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빙]내일을 위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의 존재가, 서로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 그 바람을 현실로 끌어낼 테니까.

단테는 고요한 눈동자로 그가 딛고 선 바닥과 주변의 가구를 둘러보았다. 좁디좁은 면적 탓에 만족감보다는 불만이 더 큰 집이었건만 곧 떠난다고 하니 새삼스레 눈에 밟히는 것들이 몇 있었다. 히마와리의 흔적을 켜켜이 쌓아 올린 공간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단테는 여상스레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은 남은 서른 밤 동안 이 공간에서 정을 떼어야만 했다.

단테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히마와리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면서부터 이사는 사실상 예정된 것이었다. 그녀의 집은 한 사람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의 면적만을 보장하는 원룸이었으므로. 두 사람, 더욱이 평균 이상의 덩치를 지닌 단테가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감이 있었다. 이 동거가 일시적일 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단테는 진즉 히마와리의 곁에 정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보다 넓은 공간은 필수 불가결하리라. 에덴과 멀지 않고 두 사람이 살기에 넉넉한 장소. 얼마 되지 않는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장소로서 라모 소유의 맨션이 화두에 오른 건 고작 이틀 전의 일이었다.

“단테 없을 때 에덴에 불난 적이 있거든. 그때 잠깐 신세 졌는데 엄청 괜찮았어.”

관리도 꾸준히 돼서 깔끔하고 위치도 좋은데, 아무도 안 쓰고 있다고 해서 돈 낭비라고 생각했지……. 이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히마와리가 꿍얼거리거나 말거나, 단테는 라모에게 통보에 가까운 연락을 넣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맨션에 곧장 쳐들어갔더랬다. 그 행태는 차라리 무단침입에 가까웠으나 라모는 오히려 반색하며 두 사람을 반겼다. “설마 단테가 내 건물에서 살게 될 줄이야, 세상일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어려운 용어가 오가는 대화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히마와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입주가 확정되어 있었다.

입주일은 한 달 뒤. 앞으로 한 달이면 더는 마주할 일 없을 투박한 벽을 단테는 말없이 쓸어보았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 위로 욕실의 물소리가 엉겨 붙는다. 가볍고 규칙적이며, 또 더없이 경쾌해서 생기를 실감케 하는 기척. 히마와리가 씻는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이던 단테는 문득 그것이 이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정말이지 몇 안되는 생활감이라는 사실을 되짚었다.

단테가 히마와리의 원룸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낀 감상은 두 가지였다. 좁다, 그리고 묘하게 삭막하다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그래. 이 집은 한 사람이 몇 년째 살아가는 공간치고는 지나치게 생활감이 없었다.

히마와리는 블레이스트와 동문이라고 들었다. 또 이번이 상경한 이래 첫 이사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나이를 따져봤을 때, 이곳에서 최소 5년을 살았을 터.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최소한의 식기만 갖췄을 뿐 먼지가 두껍게 쌓인 부엌이며 계절별로 간신히 돌려 입을 정도의 옷가지만 걸린 옷장, 운동화와 슬리퍼 고작 두 켤레뿐인 신발장까지……. 살아온 세월을 가늠할 구석이라곤 부엌과 신발장에 쌓인 먼지의 밀도뿐이었다.

“아~…… 부엌은 잘 안 써. 처음 몇 번은 직접 요리해 보려고도 해봤는데, 역시 사 먹는 게 훨씬 편하고.”

언젠가 히마와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편의성이 가장 큰 이유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상스럽기만 했다. ‘아무 문제 없잖아.’ 꼭 그렇게 대꾸하는 듯한 무색의 호흡에 단테 역시 소리 없이 회답했더랬다. 이 집은, 굳이 평가하자면 단순히 몸을 누이는 숙소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활한다’보다는 ‘잠시 들러 휴식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공간. 그 삭막함은 히마와리의 어떤 표정과도 제법 닮아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을 적, 단테나 에덴의 밴드맨들이 없는 자리에서나 살풋 드러나는 어떠한 적막. 가까이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사하게 웃는 낯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밀려나곤 하지만,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을 뿐. 마치 달의 뒷면처럼,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애정 이면에 그 반동으로서 선명히 존재하는 지독한 무심함. 히마와리는 제 관심사 밖의 일에는 한없이 무감각했으므로, 그 냉담과 닮은 공간은 결국 히마와리에게 제대로 된 ‘안식처’의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당신이 행복했음 좋겠어. 그러니까, 정해둔 계획 없이 떠도는 거 말고, 어디 한군데에 정착해서 평범하게 오늘 저녁 뭐 먹을지나 고민하면서——’

“내게는 그렇게 말한 주제에 말이지…….”

대체 누가 누구에게 그런 소릴 하는지. 단테는 헛웃음을 삼키고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이 침대를 썩 마음에 들어 했다. 히마와리가 홀로 눕기에는 넉넉하지만 자신과 함께 눕기에는 턱없이 좁은 면적임에도, 꼭 그러했다. 제가 모르는 히마와리의 시간이 거기 있었으므로.

침대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제 연인의 생활감.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방금까지 덮고 있다가 걷어 올린 듯 헝클어진 이불과 지독한 각도로 기울어진 베개, 여기저기 뒹구는 인형들과 그 모든 물건에 깊게 배인 히마와리의 체취 따위는 단테에게 야릇한 안정감과 충족감을 주었다. 히마와리에게 ‘안식처’가 있다면, 그건 집이라는 공간 전체가 아닌 일부를 가리키는 말일 테다. 가령 이 침대나, 그 바로 옆에서 앨범이나 라이브 굿즈 따위로 어지러운 책상 같은 것.

에덴의 밴드맨들을 향한 친애가 눌어붙은 책상은 시선을 곧잘 끌어당기곤 했다. 자신보다 일찍 잠들어 늦게 깨어나는 제 품속의 연인이 눈뜰세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적마다, 단테는 눈길을 멀리 두어 정리되지 않은 책상 위 물건들에 깃든 애정을 하나씩 가늠해 보았다. 먼지 한 톨 쌓일 새도 없이 손때가 타고 모퉁이마다 말려 올라가고, 자랑스럽다는 듯 늘어놓고 규칙 없이 전시한 라이브 홍보지의 형상에서 엿보이는 무수한 애정을. CD 플레이어 옆에 탑처럼 쌓아둔 앨범처럼 굳건히 서서 히마와리가 걸터앉을 자리를 마련해준 사랑이라는 이름의 버팀목을. 히마와리는 기분이 좋을 때,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혹은 단순히 입이 심심할 때마다 문득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지나간 홍보지 속의 라이브에서 물이 들고 앨범으로 멜로디를 짙게 덧그린 음률은 분명 그 책상 위에서 완성되었을 터다. 고작해야 두 팔을 벌린 것보다도 좁은 너비에서, 그녀 본인이 위안을 얻은 시간만큼이나 선명하게.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고작 그 즈음의 좁은 영역에서 위안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단테와 히마와리, 두 사람의 새로운 집은 그 공간 자체로 안온을 머금을 테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의 존재가, 서로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 그 바람을 현실로 끌어낼 테니까. 단테는 다가올 내일을 위해 필요한 것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이 원룸에 없는 것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단테, 이제 씻어도 돼.”

익숙한 바디워시 향과 함께 벌컥 열린 문에서 상쾌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곧 단테 역시 같은 향을 두르게 되리라. 하나뿐인 욕실을 두고 순서를 번갈아 가며 씻는 것도 앞으로 서른 밤이 지나면 끝날 일이었다.

“히마와리.”

“응? 왜, 단테?”

“이사가 끝나면 식기부터 사러 가지.”

“……갑자기요?”

벌써부터 이사 후 계획 세우고 있었어?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훑는 소리 뒤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수건 두른 목덜미를 단테의 팔에 기댄 채 키득거리는 목소리는 가볍기만 했다.

“근데 식기 사봤자 나는 요리 잘 못하는데…… 단테가 해줄 거?”

“노력해 보도록 하지.”

“어, 진짜!?”

“언제까지고 사 먹을 수도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단테의 말이라면 쉬이 수긍하는 히마와리의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툭툭거리는 소리를 따라 침대 시트에 얼룩이 생기기를 두어 차례, 단테가 혀를 찬다. “혀 차지 말고 머리 좀 말려주라.” 태연한 목소리 뒤로 히히덕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어쩌겠는가, 히마와리를 응석받이로 변모시킨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을. 단테는 허, 하며 한숨처럼 웃고는 가는 목에 걸린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짓으로 황혼빛 머리카락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잘게 흩어지는 물방울에 소리 없는 바람이 담긴다. 내일의 연인이 감기로 앓지 않도록, 내일의 하루도 모쪼록 무던히 넘길 수 있도록.

그래,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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