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아직 모르겠고 (4)
윤이 이 시점에서 통신 단말을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대화’를 해야 하는 상대는 교사들만이 아니었다. 대면보다 문자상에서 활발한, 같은 기숙사의 동기들도 있었다.
‘조금 이야기를 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내가 제법 없었군… 아마 같은 반의, 같은 기숙사생에게 들었을까.’
윤은 빠르게 메세지를 훑으며, 시간을 체크했다. 몇시부터 대식당에서 점심 먹을 건데 조용히 같이 먹을래. 시간은 아슬아슬 맞출 수 있을 것 같았고, 호의 품은 제안이다. 짐작컨데, 실질 같은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집단적 혼밥이겠지만 식사를 같이 할 정도의 거리라는 건 중요하니까. 윤은 더듬더듬, 한참 말을 몇번이고 입에서 굴려가며, 글자의 발음과 번역 술식을 겹쳐서 간신히 만든 긍정의 답을 보냈다.
┌───────────────┐
│ 서류 오류가 좀 있었어. 해결되었고. │
└───────────────┘
┌─────────────────┐
│ 조금 늦었지만, 대식당앞에서 만나는 걸로 │
└─────────────────┘
┌──────┐
│ …괜찮을까? │
└──────┘
확인은 빠른데 퍽 망설이는 기색이 난다. 말을 고르는 걸까, 아님 새삼 밥을 타인과 같이 먹는게 꺼려지는 건가. 그래도 잠깐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래] 하고 답이 온다. 윤은 조금 눈을 가늘게 떴다가, 괜한 짐작을 하는 대신 빠르게 발을 옮겼다.
대식당 근처에 도달하니 모여있는 듯 흩어져 있는 듯한, 같은 기숙사의 무리가 그럭저럭 있다. 아까 교실에서 봤던, 같은 반의 학생을 포함해서. 그 모양을 말하자면, 그나마 편한 듯한 이들 사이로 모여 있는데 퍼스널 스페이스가 망했고 눈에는 안띄고 싶은데 이 수면 띌 것 같고의 결과물같은……. 윤은 그나마 가깝게 있는 두 사람, 아르덴과 카일의 쪽으로 갔다.
“…왔어.”
“아, 윤.”
“기다려 준 거 고마워. …식사, 같이 하지?”
왜 굳이 무리를 지을까, 왜 머뭇거리면서도 받아들였는가. 그런 고민을 하던 윤은 대식당 안을 보고 그 모든 것의 답을 찾는다.
‘하기는, 이런 구조는 혼자서 먹는게 오히려 눈에 띄일까 걱정되는 구조인가…….’
기숙학교도 몇년 차인 윤은 쉽게 짐작했다. 과연 익숙해지만 혼밥도 태연스럽게 하겠지만 처음은 의외로 난이도가 있다. 무슨 의미의 난이도나면, 앞자리나 옆 자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찰 가능성이 있고 그 사람이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덧없는 관계성으로 말을 걸을 가능성이라던가. 기숙학교라는 좁은 사회니까 더 어렵다. 윤이 원래 있던 곳 같은 초대형 기숙학교면 크기라도 하지, 이 드문드문한 무리가 한 기숙사 한 학년의 절반 좀 못되는 무리라는것을 생각하면 수가 적다.
아마도 비슷한 성향인 것이다, 정말로.
대식당 같은 곳에서도 혼밥이라면 이미 몇 년 전에 별 감흥 없는 경지에 이른 윤이었지만, 이 미묘한 동질감에는 어울릴 수 있었다. 음식은 배식을 받아 모여, 대화는 거의 없고, 흘려듣듯이 이름만을 나누고. 실질 서로 아주 긴 말을 걸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듯한 집단적 혼밥이다. 그래도 뭔가 노력을 해보려는 듯 이름은 어쩌고 저쩌고 나왔지만. 그런 분위기에 윤은 둘이라지만 옆 반의 같은 기숙사생에게 잘도 말을 건 아르덴과 카일의 점수를 조금 더 높이면서, 흘리듯 들은 A반과 B반의 이그니하이드 생 이름을 숙지했다.
A반의 나머지 넷은 둘둘 같은 방, 각각 C방과 D반에 다른 룸메이트. B반의 나머지는 E반에 다른 룸메이트. 같은 반에 룸메이트가 겹치면 그래도 말은 튼 모양인데, 다른 반이면 그나마도 조금 어설픈가. 어느정도는 이런 애들이니까 같은 반 조금 다른 반 조금으로 룸메이트 맞게 맞춰준 것도 같다.
드문드문 속삭이는 대화 사이에서 다들 무언가를 탐지하고, 전혀 다른 반 다른 방임에도 뭔가 통하는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것까진 잘 모를 일이었다. ‘관계 맺기를 꺼리고는 있는데, 사회적 생물로서의 관계 욕구 자체가 없는건 아닌, 걸까…….’ 윤은 담담하게 정보를 처리하면서 식사를 입에 넣었다. 낯선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요리는, 입맛에 딱 맞는다까진 아니었으나 제법 훌륭한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먹는 일에는 신경을 안 쓰고 대충 입에다가 쑤셔넣었더니, 옆 자리엔 아직 음식이 남았는데 다 해치웠다. 머리를 지나치게 써서 그런가, 평소 식사량은 먹었는데도 허기가 남은 느낌이었다. 윤은 잠시 식기를 내려놓는 것을 머뭇거리다, 잠시 옆자리에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요리를 추가로 받아왔다. 솔직히 기분만으로는 이 배를 먹어도 좋을 것이었으나, 주변과의 박자 따위를 적당히 감안한 양이었다.
…기분 만큼이나, 라고 해야할까. 가시지 않는 허기는 명확하다. 일단 무리인듯 무리 아닌 듯 모호한 거리 사이에서 걷다가 각자의 갈 곳으로 가는 와중에도, 윤은 식사가 끝나고도 남은 허기에 방점을 찍었다.원래부터 몸 쓰던 일이 메인이니, 제 뱃구레가 제법 크기는 했다. 하니 너그럽게 보자면, 신경을 쓰고 힘을 쓰고 있으니 몸이 기력을 보하려 드나, 할 수는 있을 정도.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제 식사량이나 지금의 상황 따위를 이리저리 재 보면, 그리 너그럽게만 보기는 불안한 감이 있었다. 어찌저찌 굴러가고는 있다고 한들, 세계를 넘은 일이다. 아직도 이 몸은 세계에 다 적응하지 못했고. 적응 중에 기력이 달려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낫긴 하겠지만…….
그리 화두를 붙드는 와중에, 대화를 열려는 말이 윤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윤, 혹시 좋아하는 게임이라던가… 있어?”
어쨌거나, 윤이 식사 후 위화감 가진 화두를 붙들고서 침묵하고 있을 뿐, 지금은 오전에 받은 교과서 따위를 들고 기숙사로 한 번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대충 말이나 트자는, 신변잡기적 의도가 강한 아르덴의 질문에 윤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게임, 이 놀이던가.’ 하고 겉으로 내지 않는 한숨을 한번. 말 걸어주는 것, 본인이 어색한 침묵을 버티지 못했다 한들, 이같은 이들 선에서는 제법 호의의 표현임을 알고 있다. 반응이야 기꺼이 내어줄 수 있지만, 이 쪽의 놀이를 윤이 알리가 없다. 윤은 적당히 머뭇거리는 투로 뱉어냈다.
“있던 곳이 그럭저럭 벽지라… 그, 온라인, 게임은 별로 회선 환경이 좋지도 않았고. 패키지 게임은, 근처 사는 사촌이 권해줘서 재밌게 했지만 나한테는 기기가 없었어. …그래서 거의 보드 게임 위주로, 그럭저럭 즐기긴 했어.”
“보드게임! 그것도 좋지. 혹시 어떤 보드게임?”
아르덴은 공통의 화제를 발견한 듯, 그리고 무언가…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 반응을 내 온다. 잘 생각해보면, 식사자리에서 숙덕이던 화제에서 그 게임이란 것이 몇 번이나 나왔던 것도 같고. 윤은 그것을 알면서도 한번 숨을 골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고향의 놀이가 이 쪽에 있을까.’ 라는 생각에 윤은 눈을 데굴, 굴렸다. 적당히 알만한 것을 대야 하는데, 어디까지가 유사점일지 감이 돌지 않는다. ‘…고전적인, 추상전략계통이라면 겹칠 가능성이 높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대충 말을 골라낸다.
“어, 음… 그, 장기, 체스라던가? 바둑도 조금은 둘 줄 알고. 그, 개인적으로는 주사위판 말놀이나 단순한 게임을 좋아했는데, 자주 상대해주는 게 사촌 정도고 걘 전략성… 플레이를 좋아해서… 팻감, 카드 뽑는 느낌의 전쟁, 게임이라던가……. 제목, 어제 검색해보니까 여긴 없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적당히 번역으로 통할만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댄 것은 거의 감으로 하는 거 뿐이지만 말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윤은 일단 숨을 돌린다.
“아, 확실히 너 이름 어감이라던가 기기라던가 봐선, 이쪽이랑 잘 수교하는 건 아닌 쪽이지. 어지간한 건 잘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았겠군. 애초에 소재를 구할래도 그쪽 소재는 구하기도 힘들고, 게임도 다르진 않겠지만…….”
하고, 카일이 알아서 납득하는 듯한 말을 꺼낸 덕도 있었다. 그리 알아서 판단해주면 정말로 편해서, 윤은 어깨를 적당히 으쓱인다. 그 모양에 아르덴은 “아, 그럼 유명작이고 보드게임 버전도 있는데 모르겠네, 내 최애작…….” 하고 조금 푹 늘어지고 있었다. 윤은, 흠, 하는 소리를 삼켜가며 그 기색을 살피다가 툭 말을 내어 뒀다.
“응, 뭐 그렇지. 그래도 새로운 건 어지간해선 좋아해. 해보고 안해보고는 다른 일이고. 출신, 벽지라 새로운 거 자체를 즐기는 편이야. …혹시 추천해 줄 만한거 있어? 내가 있던 쪽 물건은 이쪽에 아마 거의 없어서… 기왕 먼 곳으로 온 거, 새로운 것도 즐기고 싶은데.”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는 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는 것만은 못해도 쉽게 친해지기 좋은 방법이다. 싫어하는 일에 비하면 손해 가능성도 적고. …생각할 것이나 할 일이 한참 잔뜩인 것은 맞았으나, 머나먼 타지에 있는 이상 사교 활동이라는 것도 빠트릴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방의 인원들과 사이가 좋은 쪽이 지금 상황에선 제법 중요한 일이었고. 그리고 새로운 것에 흥미가 있는 것도, 일단 사실의 범주 안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반응이 조금은 묘했다. 엣, 하고 어째선지 아르덴과 카일이 눈을 마주치는 모양. 윤은 짐작 어려운 반응에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영업해도 괜찮나?” “너 하는거 레트로고 별다른 편견 없는 쪽 같으니까 괜찮지 않냐?” 하고 주고받는 와중에 윤은 의문을 얼굴에 올린다.
그 얼굴에 ‘아직 오타쿠가 안된 쪽인가? 아니면 장르차이? 갓반인은 아니겠지?’ 하고 아르덴의 센서가 핑핑 돈다. 이그니하이드면 대개 음캐와 덕후가 배정된다는 건 알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라고 할까, 말하자면 최애 장르가 학문적인 이들도 당연히 있다. 윤은 실제 언행을 보면 후자에 가까워 보이는 편이었고. 그러다 결국 ‘하지만 내 최애작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고…….’라는, 제법 원초적인 욕망을 선택한 아르덴은 결단을 내렸다.
“이따, 저녁에… 아니다, 확실히 준비해서, 주말에! 내 게임기 빌려줄게!”
지르고 보자! 아르덴은 오타쿠다운 급발진을 하는 감으로 배팅했다. 카일도 “간만에 그거 보면 재밌긴 하겠네.” 라고 동조의 입장을 냈다. 점심시간에 언뜻 나온 화제로 나온 아르덴의 최애작은, 카일의 입장에서도 이름만은 자주 들어본 게임으로, 해당 회사의 기기의 몇몇 버전은 (뜯어보기 위해) 가지고 있기도했던 것이다. 본디부터 흥미가 없진 않은 것에, 세 명 짜리 방에서 두 명이 움직인다면 마음이 흔들리기도 쉬우니 카일로서도 크게 거리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윤은 눈은 조금 크게 뜨면서 “어라, 진짜?” 하고 반문했다가 즐거운 듯 단정한 낯으로 웃었다. 머릿속에서 차후의 일정을 빠르게 재조립하고 있는 건 티 하나 내지 않고, “기대하고 있을게.” 따위의 말이나 뱉어내면서였다. 그런 윤의 얼굴 모양은 그다지 어설프지 않았는지, 아르덴은 무언가를 추천하려는 자신이 더 즐거워진 기색을 낸다.
이해할만한 동지가 생기면 좋지. 대화가 통하면 편하고. 하드웨어 취미와 소프트웨어 취미로 일부 교차점이 있는 탓에, 윤이 없는 때에 아르덴과 대화를 해 보았던 카일은 어느정도는 공감한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장르가 다를 뿐 오타쿠로서의 소양이 있으니 모를 바도 아니기도 했고. 이래저래, 아직 기숙사내의 덕질 관련 소란을 겪지 못한 1학년 다운 태도였다.
“같은 거 이야기 할 상대는, 뭐… 그래서 동아리 같은 것도 사실은 조금 흥미 있는데.”
화제가 살짝 돌아간다. 아르덴이 조금 꿍얼거리듯이 “그 좀 장르… 분야가… 그리고 기숙사 바깥도 좀…….” 하고 소리를 낸다. 카일은 대수롭잖게 “그래도 긱사내로도 동호회 이거저거 있다는 거 같으니까.” 하고 그 소리를 받아낸다. 아르덴도 금방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쪽 보고는 있고. 아, 윤 너는 혹시 보겜부? 게시판에서 봤는데 공식 동아리 치고는 우리 기숙사 사람 많고 널널하다던데.”
“아, 나도 봤어. 이번주 체험 입부에 살짝 들어가 볼까 하고는 있긴 해. …기숙사 내에서 만들어 동호회가 좀더 편할거 같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말을 받고는, ‘편하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선택하기 애매하고.’ 라고, 윤은 속으로 덧붙인다. 기숙사가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떠한 기준에 의해 유사한 특성이 모이기 쉽다는 것은 파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내기는 나쁘지 않겠으나… 이런 ‘타지’에서는 시야를 넓게 두는 게 좋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마냥 편하게 맨날 보던 놈들이나 보는 거는 지금은 일단 피하는게 좋다.
“…뭐. 일단 후보. 보드게임부 쪽을 보고 있지만, 사이언스 부 쪽도 관심은 있어서. 뭐든지 부, 같은 느낌도 있다길래. 그럼 편하지 않을까 해서.”
“아, 그쪽도 우리 기숙사 사람 은근 많다고는 해서. 나도 후보군.”
“음 …사이언스 부, 말이지.”
아르덴이 묘한 반응을 냈다. 그것에 윤은 카일과 엇비슷한 타이밍에 시선을 돌렸다. 뭔가 고민하는 듯 싶던 아르덴이 “별건 아니고.” 하고 고개를 저었다.
“…집에 이 학교 먼저 다닌 양반이 있는데, 음. 뭐든지 부, 라서 사람도 뭐든지 있는 모양이라 했던게 기억나서.”
“아~ 뭐. …사람 많긴 하고, 그런건가.”
“그런거겠지.”
툭 튀어나온 정보에 윤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가 만다. 감이, 어쩐지 익숙한 것을 가리키는 것도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숙사의 내부에 들어섰다. 교과서를 다시 한번 올려 잡고, 기숙사에 들어서면서 줄어들은 말소리에 조금은 신경쓰면서.
어쨌거나 오후에도 수업은 남았고, 할 일은 쌓여만 갔고. ─그저 배가 고프다. 윤은 거르고 걸렀지만 참지 못한 짧은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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