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웅의 말로

그리고······.

토끼굴 by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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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F14 효월의 종언(6.0)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에메트셀크와 빛의 전사 HL 드림 연성으로, 개인적인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 본 블로그에서 묘사하는 ‘영웅’은 드림주인 달의 수호자 미코테족인 ‘시타’입니다. 

  •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 쓰고 싶은 대로 마구 날려 쓴 날조 글이므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웅이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에는 피가 낭자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와 함께 꺼질 듯 자그마한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죽어가는 중이었다. 영웅을 죽인 것은 신비로운 고대 마법도, 예리한 날붙이도, 닿는 것을 모조리 녹여버리는 극독도 아니었다. 그녀를 죽인 것은 늑대였다. 할로네의 눈길 아래서 자유로이 떠도는 늑대. 아이테리스를 넘어 거울 세계까지 구원한 영웅이 고작 늑대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영웅은 태연했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올 줄을 알고 있었다.

 죽음은 항상 영웅의 주변을 맴돌았다. 수많은 적과 벗이 죽음과 함께 그녀의 곁에서 떠나갔다. 어떤 죽음은 그녀를 무력하게 했다. 그런 죽음은 영웅을 자책에 빠뜨려 차라리 대신 죽기를 소원하게 했다. 또 어떤 죽음은 그녀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했다. 그런 죽음은 영웅으로 하여금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나도 데려가 달라 울부짖게 했다. 하지만 죽음은 항상 먼발치에서 영웅을 지켜볼 뿐,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영웅은 죽음이 자신의 발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늑대의 이빨에 찢긴 목이 계속해서 피를 뱉어냈다. 백색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들었다. 지혈이 시급했으나, 그녀에게는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운 줄 모르고 살았던 그리운 얼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영웅은 눈을 감았다. 갖가지 상념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흘렀다. 에스티니앙은 괜찮을까? 어디선가 또 머리 끈 하나를 팔천 길에 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마토야 엄마와 위리앙제가 날을 잡고 가르쳐 준다면 나아질 텐데. 맞다, 산크레드에게 린이 얼마나 컸는지 전해줘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알리제가 화를 내겠지? 라하는 울지도 몰라. 그래도 알피노와 쿠루루가 말려 줄 거야. 타타루에게……아.

 타타루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해 줘야 하는데…….

 생각이 멎었다. 주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더는 아프지 않았다. 아픔이 가시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몸 위에 눈이 쌓였는데도 춥지 않았다. 아늑했다. 영웅은 굳이 숨을 쉬려 애쓰지 않았다. 다만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길 따름이었다.

 이거, 영웅님 꼴이 말이 아니로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영웅은 한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영웅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푸르른 두 눈에 그의 모습을 담았다. 점잖은 로브에 잘 다듬어 넘긴 백색 머리카락. 에메트셀크는 여전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와는 달리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못내 반가워 영웅은 그만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밝게 웃고 말았다. 뭐가 좋다고 웃어. 에메트셀크의 타박에도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 물었다. 마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묻기라도 하듯, 평탄한 어조였다.

 ……어때, 충분히 봤나?

 영웅의 눈매가 둥글어졌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가득했다. 그러나 구멍이 뚫린 목은 소리를 만들지 못했다. 영웅은 아쉬운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메트셀크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풍요해에 가라앉은 해저 유적은?

 봤어.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웠어.

 메라시디아에는 다녀왔나?

 응, 에오르제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어.

 열두 신의 비밀은 파헤쳤고?

 그런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뭐야.

 내가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고 왔나?

 어쩌면.

 새 여행지로 떠날 준비는.

 영웅이 웃었다. 어느 때나 여행자는 새로운 땅을 보면 가슴이 뛰는 법이다. 별바다라는 새 여행지를 눈앞에 둔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에메트셀크는 그녀의 미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군, 그러면 갈까. 그의 말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에메트셀크는 영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에메트셀크의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어느 틈엔가 가벼워진 몸은 저항 없이 새로운 모험을 향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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