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판타지14 / 에메히카
키워드 : 아련한 추억, 에메트셀크가 남겨준 기억을 보는 빛전
글자수 : 3,300자
에메트셀크의 죽음은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찾아왔다. 마치 악을 섬멸한 선처럼, 선에게 굴복한 악처럼.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영웅은 알고 있었다.
영웅은, 르네는 노르브란트의 가장 깊은 땅에 들어와 있었다. 바다에 거대한 숨을 불어넣은 지역의 거대한 분지에는 언제 보아도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르네는 코우진 족과의 교류로 얻은 가오리를 타고 장엄한 도시를 헤엄쳤다. 물방울 하나까지도 바짝 말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헤엄친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은 이곳이 곧 흘러갈 도시인 까닭이다.
르네는 몸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한 계단에 내려섰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이곳은 너무나도 컸다. 르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건물 하나하나를 둘러보다가 가오리의 턱을 다정히 긁어주고는 “나중에 보자.”하고 인사했다. 가오리는 어딘가로 헤엄쳐갔다. 아무리 멀리 간다해도 르네가 부른다면 곧장 돌아올 것이다.
르네는 가오리가 멀어지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계단을 느리게 올라갔다. 허상처럼 빛나는 계단은 단단하게 얽힌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발을 힘껏 디뎌도 불안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곳은 아직 사라지지 않는 걸까?
에메트셀크는 세계의 틈새에서 살아남았을까?
르네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고, 대부분 답해줄 수 있었다. 그녀는 늘 세상의 비밀 끝자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렇듯, 진정 알고자 하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르네가 타인보다 낭떠러지에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르네는 늘 다정한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그 운명을 받아들일 때 또한 누구보다 상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이렇게 공허한 눈으로 세상의 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아마 산책로였을 법한 장소가 나타났다. 거대한 벤치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바닥을 탁탁 털고 그 자리에 앉자 발아래가 아득히 멀었다. 발을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 없는 숫자만큼 흔들었을 때였다.
“아이야, 길을 잃었니?”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마 그들만의 언어로 말을 걸었을 테지만 르네에게는 아주 잘 들렸다. 르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이도 아니었고 길을 잃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가면을 쓴 거인이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시간 속에 영원히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럼 왜 이런 곳에 혼자 앉아있니? 가족은?”
“기다리는 중이야.”
“이곳에 온다고 했니?”
“아니. 그래도 기다리는 중이야.”
르네는 계속해서 발을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내가 갈 수는 없으니까.”
르네는 유일무이한 영웅이었다. 누구보다도 넓은 세계를 유영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나 사실 존재해야하는 곳에만 존재했다. 어쩌면 잔존해있을 에메트셀크의 흔적을 찾으러 떠나는 것은 그녀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입밖으로 내고나니 마음에 서늘한 감정이 찾아왔다. 르네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면 쓴 이는 르네를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서있었다. 말을 걸더라도 금방 사라지곤 하던 환영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르네는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가면 너머의 얼굴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내가 기다리던 아이로구나. 오래 기다렸단다.”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르네의 뺨을 어루만졌다. 르네는 인간을 마주한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강렬한 어지럼증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허상의 손이 벤치 아래로 추락하는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다시 벤치에 놓아주는 손은 아주 귀한 이를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반듯하게 놓인 르네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눈꺼풀을 옅게 떨고 있었다.
르네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똑같은 벤치 근처였다. 그러나 에테르로 이루어진 물건들이 옅은 빛을 뿜는 것과 달리 이 벤치는 익숙하고 무던한 색이었다. 심지어 르네의 몸과 알맞는 크기였다. 르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벤치에 엉거주춤 앉아보려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귀찮은 놀이에 장단 맞춰줄 생각 없어.”
바늘로 푹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르네는 숨을 삼켰다. 그곳에는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 둘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르네도 아는 사람이었다. 르네는 손을 뻗어 남자의 망토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손은 허망하게 통과해버렸다. 멀거니 서있는 르네와 달리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는 정자세로 앞만 보고 걸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좌우를 왔다갔다 다람쥐처럼 오다니며 요란하게 굴었다.
“하지만 하데스, 이번엔 너도 좋아할 거라니까. 정말이야.”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지만 질척이는 슬라임만 잔뜩 뒤집어썼잖아.”
“그거 재밌지 않았어? 난 내가 너무 재미있어서 당연히 너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런 쓸데없는 건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부탁해.”
에메트셀크였다. 에메트셀크가 아니던 시절의 에메트셀크였다.
“휘틀로는 당연히 불렀지. 셋이 모여서 노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응? 그렇지? 응?”
여자의 조르는 말투에 에메트셀크가 잠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하!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마치 비웃는 것도 같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웃음소리였다. 그러자 여자는 즐겁다는 듯 까르르 따라 웃었다.
“거봐, 재미있을 것 같아서 웃었지?”
“헛소리! 네녀석들이 온 바닥에 마법진을 그린다고 굴러다니는 걸 본 게 어제인데 오랜만은.”
“시간이 흘렀으니 오랜만이지. 가자, 갈 거지?”
“싫어.”
“이쪽이야!”
냉랭한 답과 달리 에메트셀크는 여자가 끌어당기는 쪽으로 순순히 끌려갔다. 불만스러운 듯 한숨을 쉬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달아나지는 않았다. 르네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일상을 좀 더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비된 선물상자는 여기까지였다.
눈을 감은지도 몰랐는데 르네는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대한 벤치 위에서였다. 르네는 거뭇한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속삭였다.
“그가 이걸 전해달라고 부탁했어?”
가면 쓴 이는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이야, 길을 잃었니?”
르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응.”
“저런. 저쪽으로 가면 안내소가 나온단다. 그곳에서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고마워.”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한 번 “아이야, 길을 잃었니?”라고 묻기 전에 벤치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눈가를 훑어냈다. 다시 고개를 든 얼굴은 영웅의 것처럼 씩씩했다.
몇 번을 찾아와도 받을 수 없었던 선물을 이제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르네는 여전히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의 끝보다 더 끝으로 나아간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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