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벨] 병든 낙원 2
사람을 낙원 삼은 자들은 병들고 만다
라하브레아 X 빛의 전사(여) 포함를 포함한 고대인 드림글입니다.
이후 공개 되는 공식 설정 및 그에 따라 수정되는 드림 설정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5.4~5.5 시점
※ 글 내에서 언급되는 조디아크는 변질된 라하브레아의 이면이나, 해당 연성 시점에서는 조디아크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효월의 종언 8인 레이드 만마전 판데모니움: 천옥 이후입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라하브레아의 외관은 고대 시절이 아닌 창천 당시 아씨엔 외관으로, 약 180 중반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본모습을 기억해 냈으나 해당 글 시점에서는 베르니체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 병든 낙원 1과 같은 내용이나, 라하브레아의 시점입니다.
빛으로 삼켜지던 세계의 깊은 바다 아래에 자리한 환영 도시 아모로트에도 밤이 내린 지 오래였다. 라하브레아는 곁에 붙어 앉아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든 베르니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읽던 책의 다른 페이지를 읽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베르니체의 몸 위에 책을 얹고, 그녀를 안아 든 채 문으로 다가갔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 서 있던 휘틀로다이우스가 가볍게 목인사를 건넸다. 라하브레아는 목인사로 답하고 그에게 베르니체를 안겨주었다.
“조심해서 데려가거라.”
“응, 걱정하지 마. ……근데 하루쯤은 의장 옆에서 재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아이에겐 말하지 말거라. 최근 조디아크가 그 아이를 계속해서 노리는 게 느껴지고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런 이유라면야 어쩔 수 없지. 좋은 밤 보내.”
고대인 시절의 키로 몸을 늘려 한쪽 팔로 베르니체를 안고, 책을 손에 감추듯 쥔 휘틀로다이우스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의사당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던 라하브레아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랑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라. 불완전한 세계를 합쳐 진정한 세계를 창조하라. 우리를 떠난 ‘태양’의 조각을 짓밟아라. 세상을 구하는 거야.》
“또 시작이군…….”
한숨을 내쉬고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간 그는 베르니체가 앉아있던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안식을 취하도록 잠시 떠나보낸 것뿐인데 가슴이 허전하다. 지금이라도 가서 잠든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올까, 싶었다가도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 다시 사무 책상에 앉았다.
질리도록 반복한 서류 작업은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지경이지만, 그곳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물론 이 일을 한다고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거나 시간 낭비라는 등 온갖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가 나중에는 동포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어 들려주지만, 서류에 집중하려고 애쓰다 보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거라도 낫다 싶었던 라하브레아는 펜을 움직였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는 게 라하브레아의 일상이었다. 베르니체가 없는 시간 동안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고, 베르니체가 오거든 함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며 베르니체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녀를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돌려보내고, 조디아크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할 필요도 없는 잔일을 하다가 겨우 눈을 붙이는, 나름 평화로운 나날.
그날도 그랬어야 했다. 휘틀로다이우스에게 가서 자겠다는 베르니체를 배웅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며 조디아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던 라하브레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펜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짓만으로도 충분히 열 수 있지만, 그 노크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아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문으로 걸어가 무거운 문을 열어보니, 분명 잠에 빠져들었기에 휘틀로다이우스를 불러 데려가게 했던 베르니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보다 두려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베르니체의 눈가가 무척이나 붉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으나,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라하브레아.”
마치 부서질 것만 같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표정을 관리하려 해도 쉽지 않았고, 대답 대신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전부였다. 평소와 달리 손을 들어 그의 손등에 손을 겹친 베르니체가 눈을 감았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손등으로 느껴지는 손이 너무나 시리다.
“내가 당신에게 고백한 날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단 한 마디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떨리는 호흡을 붙잡고 쓰러지려는 몸을 세우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지만 흔들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할 것을 바라지 않겠다 하였지.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냐.”
“다시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이를 악물고 조용히 바라보자, 베르니체가 여전히 낯선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삶에 비해 내 삶은 너무나 찰나이고, 내 걸음이 멈추면 난 혼조차 남지 않아요. 물론 내가 당신의 기억에 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만에 하나 기억에 남을 것을 막으려면 당신의 마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베르니체.”
“물론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미 당신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내가 당신의 정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이지.”
“베르니체.”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 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힘을 주기만 했는데도 그녀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텅 빈 시선과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 라하브레아는 먼 옛날 떠나버린 이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표정이 그 위로 겹치는 것을 느끼고 숨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그냥……. 욕심 하나만 들어줘요. 쓸모없는 장난감 정도로만 여겨주겠어요? 잊어버리기엔 그것만큼 적절한 것도 없죠.”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에 질문으로 대답하자 그녀가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그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정이 격해져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제발 그런 상태이길 바라며 차를 권하자, 그녀가 그의 손을 떨쳐내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분명히 한 걸음인데, 너무나 멀다. 아무리 쫓아가도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당신을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그게 맞아요.”
“베니.”
“……나한테 그런 애칭은 과분해요. 라하브레아.”
왜 거부하는 것인지, 왜 도망치는 것인지, 왜 밀어내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말이 어지럽게 섞여 나오지 못했다. 물 밖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라하브레아는 다시 뒷걸음질 치며 가 보겠다는 그녀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언어들 탓인지 말이 더듬거렸다.
“내가, 네게…… 큰 실수를 했느냐.”
“아뇨. 당신은 아무 실수도 안 했어요.”
그러면 왜 내게 이런 잔인한 말을 꺼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르니체가 먼저 말했다. 이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자는 것뿐이라고. 그 말을 들으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올바른 관계가 보답받을 수 없는 일방적인 애정이어야 한다는 뜻인가?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관계가 아닌가? 물론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적절하지 못한 것을 안다. 자신의 죄가 이 심해보다 깊고 모든 거울 세계의 생명보다 많기에 눈앞에 있는 빛나는 영웅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그 죄들이 있기에 그 손에 목숨을 잃어야 맞겠지. 하지만 먼저 그 악행까지도 받아 들여준 것은 그녀가 아니었나. 밀어내는 자신은 신경 쓰지도 않고 끊임없이 곁에 머물며 멋대로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더니, 온정과 애정이 담긴 손을 뻗던 것은 그녀가 아닌가. 그 애정으로 그를 뒤흔들어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정을 품게 해서는 그 존재에 구속한 것도 그녀가 아닌가…….
그렇게 그가 죄인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안식을 바라도록 하고서–물론 이것이 옳은 처사가 아님을 안다–, 곁에 두고 싶게 해 놓고서, 온기를 그리워하게 하고서,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갈망을 만들어 놓고서 갑자기 정을 주지 말라고? 가능할 리 없다. 어떤 정도 줄 수 없던 순간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차라리 이별을 말한다면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일방적인 감정의 정리를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부당해 갈 곳 없는 마음은 어디로 향해야 하느냐.”
“라하브레아. 억지로 어울려 주느라 연기할 필요 없어요.”
“네 귀에는, 지금 내가…… 거짓을 고하는 것으로 들리느냐. 날 보고 답하거라. 왜 내 눈을 피하는 것이냐.”
“……내 분수를 알 뿐이에요. 당신은 내게 과분했어요. 내가 너무 욕심을 낸 거죠. 당신이 잠시 눈을 감고 뜨면 끊어질 목숨으로 감히 당신을 탐낸 거였어요.”
“이런 식으로 늘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거부해 왔느냐.”
비참하다. 라하브레아를 그 슬픈 감정이 가득 채웠다. 조디아크의 비웃음이 커지지만 지금 당장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과분한 것을 탐한 쪽은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끔찍한 악이자 살인자의 신분으로 감히 세상의 구원자를 탐한 것은 자신이다. 이 상황보다 더 슬픈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감정을 욕심이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를 내침과 동시에 그녀 자신을 고립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이 왼손을 잡고, 뺨을 감싼 오른손의 엄지가 괴로움을 견디려 짓씹는 입술을 스쳤다. 그것에 치유의 힘이라도 담긴 것인지 잠시나마 입술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감히 받아서도 안 되죠. 감히 욕심내서도 안 돼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 난 세상을 우선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물으마. 거절당해 갈 곳 없는 마음은…… 어디로, 누구에게 향해야 하느냐…….”
아무리 말해도 닿지 않는다. 절망이 그를 끌어내렸다. 젖은 목소리로 다시 답을 요구하자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떨어지려는 것을 붙잡았다. 찰나인 것을 안다. 그것을 알고서 받아들인 감정이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말처럼 넌 내 삶에서 찰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느냐.”
“나 때문에 이게요름도 죽고, 당신도, 에메트셀크와 엘리디부스도 죽었어요. 당신들이 사랑하던 세계를 되찾을 기회도 전부 짓밟혔다고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감히……!”
“사람의 마음은, 감정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방으로 가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라하브레아는 숨을 들이쉬며 몸을 떨었다. 물론 화가 조금은 났지만 이렇게 소리 지를 만큼은 아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뒷걸음질 치는 베르니체를 다시 붙잡은 라하브레아는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림자에 스며들었던 두 사람이 라하브레아의 침실에 다시 나타났다. 의장실 앞에서 마주 보던 그대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녀가 한 일은 마땅히 그녀가 해야 했을 일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베르니체가 놔달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수없이 이야기했던 말은 미루고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지만, 대답은커녕 푸른 눈동자가 그를 피했다. 라하브레아는 베르니체의 텅 빈 슬픈 표정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내가 ‘라하브레아’로서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보았을 때. 그날, 그 아이도 너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한, 그런 표정 말이지. 그리고 그 아이는 아모로트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도, 내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겠다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다오, 베르니체. 내가 그 아이에게 그랬듯 너에게마저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게 하지 말아다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물론 거절했어도 말했을 것이다. 잠기려는 목소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라하브레아는 그녀를 붙잡았다.
“네 행동은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이냐. 너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네 뜻대로 하겠다. 하지만 네 모든 말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거두어다오.”
“우리 둘을 위한 거예요. 나는 순식간에 사라질 테고, 당신은 나보다도 오래 존재할 테니까. 내 삶이 끝나면 나는 기억조차 남지 못해요. 알잖아요, 라하브레아. 내가 무엇으로, 누구의 혼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마음을 이제 와 끊어내라는 것이 가당하더냐? 네 삶이 짧기에 오히려 손에 쥐고 놓고 싶지 않아 하는 나는 보이지 않느냐?”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놓치고 말 생명이에요. 차라리 더 늦기 전에 놔 버리라고요! 어렵지 않잖아요, 라하브레아. 당신을 위해서는 이게 맞아요. 당신은 내게 마음을 줘선 안 됐다고요! 그냥 유희이고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된 거라고요!”
이기적이구나. 이것이 네가 이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냐? 네게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냐? 여러 가지 물음이 뒤섞이고 또 뒤섞인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몸에서 힘이 빠지고,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손이 떨어지고 말았다. 붙잡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지만, 무거운 족쇄가 손에 매인 양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격양된 숨을 고르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베르니체가 흐느끼며 말했다.
“난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앞으로도 그러겠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찰나도 되지 않을 시간이에요. 이 찰나의 감정에…… 당신이 억지로 어울려 줄 필요 없어요. 내일 봐요.”
“……지금은 혼란스러워 보이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아뇨.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잊지 마요, 라하브레아. 내게 정을 주지 말아요. 그게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더 이상 내 감정을 받아주지 않아도 돼요. 난 그래도 상관없어요.”
“올 때까지 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아라.”
제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붙잡아 보았자 이야기는 도돌이표를 그릴 뿐이다. 에테르의 흐름이 그녀를 감추고 나서야 라하브레아는 침대로 겨우 걸어가 주저앉았다. 악몽이라면 정말로 지독한 것이다. 그래, 이것은 일하다가 깜빡 잠든 자신의 악몽이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분명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을 테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지만, 여전히 어두운 침실의 침대 위이다. 주제에 맞지 않는 이를 사랑하니 이런 결과가 나는 것이라며 어둠이 비웃는다.
《한 번 떠난 자가 두 번 떠나기는 어렵지 않지. 그 혼을 가진 이상,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 잊고 내쳐라. 우리는 다시 세상을 되돌려야만 한다.》
정신을 지배하려는 존재가 약해진 그를 놓칠 리 없다.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영영 떠날 리 없다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믿었던 적이 한 번 있지 않았냐며, 아픈 곳을 후벼판다. 잊으라고 외치고, 기억을 하나둘 묻어버리려 한다. 가장 먼저 묻히려는 것은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을 텐데.”
조정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머리에 손이 닿았다. 조디아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지고, 그를 괴롭히던 두통도 씻은 듯 사라졌다. 조디아크와 누구보다 가깝기에 분리된 지금조차도 그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숨을 고르며 고맙다고 한 뒤 가라앉으려던 이름을 되새겼다. 그의 이마에서 손을 뗀 엘리디부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베르니체가 정을 거두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듣고 충격이 좀 컸던 모양이야. 괜찮다.”
“실연당했군.”
“그런 게 아니야.”
“보통 그런 걸 실연당했다고 한다만.”
입술을 깨물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조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엘리디부스가 물었다. 그 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물론 안다.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턱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디부스가 생각났다는 듯 손을 떼더니 고개를 다시 들어 라하브레아를 보았다.
“하지만 아까 녀석을 보았을 때, 썩 좋아 보이지 않더군. 아마 본심으로 한 말은 아닐 거다. 가끔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하는 녀석이잖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해.”
“그 아이를 봤나?”
“휘틀로다이우스가 부탁해서 잠깐. 요즈음 안 좋은 꿈을 꾸는지 새벽에 비명도 지르고, 가끔은 잠결에 스스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더군. 혹시라도 조디아크의 영향이 있는 건 아닌지 알아봐달라고 했었어. 아마 다른 심리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더군. ……게다가 녀석의 빛의 가호는 두 사람에게 주어졌던 가호가 하나에게 몰린 상황……. 이 시대의 다른 빛의 전사들보다 강하지. 조디아크가 손을 쓸 수는 없을 거다.”
“빛의 가호가 강하기 때문에 파고든 것을 자네가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은?”
엘리디부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길지 않은 고민이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라하브레아에게 답했다.
“조금은. 그렇게까지 망가졌다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흔들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이델린의 힘이 있으니 오래는 못 갈 거다. ……아니, 하이델린의 힘이 약해진 지금이라면 혹시…….”
머리가 아찔했다. 만약 자신과 있어서 조디아크의 표적이 되었다면 그녀를 위해 거리를 두는 게 맞지만, 그것도 그녀가 찾아오지 않을 때나 가능했다. 베르니체의 감정에 변화가 없어서 계속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정을 주지 않고 이전처럼 손끝도 닿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
“……조디아크가 계획한 일이라면, 뭐를 위한 것인지 몰라도 훌륭하게 성공했군.”
“녀석은 괜찮을 테니 너부터 잘 챙겨라. 녀석이 감정을 추스르더라도 자네가 조디아크에게 지배당하면 결국 끝이야.”
“……그렇게 되면 베르니체는 기뻐하겠지. ‘아씨엔 라하브레아’는 그 아이를 사랑할 리 없으니…….”
“그건 라하브레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일 텐데.”
원할 리 없다. 매몰찬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반응인가. 베푼 감정만큼 돌려받으며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그녀의 특별한 애정은 자신에게만 향하길 바라지만……. 어쩌면 욕심이다.
“날이 밝으면 찾아가서 다시 이야기해 봐라. ……아젬 때와는 달리 지금은 우선 해야 할 일도 없지 않나.”
“나에게는 그렇지만 그 아이에게는 있지. ……찾아오면 다시 이야기할 생각이야.”
“뭐, 마음대로 해. 하지만 그때처럼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좋지 않을 거야. 참견은 여기까지 하지. 자네와 그 녀석의 관계니까. 이만 가 보지.”
엘리디부스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그가 사라져서야 침대에 몸을 누였다. 눈가가 욱신거리고 입으로는 울음이 새어 나온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늘 밤은 함께 있자고 권하는 것인데. 적어도 며칠 전에 부탁할 때 곁에 두는 것인데. 지난날들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는 늦은 것이다. 팔로 눈을 가린 채 조용히 울음을 흘리던 사내는 청승맞게도 슬픔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모습뿐이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라하브레아는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홀려 걸음을 옮겼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면 그동안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수작일 것은 알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서라도 슬픔을 잊고 싶었기에 계속해서 걷던 그는 막상 눈앞에 보인 모습에 화가 났다.
“라하브레아.”
상냥하게 그를 부르는 존재는 베르니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떨쳐내고 꿈에서 깨어나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이를 외면할 수 있을 리 없다. 푸른 빛을 흉내 낸 어둠을 노려보던 라하브레아는 그것이 흉내 낸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끌어안으려 하는 손을 붙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니체의 모습을 한 악몽이 한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비웃듯이 말했다.
“왜 그래요?”
“물러나라.”
“정말로?”
잡힌 손에서 힘을 빼고 물러나려는 환영을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미소 짓는 그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한없이 그립다. 라하브레아는 다시 자신에게 다가와 끌어안는 그 존재를 저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베르니체.”
“…….”
“베르니체. 대답해다오, 베르니체……. 네가 여기 있다고 말해 줘, 제발…….”
모습의 주인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이름을 불러보아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그녀가 아니라는 대답이지만, 끝없는 미련은 어쩔 수 없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 울렸다. 그 자신이 점차 침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가슴께까지 가라앉았을 즘, 문득 엘리디부스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감정을 다스리더라도 그가 조디아크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면 소용없다는 말.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것을 밀쳐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라하브레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빛도 깊은 물에 갇혀 헤매고, 시계도 없는 이 도시에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거리를 거니는 시민들의 행동이었다. 항상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지켜보던 라하브레아는 아직 회의가 시작하기 전인 것을 확인하고 침대로 걸어가 쓰러지듯 엎드리고 책상을 향해 손을 뻗어 오늘 그를 대신할 환영을 창조했다.
환영이 그날 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하는 것을 소리로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내쉬고 잠을 청하려 애썼다. 평소라면 기피 했을 행위지만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지쳐 회복이 필요했고, 당장 떠오른 방법은 수면 활동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자신의 의지인지 조디아크의 의지인지, 아니면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변해버린 조디아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따르며 불사르는 나방이 되고 말 테니까. 다시 그의 호흡이 느려져 갔다.
꿈은 다시 반복되었다. 하나 다른 점이라면 그 찬란한 푸른 영혼의 소유자를 흉내 낸 것을 품에 안지 않고, 안겨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눈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온갖 유혹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꿋꿋이 흘려 넘겼다.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가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에. 하지만 그 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한참을 그렇게 거짓된 푸른 빛을 응시하며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내를 깨운 것은 에메트셀크의 목소리였다.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키는 라하브레아를 못마땅하게 쳐다본 에메트셀크가 말했다.
“그렇게 안 해도 된다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웬일로 대역을 내보내고 늦잠을 자?”
“오늘은 좀 쉬고 싶었을 뿐이네.”
“네가?”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그의 입이 벌어졌다. 라하브레아는 그것을 못 본 척 고개를 끄덕였고, 에메트셀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라하브레아는 자신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금색 눈에서 눈을 돌렸다. 한참을 다물려 있던 에메트셀크의 입이 열렸다.
“혼은 멀쩡한 것 같은데.”
“난 멀쩡해. 걱정 거두고 돌아가서 쉬도록.”
“네가 쉬겠다고 하면 걱정부터 된다고.”
“쉬겠다고 해도 문제인가.”
“평소에 잘했어야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다고 대꾸하고 싶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사람을 앞에 둔 채 눕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앉아있을 기운조차 없어 몸을 다시 누인 그는 에메트셀크에게서 등을 돌리고 가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고,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조심스레 묻는 말에 라하브레아는 울컥하고 말았다.
“……엘리디부스 말로는 네가 실연당한 것 같다고 하던데 진짜였나?”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야 뭐……. ……이만 가 보지.”
대꾸하지 않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쉰 에메트셀크의 기척이 사라졌다. 이것이 유치한 행동임을 안다. 하지만, 슬픔을 잊은 채 있고 싶었기에 잠들지도 못하고 침대에 한참을 누워있던 그는 문득 몸을 일으켜 몸을 정돈한 후 그의 마력 조각을 쫓아 원초 세계로 향했다.
정신이 약해진 탓인지 에테르 멀미가 그를 괴롭혔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던 라하브레아는 그곳이 처음 보는 방인 것을 알았다. 늘 깔끔하게 청소하지만, 주로 거주하는 곳은 아닌 모양인지 불도 꺼져 있고, 침대나 테이블 따위의 간단한 가구만 놓여 있으며 오케스트리온에서는 아무 음악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라하브레아는 침대 옆 서랍장에서 그의 마력이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서랍을 열어보았다.
베르니체에게 걸어주었던 목걸이가 그 안에 놓여 있었다. 에테르가 담겨 푸른 빛을 내는 목걸이를 들어 올린 라하브레아는 침대 위에 앉은 채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황홀한 푸른 빛의 조각이 시시각각 흔들린다. 정말로 자신을 떠나버린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덮쳐 오고, 조디아크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시 목걸이를 넣어두고 창밖을 보았다. 창으로는 태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것이 아무래도 정오가 지난 듯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녀가 돌아올지 싶은 마음에 서 있던 라하브레아는 고개를 젓고 제1세계로 돌아왔다.
물론 기다리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약 그녀가 그것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싫다. 라하브레아는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에 잠긴 도시는 평소보다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끔찍한 악몽 대신 그리운 백일몽이 그를 감싸고 있다.
윙윙거리는 시민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멀거니 서 있던 그가 걸음을 옮긴 곳은 다시 그의 방이었다. 피로가 너무도 많이 쌓여 도저히 눈을 뜬 채 있을 수가 없다. 그동안 잠들지 못했던 것을 한 번에 몰아 자기라도 하는 기분이지만, 이 행동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행동임을 안다. 잠들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지금 그가 아끼는 작은 빛도, 먼 옛날부터 돌봐온 태양도 있다. 차라리 이 꿈속에 잠긴다면, 하는 생각도 들 지경이다. 그러면 아무 걱정 없이 행복 속에서 숨죽일 수 있을 텐데.
그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푸른 꽃 두 송이가 화사한 미소를 짓고 그의 손을 잡은 채 그가 그리던 아모로트를 향해 끌어당기지만, 그의 발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내 검은 가면을 쓴 아이를 흉내 낸 것은 서글픈 표정으로 그를 놓은 채 멀어지고, 곁에 선 빛의 전사를 흉내 낸 것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 아모로트의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풍경은 어둠에 가라앉았다. 고장 난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이대로 있으면 얼마나 잠들 수 있을까. 눈을 뜨면 그 아이가 돌아와 곁에 있을까. 잠든 사이 조디아크가 몸을 차지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그를 짓눌러 침전시킨다. 자신을 밀어내던 이의 이름을 애처로이 불러보지만, 들려오는 대답도, 내밀어지는 손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그 집념이 그를 끌어올렸고, 라하브레아는 그 늪에 목까지 잠겼다가 겨우 빠져나와 잠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라하브레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시민들의 이동을 보아하니 베르니체가 왔다면 이미 그에게 찾아왔을 시간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정돈한 후 그녀가 먼저 머무는 휘틀로다이우스의 국장실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 그녀는 없다. 두 사람만 테이블에 앉아 대화하다가 평소처럼 맞아줄 뿐이었다.
“그 아이는 오지 않았나 보군.”
“찾는 사람이 많을 거야. 늘 그랬잖아.”
“아니면 이 칙칙한 심해가 마음에 들지 않던지. ……농담이야. 그러니 그런 눈 하지 말라고. 자네한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겠다는 놈이 있다나 봐.”
“……그렇다면 더더욱 만나야겠군. 베르니체가 오면 곧장 내게……. 아니, 내가 찾아오지.”
“어린아이나 평범한 녀석도 아니고 원형을 셋이나 쓰러뜨린 빛의 전사인데 지나치게 걱정한다고 생각하는데. 걱정하지 마, 때가 되면 오겠지.”
한때 그렇게 기다리다가 놓치고 만 이가 있지 않은가. 그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대답도,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그때를 떠올린 듯, 에메트셀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아무리 그 혼을 가졌다고 해도 그 녀석은 너한테 꼭 돌아올 거라고. 네 녀석 상태가 조금이라도 안 좋다는 걸 알면 바로 달려가거나 도와달라고 달려오던 녀석이고, 위험한 일에 손을 뻗으려 한다고 말하면 내 멱살을 쥐고 당장 자네에게 보내달라고 하던 녀석이야. 나 참, 예전에 날 보는 자네 심정이 이랬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도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알겠네. 기다려 봐야겠군.”
“자리는 많아, 의장.”
늘 셋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을 소파는 휘틀로다이우스의 말대로 넓었다. 너무 넓어서 어색함이 느껴질 지경이었고, 멀거니 바라보던 라하브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곳이나 앉았다. 그렇게 앉고 보니 늘 베르니체가 앉던 자리의 옆자리다. 이제는 습관이 되었구나 싶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라하브레아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오래간만에 토론이나 해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두 제자는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재미있겠다거나 할 일도 없었으니 잘 됐다며 엘리디부스까지 불러왔다. 비록 셋과 그림자뿐이지만 토론이 막히는 일은 없다. 잊고 있던 즐거움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내길 한참, 마침내 결론에 이르러 토론 내용을 이데아로 기록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만족과 즐거움은 잠깐. 어두컴컴한 방이 다시 숨을 죄였다.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하다. 입속으로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하나 삼켜보아도 해소되지 않아, 마지막에 와서야 태양을 손에 쥐고 미래로 나아가는 이의 이름을 삼켰다. 하지만 갈증은 더 심해질 뿐. 라하브레아는 도저히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에 그녀를 보러 가겠다는 편지 하나만 남겨둔 채 원초 세계로 왔다.
목걸이를 쫓아가는 것은 의미 없다. 그렇다면 어찌 그녀를 찾아야 하나. 막막함에 기억을 더듬던 라하브레아는 그녀의 집을 떠올렸다. 그래, 그곳이라면. 그림자에 녹아든 채 잠시 집중하고 눈을 뜨니, 꽃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꽃들이 피어 관리되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지나 제일 먼저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본래 하나의 공간이었을 곳에 벽을 설치해 만든 방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들어간 곳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그곳에 베르니체가 잠들어 있다. 어찌나 곤히 자는지, 보는 라하브레아마저 잠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침대에 펼쳐진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환상이 아닌 현실의 그녀다. 품에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머리카락만 한없이 만지던 라하브레아는 그녀가 뒤척이자 잠시 손을 떼었다. 그저 잠꼬대였던지 눈을 뜨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부드러운 볼을 손으로 감싸고 어루만지며, 그는 잠깐 보고 가는 것뿐이라며, 악몽을 꾸지 않는지 보다가 가는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해 가며 곤히 잠든 이의 곁을 지켰다.
평화에 잠긴 작은 빛은 짙은 어둠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피곤했던 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코와 입에 손을 대 호흡을 확인해 가며 베르니체를 지켜보던 라하브레아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창문 너머에서 여명이 비추고, 설상가상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마저 들린다. 라하브레아는 급히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뒤늦게야 초월하는 힘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그는 베르니체의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곤 대답이 없으니 멋대로 열고 들어온 뒤다.
“베르니체 님, 주무세요?”
고개를 빼꼼 내민 채 그녀를 본 자는 분홍 머리의 남성 미코테였다. 그는 라하브레아가 그랬듯 코와 입 근처에 손을 대서 그녀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작은 서랍 위에 올려두고 방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1층으로 내려가고, 물에 잠긴 듯한 소리가 집을 가득 채우도록 오케스트리온을 틀고 집을 나가는 것까지 확실하게 듣고 나서야 다시 그림자 밖으로 나온 라하브레아는 베르니체의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지켜보다가 방을 나와 집을 둘러보았다.
엘리디부스가 주었던 검과 방패가 욕실과 방 사이의 작은 공간에 장식처럼 걸려 있고, 그 아래에 빛의 전사가 되었던 엘리디부스를 형상화한 우상과 변신한 에메트셀크를 형상화한 듯한 우상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고대인의 모습을 한 움직이지 않는 솜인형까지. 아직 멀쩡히 존재하는 이들도 사라진 이들처럼 대하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이들이기에 그리 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은 있으나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워버린 것인가? 기억조차 하기 싫어서?
‘왜 이런 것으로 슬픔을 느끼는 거지? 이럴 시간에 계율왕의 강림을 서둘러야……. 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조디아크의 권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물론 그 속에 잠든 동포들을 되돌려받기 위해서는 조디아크를 봉인에서 풀어 통합된 세계의 생명체를 바쳐야만 하지만, 꼭 그 방법이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오히려 다른 방법이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희망인 빛의 전사를 조디아크가 해치도록 둘 수 없다.
라하브레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고대인형을 집어 들었다. 동포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그의 선택으로 긴 잠이 든 동포들을 깨우기 위해. 돌아온 그들만큼은 조디아크의 손아귀에 잡히게 둘 수 없다. 자유 의지를 빼앗기고 신도가 되는 것은 위원회로 족하다. 낙원을 되찾고자 하던 그들이 이 선택을 알면 책망할지도 모르나, 그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벌이다.
손에 들었던 인형을 다시 조심스레 내려둔 라하브레아는 그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쳤다. 그때 다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흠칫하고 몸을 틀어 그곳을 보니, 그 발소리의 주인은 베르니체가 늘 데리고 다니던 작은 고대인형이었다. 신도화 치료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던가. 그가 말해 주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몸을 낮추고 인형을 바라보니 인형이 작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위로해 주는 것이냐. ……베르니체를 잘 돌봐 주거라. 내가 함께하지 못하니, 네게 부탁하마.”
인형이 작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 다시 방으로 이끈다. 혹시나 해 문을 열어주고 물러서니, 그것은 오히려 라하브레아에게 들어가지 않느냐고 묻듯 빤히 바라보았다.
“……베르니체가 날 보면 싫어할 거야.”
그것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그에게 손짓한 것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의자를 가리켰다.
“앉혀주길 원하느냐. ……나보고 앉으라고? 아니. 이만 돌아가 봐야 하니, 네가 거기 있거라.”
당황한 인형이 그의 로브 자락을 잡은 채 잠든 베르니체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폴짝대며 제자리에서 뛰는 것을 붙잡아 의자에 앉히니, 그것이 손을 놓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의 사역마들도 유독 그가 그녀에게서 떠나려 하는 것을 싫어했지. 아젬 본인도 곤란해하던 날을 떠올리고 짧은 웃음을 흘린 라하브레아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아 만족한 듯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간 고대인형에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꺼냈다.
“네 주인의 원형이 만든 사역마들도 종종 너와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특히 녀석이 고민이 있을 때 더욱 그랬어.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는 것이 사명이었던 자이지만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었거든. 그때마다 날 찾아낸 녀석의 사역마들이 나를 그 녀석에게 이끌거나, 녀석과 마주치면 나를 붙잡아 두려 했지. ……그런데 너도 그 아이의 사역마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 변했더라도 결국, 자신이라는 건가……. ……베르니체가 들으면 서운해하겠군.”
창밖으로 밝아오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진 그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젠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시나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에게 남은 조디아크의 의지인지, 아니면 그것의 의지라고 핑계 삼고 싶은 자신의 의지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라하브레아는 한숨을 내쉬고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눈을 감은 그대로 한참 멍하니 있던 그는 천이 쓸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림자 밖을 보았다. 베르니체가 깨어나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잠들었던 것인가 싶어 그녀가 누운 침대를 향해 시선을 주며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잠에 취한 채 무언가 웅얼거리던 그녀는 겨우 떨치고 일어나 서랍장 위의 쪽지를 한참 보다가 손을 뻗어 내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질질 끌며 1층으로 내려갔다.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어딘가 아픈 것이 아닐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1층에 가서도 한참을 멀거니 서 있던 그녀는 집이 완전히 텅 빈 것을 확인하더니 소파로 걸어가 늘어졌다. 아모로트에서도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어딘가 아프거나 정말 지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라하브레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죽은 자의 걸음에는 소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앉은 소파가 놓인 카펫 위에 서니 저도 모르게 에테르로 몸을 감았고, 그에 따라 물질화된 혼에서 발소리가 났다. 아차 싶어도 이미 늦었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도 감각은 살아있던지, 베르니체가 잔뜩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휴가 다녀오라고 했잖아. 뭐 두고 간 거라도 있어?”
“미안하구나. 네가 생각한 사람은 아니야.”
목소리를 흉내 내려면 흉내 낼 수야 있지만, 지금의 베르니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성의 없는 흉내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어리숙한 모험가가 아니었다. 금방 눈치챌 것이고, 더군다나 동료의 육체를 빼앗았을 때처럼 기억을 보지 못한 지금이라면 첫 마디에 들킬 것을 알기에 할 수 없이 정체를 밝히니 베르니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돌아보았다.
“라……. ……잠시만요. 커튼 좀 칠게요.”
“되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 위치이지 않으냐.”
“그러면 차라도 들겠어요?”
“네게 필요하다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차와 쿠키를 내어오는 모습은 담담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라하브레아는 역시 괜히 찾아왔다는 낭패감에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아무 일 없다는 양 시선을 창 너머로 두었다. 아침의 햇빛이 창문으로 곧장 들어오는 것이, 태양의 길을 따라 창문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긴장을 한숨으로 흩어냈다.
“휴식을 취하기 좋구나. 빛도 잘 드는 장소이니.”
“아무래도요. 햇볕을 쬐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노곤해지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그리고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듯 한참을 침묵하며 시선을 외면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라하브레아는 곧 그녀가 말을 걸자, 잔을 들으며 시선을 투명한 붉은 액체에 두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겠다고 말해놓고서 오지 않아 걱정되어 와 보았다. 목걸이를 다른 곳에 두었더구나.”
“아, 그건…….”
“탓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뒤엉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괜한 잔 손잡이만 문지르며 말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처음 라하브레아 좌에 앉아 사람들 앞에 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씁쓸한 미소를 잔으로 가리며 목을 축인 그는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그동안 아모로트에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었다고 들었다만, 어제는 편히 잤느냐.”
“푹 잤어요. 그간의 불면은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사실 일어난 것도 별로 안 됐고요.”
“다행이구나.”
다시 침묵이 돌았다. 분명 목을 조이는 것은 없는데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가면을 벗고 바짝 마르는 입술을 축이고 있자니 고개를 돌린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라하브레아.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내게 정을 주지 않는 게 맞아요.”
“……정말로 넌 내가 널 기억하지 않길 바라느냐.”
“그래요.”
“또 시선을 피하는구나.”
끓어오르는 감정을 더는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그 감정을 그대로 토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잔을 내려두며 어지럽게 머리를 채우는 말을 대충 정리하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느냐. 사랑을 확신하고 싶거든 차라리 그리 물어보아라. 몇 번이고 내 감정을 너에게 답해주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쌓이고 쌓인 거부감이라면 네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네가 익숙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건네주마. 하지만 네게 자격이 없다는 말로 네게서 모든 것을 밀어내지 말아라. 누가 네게 그런 가혹한 것을 강요하느냐. 적어도 아모로트에서는 네가 바라는 것을 모두 손에 쥐어도 된다. 스스로 그 도시에서 욕심을 허락하는 것조차 버겁다면 내가 허락하마. 그러니……. 제발 네게 좀 더 너그러워져다오.”
그러나 슬픔만큼은 참아낼 수 없었다. 타이르는 말에 점차 그 감정이 섞여 목소리가 떨리고, 결국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려 마른세수를 해 감정을 다스렸다.
“그 도시에서만큼은 영웅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바로 너다. 해서 네가 지나치게 그 도시에 집착할 때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오롯이 베르니체라는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느냐. 무엇보다…… 네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어찌하라는 것이냐. 네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내게 마음을 주었듯, 나 역시 이전의 나로 돌아가기 힘들 만큼 네게 마음을 주었다. 이 마음은, 감정을 네게 주지 말라고 하면 나는 어찌해야 하느냐…….”
“……라하브레아.”
“이 마음을 거두라던가, 착각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이미 너도 알지 않으냐. 너도, 나도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병든 사랑이라 한다면 그리 해도 좋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이니, 네 말을 빌려 그 짧은 찰나 동안 내게 너를 허락해다오. 부디 내게서 너를 빼앗지 말아다오, 베르니체…….”
네가 바라는 것이 나의 파멸이라면 참으로 잔인한 성공이로구나. 그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결국, 흘러내리고 마는 눈물을 흐르게 두며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머리를 움켜쥐는 모습 뒤로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역시 네 놈 짓이었구나, 조디아크. 내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감히 그 아이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괴롭혔느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뻗으니, 그녀가 사나운 표정과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표정이 진심인지, 혹은 파고드는 어둠으로 인한 고통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끌어안은 채 그녀를 삼키려는 어둠을 바라보며 비통한 심정으로 속삭였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있을 테다. 푹 쉬고 난 뒤에도 네가 여전히 뜻을 바꾸지 않겠다면, 나 역시 조금씩 이 마음을 정리해 보마.”
밀어내려는 힘을 버티며 품에 끌어안은 채 변함이 없다면 이별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면서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깊게 파고든 존재를 서서히 비워내야 한다는 것이 벌써 괴로웠다. 그 괴로움이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비켜 달라면서도 잠에 빠져든 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라하브레아는 고개를 들어 짙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그녀에게 새어들었을 어둠을 다시 제 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머리카락이 다시 검게 물들어 갔다. 거울로 검게 물든 새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그는 뒤에서 들리는 뒤척이는 소리에 그녀에게 익숙할 형태로 모습을 바꾸고 의자에 앉았다. 상체를 일으켜 가장 먼저 어둠이 내린 창밖을 보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라하브레아를 보더니 탄식했다.
“라하브레아. 당신……. 머리카락이…….”
“신경 쓰지 말아라. 괜찮다.”
검게 변한 금빛 머리카락을 손에 얹은 채 울상 짓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쓰렸다. 위험했던 것은 본인이면서 통제할 수 있는 이를 걱정하다니. 물론 자신이 그에게 지배당했던 시기가 길었기에 걱정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는 괜찮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믿어줄까.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몸도 나빠졌던 모양인지 베르니체의 하얀 손이 너무나 차가웠다.
“난 지지 않아. 하지만 그것이 네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면, 난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어. 베르니체, 그런데도 내게서 너를 빼앗을 테냐. 네가 있어야만 그것이 건네는 달콤한 거짓에 일부러 속을 필요가 없어. 그것이 주는 거짓을 네가 진심으로 건넬 텐데 왜 속아주어야 하느냐.”
“……후회할 거예요.”
“사람을 낙원으로 삼은 이상 이미 정해진 일이다.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어.”
“그럴 때가 가장 빠를 텐데도요.”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주자, 손에 기대는 모습을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이제야 머리가 맑아진 것일까. 자신과 있기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이라면 거리를 두는 것이 맞지만, 차마 놓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후회하더라도 찰나에 충실하게 해다오.”
그녀를 괴롭게 했다는 사실에 영원히 후회하고 벌을 받더라도 이 이기심을 놓고 싶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을 살 존재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 모든 감정을 담아 속삭이자, 양 뺨에 찬 손이 닿고 그를 그녀에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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