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벨] 병든 낙원 1
사람을 낙원 삼은 자들은 병들고 만다
라하브레아 X 빛의 전사(여) 포함를 포함한 고대인 드림글입니다.
이후 공개 되는 공식 설정 및 그에 따라 수정되는 드림 설정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5.4~5.5 시점
※ 글 내에서 언급되는 조디아크는 변질된 라하브레아의 이면이나, 해당 연성 시점에서는 조디아크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효월의 종언 8인 레이드 만마전 판데모니움: 천옥 이후입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라하브레아의 외관은 고대 시절이 아닌 창천 당시 아씨엔 외관으로, 약 180 중반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간혹 꾸는 꿈이 있다. 고대인들 사이에 섞인 라하브레아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 그를 부르려고 하면 입을 틀어막는 수없이 검은 손. 라하브레아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껴 손을 뻗으면, 그는 보지 못한 것인지 다시 돌아서서 동포들과 사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목소리였다.
“어차피 너 따위는 찰나의 유희일 뿐이야. 정말 진심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네 사랑놀이에 어울려줄 뿐이지.”
‘아니라고.’
“애초에 자신을 죽이고 동포를 죽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 말에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면, 곧 그 사람에게 너는 그저 장난감일 뿐이라며 비웃는 소리가 가득 차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러면 늘 곁에서 쉬던 휘틀로다이우스가 놀라서 돌아보고, 에메트셀크는 잠 좀 자자며 짜증을 냈다가도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아로마 향을 방에 가득 채워 주었다. 그러한 악몽들이 연속되니 결국 베르니체는 눈을 떴을 때 그가 곁에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잠들기를 바랐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미안하다. 내 일이 네 수면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아. 그래도 괜찮거든 이곳에서 자거라. 네가 잠들면 휘틀로다이우스를 불러주마.”
그렇게 거절당한 날이면 악몽은 더 심했다. 휘틀로다이우스의 말로는 스스로 목을 조르며 발버둥을 쳤다고 하고, 물에 비친 모습을 보면 늘 손자국이 나 있었다. 물론 사람들과 만날 즘이 되면 사라지거나 잘 보이지 않았기에 크게 신경 쓸만한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그런 일이 반복되니, 아모로트에 있어서 생기는 일인가 싶어 며칠간 크리스타리움이나 원초 세계의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보았지만, 다를 것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꿀 악몽이라면 차라리 아모로트에 있자. 그런 생각으로 또 아모로트로 와서 라하브레아와 있다가 잠들었던 그녀는 또 새벽에 깨어났다. 분명 라하브레아와 있었을 텐데, 깨어난 곳은 그의 방이 아닌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가 함께 쓰는 방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잠들자 마자 휘틀로다이우스를 불러 데려가게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뭍으로 나와 별이 내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꿈을 되새기며 별을 헤아리던 그녀는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가 곁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엘리디부스.”
“오해하지 마라. 휘틀로다이우스가 부탁해서 온 거니까. ……빛의 가호도 멀쩡하고, 조디아크의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배려 고마워. 하지만 난 괜찮아.”
“네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이지. 너 스스로 속을 만큼. 난 네 생각보다 너에 관해 무지하지 않아.”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바다로 눈을 돌리니, 그것도 거짓말이 들통난 뒤 그녀의 버릇이라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한 엘리디부스가 휘틀로다이우스의 부탁은 들어주었으니 가보겠다며 사라졌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손등으로 문지르곤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소름 끼칠 만큼 차분했다. 어쩌면 망가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만큼은 편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다정한 은신처가 그녀를 끌어안지만, 지금은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잠시 마카렌세스 광장에서 서성이던 베르니체는 자신도 모르게 대의사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어쩌면 악몽으로 병든 정신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어차피 그가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간의 감정이 거짓이라도 무척 행복했으니까. 금빛 조명에 물든 홀을 가로질러 그가 늘 머무는 방의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며 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하브레아.”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스러운 이름을 부르니 그의 입가가 굳었다. 큰 손이 어깨에 닿았지만, 그녀 스스로가 망가진 탓인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겹쳐 잡은 베르니체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애써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에게 고백한 날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너를 사랑할 것을 바라지 않겠다 하였지.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냐.”
“다시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가면 아래에 가려진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가려지지 못한 입술이 굳었다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망가져 버린 이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 없다.
“당신의 삶에 비해 내 삶은 너무나 찰나고, 내 걸음이 멈추면 난 혼조차 남지 않아요. 물론 내가 당신의 기억에 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만에 하나 기억에 남을 것을 막으려면 당신의 마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베르니체.”
“물론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이미 당신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내가 당신의 정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이지.”
“베르니체.”
남자가 다급하게 어깨를 움켜쥐어도 잡히는 것은 육체뿐. 홀로 정리된 마음에 손이 닿지 않았다. 베르니체 스스로는 덤덤하게, 그러나 보는 이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욕심 하나만 들어줘요. 쓸모없는 장난감 정도로만 여겨주겠어요? 잊어버리기엔 그것만큼 적절한 것도 없죠.”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왜 나는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베르니체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의 너머만 바라보았다. 잡힌 어깨가 조금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차라도 내려줄 테니 안에서 차분히 이야기하자는 말에 그의 손을 떼어낸 베르니체는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신을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그게 맞아요.”
“베니.”
“……나한테 그런 애칭은 과분해요. 라하브레아.”
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베르니체 역시 속이 뒤틀리는 것이, 아무래도 혼란스럽기는 그도, 자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겠거니 하며 따끔거리는 팔을 문지르다가 뒷걸음질 쳤다.
“가볼게요.”
“내가, 네게…… 큰 실수를 했느냐.”
“아뇨. 당신은 아무 실수도 안 했어요.”
“그러면 왜…….”
“오해하지 말아요. 이별을 말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관계는 너무 잘못됐어요. 그걸 바로잡자는 것뿐이에요. 원래 그래야 했잖아요.”
일방적인 애정이어야 했다. 바라지 않던 애정에 너무 취해버린 자신에게 라하브레아가 어울려 준 것뿐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느새 붙잡힌 팔이 욱신거렸다.
“그렇다면, 거부당해 갈 곳 없는 마음은 어디로 향해야 하느냐.”
“라하브레아. 억지로 어울려 주느라 연기할 필요 없어요.”
“네 귀에는, 지금 내가…… 거짓을 고하는 것으로 들리느냐. 날 보고 답하거라. 왜 내 눈을 피하는 것이냐.”
“……내 분수를 알 뿐이에요. 당신은 내게 과분했어요. 내가 너무 욕심을 낸 거죠. 당신이 잠시 눈을 감고 뜨면 끊어질 목숨으로 감히 당신을 탐낸 거였어요.”
“이런 식으로 늘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거부해 왔느냐.”
목소리는 담담하나, 팔을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베르니체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오른손으로 그의 왼손을 잡았고, 미소 지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짓씹는 그의 입가를 왼손 엄지로 어루만졌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감히 받아서도 안 되죠. 감히 욕심내서도 안 돼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 난 세상을 우선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물으마. 거절당해 갈 곳 없는 마음은…… 어디로, 누구에게 향해야 하느냐…….”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베르니체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라하브레아가 그 손을 움켜쥐었다.
“네 말처럼 넌 내 삶에서 찰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느냐.”
“나 때문에 이게요름도 죽고, 당신도, 에메트셀크와 엘리디부스도 죽었어요. 당신들이 사랑하던 세계를 되찾을 기회도 전부 짓밟혔다고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감히……!”
“사람의 마음은, 감정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방으로 가자.”
언성을 높인 것에 스스로 놀랐던지, 라하브레아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것은 베르니체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다시 그에게서 물러나려는 것을 붙잡은 라하브레아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그림자를 끌어올렸다가 풀었다. 넓은 복도 대신 방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놔 주세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거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니, 대답을 재촉하듯 그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지금도 그에게서 도망쳐 아모로트를 떠나고 싶은데 약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니 라하브레아가 말했다.
“……내가 ‘라하브레아’로서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보았을 때. 그날, 그 아이도 너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한, 그런 표정 말이지. 그리고 그 아이는 아모로트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도, 내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겠다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다오, 베르니체. 내가 그 아이에게 그랬듯 너에게마저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게 하지 말아다오.”
베르니체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거절했어도 무시했을지 몰라도 라하브레아가 애써 목소리를 내었다.
“네 행동은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너를 위한 것이냐. 너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네 뜻대로 하겠다. 하지만 네 모든 말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거두어다오.”
“우리 둘을 위한 거예요. 나는 순식간에 사라질 테고, 당신은 나보다도 오래 존재할 테니까. 내 삶이 끝나면 나는 기억조차 남지 못해요. 알잖아요, 라하브레아. 내가 무엇으로, 누구의 혼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마음을 이제 와 끊어내라는 것이 가당하더냐? 네 삶이 짧기에 오히려 손에 쥐고 놓고 싶지 않아 하는 나는 보이지 않느냐?”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놓치고 말 생명이에요. 차라리 더 늦기 전에 놔 버리라고요! 어렵지 않잖아요, 라하브레아. 당신을 위해서는 이게 맞아요. 당신은 내게 마음을 줘선 안 됐다고요! 그냥 유희이고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된 거라고요!”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려 떨어지고, 베르니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다. 정리되기 전까지는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홀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앞으로도 그러겠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찰나도 되지 않을 시간이에요. 이 찰나의 감정에…… 당신이 억지로 어울려 줄 필요 없어요. 내일 봐요.”
“……지금은 혼란스러워 보이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아뇨.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잊지 마요, 라하브레아. 내게 정을 주지 말아요. 그게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더 이상 내 감정을 받아주지 않아도 돼요. 난 그래도 상관없어요.”
“올 때까지 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아라.”
에테르의 흐름을 따라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와 펜던트 거주관의 침대에 엎어졌다. 분명 개운해야 하는데 속이 울렁거리기만 했다.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도 모르게 날이 밝고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크리스타리움을 돌며 잔일을 도왔고, 원초 세계에서 각지를 돌며 다친 이들을 치료해주고 힘이 필요한 곳은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러니 아모로트에서 있었던 일은 자연스레 떠올릴 수 없었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숨 돌릴 틈이 생겨 석양이 잘 보이는 장소에 앉아 멍하니 불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 빛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눈을 돌릴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이다. 순간 라하브레아와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그가 자신과 어울려 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덮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하늘을 바라보길 한참, 점차 하늘이 어두운 푸름에 물들다가 곳곳에 아주 작은 등불을 밝히고, 별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모로트로 가야 할 시간인 것을 알지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베르니체는 그대로 개인집으로 와선 씻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뻗어 목 주위를 더듬거렸다. 라하브레아가 준 목걸이는 다른 도시의 모험가 거주지에 마련한 아파트에 두고 왔기에 손에 걸리는 것은 없다. 허전한 마음에 계속 목을 어루만지던 베르니체는 이내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집에서 쉬자. 그 생각만이 간절했다. 이런 상태에서 적을 잘못 만나면 정신 공격을 당할 수도 있고, 보나 마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니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침대에 엎어진 채 손을 뻗어서 집사 초인종을 울리니 곧 미코테 집사가 뛰어왔다.
“부르셨어요?”
“날이 밝거든 일주일만 휴가 다녀와. 당분간 혼자 쉬고 싶어……. 다른 사람들한테도 전해줘…….”
“앗, 네. 알겠습니다.”
가보라는 말 대신 손만 휘적대니 정말 피곤해 보인다며 올 때 좋은 차를 가져오겠다는 이에게 웅얼거리며 고맙다고 대꾸한 그녀는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은 놀라울 만큼 평화로웠다. 그간의 악몽은 모두 그녀의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었다. 라하브레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다시 차분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니 침대 옆에 둔 서랍장에 꼭 식사를 챙기라는 집사의 편지가 놓여있었지만, 입맛이 영 돌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눈이 아플 지경인 것이 아무래도 정오쯤 되거나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늦잠 자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며 1층으로 내려간 베르니체는 창가 소파에 털썩 앉고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집사가 틀어두고 간 것인지 오케스트리온에서부터 깊은 물 속에 있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제1세계의 심해도시가 그리워졌다. 어쩌면 그곳을 너무 많이 사랑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찰나 카펫 위로 발소리가 들렸다.
“휴가 다녀오라고 했잖아. 뭐 두고 간 거라도 있어?”
“미안하구나. 네가 생각한 사람은 아니야.”
의외의 목소리에 놀라 몸을 틀어 돌아보니, 라하브레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붉은 가면으로 눈을 가렸지만, 입가는 가려지지 않아 굳은 입매가 선명하게 보였다.
“라……. ……잠시만요. 커튼 좀 칠게요.”
“되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 위치이지 않으냐.”
“그러면 차라도 들겠어요?”
“네게 필요하다면.”
주방으로 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내고, 물을 받아 끓였다. 마침 집사가 구워둔 쿠키도 있겠다, 물이 끓은 것을 확인하고 찻잎을 띄워 쟁반에 들고 가니, 바깥을 내다보던 사내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휴식을 취하기 좋구나. 빛도 잘 드는 장소이니.”
“아무래도요. 햇볕을 쬐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노곤해지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어떻게 말해야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예전에는 어떻게 말을 건넸더라.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꺼냈다.
“무슨 일 있어요?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겠다고 말해놓고서 오지 않아 걱정되어 와 보았다. 목걸이를 다른 곳에 두었더구나.”
“아, 그건…….”
“탓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베르니체는 그가 그랬듯 뒷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시간이 영원이었기에 그녀를 기다렸다면, 그녀는 찰나의 숨을 가졌기에 그가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라하브레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잔 손잡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러다 결국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겠는지 목을 축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그동안 아모로트에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었다고 들었다만, 어제는 편히 잤느냐.”
“푹 잤어요. 그간의 불면은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사실 일어난 것도 별로 안 됐고요.”
“다행이구나.”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베르니체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가 먼저 말을 건넸다.
“라하브레아.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내게 정을 주지 않는 게 맞아요.”
“……정말로 넌 내가 널 기억하지 않길 바라느냐.”
“그래요.”
“또 시선을 피하는구나.”
낮은 목소리에 흠칫 떨었던 베르니체는 고개를 천천히 그에게 돌렸다. 어느덧 가면은 테이블에 놓여있고,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베르니체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들이쉬니 잔을 내려놓은 그가 그녀보다 빨리 말을 꺼냈다.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느냐. 사랑을 확신하고 싶거든 차라리 그리 물어보아라. 몇 번이고 내 감정을 너에게 답해주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쌓이고 쌓인 거부감이라면 네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네가 익숙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건네주마. 하지만 네게 자격이 없다는 말로 네게서 모든 것을 밀어내지 말아라. 누가 네게 그런 가혹한 것을 강요하느냐. 적어도 아모로트에서는 네가 바라는 것을 모두 손에 쥐어도 된다. 스스로 그 도시에서 욕심을 허락하는 것조차 버겁다면 내가 허락하마. 그러니……. 제발 네게 좀 더 너그러워져다오.”
단호했던 목소리가 갈수록 흔들리고, 끝내 물기가 어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자 담담한 표정과 달리 눈가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라하브레아가 얼굴을 감싸 마른세수를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도시에서만큼은 영웅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바로 너다. 해서 네가 지나치게 그 도시에 집착할 때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오롯이 베르니체라는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느냐. 무엇보다…… 네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어찌하라는 것이냐. 네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내게 마음을 주었듯, 나 역시 이전의 나로 돌아가기 힘들 만큼 네게 마음을 주었다. 이 마음은, 감정을 네게 주지 말라고 하면 나는 어찌해야 하느냐…….”
“……라하브레아.”
“이 마음을 거두라던가, 착각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이미 너도 알지 않으냐. 너도, 나도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병든 사랑이라 한다면 그리 해도 좋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니, 네 말을 빌려 그 짧은 찰나 동안 내게 너를 허락해다오. 부디 내게서 너를 빼앗지 말아다오, 베르니체…….”
쥐고 있던 제 손을 더 꽉 쥐었다. 시선은 갈 곳을 잃어 방안을 떠돌고, 속은 소용돌이가 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그와 자신의 감정이 같을 리 없다는 말과 그의 말들이 충돌하며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자니, 라하브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 놈 짓이었구나, 조디아크. 내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감히 그 아이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괴롭혔느냐.”
라하브레아가 일어나 다가와 손을 뻗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외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잠시 지을 뿐, 이내 침착하게 잠깐이면 된다고 그녀를 붙잡은 라하브레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있을 테다. 푹 쉬고 난 뒤에도 네가 여전히 뜻을 바꾸지 않겠다면, 나 역시 조금씩 이 마음을 정리해 보마.”
조금은 비통에 차 있나. 머릿속이 타는 것만 같은 두통과 멀어지는 의식을 애써 붙잡으며 그에게서 멀어지려 해보아도 힘에 부쳤다. 결국, 완전히 그에게 붙잡힌 채 애처롭게 비켜 달라고 하는 것을 끝으로 기억이 끊어졌다.
마치 마비가 온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힘쓰다가 손가락을 겨우 까딱이는 것을 시작으로 몸의 감각이 다시 돌아와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고, 창밖엔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라하브레아가 왔던 것은 꿈이었던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침대 옆에 그가 앉아 있었다.
“라하브레아. 당신…… 머리카락이…….”
“신경 쓰지 말아라. 괜찮다.”
금빛을 삼키는 어둠이 더욱 높이 올라왔다. 탄식을 뱉으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손에 얹으니, 라하브레아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지지 않아. 하지만 그것이 네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면, 난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어. 베르니체, 그런데도 내게서 너를 빼앗을 테냐. 네가 있어야만 그것이 건네는 달콤한 거짓에 일부러 속을 필요가 없어. 그것이 주는 거짓을 네가 진심으로 건넬 텐데 왜 속아주어야 하느냐.”
“……후회할 거예요.”
“사람을 낙원으로 삼은 이상 이미 정해진 일이다.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어.”
“그럴 때가 가장 빠를 텐데도요.”
식은땀을 닦아주는 서늘한 손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영원히 후회하더라도 찰나에 충실하게 해달라는 속삭임에 눈을 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이라면, 충실해도 좋으리라. 베르니체는 조심스레 그의 뺨을 감싸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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