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니다

마지막 불꽃

게나조

篝火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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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할 게 있네.”

갑자기 들이닥친 이웃집 요괴, 시라누이는 미즈키와 게게로의 술자리에 태연하게 끼어들어 담배를 한 모금 피우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급습해 저녁을 같이 하는 일이야 한두 번이 아니라 익숙했지만, 그가 먼저 부탁을 해오는 경우는 가게를 대신 봐 달라는 것밖에 없었기에 미즈키는 그쪽이라고 생각하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내일 몇 시에 가면 되는데?”

“···보통은 뭐냐고 물어보지 않나? 아니면 그만큼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되나, 미즈키 공?”

그러니까 그 ‘미즈키 공’이라는 표현 좀 그만하라고. 몇 번 지적했으나 시라누이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요괴든 인간이든 고집이 세지나. 미즈키는 애써 ‘공’ 호칭을 무시하며 말했다.

“네가 할 만한 부탁이라면 그것밖에 없지 않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군.”

“그래서, 그 부탁이라는 게 뭔가. 시라누이.”

게게로가 끼어들고서야 무의미한 대화가 끝났다. 역시나 게게로 도령, 눈치가 빠르군. 시라누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었다.

“훗, 아주 간단한 것이지.”

시라누이는 바깥을 향해 담배 연기를 후 불어 보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츠시로해까지 데려다 줘.”

“뭐?!”

미즈키는 놀란 나머지 술병을 놓칠 뻔했다. 도쿄에서 야츠시로해까지? 제정신인가? 구마모토 현의 아츠시로해까지는 이곳에서 대중교통으로 무려 14시간이나 걸린다. 가장 가까운 가미마치역에서 도큐 세타가야선, 덴엔도시선, 야마노테선으로 차례대로 갈아탄 뒤 토카이도 신칸센, 산요 신칸센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규슈 신칸센으로 갈아타 구마모토역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고 마지막으로 가고시마 본선까지 타야 야츠시로역에 도착한다. 중간에 이 기차가 히로시마 행인지, 사쿠라 행인지, 구마모토 행인지까지 따져야 한다. 이 모든 환승 절차가 부담스럽다면 차를 타고 꼬박 반나절을 타야 한다. 서로 번갈아 가며 운전한다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미즈키는 이 요괴들이 운전을 제대로 할 수는 있는지 의심이 됐다.

“무리. 완전 무리.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미즈키는 순식간에 도쿄에서 야츠시로해까지의 동선을 머릿속에 짠 다음,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게게로가 필살 아련한 눈빛 스킬을 썼으나 미즈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제국혈액은행 시절 영업부 에이스로 불리던 언변 스킬을 발휘해 야츠시로해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등을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시라누이의 한마디에 모든 게 정리되었다.

“그 정도면 갈 만하지 않나?”

“네 ‘갈 만하다’의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음, 게이코 때보다는 덜 걸리지 않나? 그럼 됐지.”

그 인간은 기원전 사람인데 왜 여기에서 이름이 나오는 거야…. 미즈키는 이마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미즈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두 요괴는 오랜만에 멀리까지 놀러갈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다. 이참에 규슈의 맛집을 모두 돌자는 게게로와 미즈키의 집을 멋대로 뒤져 지도를 가져와서는 제게 맡기라는 시라누이를 보고 미즈키는 제 운전면허증이 유효한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규슈 앞바다가 고향이지.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겐가?”

얼마 전 미즈키가 만들어준 스마트폰으로(신기하게 생긴 상자라며 낯을 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즈키보다 더 많이 쓰고 있다) 규슈 볼거리를 검색하던 게게로가 시라누이에게 물었다. 시라누이는 낡은 지도와 컴퓨터에 열어둔 새 지도를 번갈아 살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300년 전만 해도 바다 요괴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았지.”

옛날을 회상하는 시라누이의 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이러면 진짜 거절을 못하잖아, 미즈키는 한숨을 쉬면서 주유를 하러 나갔다.

마지막 불꽃

미즈키가 자차를 끌고 야츠시로해까지 가기로 한 이유는 두 요괴가 기차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일본에서 백 년 이상을 산 미즈키도 환승 구간에서 가끔 길을 잘못 들기도 하는데, 문명과 거리가 먼 요괴 둘을 데리고 두세 번씩 환승을 하며 무사히 야츠시로해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일정표를 짜던 미즈키는 시라누이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9월 3일 오후 여덟 시 전에만 도착하면 되는 거지?”

“음, 그때는 반드시 그 바다 앞에 있어야 해.”

“알았어. 일단은 9월 1일 새벽 네 시에 출발할 거야. 중간중간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눈을 붙일 거고, 그렇게 하면 아마 1일 밤 아홉 시에는 숙소에 도착할 거야. 그러면 2일 하루하고 3일 오후까지는 자유시간. 가고 싶은 데를 가도 좋고, 숙소에서 쉬어도 되고. 이상!”

발표를 마친 미즈키는 바로 카페 SNS에 휴업 일정을 올렸다. 갑자기 정해진 휴가라 단골들에게는 미안하자만, 시라누이의 사정을 알고 나니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시라누이는 규슈에 바다가 열릴 때부터 존재했다. 새벽이 되고 바닷물이 차오를 때면 수평선을 따라 불을 쏘아올리며 춤을 추었다. 어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용신의 등불이라고 떠받들기도 하고, 귀신이라며 두려워하기도 했다. 한때는 야츠시로해는 그의 이름을 따 시라누이해로 불리기도 했다. 게이코 천황의 군대 앞에서도 그는 규슈의 생명을 해치는 그들에게 분개해 불을 일으켰다. 뭐, 나중에는 겁이 나서 끝없이 도망쳤지만.

그러나 이성과 계몽에 취한 시대가 오자 인간은 그를 분석하여 정의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학자’라는 자들에 의해 요괴 시라누이는 요괴가 아니라 광학현상, 신기루의 일종의 되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시라누이를 요괴로 대하지 않았다. 경외하지 않고 그저 어선의 불빛과 바다의 찬 기운이 우연에 의해 맞아 떨어져 생긴 자연현상의 일종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마음을 돌려버리면서 요력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시라누이는 규슈를 대표하는 요괴였고, 일본의 여러 요괴 중 강함으로는 손에 꼽을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50, 60년대 수은 유츨로 바다가 병들고, 대대적인 간척 사업으로 바다가 메워지고, 도심과 어선의 불빛이 강해지면서 시라누이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 요괴면서 바다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그는 고향을 잃었고, 더 밝은 불빛에 자신의 불을 잃었다. 야츠시로해가 줄어든 날, 시라누이는 마지막 불을 일으키면서 생각했다. 이제 규슈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구나,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떠밀리듯이 밀려온 시라누이가 정착한 곳은 도쿄였다. 도쿄 만은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의 가게에 폭죽과 간식거리를 사러 왔고, 시라누이는 그들이 피우는 미약한 불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렇게 점차 고향을 잊어가던 중, 시라누이는 규슈에서 온 한 요괴로부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야츠시로해 부근에 있는 한 마을에선 매년 음력 8월 1일에 시라누이 축제를 하는데, 그것이 올해로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그래서 무조건 9월 3일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구나.”

미즈키는 핸드폰으로 달력으로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음력 8월 1일은 9월 3일이다. 시라누이가 부탁이 있다며 집에 들이닥친 날이 8월 29일이었으니, 그렇게 떼를 쓰던 이유도 얼추 납득이 되었다. 시라누이는 뒷좌석에 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에게 미안하군. 전성기였다면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더군다나 내 주변에 대중교통이나 운전에 해박한 자가 미즈키 공밖에 없어서 그랬네.”

“어어, 그렇겠지.”

미즈키는 하루 만에 산을 넘고 현 두세 개를 넘어 들락날락하는 요괴들의 이동 능력을 생각하며 대꾸했다. 애석하게도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다는 것 외엔 모든 부분에서 인간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미즈키는 그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요괴가 지금은 고향을 잃고 신앙을 잃어 인간에 가까워 졌다니 조금은 안쓰러웠다.

게게로는 뒷좌석에 타자마자 지난 밤에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물었다.

“흠, 그런데 올해가 끝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아, 그 마을이 재개발인지 뭔지에 들어간다고 하더군.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고….”

최근 일본 곳곳, 구도심과 시골 중심으로 재개발과 신도시 건설 붐이 일고 있다는 건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미즈키의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도 종종 자기들 마을이 재개발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니, 신도시의 멘션 값이 얼마나 올랐다느니 하면서 대화에 열을 올리곤 했다. 그의 동네도 몇 년 전에 낡은 건물을 허물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으나, 그의 집 주변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아무런 터치도 받지 않고 넘어갔다. 심령 스팟으로 유명한 것도 나름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거 아닌가, 인간이 사는 마을을 갈아엎고 완전히 새로운 마을을 만든다는….”

아는 단어가 나오자 게게로가 신나게 주절거렸다. 어어, 그렇다는군. 시라누이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미즈키의 살벌한 시선을 받고 손가락을 내렸다.

“낡으면 그냥 낡은 대로 살면 되지, 왜 굳이 다 부서뜨리고 새로 만든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너희야 그냥 살아도 문제 없지만, 인간은 낡은 집 때문에 다칠 수도 있거든…. 그리고 뭐, 무엇보다 돈이 되니까.”

“집을 허물고 세우는 데에도 돈이 들어가는데?”

“그 집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잖아. 원래 살던 사람들도 퇴거 조건으로 돈을 받기도 하고. 무엇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그래서 일부로 재개발이 예정된 동네로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어.”

흠, 하고 시라누이는 팔짱을 꼈다. 인간은 그렇게 계산을 하는군. 시라누이는 아직도 인간에 대해 배울 게 많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게로는 미즈키와 시라누이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돈을 위해 살던 사람을 쫓아내고 그들의 집을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따르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하던 게게로는 운전석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물었다.

“미즈키여, 만일 자네의 집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어 나가야 한다고 하면 어찌할 겐가? 자네도 다른 인간처럼 돈을 받고 나갈 텐가?”

“뭐? 내 집인데 왜 나가. 안 나갈 거야. 집을 통째로 들어내서 산속으로 간다면 모를까.”

“진심인가?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고, 돈도 받을 수 있는데?”

“아니,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지.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 인간도 요괴도 다 똑같아. 추억이라는 게 있잖아.”

미즈키가 게게로에게 설명하면서 던진 ‘고향’이라는 단어에 시라누이는 우수에 젖은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고향이라, 그렇지. 시라누이는 점차 쿠마모토와 가까워지는 차에 앉아 그 시절을 떠올랐다.

새벽녘이 되면, 그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배마다 켜놓은 등불은 마치 수평선을 따라 춤추는 도깨비불처럼 보였고, 축제를 준비하는 활기찬 생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라누이가 불을 두 개, 세 개씩 쳐다 바다를 빙 두르듯 도깨비불을 피우고 춤을 추면 인간은 시라누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풋내기 어부는 그를 보고 놀라고, 그를 삼사십여 년 간 지켜본 나이든 어부는 또 왔다고 반가워하기도 했다. 야츠시로해와 아리아케해에 사는 인간들은 그를 두고 용신이 뭍으로 올라올 때 길을 밝히는 등불이라며 시라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라누이를 반기는 이는 인간만이 아니었다. 바다의 요괴도, 뭍의 요괴도, 하늘의 요괴도 그를 좋아했다. 규슈와 쿠마모토에 사는 모든 요괴는 그를 어버이처럼 따랐다. 그 땅에서 시라누이는 가장 오래된 요괴였고, 모두의 보호자였으며 모두를 안아주는 다정한 불이었다. 시라누이가 곧 규슈인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라누이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단지 달이 떠오르고 물이 차오를 때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어선이 켜놓은 등불이 좋았고, 그를 아끼는 이들이 좋았다. 바다의 품안에서 나고 자라 바다로 나가는 어촌 인간의 숙명을 사랑했고 태양볓에 그을린 그들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윤슬처럼 환한 미소가 좋았다. 거친 환경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규슈의 요괴와 인간이 좋았다.

그때가 그립다. 그때처럼 다시 인간과 요괴와 손을 잡고 춤추고 놀았으면 좋겠다. 시라누이는 눈을 감았다.


쉬다 가다를 반복하니 반나절 만에 도착했다. 강도 높은 운전을 무사히 마친 미즈키는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유카타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이불 위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너희끼리 마음껏 돌아다녀라, 그 말과 함께 카드를 쥐여주고는 곯아떨어졌다. 게게로는 천금을 얻은 아이처럼 미즈키의 카드를 들고 기뻐서 빙빙 돌며 말했다.

“시라누이! 야쿠시마! 야쿠시마에 가보세! 그곳의 숲에서 요력을 충전하면 금방 차지 않겠나!”

최근 미즈키의 집에서 『모노노케히메』를 보다가 야쿠시마의 숲을 닮았다고 하니, 게게로가 눈을 빛내던 것이 떠올라 시라누이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영화처럼 시시가미도 모로도 산도 없지만, 코다마를 비롯해 숲 요괴가 잔뜩 있는 곳이다. 영화 개봉 이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들었는데, 그곳만은 과거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심 섞여 있었다.

시라누이는 나가기 전 미즈키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고, 미즈키는 됐으니 재미있게 놀다 오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잠에 들었다. 게게로는 미즈키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야쿠시마의 숲 요괴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시라누이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령족 나리, 규슈에 온 적이 없나?”

“그러하네. 나는 날 때부터 기나이오늘날 일본의 긴키 지역. 나라, 오사카, 교토, 효고 일대를 가리킨다에 쭉 머물렀으니 말일세.”

“기나이라, 그러면 이와코 아씨도 기나이에서 만났나?”

“오, 그렇다네. 지금의…, 어디 보자, 그래. 고베 시에서 만났지. 막 새싹이 올라오는 늦봄에 그를 만났는데….”

일정을 짜다가 이와코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화제는 그쪽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저거 날이 샐 때까지 아내 이야기만 하고 있겠네. 미즈키는 잠결 속에 게게로가 들뜬 목소리로 풀어놓는(미즈키도 시라누이도 이미 서른네 번 정도는 들은) 아내와의 만남을 들으면서 몸을 틀었다.

결국 게게로의 끝없는 아내 이야기 탓에 그들은 야쿠시마에 가지 못하고 새 날을 맞이했다. 게게로는 동이 트자마자 미즈키를 붙잡고 흔들었다.

“미즈키여, 벌써 해가 떴다네. 자네도 같이 야쿠시마에 가서 숲의 정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온천욕을 즐기는 게 어떠한가!”

“내가 간조 때마다 즐겨 찾던 온천이 하나 있지. 소개시켜주마.”

“으으…, 아직 새벽이잖아…. 조금만 더 자자.”

“미즈키여어!”

미즈키가 얼굴을 구기면서 하소연을 했으나 게게로도 물러날 생각을 안 했다. 결국 미즈키는 발을 들어 게게로를 한 번 찬 다음 평온하게 새벽잠을 즐겼다. 게게로는 무슨 짓을 해도 깨지 않는 친우에게 서운할 뻔했으나, 반나절 동안 좁은 곳에 앉아 온 신경을 세운 채 운전을 해서 피곤할 것 같다는 시라누이의 말에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다시 미즈키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발가벗겨진 채 온천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우와아악?!”

“오, 어떤가 미즈키. 시라누이 공이 추천해준 곳이라네. 극락이지 않은가?”

“여기도 사라졌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 건재하군. 오, 그대들도 온천욕을 즐기러 왔는가. 이쪽은 유령족 나리이고, 또 저쪽은 내 이웃인 미즈키 공이라고 하네.”

“게게로오――!”

미즈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곤노곤하게 풀려 있는 게게로를 한 대 쥐어박았다. 게게로는 피로에 절어 있는 미즈키를 위해 잠든 사이 온천으로 데려온 것이라고 항변했고, 또 한 대 맞았다. 두 사람이 싸우든 말든, 시라누이는 오랜만에 만난 원숭이 요괴 가족들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미즈키가 게게로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라누이?”

“음,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설마 야쿠시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겐가?”

“아, 심각한 일은 아니야. 최근에 집중호우 때문에 고목 몇 개가 부러진 모양이더군.”

“그거 심각한 일이잖아. 나무가 쓰러질 때 아래에 있으면 얼마나 크게 다치는데!”

미즈키는 전쟁 시절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라누이는 ‘다들 요괴니까 괜찮다’고 대꾸한 뒤 원숭이 요괴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다들 무사하지만 그렇게 쓰러진 나무들이 요괴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모양이군. 우리더러 그것들을 처리해 주었으면 한다는데?”

“뭐, 나무 치우는 거야 별 일 아니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하라고?”

“나무를 위해 장례식을 치뤄 달라는군.”

“음, 그러면 온천욕이 끝나자마자 숲으로 달려가야겠군.”

게게로는 자연스럽게 다음 일정에 야쿠시마를 넣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고대삼림을 보게 되는군. 미즈키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시라누이가 첨언했다.

“보답으로 이들이 빚은 술떡을 주겠다는데.”

“어서 가자.”

미즈키가 다시 일어나 수건을 집어들었다. 하여간 맛있는 음식과 술에 사족을 못 쓰는 사내로고. 바로 온천을 나가 몸을 닦는 미즈키를 보고 고개를 젓는 게게로도 이미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참 쉬운 녀석들이야…. 시라누이는 원숭이 요괴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원숭이가 따라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받아주었다.

야쿠시마의 숲은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신의 숲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굵직한 삼나무가 하늘을 가려 숲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이리저리 뻗은 뿌리는 타인의 출입을 쉽게 허가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숲속엔 여러 희귀한 요괴가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시라누이를 반기다가도, 뒤따라오는 낯선 요괴와 인간을 경계했다. 시라누이가 자신의 친구라고 말해도 그들은 시라누이 뒤에 숲어 그들을 감시했다.

미즈키가 생각한 대로 고목을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나무 장례에서 미즈키가 한 일이라고는 그럴 듯한 제문과 축문을 쓰고 낭송한 다음 그것을 태우는 일이었다. 힘을 쓰는 일은 게게로가, 불을 쓰는 일은 시라누이가 맡았다. 공터에서 활활 타는 죽은 나무와 하늘 위로 날아가는 불티를 보면서 미즈키가 중얼거렸다.

“이 나무들도 환생이라는 걸 할까.”

“물론. 모든 생명에는 혼이 있고, 하물며 오래 쓴 물건에도 혼이 깃든다네. 이 나무들은 모두 2, 300년을 살았으니 정령이 붙어 있었을 걸세. 오랫동안 이 터를 지켜왔으니, 다음에는 축생이나 요괴로 태어날 수 있겠군.”

“그렇다면 다시 이 숲의 주민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네.”

미즈키는 나무의 명복을 빌어주며 담배를 꺼냈다. 시라누이가 검지를 세워 불을 붙여주었다. 거대한 연기 위로 실처럼 가는 연기 하나가 숲 위로 뭉실뭉실 피어 올라갔다.

답례로 받은 술떡을 먹으며 돌아가는 길에 미즈키가 물었다.

“게게로, 요괴도 환생이 가능해?”

“음, 보통의 경우라면 어렵지. 우리는 생물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존재이니 말일세. 하지만 다른 생물처럼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업을 쌓고, 염라는 그 업을 재어 우리의 다음을 결정하지.”

게게로는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유령족에게 다음은 없다네. 우리는 특수한 종족이라 지옥을 넘나들 수 있고, 사지만 멀쩡히 남아 있으면 지옥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네. 내 아내도 지옥에서 충분히 힘을 보충한다면 돌아올 수 있을 게야. 미즈키 자네가 거두어 묻어주었으니.”

이와코의 무덤 이야기와 유령족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해가 쨍쨍한 초가을인데도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미즈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와코가 돌아온 모습을 상상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면 셋이서 같이 살게 되려나….”

“암, 물론이지. 이와코도 자네를 좋아할 거라네.”

“엥? 아니, 난 너희 셋 말한 건데.”

“음?”

두 사람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서로가 말한 ‘셋’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게게로가 먼저 말을 더듬으며 항변했다.

“키, 키타로는 이미 독립했으니 부모들끼리 사는 거 아닌가!”

“아니, 너희는 가족이지만 난 객식구잖아? 그러니까 너희 셋이 같이 살고 나는 나가는 게 맞지 않아?”

“에잇, 어떻게 그렇게 되나! 자네도 우리랑 같이 살게나!”

“뭐? 무슨 그런 억지가 다 있어!”

“이미 70년이나 함께 살았는데 더 안 될 게 뭐 있나!”

억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시라누이는 홀로 우미노나카미치 행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야 미즈키와 게게로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헉헉대며 좌석에 앉아 뒷자리에 앉아 있던 시라누이가 고개를 내밀어 물었다.

“그래서 넷이 살기로 합의를 봤나?”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래! 아예 넷이서 같이 평생 살게나 미즈키!”

게게로가 순수하게 기뻐하며 말하길래, 미즈키의 입에서는 차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은 9월에도 각종 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푸른 유리를 닮은 꽃은 질 때가 되어 많지 않았지만 들판 가득 피어 세 사람을 맞이했다. 푸른 꽃을 넘어가면 자신의 계절을 맞이해 코스모스가 만개해 있었고, 그 사이로 여러 동물이 돌아다녔다.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의 또 다른 특징은 방목형 동물원이다. 특히 홍학이 유명한데, 최근에는 카피바라도 키우기 시작했다. 시라누이는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앵무새와 대화하다가 지나가는 카피바라를 발견하고는 미즈키에게 물었다.

“미즈키 공, 저…, 덩치 큰 쥐는 대체 무엇인가?”

“응? 글쎄?”

애석하게도 미즈키 역시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카피바라를 알아보진 못했다. 두 사람이 카피바라를 쓰다듬으며 정체를 토론하는 사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게게로가 팻말을 보고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카피바라라는 생물이군, 남미에서 왔다는데. 시라누이는 아쉽다는 듯 카피바라에게 말을 걸었다.

“남미 생물 말은 배운 적이 없는데. 그대와는 소통하지 못하겠군.”

그러고 보니 키타로도 곤충의 말을 일일이 배워야 소통이 가능했지. 언젠가 키타로가 참매미의 언어를 벼락치기 하는 것을 보고 게게로가 그러게 평소에 배워두지 그랬냐고 잔소리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미즈키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시라누이는 해변공원을 멀리에서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아주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군. 이곳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없는 모래사장이었는데. 인간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게 순식간에 변해버리는군.”

“그게 인간의 특성이니까.”

“그래, 명이 짧아 모든 것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종족이지.”

해변공원을 잔뜩 둘러보고 신이 난 게게로가 달려왔다. 미즈키는 그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주었다가, 게게로의 머리에 얹어진 형형색색의 화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학! 뭐야 게게로, 숲 속의 공주님이야?”

“인간 아이들이 만들었다네. 종이로 만든 꽃이라는군. 아름답지 않은가?”

“푸핫, 어울려 어울려.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님 같아.”

한참 폭소하던 미즈키는 갑자기 진지하게 자세를 잡더니 한 손은 허리 뒤에 대고 반대쪽 손은 정중하게 게게로에게 내밀며 고상하게 말했다.

“가실까요, 게게로 공주님.”

“네, 미즈키 기사님.”

자연스럽게 역할극을 하는 미즈키도 그렇지만, 천연덕스럽게 수줍어하며 받아주는 게게로도 참 장난을 좋아한다. 아니나다를까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배고프니까 빨리 가자, 찬성일세.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언덕을 내려갔다. 시라누이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청춘이구먼.”

점심을 먹고 온천 마을까지 알차기 즐기고 돌아오니 밤이 되었다. 미즈키는 야쿠시마의 원숭이들에게서 받아온 술떡을 꺼내오고, 게게로는 돌아오는 길에 시내애서 산 매실주를 꺼냈다. 금연실이라 담배는 피우지 못하지만 유루리가 있었다. 시라누이는 즉석 나베를 꺼내 냄비에 때려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나베 냄새를 배경으로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다. 먼저 기운차게 술을 넘긴 미즈키가 물었다.

“그럼 시라누이,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거야?”

“70년 밖에 안 되었네.”

“70년? 거의 키타로가 태어날 때잖아.”

“그때 간척사업이 대규모로 이뤄지기로 했고, 독극물이 섞여서 많은 바다 생물과 요괴가 죽었지. 탈출하지 않았으면 나도 죽었을 거야.”

시라누이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미즈키는 마음이 무거웠다. 50, 60년대에 규슈 지방 중심으로 퍼진 미나마타병은 도쿄에서도 화제였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규슈 출신을 피하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걸, 그도 많이 보았다.

시라누이는 나베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제 먹어도 될 것 같군. 그 말에 게게로가 먼저 국자를 집어 들어 제 그릇에 고기와 채소를 덜어냈다. 야, 치사하게 너만 먹으려고 하냐! 산처럼 쌓이는 건더기에 미즈키가 화를 내면서 바로 국자를 낚아챘다. 미즈키도 양껏 덜어간 뒤에야 시라누이는 국자를 쥘 수 있었다. 국물을 가득 담아간 시라누이는 술을 홀짝이면서 중얼거렸다.

“가끔은 내가 떠나지 말았어냐 하나, 생각하네.”

“음?”

이렇게 맛이 깊은 매실주는 처음이라고 헤실대던 게게로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별 것 아니라면서 시라누이는 쓸쓸한 낯을 띄고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네. 내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요괴인데, 내가 떠나서 이곳의 요괴가 힘이 약해진 거 아닐까. 그래서 그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 거 아닐까. 하는 생각.”

시라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따르던 미즈키는 하마터면 술을 낭비할 뻔했다. 겨우 손을 멈추고 잔을 보니 술이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미즈키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입술만 내밀어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쪽 빨아 마셨다. 그가 엉성한 자세로 술을 마시는 동안 게게로는 벌개진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시라누이, 그대가 살아 있기에 규슈의 요괴들도 살아 있지 않겠는가.”

게게로가 잔을 내려놓았다. 미즈키와 시라누이는 손을 멈추고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게게로는 취기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상체를 흔들거리면서도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규슈의 기현상이라고 불리는 그대가, 규슈를 떠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규슈의 요괴도 미약한 힘으로나마 살아있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그대가 규슈를 떠나지 않았으면 모든 바다와 산이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네.”

모든 것은 결과론이라고 말한다. 결과가 좋지 못하면 노력도 무의미하고 당시 최선이라 여겼던 선택도 무가치하다고. 인간이 환경을 해쳤고, 요괴를 규명하고자 했다. 시라누이는 규슈를 떠났고, 규슈 요괴의 힘은 약해졌다. 그 사이에 어떤 인과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규슈는 약해졌고, 아직도 살아 있다. 그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살아가고 있다.

시라누이는 주홍빛으로 물든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인간으로 인해 터전과 아내를 잃은 두 요괴 사이에서 미즈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나베와 술을 흡입했다.


너무 많이 마셨어. 미즈키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게로가 숙취에 좋다며 내민 잔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 한 모금 마셨다가 미즈키는 물을 토해내며 거친 기침을 터트렸다. 숙취에 좋기는 개뿔, 매실주잖아! 어제 자신을 죽일 뻔한 매실주를 빤히 쳐다보다가 미즈키는 호통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게로오!”

“술독은 술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얌마! 너 진짜 나를 죽이려고!”

새벽 세 시까지 술과 안주를 퍼마시고 기절한 사람답지 않게 아침부터 두 사람은 여관방을 돌아다니면서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둘이 합쳐 400살이 훨씬 넘는데도 시라누이는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 속으로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즈키가 알았으면 자신들은 이미 백 살이 넘었으며 귀엽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구구절절 잔소리를 늘여놓을 생각이었다.

냉수 샤워로 술기운을 몰아내고 최대한 정갈한 모습으로 나온 미즈키는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은 게게로를 빤히 쳐다보다가 옷이라곤 그것만 챙겨왔냐는 식으로 딴죽을 걸었고, 둘은 몇 번 더 실랑이를 벌이더니 갑자기 새옷을 사자며 기모노 전통 시장으로 향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전통 시장에는 사람도 많고, 가게들도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즈키는 게게로를 끌고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하며 옷을 골랐다. 이 와중에도 게게로와 미즈키의 미감이 달라 신경전이 이어졌다.

“흠, 미즈키. 그 격자무늬보다는 이 학 무늬가 좀 더 낫지 않겠나?”

“너 지금 줄무늬 무시하냐?”

“하긴, 미즈키의 옷장에도 줄무늬 셔츠가 한가득이지.”

그렇게 서로의 패션 센스를 한참 까내리면서 미즈키와 게게로는 각자 한 벌씩 구매했다. 시라누이에게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기모노는 필요 없고 가면을 하나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다행히 전통 시장 구석에 가면을 같이 파는 곳이 있었다. 어서오세요, 하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던 점장은 시라누이를 보고는 갑자기 화색이 되었다.

“어라! 시라누이님 아니십니까! 건강하셨습니까?”

“오, 자시키와라시! 그대도 잘 지냈나.”

자시키와라시와 시라누이는 친근하게 포옹하고는 근황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요괴는 시라누이가 떠난 뒤에도 그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이곳에서 살아내고 있었다. 자시키와라시는 삼십 년 전 자신이 수호하던 집안이 대도시로 떠난 이후 이곳 전통 시장에서 종이 공예품을 팔면서 근근히 지냈다고 한다. 그는 시라누이의 근황을 듣고는 미즈키와 게게로를 훑어보면서 감탄을 뱉었다.

“이야, 유령족 마지막 후예랑 인간이 같이 산다니, 이거 참 신기한 일인데요?”

“나도 처음에 요괴들로부터 들었을 때는 놀랐지. 인간이 유령족에게 한 일이 있으니 말일세.”

‘인간이 유령족에게 한 일’,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즈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게게로가 바로 미즈키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변호했다.

“미즈키는 그런 인간들과 다르네!”

“네에,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죠.”

자시키와라시의 말투는 빈정대는 듯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수호하던 집안의 사람들이 좋은 이들이었나 보다.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집 사람들과는 여전히 연락이 됩니까?”

“응? 아아, 우리 도련님? 당연하지! 꼭 달마다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거든. 막내가 벌써 대학 졸업한다고 하더라.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

요괴가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니 기분이 묘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요괴는 다 인간과 비슷한 시간 감각을 가지게 되는 걸까. 미즈키는 게게로를 슬쩍 바라봤다. 이 녀석도 나와 지낸 70년이 엄청나게 길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시라누이는 자시키와라시에게 가면 두 개를 부탁했다. 그는 하얀 너구리 가면과 붉은 여우 가면을 꺼내더니, 미즈키를 보면서 물었다.

“형씨는 안 필요하십니까? 여기 까만 토끼 가면이 어울릴 거 같은데.”

“토, 토끼?”

미즈키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토끼라니, 개나 너구리라면 모를까 한 번도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동물을 추천받았다. 미즈키가 답을 못하고 버벅거리니 시라누이가 의견을 더 묻지도 않고 토끼 가면까지 합해 계산해버렸다. 자시키와라시가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시라누이에게 물었다.

“시라누이님도 축제에 오시는 거죠?”

“그래. 그것 때문에 저 둘에게 부탁해서 온 거야.”

“다른 요괴도 많이 올 겁니다. 마지막 어촌 마을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자시키와라시는 가게 밖으로 눈을 돌렸다.

“재개발이 끝나고 축제가 다시 이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애석하지만 모두가 어슴푸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자시키와라시가 일부로 밝은 낯으로 축제 때 보자고 했으나 가게에서 나온 시라누이의 얼굴은 어두웠다. 위로는 내 전문 영역이 아닌데, 미즈키는 곤란한 눈으로 게게로를 쳐다봤다. 게게로도 똑같은 눈빛으로 미즈키를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막막한 기분 속에서 미즈키는 괜히 가면만 만지작대다가 헛기침을 했다. 모르겠다, 별 쓸데없는 소리라도 해야지. 미즈키는 일부로 들으라는 듯이 과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흠, 그런데 토끼가 정말 나한테 어울리나?”

“당연히 어울리지. 자네는 키가 좀…, 그렇지 않은가.”

곧 다 큰 성인 둘이 나잡아 봐라 하면서 필사적으로 시장 바닥을 뛰어다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미즈키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토끼 가면을 휘두르며 시라누이를 뒤쫓아갔고, 시라누이는 붉은 머리카라을 불꽃처럼 흩날리면서 가볍게 뛰었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게게로는 미즈키가 준 용돈으로 당고를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장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구마모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니 금방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축제가 열리는 어촌 마을은 숙소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그들은 잠시 숙소로 돌아가 차레로 목욕을 마치고, 시장에서 산 유카타로 갈아입었다. 미즈키는 여전히 토끼 가면에 불만이 있었지만, 별 수 없이 입술을 비죽이면서 가면을 머리에 얹었다. 익숙하게 가면을 쓰는 게게로와 시라누이를 보면서 미즈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요괴는 인간 축제에 가면을 쓰고 들어가는 거야?”

“우리의 정체를 가면으로 가리는 걸세. 대부분의 인간은 요괴를 인지하면 정신적으로 부담이 오니까.”

“더군다나 요괴란 족속은 노는 걸 좋아해 인간 마을에 축제가 열리면 너도나도 몰려드는데, 인간들이 모두 쓰러지면 어떡하겠나. 그러니 이렇게 정체를 가리고 활동하는 것이지.”

꽤나 일 리 있는 말이라 미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구라 마을의 숲에 들어갔다가 쿄코츠에 의해 광화된 요력에 짓눌려 실신했으니까. 미즈키는 그러나 여전히 제 가면에 불만이 많았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 왜 토끼냐고.”

“음, 인간은 약하니까?”

“진짜 한 대 맞을래.”

미즈키가 장난처럼 주먹을 들어올리자 시라누이가 깔깔 웃으면서 몸을 화염으로 바꿔버렸다. 비겁한 자식, 미즈키는 혀를 차면서 먼저 현관으로 나갔다. 게게로가 게다를 신는 미즈키의 어깨에 턱을 얹으면서 중얼거렸다.

“축제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마지막으로 간 게 80년 전 아내와의 데이트였는데.”

“그럼 지난 달에 도쿄 만에서 본 오봉맞이 불꽃놀이는 뭔데.”

“그걸 축제라고 할 수 있나. 자고로 축제란 맛있는 음식과 놀이가 가득해야 하건만.”

마당을 쓸고 있던 주인이 호려하게 갖추어 입고 밖으로 나가는 일행을 보고 축제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오늘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축제를 간다며, 즐기고 오라는 덕담을 해줬다. 미즈키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안 가십니까?”

“나는 방 청소 끝내고 조금 느지막하게 가려고요. 마을 주민들끼리 보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는데, 안 가면 섭섭하지요.”

사실 이곳, 내년엔 재개발에 들어가서 11월까지 모두 나가야 하거든요. 주인은 씁쓸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돌아올 수 있을까요, 다시 축제가 열릴까요, 미즈키는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대신 한 사람은 시라누이였다.

“다시 축제가 열릴 수 있을까요.”

“글쎄요, 타지인이 더 많아진다면 어려울지도…. 어머나, 이제 보니 규슈 말씨네요. 혹시 고향이?”

“여깁니다. 야츠시로 시요.”

시라누이가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주인은 반가워하며 시라누이의 팔을 잡았다. 어머나, 그럼 고향에 오신 거네요. 재개발로 사라져서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거 때문에 오신 건가요? 주인의 질문에 시라누이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서요.”


축제는 슬프기보단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다들 소시지나 사과사탕, 구운 오징어 등을 입에 하나씩 물고 있었다. 아이들은 금붕어를 잡아달라고 부모에게 조르거나 다트 게임 등에 빠져 있었다. 여기저기 신기한 음식을 팔고 있었고 다양한 체험 부스도 있었다.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이들은 인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요괴였다.

시라누이가 다른 요괴를 만나러 간 사이, 자시키와라시가 미즈키와 게게로를 불렀다. 그는 중년 남성과 같이 서 있었다. 자시키와라시가 남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소개했다.

“자, 얘가 우리 도련님 소짱!”

“자시키와라시! 내가 이제 나이가 몇인데…, 코바야시 소이치로라고 합니다.”

“미즈키입니다. 이쪽은 게게로고요.”

“이 사람들이 방금 내가 말했던 시라누이 이웃! 여기까지 데려와줬대.”

“시라누이? 정말 시라누이가 존재한다고?”

“얌마! 그럼 자시키와라시도 있는데 시라누이라고 없겠어!”

자시키와라시의 너스레에 코바야시 씨가 웃었다. 자시키와라시는 인간에게 학대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별명으로 부르고 서로 근황을 주고 받을 정도면 다행히 사이가 좋았나 보다. 코바야시는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는 본 적 없지만, 아버지는 매일 밤 어획을 나갈 때마다 시라누이를 보셨다고 합니다. 갑자기 수평선이 환해지면서 도깨비불이 늘어져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셨죠.”

코바야시는 야츠시로의 다른 친척을 보러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절묘한 타이밍에 시라누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미즈키가 코바야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시라누이는 먼산을 바라보더니 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있었지. 자시키와라시의 가호를 받는 코바야시라는 배. 규슈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라도 나를 보면 신기해하거나 겁에 질렸는데, 그 배의 인간만은 달랐어.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

갑자기 대로가 떠들썩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주황색 용 탈을 쓴 행렬이 꿈틀대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종이 탈 안쪽이 환한 게 전구를 달아둔 듯하다.마치 진짜 용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들은 솟구치거나 꿈틀대다가, 구경꾼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아이들을 놀래키곤 했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뒤로 비슷하지만 디자인이 다른 용탈이 따라왔다. 자시키와라시가 말했다.

“아, 이제 시작했군.”

“저게 뭡니까?”

“시라누이가 용등이라고 불렸다고 했죠? 거기에서 따온 건데, 우리는 ‘용등 행렬’이라고 해요. 7~8 팀이 용 탈을 만들어서 그 안에 전구를 넣고 지나가죠. 그중 가장 멋진 탈을 뽑아서 경품을 주는 게 이 축제의 대미죠.”

아이들이 용탈에 손을 내밀면서 웃고 있었다. 용탈 안에 있는 사람들의 즐거움도 함께 느껴졌다. 네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용등 행렬을 끝까지 바라봤다. 게게로가 웃으면서 시라누이를 바라봤다.

“축제는 끊기더라도, 시라누이는 잊히지 않겠군. 모두가 자네의 모습을 끝없이 후세에 전하고 있으니.”

“맞아요. 시라누이님은 지금 여기 없지만, 저희에게 시라누이님은 규슈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요괴인 걸요.”

자시키와라시도 거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미즈키가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시라누이에게 종이백 하나를 건넸다.

“다행이네, 시라누이.”

조심스럽게 안을 열어보자 불꽃 모양이 새겨진 곰방대 하나가 있었다. 미즈키는 멋쩍어하며 턱짓으로 노점상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에서 팔고 있더라고. 온통 네 문양이었어.”

깔깔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곳곳에 걸린 등불과 용등 행렬, 시라누이의 도시라고 과시하듯 물건 곳곳에 새겨진 불꽃 문양.

시라누이가 떠난 뒤에도, 이곳은 시라누이의 땅이었고, 항상 그럴 것이다.

“그래, 다행이야.”

시라누이는 곰방대에 담배잎을 채워 불을 붙였다. 기분 좋은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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