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0.0 프롤로그

필링필링(Pilling Feeling)

망상요람 by ZZERO
7
0
0

히어로 기관 스푼.

동물이 사람이 되어 사회에 받아들여진 영물과 기상천외한 능력을 쓰는 특기자들이 등장하는 세상 속에서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다. 물론, 가까이 들여다보면 공공기관의 셔틀이 보이기는 하지만, 전 직원이 고작 100여 명 남짓하긴 하지만…. 어쨌든 번듯한 히어로 기관이라는 거다.

그 기관의 출퇴근 시간에는 늘 진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모든 사원이 줄지어 한 사람과 악수를 하며 오고 가는 것. 지겨운 아침, 무기력에 찌들어 가던 사원도 그 사람과 손을 잡고 나면 눈에 총기가 들어온다. 트리플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보다도 확실한 효과였다.

“오늘도 다들 파이팅~”

그리고 그런 사원들을 양산해내는 바로 그 사람은, 꿀을 녹여 실로 짜낸 듯한 금발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순하게 눈을 접어 올리는 모습, 자그마한 체구, 귀여운 소형견이 떠오르는 외양. 덤으로 안경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 얼굴은 처음부터 그렇게 타고난 것처럼, 예쁜 미소를 그린다.

줄이자면, 대놓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타냐쌤!”

“아, 리사 씨! 휴가 다녀오셨죠?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떠세요?”

“몰라요, 타냐쌤이 너무너무 부족했어요….”

자, 잡아요. 오늘은 특별히 더 오래 가게 해드릴게요. 앗싸!

…그런 대화가 오가는 평화로운 시간이 끝나고, 로비가 텅 비면 스푼의 ‘타냐쌤’은 자리를 정리한다. 오전 10시, 그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늦지 않게 의료실로 복귀해야 했다.

“올라가십니까?”

“네, 이제 저도 업무 봐야죠. 오늘도 힘내세요!”

그 와중에도 그는 장난스럽게 파이팅 포즈를 취한 뒤 로비를 지키는 세 형제의 손도 한 번씩 잡아주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렇게 긴 치맛자락이 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로비에는 비로소 정적만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상담실로 올라가는 길에도,

“타냐쌤, 복귀하세요?”

“이거 드실래요? 이따가 잘 부탁해요!”

인사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쏟아지는 인사만큼이나 개인 상담실 앞의 진료 일정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한 달 단위의 달력이 꽉 차 있는 모습을 보고도 웃어넘긴 그 사람은 이내 상담실로 들어가 포근한 빛의 조명에 불을 켰다. 포근한 빛의 조명이 투명한 석류색의 눈동자에 달을 띄운다.

“제이씨, 들어오세요-”

그 사람은, 스푼의 심리 상담사다.


나가는 스푼이라는 히어로 기관에 스카우트된 지 이제야 일주일째인 신입사원이다. 그런 거치곤 첫날부터 마약 거래 현장에 초등학생과 함께 보내지긴 했지만, 베테랑이라던 사사 선배를 구해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래도 나름 절차는 있었는지, 그 후로는 내내 능력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나가는 이렇게까지 능력을 활용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마냥 신기했다. 물론 지금도 능력의 10%도 발휘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어쨌든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보고 있자니 꽤 즐거웠다.

그래서 나가는 옆에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뀨뀨 거리는 귀능(자신을 서장님의 비서라고 소개한)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제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 일단 여기서 좀 쉬고 다시 해봅시다. 박카스 마실래요?”

“아, 네.”

“귀능아.”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가를 스카우트할 때 그 구린 TV 광고에서 나온 목소리… 스푼의 서장, 다나였다.

“서장님~”

“아, 안녕하세요.”

“테스트는 안 하고 농땡이 중이었냐?”

“아뇨~ 잠깐 쉬는 시간이었어요.”

이 사람이 다굴은 히어로의 종특이라고 했던 그 사람…

어쩐지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나가는 자신의 직감(이라기엔 누구나 내릴 법한 판단이었지만)을 따르기로 했다. -서장씩이나 되는 직책이면 일반 사원인 나랑 엮일 일도 없겠지?

“흠…. 나가야, 혹시 지금은 텔레포트 못하냐?”

“아뇨, 할 수 있는데…”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리고 스푼은 보통 콩가루인 게 아니었다.

-젠장, 오늘은 더 못 한다고 할걸!

“결석계 써줄게. 내일은 학교 가지 마라.”

하지만 나가는 곧 결석계에 낚인 물고기가 되어 희희낙락하며 다나의 뒤를 따랐다. 빈약한 직감보다는 내일의 휴식이 중요했다. 어차피 잘 거, 수업 시간에 혼이 나가며 조는 것보단 합법적으로(!)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바로 가는 게 아닌가요?”

“어. 데려갈 사람이 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처럼 바로 출발하는 게 아니었다. 나가를 두고 굳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다나. 그곳에는 의료실이 있었다. …의료실? 이쪽은 처음 오는 것 같은데…. 아직 의료실 위치도 모르는 나, 이대로 괜찮은가? 나가는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잠자코 걸어갔다.

‘상담실’

상담실?

고등학생인 나가에게 떠오르는 건 유명무실한 또래 상담실, 혹은 담임과 함께하는 진로 상담 시간 정도의 이미지였다. 있긴 하지만 별로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는 소리다. 여기도 직원 복지 차원으로 있는 건가, 신기하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른바 꿀보직일 것 같… 그렇게 나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문이 활짝 열렸다.

“서장님?”

-그리고 나가는 처음으로 이상형을 보았다.

“타냐, 이번에 같이 가야겠는데.”

“아, 갑자기 현장인가요? 어쩌지, 오늘 레인 씨 상담은 금요일로 미뤄야겠네요. 전해드리고 올게요.”

“아니, 귀능이 전달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출발하자. -나가야.”

“네? 네…”

생각도 못 한 미인의 등장으로 반쯤 굳어 있던 나가는 다나가 부르고 나서야 겨우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어진 텔레포트. 익숙한 효과음이 들렸다.

와씨, 좀 까칠하기만 하면 완전 이상형….

나가의 잡생각에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초면이죠?”

“앗, 넵.”

“전 타냐라고 해요. 스푼의 심리 상담사죠. 편하게 타냐 씨나 타냐 선배라고 불러도 돼요.”

“타냐는 믿을 만한 상담사다. 혼자 이상한 생각할 바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바로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네? 네…. 전 나가라고 합니다.”

“서장님도 참, 그렇게 띄워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렇게 타냐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고, 어색한 분위기로 통성명한 두 사람. 배경에 서 있던 다나가 덤으로 조언을 얹었지만, 별로 와닿지는 않는 말이라 나가는 대충 귓등으로 들어넘겼다.

“그래도 나가 군,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매일 5시부터 6시까지는 자유 상담 시간이거든요.”

“네….”

그야,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는걸.

평범한 고등학생인 나가에게 고민이라고는 어떻게 투시 능력을 조절해야 사람의 인체 내부까지 투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도였다. 심리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거창한 고민이 생길 리가 없었다. 아, 물론 이런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몇 번 정도는 가봐도 좋을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다나는 곧 나가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실종된 여고생이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치여 죽은 사건이다. 처음엔 우연한 사고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다섯 번이나 반복될 리가 없으니…. 유력 용의자도 있고.”

“다섯 번?!”

생각보다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그 사건 현장이라면 당장 이곳에서 타의에 의한 끔찍한 교통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금강불괴의 특기를 가진 다나와 투시, 텔레포트, 염동력의 특기를 가진 나가가 이 자리에 온 이유가 있었다.

-어, 그럼 타냐 선배는 여기 왜?

나가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여고생에게 마약을 먹이고 차에 치여 죽게 하는 악취미적인 범죄자를 잡으러 온 현장에 타냐를 데려온 이유는 뭐란 말인가? 혹시 자신이 모르는 어떤 특기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랬다면 보자마자 그렇게 소개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가를 두고,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주로 피해자로 보이는 실종된 여학생에 관한 얘기였다. 이름이며 나이를 묻고는, 안타까워하는 타냐의 모습은 그마저도 그림 같았다.

“그런데, 타냐 선배는 여기 왜….”

“어, 저기 저 사람 아닌가요?”

“가라, 나가.”

“넵.”

그리고 시작된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신호하면 뛰어드는 거야, 알겠지? 차에 치이는 게 총 맞는 거보단 살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지? -자, 뛰어!’

납치한 여고생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말하는 미친 범죄자의 목소리를 타냐가 발견하고, 그에 나가와 다나가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부아아앙-

팟,

“괜찮으세요?”

“어… 어…?”

나가가 텔레포트로 여고생을 구조하고, 다나가 범죄자를 조지는 완벽한 호흡이었다. 물론 타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저 짝짝 손뼉을 치다가 상황이 얼추 정리되고 나서야 다가오는 것이다. -대체 왜 온 거지? 나가는 더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피해자 케어는 부탁한다. …혼자 스푼으로 올 수 있겠어?”

“네? 당연하죠. 사람도 드물고…. 정 안되면 연락할게요.”

“? ??”

“나가 군, 조심해서 들어가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경찰서까지 학생과 동행하는 타냐를, 나가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보통 회사 소속 심리 상담사가 저런 일까지 도맡아서 하던가? 그냥 스푼 사원 복지 차원에서 있는 인력이 아니었나? 그래서 무슨 특기가 있는 거지?

설명이 필요했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나가는 의문을 접어두었다.

그런 의문보다는 퇴근이 더 중요했으니까!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