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l Safe

토끼굴 by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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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F14 효월의 종언(6.0)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에메트셀크와 빛의 전사 HL 연성으로, 개인적인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 본 블로그에서 묘사하는 ‘영웅’은 드림주인 달의 수호자 미코테족인 ‘시타’입니다. 

  • 하데스 토벌전 2페이즈의 가사 및 개인봇님의 해석이 일부 인용되어 있습니다.

  • 쓰고 싶은 대로 마구 날려 쓴 날조 글이므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조만간 퇴고합니다. 조만간…….



 

 “에메트셀크, 그거 알아?”

 영웅이 말을 붙였다. 에메트셀크는 대꾸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영웅은 돌아보지 않았다. 무기를 손질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고 거친 손에는 건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그건 영웅의 새로운 무기였다. 최근 그녀는 새 무기에 익숙해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픈 것이 싫달 때는 언제고, 일단 한 번 나가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고는 했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영웅은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알리제가 강제로 재우는 방안을 제시할 정도였다.

 에메트셀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얀 손바닥에 맺힌 피고름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오른 탓이다. 그가 보기에도 영웅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웅은 기름을 묻힌 융으로 검날을 문질러 닦으며 웃을 뿐이었다. 에메트셀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묵을 선택했다. 지금 입을 열어본들 고운 소리가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에메트셀크는 그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닥불 앞에 앉은 영웅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그는 잠자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영웅은 미소 띤 낯으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시드가 가르쳐줬는데, 페일 세이프(Fail-Safe)라는 설계 방식이 있대.”

 “페일 세이프라.”

 모르지 않는 이야기다. 에메트셀크는 알라그의 기술을 선도했다. 그리고 갈레안에게 마도 기술을 전파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다만 턱을 괼 뿐이었다. 저에게 머무르는 에메트셀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웅은 새 무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영웅의 손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작았다. 그와 손을 마주 댄다면, 두 마디쯤 아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영웅은 그 손으로 빛뿐인 세계에 어둠을 불러왔다. 하나의 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더구나 영웅이 불러온 것은 어둠뿐만은 아니었다. 어둠이 돌아온 뒤, 노르브란트 전역에서는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다. 땅 위를 마음껏 누비던 죄식자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런대로 평범한 삶을 누릴 기회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놓치는 사람이 있다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더 이상 영웅의 비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섰다. 그들은 더 이상 메올 따위에 의지하는 가축이 아니었다. 눈과 귀를 가리고 눈앞의 쾌락에 취하는 인형이 아니었다. 무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산 송장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영웅의 손이 건블레이드의 안전장치에 닿았다. 무기 손질은 끝이 났으나, 그녀는 안전장치가 바르게 걸려 있는지 확인한 뒤에야 무기를 내려놓았다. 무기를 내려놓은 영웅은 창 밖으로 드러난 세상을 바라보았다. 에메트셀크는 그녀를 따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은 울퉁불퉁한 땅 위를 내달렸다. 그들의 아찔하게 높은 웃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어른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어둠을 되찾은 사람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의 안정과 활기를 되찾는 중이었다. 영웅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무기를 들었을 것이다.

 “체계의 일부가 고장나거나, 잘못된 조작이 이루어지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잖아.”

 영웅의 손에는 항상 무기가 들려 있었다. 때로는 검과 방패가, 때로는 도끼가, 또 때로는 그 몸보다도 커다란 대검이. 그녀는 끊임없이 싸웠다. 고난을 마주했다. 뒤틀리고 찢어진 불완전한 세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고귀한 천사조차 욕망 속에 피를 마시는 이 세계에서 영웅은 쉼 없이 구르고, 찢기고, 추락했다. 마치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에메트셀크는 영웅을 꼭 닮은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아니, 영웅이 그녀를 닮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웅의 혼은 분명 그녀와 같은 색을 띠었으나, 그녀의 것만큼 완벽한 혼은 아니었으므로. 에메트셀크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 아젬도 영웅처럼 아픈 것을 싫어했다. 종이에 살짝 베인 걸 가지고도 엄살을 부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 손에는 항상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아젬은 끊임없이 싸웠다. 불합리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눈앞의 영웅이 그러하듯, 그녀도 쉼 없이 구르고, 찢기고, 추락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까맣게 타들어가는 사람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메트셀크의 타박에도 아젬은 바보처럼 웃고는 했다. 가면은 벗겨지고, 머리 끝은 불에 그을리고, 무기에 부딪힌 손바닥은 다 터졌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리 좋아 웃었던 것인지.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 장치가 작동하는거야.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영웅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위로 에메트셀크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에메트셀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영웅의 짧게 잘린 머리 끝을 매만졌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위였다. 그녀는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에메트셀크의 손길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혀를 찼다. 입 안이 썼다.

 에메트셀크는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을 더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편린은 그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고는 했다. 그녀가, 아젬이 그러했듯이. 그럴 때면 에메트셀크는 속수무책으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는 손 끝으로 영웅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만약 내가 그 때 너를 붙잡았다면 어땠을까. 네 뜻을 따라 함께 떠났다면 어땠을까. 네가 조금만 덜 미련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네가…….

  “내가 그런 존재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아젬도 영웅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책 더미에 파묻힌 아젬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련하게 비를 맞고 몸살에 걸려 호되게 앓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건만, 그녀는 채 낫지도 않은 몸으로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었다.

 ‘이럴 줄 알았다.’

 에메트셀크가 문을 열자, 아젬은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든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메트셀크는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아젬은 끝까지 자리에 앉아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폭발하는 건 에메트셀크였다. 쏟아지는 잔소리에 그녀는 두 뺨을 부풀렸다. 그리고 못 들은 척 그의 옷 소매를 잡고 끌어당겼다. 에메트셀크는 화를 내면서도 못 이기는 척 그녀의 곁에 앉았다. 아젬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근 이데아 창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가 읽는 책은 아마 그 사람의 전문 분야를 다룬 서적일 터였다.

 아젬은 항상 자신의 책무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고 태양처럼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녀와 만난 자들은 어두운 생각에 빠져 있다가도 금방 생각을 멈추고 양지로 끌려나오고는 했다. 에메트셀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젬의 목표물이 된 남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메트셀크는 아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졸리운 낯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앞으로 책을 몇 장이나 더 읽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세 장, 아니, 두 장.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결국 책을 오래 읽지 못하고 졸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아젬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에메트셀크는 축 늘어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아젬이 그의 품 안에서 칭얼거렸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싶으니 읽어 달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에메트셀크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혔다.

 ‘……어디부터 읽으면 되는데.’

 에메트셀크가 책을 집어들자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메트셀크는 생경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인지 아젬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아젬은 투정을 부렸지만 끝내 눈을 감은 채 사랑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데스, 나는……내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에메트셀크는 영웅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체계는 이미 오래 전에 고장났다. 고장난 체계에 당황한 사람들은 잘못된 조작을 일으켰다. 결국 종말은 도래하였으며, 세계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제는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바보 같긴.”

 에메트셀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영웅의 시선이 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페일 세이프는 이미 오래 전에 부러졌다. 그러나, 어쩌면.

 “어디 한 번 잘 해 봐, 영웅님.”

 에메트셀크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영웅은 다시 기름을 묻힌 융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결국 종언으로부터 별을 구하는 안전장치가 되는 것은, 그래. 머지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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