다.

 

“-!”

 

…아무것도 모르는 스텔만 해맑게 빅터에게 손을 내밀 뿐이었다. 빅터는 힘없는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다 스텔을 안아 올렸다. 아기 냄새가 연하게 스쳤다. 빅터로선 경험해본 적 없는 냄새. 그것이 신기했던 빅터는 다시 희미하게 안광을 되찾으며 말했다.

 

“…난 못해. 난, 보스를… 죽이는 거 못해. 생각만 해도 무섭고, 그랬다가 다들 떠나가고, 나 혼자 남을까 무서워.”

“…”

“그러니까, 난 내 손으로 우리 가족을 배신할 수 없다는 소리야. 대신-”

 

이 산장 얘기도 안 할 거고, 부적도 두고 갈 거고, 누나 쫓는 거 최대한 방해할 테니까.

빅터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머 간절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 하며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우릴 쫓는 히어로들이 있어. 거기에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누나 얘기를 하면 그쪽에서 도와줄 테니까-”

“히어로?”

“아, 예전에 들어본 적은 있는데… 거긴가.”

 

랩터는 아예 처음 듣는 듯한 눈으로 귀를 까딱였고, 헤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고국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빅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래서 거기 이름이 뭔데?”

 

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몰라.”

 

그동안 제 생각하기에 바빠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체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빅터의 잘못이었다. 빅터는 두 사람분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으며 슬쩍 고개를 돌리고 스텔을 내려주었다. 그리곤 랩터의 무릎 곁에 꿇어앉는 것이다. 그 언젠가 어릴 적의 빅터가 다친 아이들을 올려다보던, 바로 그 자세였다.

 

“내가 바보라서 미안해, 나이프를 배신할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하지만?”

“나이프는 내 집이고 가족이야. 아직은, 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

“그 ‘아직은’이 끝날 때가 언젠데?”

“…몰라?”

 

긴 망설임에 랩터가 눈을 치켜세웠지만, 어떻게든 고개를 기울여 무해함을 어필한 빅터는 랩터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뱉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빅터의 코를 랩터가 퉁, 하고 튕겼으나 그마저 좋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다.

 

“나도 참, 애한테 뭔 짓인지…. 그냥 약속하자. 내가 히어로가 되어서 접촉하면 도와주는 걸로.”

“응! 히-”

“이 바보야. 맞아놓고 좋아?”

“랩터 누나가 화 안 냈으니까.”

 

빅터는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랩터를 올려다보았다.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랩터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남아있었지만, 지금 또 빅터에게 선택을 종용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랩터에 비해 헤이즈의 얼굴은 조금 차갑기는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빅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를 뒹굴거렸을까. 벌써 정오의 태양이 하늘의 천장에 닿아 있었다. 빅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탁, 먼지를 털었다. 랩터를 본 건 좋지만 슬슬 가보지 않으면 나이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에 랩터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가게? 점심 안 먹고?”

“으응, 먹은 거 들키면 안 되니까!”

“철저한 건지, 무식한 건지.”

“헤이즈.”

 

익숙한 매도에 빅터는 그저 눈을 깜박였고, 랩터는 엄한 말씨로 헤이즈를 불렀다. 헤이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이 산에 깃들어 있는 귀신의 대처법에 대한 설명이었다.

 

“여기 귀신이 있는 건 사실이야. 우리한테야 은신에 도움이 되니까 놔두고 있긴 한데 좀 위험하니까 최대한 뒤 돌아보지 말고 걷는 게 좋아. 두리번거리면 거릴수록 더 홀리는 거니까 명심하고. 부적이 있긴 해도 위험히니까-”

“오오…”

“헤이즈 말대로야. 꼭 조심해서 나가. 내 얘기 하지말고. 넌 쓸데없이 꼭 한 마디를 더해서 거짓말을 들키니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꼭 그럴게!”

 

하지만 잔소리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아라. 귀신 따라가지 말아라, 절벽이 있으니 조심해라, 하늘만 보고 걷지 말고 땅 밑 조심해라, 시계는 있냐, 돌아갈 수는 있겠느냐…

 

이게 부모님의 잔소리?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한 빅터는 끝내 기계적으로 ‘응! 응! 그럴게!’만을 반복하며, 그 말의 절반을 귀 밖으로 튕겨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빅터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랩터는 결국 한숨을 쉬며 그를 놓아주었다. 랩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져 있었던 빅터는 조금 비틀대며 제자리에 설 수 있었다.

 

“누나아… 나 진짜 괜찮아. 잘 갈 수 있어!”

“그래. 오랜만에 잔소리는 싫다 이거지?”

“그으건 아니지만!”

“말은 잘 한다.”

 

그리곤 랩터가 손을 뻗는다. 빅터는 이 제스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냅다 고개를 숙였다. 예전과는 달리 더 깊게 숙여야만 랩터의 손이 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거칠게 부벼지는 감각이 익숙해서 마음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한편,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땐, 빅터가 조금 숙이고 랩터가 발꿈치를 들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는데.

그것을 느낀 건 빅터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두 사람은 머쓱하게 멀어졌다. 빅터는 뭐라 말해야 할지를 알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발코로 바닥을 툭툭 치거나 볼을 긁적이거나 하다가, 냅다 랩터를 안아주었다. 그리곤-

 

“꼭 다시 봐. 꼭!”

 

그들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약속. 빅터는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 사라졌다. 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의 크레이터를 남기며.

 

“…이거 어쩌냐.”

“쟤 힘이 좋은 걸 어떡해. 그냥 두자.”

“그ㄹ, 잠깐.”

“왜?”

“이거… 내가 걔한테 준 부적인데.”

“…그걸 지금 놓고 갔다고?!”

 


 

빅터는 한참이나 헤맸다. 헤이즈의 말대로 다른 곳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와중인데도 홀리는 기분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주머니를 뒤적여보니-

 

“앗, 없다.”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더라. 랩터와 치고받고 또 흙바닥 위를 구르는 와중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빅터는 이게 다 바지 때문이라며 입을 댓발 내밀고 툴툴거렸다.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귀신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마저 귀신에 대한 공포심보다는 호기심밖에 없는 아이였으니.

 

“어떡하지….”

 

하지만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빅터는 일단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고, 귀신에 홀리는 ‘끝’이 오는 순간이 위험할 거란 본능적인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빅터의 감에 따르면… 그것은 이제 곧이었다.

-음, 그래. 사실 빅터는 감이 삐용삐용 경고음을 보내는 것을 무시하고 몇 분이나 더 헤맸다. 혹시나 백모래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랩터가 살고 있는 산장에서 최대한 멀어져 있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돌아가는 길에 랩터와 마주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니까.

같은 선상에서, 빅터는 헤이즈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다 괜히 저를 찾아올 나이프와 헤이즈와 빅터의 삼파전, 이 발생했다가는 빅터의 정신 줄이 버텨주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귀신이 나와서 몸으로 때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적당한 생각을 하는 빅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옅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터.’

‘-빅터!’

 

오르카의 목소리!

빅터는 그게 함정이란 것을 머리로 인지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까만 암굴이.

 

빅터는 어느새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깜깜하고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숲이 우거진 산이라고는 해도 지금 시각은 정오. 하루의 가장 센 햇빛이 지면을 최고까지 꾸준히 달구는 중이었다. 그러니 한 줌의 햇빛이라도 비칠 법한데 이곳은 지금….

 

“…어두워.”

 

짐승의 아가리에 삼켜진 기분이 이러할까. 빅터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머리 위까지 새까만 어둠이 자리하는 것을 확인했다. 사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암굴은 이미 빅터를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빅터를 가두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앗,”

 

빅터는 작은 힘에 밀려 앞으로 발을 디뎠다. 누군지 모를, 아니 무엇인지 모를 흔적이 서늘하게 빅터의 등에 자욱을 남겼으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나뭇잎이며 가지의 감촉들이 선연하게 향을 남길 뿐. -아니, 사람의 손이던가?

 

오싹, 빅터는 파드득 떨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어떤 영적인 공간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빅터를 앞으로 밀고자 한다는 것. 결국 그 자리에서 버티려는 빅터와 앞으로 밀어버리려는 ‘그것’ 사이에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슬에 젖듯 천천히, 빅터는 앞으로 밀려 나갔고-

 

“-어?”

 

발밑이 꺼졌다.

 

화악,

시야가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눈이 부신 햇빛에 눈이 절로 감겼다. 이미 몇 번의 몸부림을 치는 동안 깜깜한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새로운 빛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 빛에 바스라지는 마른 뼈의 감각이 목에 욱신거리는 고통을 낳았다.

 

하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이, 빅터는 이미 추락하고 있었다.

 

“-아!”

‘-절벽이 있으니 조심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아찔한 높이의 절벽에서 균형을 잃은 몸은 어떻게 될까?

 

-정답, 작신작신 부서져 인간이었던 멀쩡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

 

빅터는 각오조차 하지 못하고, 다만 눈을 감았다.

 

“-터!”

 

텁,

그때, 몸이 덜걱 끌어올려지는 느낌과 함께 빅터는 물에서 갓 끌어올려지는 물고기라도 된 것처럼 거칠게 숨을 집어삼켰다. 가슴이 가쁘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난 빅터. 곧 땅에 엎어지다시피 하며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커헉.”

“와, 큰일 날 뻔했네….”

 

그리고 빅터를 구해낸 사람은 바로,

 

“크흡, 킁, 보스?”

 

백모래였다.

 

빅터는 귀신에게 홀렸다 정신을 차린 뒤의 충격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축축 처져서 움직이기 힘든 것을 애써 참고 자리에 일어나려는 것을, 백모래가 도와주었다. 일어나고도 몇 번이나 휘청거린 빅터는 겨우 제자리에 서서 말했다.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응? 그냥. 아무 일도 없더라고~ 나, 귀신이나 저주도 정화하는 게 아닐까?”

 

사기다.

온 세상의 삿된 것을 정화하는 능력. 그것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다 뒤늦게 볼을 긁적였다.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다는 것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선뜻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필 그 인사의 대상이 백모래였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너무 평소랑 다르고. 고마워? 너무 가벼운 것 같다. 무엇보다 평소에 백모래에게 감사할 일이래 봐야 수업 후에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는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백모래와는 애매한 마음의 거리가 있지 않은가. 빅터에게 백모래는 아직도 껄끄러운 사람인데, 이렇게 되면-

 

자꾸 방심하게 되잖아.

 

결국 빅터가 선택한 결과는,

 

“…고마워!”

 

백모래를 안으며 그렇게 말하곤 도망치는 것. 붙잡을 새도 없이 벌써 저 멀리 사라져가는 빅터를 보며 화들짝 놀란 백모래는 뒤늦게 그런 빅터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답지 않은 정상적인 잔소리는 덤이었다.

 

“빅터! 그러다 또 귀신 만난다~”

 

바로 직전의 그 살벌한 사건과는 별개로 참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에이씨, 들킬 뻔했네….”

“들켰어.”

“뭐?”

“이미 눈 마주쳤다고. 나랑.”

“근데 왜 빅터 쪽으로….”

“뭐 진짜 빅터가 말한 ‘가족 같은’ 관계 같은 거라던가? 몰라. 미친놈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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