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빛전수정]소문
-파이널판타지14 메인스토리 5.0스포 (*5.0당시에 쓴 글이라 설정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리버스로 소비하셔도 무관합니다. 빛전의 성별이나 종족이 특정되지 않습니다
[빛전수정] 소문
by. 솔방울새
(*말리카 큰우물~굴그화산 사이의 시점)
"정말 죄송합니다, 수정공. 저희의 대처가 느렸습니다."
"상황은 이해해. 근거 없는 소문이 이렇게까지 빨리 퍼지는 것은 크리스타리움 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니 다들 놀랐을 테지.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대처해 바로잡는 수밖에."
침통한 얼굴로 고개 숙인 라이나를 달래듯 말하는 수정공은 정작 본인이 소문의 당사자임에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늘 그렇듯 깊게 눌러 쓴 후드 아래 드러난 입가는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1세계에 남은 마지막 저항의 도시, 크리스타리움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 소문인지라 혹여 그들의 지도자를 동요시키지는 않을지 염려했던 라이나는 그에 내심 안도했다. 어둠의 전사에 대한 수정공의 태도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그가 그토록 순수한 진심을 내보일 정도인데, 영웅을 향한 감정의 본질을 의심당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함부로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수정공과 어둠의 전사는 사실 연인 관계라더라.'
며칠 전부터 나타난 시작한 밑도 끝도 없고, 출처조차 모를 소리건만 주민들 사이에서도 조용히 알음알음 퍼진 탓에 화음 시장을 담당하는 브라기에게까지 닿은 뒤에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둠의 전사가 누구인지조차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있건만 어디서 애정사에 대한 말이 나왔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그의 정체야 홀민스터에서 활약한 영웅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과, 그 발길이 닿는 지역마다 밤을 되찾는단 사실만 놓고 보아도 암묵적인 사실이 되어 있다지만 이런 낭설은 또 전혀 다른 얘기가 아닌가. 지극히 사적이고 예민한 문제였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 수정공은 괜찮으십니까?"
그래서 라이나는 조심스럽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수정공은 그들의 존경하는 지도자이면서, 그녀에게는 가족이었고, 소중한 할아버지였으니. 성견의 방 한가운데 홀장을 쥐고 굳건하게 선 그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까지 라이나는 세심히 눈에 담았다.
"나야 그저 영웅에게 몸 둘 바 없이 미안할 뿐이로군. 100년도 넘게 산 노인과 엮여 염문설이라니…. 자랑스러운 크리스타리움의 사람들이 밤을 되찾아 준 영웅에게 이런 실례를 범할 줄은 몰랐어."
"…그렇군요."
역시 화나셨구나. 생각보다 더 분노하고, 실망하고 있음이 느껴져 라이나는 내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그가 동요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수정공을 그녀 역시 한때는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마자마자 수정공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는 것을 본 뒤에야 그 생각을 버리게 되었지만.
'내 나이를 생각해주었으면 싶구나. 나 역시 너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지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지.'
아무리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도 수정공은 자신을 노인이라 생각했다. 같은 고향에서 왔다는 영웅을 만난 뒤로는 많이 풀어지셨지만, 그 때 이후로 세월이 더 흘렀으니 뿌리에 박힌 생각은 더 굳건해지면 굳건해졌지 뭉그러지지는 않았으리라. 마음 깊이 묻어둔 수정공의 진심이 어떻든 간에. 설령 정말 그가 영웅을 향한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하여도 쉬이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둠의 전사는 손녀라 못 박힌 라이나와 나이 차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니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주민들에겐 사실이 아니라 분명히 밝힐 생각이다. 하필 이런 중대한 시기에, 영웅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군. 지난밤 돌아온 그 사람이 헤매는 계단 식당에서 식사했다니 영웅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웅이 언제 돌아와 어디서 식사를 했는지까지는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수정공의 등 뒤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거울에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며 라이나는 짧게 경례했다.
한편 중용의 공예관,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인 어둠의 전사는 별생각 없이 무기를 정비하러 나왔다가 엘레젠 쌍둥이 사이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저기 당신~ 이대로 넘어갈 생각인 거야? 어쩔 생각이야? 이런 소문엔 제대로 대처하는 게 좋다고!"
"알리제, 왜 네가 그렇게 흥분했는진 모르겠지만 그가 난처해하고 있잖아. 하지만 이런 소문을 들은 소감은 나도 궁금하군. 혹시 물어도 되겠나?"
"네가 묻는다고 저 사람이 말해주겠어? 야슈톨라 씨가 벌써 엄청 놀리고 갔지만 여태 묵묵부답이었다구!"
어른들이 한바탕하고 지나가니 이번에는 청소년들 차례였다. 알리제와 알피노, 그들 뒤에서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봐 오는 린의 시선까지 느끼며 영웅은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제발 둘 다 조용히 좀…아니, 카트리스 씨. 그만 웃어주시겠어요? 아침부터 난리라니까요?"
곤란한 얼굴로 쌍둥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하소연했지만 공예관 관장인 카트리스는 그저 웃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어둠의 전사의 정체부터가 분명 비밀사항이었건만, 아침부터 들려온 소문에 새벽 사람들부터가 홀랑 뒤집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마주친 주민들은 죄다 정체를 확신하게 되어버렸다.
"크리스타리움에 이런 열애설이 퍼진 건 처음이야. 아마 근 100년간 이런 적은 없었을 테니 수정공도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수정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데? 여태 한 번도 부정을 안 했잖아."
"……. "
"난 사실 여태 별 헛소문이 다 있다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당신 반응을 보니 오히려 흥미가 생겨버렸어. 솔직히 불쾌한 건 아닌 거지?"
"불쾌한 건 절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수정공이 유독 영웅에게 지극정성인 것을 느낀 이들로부터 우스갯소리처럼 시작된 말들일 뿐이다. 100년간 누구도 입주시키지 않고 조용히 가꾸던 거주관의 방을 그에게 주었다더라, 수정공이 샌드위치 보따리를 들고 그 방을 찾아가는 걸 누가 봤다더라, 그가 다쳐왔다는 소식에 성견의 방에서 뛰쳐나왔고, 그가 멀리 떠났다 돌아온 날이면 늦은 밤중에 홀로 방을 찾아갔다더라.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섞였지만 모두 사실이기도 했다. 달리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그랬을 테고, 마지막도 그저 영웅의 빛이 흘러넘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지만. 게다가 대다수의 주민은 그들의 지도자와 영웅을 존중해 이런 사적인 소문을 주변에 말하고 다닌 사람들이 욕을 먹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떠올리자니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이의 모습이 머리를 가득 채워버렸다. 영웅을 향해 그가 내보이던 순수한 존중, 지도자로서의 현명함과 인망, 먹을 것을 챙겨주고 몸 상태를 걱정해주던 세심함과 다정함까지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연로한 사람다운 초연한 그의 어조 속에는 때때로 뜨거운 열정이 섞여들어 덩달아 가슴이 울렁였고, 노래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것만 같은 맑은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하관밖에 볼 수 없었지만 수정으로 덮여가는 그의 모습에선 헌신 어린 고결함마저 느껴졌다. 홀장으로 땅을 짚고 곧게 선 그 굳건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곧은 의지도.
"아."
침묵 끝에 작게 탄식하자 주변의 시선이 못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던 영웅은 끝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기색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듯 주변에서 웃고 떠들던 이들도 하나둘씩 당황하며 침묵을 택해버렸다.
"……."
"……."
"저기…괜찮아?"
영웅은 견디지 못하고 거주관으로 도망쳤다.
"이야…. 너 지금 온몸으로 긍정해버린 셈인 거 알지?"
기가 막힌다는 아르버트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거주관에 왔다고 해도 영웅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없었다. 답답한 속을 달래려 창문을 활짝 열자 보인 푸른 하늘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므아랭의 따갑도록 내리쬐는 빛 아래 있다 와선지 멀쩡한 하늘이 유독 더 반가웠다.
"근데 너 정말 수정공 좋아하냐? 내가 봐도 좋은 사람이긴 한데, 아무래도 정체조차 모르잖아."
"자꾸 그 얘기 할 거면 나가 이 불법 침입자야."
"에이~. 나한테 털어놓으면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도 없잖아. 어차피 너 외엔 얘기 나눌 사람도 없다고."
마음 약해지는 지점을 정확히 찌르다니, 반칙이었다. 아르버트는 아예 인내심 깊게 대답을 기다려주겠다는 양 창가에 걸터앉아버렸다. 영웅은 으으!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심란하게 헤집다 문득 문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우뚝 멈추었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예민한 감각에 이제야 감지되었다는 건 상대가 꽤 소리죽여 은밀하게 다가왔음을 뜻했다. 아르버트를 향해 눈짓하자 그도 느낀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해졌다. 조용히 무기를 손에 쥐는데 이내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수정으로 두드려지는 둔탁한 소리임을 깨닫고 영웅은 곧장 무기를 넣었다. 어둠의 전사의 방에 이런 소리로 노크할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영웅, 잠시 실례하겠네.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불안한 듯 양손을 모으고 있는 수정공의 모습이 보여 영웅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어버릴 뻔했다. 꾹 참고 그를 들이자 다행히 작게 숨을 고르고 한결 진정하는 기색이 있어 덕분에 이쪽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열었던 문을 다시 닫고 잠근 뒤 몸을 돌렸다.
"소문 때문에 찾아온 거지? 그런 얘기가 도는데 이렇게 혼자 또 내 방에 와도 괜찮은 거야?"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뜸을 들이는 수정공 대신 먼저 선수를 치자 놀란 듯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당황한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영웅은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을 길게 늘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역시 그대도 들은 모양이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투명화 마법을 걸고 왔으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행선지에 대해서는 라이나에게만 말해두었고."
"철저하네."
수정공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그 입술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영웅은 돌아온 대답을 하마터면 듣지 못할 뻔했다.
"그대에게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말이야. 우선 이런 일로 그대의 명예에 흠을 내어버렸음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이 이상 낭설로 그대의 심력을 소모시키는 일이 없도록 책임지고 철저히 차단할 테니 부디 크게 노여워 말고 조금만 시간을 줄 수 있겠나?"
"…괜찮아. 나는 하나도 화나지 않았어."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환장할 노릇이었다. 공예관에서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공기에 영웅은 옆에 있던 테이들의 의자를 부러 소리 나게 끌어다 앉았다. 차라리 노여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영웅을 위하고자 한다는 수정공의 진심만은 분명히 느껴져 차마 그럴 수조차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세계 하나쯤 구해서라도 구하고 싶다던 그 사람이 누군지조차 말해주지 않으면서. 그게 나인지, 아니면 전혀 관계없는 다른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하면서 이토록 따뜻하게 굴었다. 그렇다고 그 마음에 이끌려 다가갔다가는 또 명확한 선을 그이며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더 할 얘기는 없는 거야?"
"우리를 위해 밤을 되찾아 준 그대에게 감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 형식적이고 뻣뻣한 말 말고. 온 김에 잠시 앉았다 가."
영웅은 손을 들어 제가 앉은 자리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건 그가 던진 지극히 개인적인 실험에 가까웠고, 수정공은 동상처럼 제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신이 하나의 크리스탈 타워라도 된 듯이.
"권유 진심으로 고맙군. 하지만 급히 나온 것이라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아."
"라이나에게 말하고 나왔다며. 오늘따라 뻣뻣한 것 같네, 수정공.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렇게 소문이 신경 쓰여?"
"당연하네. 그대는 젊고, 강인하며, 누구 보다 존경받아 마땅할 이야. 100년도 넘게 살아온 이 노인과 그런 식으로 엮이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더없는 실례가 아닌가. 심지어 그대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행실에서 비롯된 오해인 모양이니 더더욱 면목이...."
"내 생각에 당신은 거짓말엔 소질이 없어."
"……."
드디어 잔잔한 호수 위로 파문이 일었다. 영웅은 몸을 일으켜 직접 그에게로 다가갔다. 후드와 로브 아래 겹겹이 싸인 수정공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끝없이 여행하며 수많은 감정들을 접해 온 영웅은 알 수 있었다.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다. 그는 어떠한 이유로 자신을 얽매어 내면을 철저히 가리려 들고 있음을. 그 안에 자리한 건 분명 정도 이상의 호의적 감정이었다. 그것이 못내 처연해 보여 견딜 수 없었다. 마지막 싸움을 목전에 둔 상황에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버린 건 그래서였다.
"수정공, 나는 당신을 좋아해."
"…!"
"정체에 대해서는 물론 의심하는 바가 있어. 하지만 이젠 후드 안의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당신을 좋아할 것 같아."
"그러지, 말아."
수정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오른손이 제 어깨를 잡아 밀어내려 들었다. 잠시 버티려던 영웅은 결국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를 조금 몰아붙여 볼 생각이었지, 괴롭힐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미는 대로 밀리면서도 끝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까득 하고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모르는 사이 한껏 그를 괴롭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나 역시 그대를 좋아하지만, 이것은 경의와 존경이지 다른 의미가 아니야."
단호하게 내뱉은 수정공은 무어라 더 말할 듯했으나 결국 문을 향해 몸을 돌려버렸다.
"조금 전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지. 아므 아랭에 다녀온 여독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을 테니 부디 푹 쉬길 바란다. 소문에 대한 건…."
"알았어, 쉴게. 소문은 수정공 마음대로 해."
"고맙군."
짧게 고개를 숙인 그는 짧은 주문과 함께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뒤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영웅은 그가 오기 전 그랬던 것과 똑같이 신음하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차였네."
"차였지. 젠장, 아르버트. 내가 방에 혼자가 아니었단 사실을 굳이 상기시켜줘야 했어?"
"말 안 해도 신경 썼을 거면서 그러네."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다. 마음 편히 궁상떨며 하소연할 상대가 있다는 의미도 되었으므로. 어느새 제가 꺼내 앉았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아르버트를 잠시 흘겨본 영웅은 곧 그와 마주 앉아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정공이 직접 나서자 소문을 잠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니. 그는 자신을 향해주는 이런 분명한 호의에 늘 새삼스레 부끄러움과 감사를 느꼈지만, 긴 시간은 그 순수한 마음과 별개로 수정공의 역치를 높여 적응시켰다.
"아…."
그러나 이런 건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100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경우와 가능성을 셈했으나, 그의 영웅이 정체조차 모를 이를 마음에 품어주는 상황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고려해본 적조차 없었다.
"…어쩌지."
성견의 방보다 깊은 안쪽, 심려의 방에 도착해 문을 닫자마자 귀가 아릴 만큼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놓친 홀장이 크리스탈 바닥에 쓰러지며 낸 소음이 방을 웅웅 울렸다. 후드 아래 짓눌려 늘 뻐근한 귀가 바짝 털을 세우다 이내 진정한 듯 가라앉았다. 어쩌기는 뭘 어쩐단 말인가. 수정으로 뒤덮인 그의 양어깨에 얹어진 것은 한 세계가 희생하며 띄워 보낸 희망이었으며, 또 다른 세계에 뿌리내린 인류의 의지였다. 이는 곧 그 자신의 염원이기도 하였으므로 계획에 바뀔 것은 없었다.
울림이 사라지고 다시금 조용해진 방 안에는 곧 작게 울음 삼키는 소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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