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절반쯤 해결된 이야기

14~20화 분량.

1

끔뻑, 끔벅.

어쩐지 눈꺼풀이 무겁다. 눈꺼풀뿐만 아니라 몸도 무겁다. 바다에 잠수한 듯 그런 기분이다. 물에 젖은 솜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환자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간호사분이 놀란 얼굴로 너스콜을 눌렀다.

“미네타 미노루 환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어라. 뭔가, 상황이 이상한데.

 

2

신님은 바보.

인간의 마음 따위는 모르는 못된 신.

“으흐흑, 미노루~!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정말 걱정했단다!”

원장님이 엉엉 울면서 나를 껴안아 주셨다.

내가 올마이트와 츠카우치와 대면한 이후 닷새 만에 깨어났다고 했다. 깨어나지 못한 나를 제외한 다른 애들은 일찍 퇴원하며 나도 얼른 퇴원하라는 편지도 남기고 갔다고 한다.

퇴원한 애들과 달리 깨어나지 못하는 나는 입원해있던 병원에서 다른 큰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원래 있던 병원보다 크고 전문적인 의사가 있는 대학병원이라고 했다.

“미노루, 어디 아픈 곳은 없니?”

“네, 없어요.”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다, 그리 말하며 웃는 원장님을 보며 나도 웃었다.

 

올마이트 1

올마이트는 트루 폼의 모습으로 병실 문 앞에 서서 문틈으로 깨어난 아이, 미노루를 보다가 조심히 뒤로 물러났다.

근처에 온 김에 잠시 보러왔는데 아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잠깐 만나볼까 하는 심정에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가 닷새 전 깨어나지도 못하고 잠들어 있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런 아이에게 다짜고짜 문을 열고 머슬 폼으로 돌아가 저가 왔음을 알리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인 듯싶었다.

친우인 츠카우치도 되도록 혼자서 대면하지 말라는 전언을 남겼을 정도이니 올마이트는 결국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다.

그러다가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저를 지나쳐간 붉은 날개의 소년을 어디선가 본 듯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 소년이 자신이 들어가지 못했던 그 병실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것을 본 올마이트는 입을 떡 벌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병실 앞까지 되돌아가 병실 안의 상황을 살폈으나 올마이트 본인이 상상한 위험한 일은 없었고 그저 병문안을 온 것으로 보여 침착하게 다시금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보다 방금 옆구리에 뭔가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올마이트는 그걸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

“미노루는 병원이 아니라 밖에서 노는 게 잘 어울리는데.”

그 말에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으니 호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은 뒤에 내게 엔데버 인형을 안겨주었다.

“병문안 선물이야.”

아니, 괜찮은데. 그렇지만 거부하기도 뭐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히어로라는데 어쩌겠어. 이 망할 인간의 어느 부분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만히 엔데버 인형을 바라보니 호크스가 눌러보라는 시늉을 한다.

눌러보라고? 뭐지 싶어 엔데버 인형의 배를 꾹 눌러봤다.

[나는 히어로다!]

…….

와. 음성도. 들어간. 인형이네. (국어책 읽기 톤)

어쩐지 호크스가 되게 자신만만하게 ‘어때, 굉장하지?’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한 번 더 눌러보니 인형이 같은 대사를 읊었다. 같은 말만 녹음된 건가? 뭐, 아무렴 어떤가. 병문안 선물이라고 받았으니 소중히 여겨 주기로 했다.

“그래서 퇴원은 언제야?”

“잘 모르겠어. 원장님은 한동안 입원해서 의사 선생님이 퇴원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는 입원해 있자고 하셨어.”

흐응, 호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거기서 수긍을 하는 거야?

“미노루는 약하니까!”

뭐지? 놀리는 건가? 우씨, 하며 주먹으로 호크스를 때려봤으나 호크스는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이게, 진심으로, 때린 거야?”

호크스는 되레 놀란 얼굴로 맞은 팔뚝을 잡더니 떨리는 눈으로 나를 봤다. 왜, 뭐. 문제 있어? 어?

“……. 미노루. 밥 많이 먹고, 얼른 건강해지자.”

아니,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건데? 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내가 씩씩거리며 주먹을 휘두르자 그제야 호크스가 웃는 얼굴로 “농담이야~”하고 말했다.

 

4

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에서 내려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야 나는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나를 발견한 간호사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 걸어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가 연세 많은 어르신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놀거나 간식을 받아먹으면서 나름대로 병원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오오, 미노루야 왔니? 자, 어서 여기 앉으렴.”

치아코 할머니가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인사를 하며 다가가니 치아코 할머니가 내게 알사탕을 쥐여주며 저 망할 무로스케 할아버지를 처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사람이, 처리는 무슨 처리여! 미노루, 저이는 무시해라. 나한테 장기로 져서 승질이 난 참이거덩.”

“한 번쯤은 무르기로 해 줘도 되잖어! 미노루, 할미 몫까지 이겨 주려무나.”

“하하.”

뭐, 이런 느낌으로 나는 의자에 앉아서 무로스케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게 되었다. 치아코 할머니에게 받은 알사탕의 봉지를 까서 입에 넣고 기물을 쥐고 맞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오호, 이렇게 나오는 거냐?”

무로스케 할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기물을 움직였다.

“이번엔 소극적으로 나오시네요.”

“헤헤, 요놈아 이 할아비가 매번 공격적으로만 두는 줄 알았냐?”

낄낄 웃는 무로스케 할아버지를 잠깐 보다가 입 안에 넣은 알사탕을 굴리며 기물을 놓았다.

그 뒤로 서로 기물을 하나둘씩 움직이며 장기판 위에 올라간 서로의 기물을 회수해갔다. 올라간 기물의 수가 확연하게 차이 나기 시작할 때 승기를 보이는 것은 내 쪽이었다.

“으음, 여기서… 이렇게.”

무로스케 할아버지가 기물을 옮겼다.

“그럼 이렇게 둘게요.”

“옳거니!”

“응?! 뭣이여?!”

“잘 봐라, 영감탱아. 여기에 미노루가 기물을 뒀으니 영감탱이 더는 둘 곳이 없잖나.”

“끄응!”

음. 아빠랑 내기 장기를 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매번 아빠를 이겨서 용돈을 받았는데.

“졌다! 이야~ 역시 미노루는 바둑도 잘 두는구나!”

“무로스케 할아버지가 봐주셔서 그렇죠.”

“허이구, 그래그래.”

무로스케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장기판 위에 남아있는 기물을 정리하며 다른 사람과 장기를 둘 준비를 했다. 치아코 할머니가 다시금 무로스케 할아버지의 앞에 앉은 것을 보면 두 분이 또 장기를 두실 모양이다.

“미노루 이젠 할미랑 놀까?”

“네, 센마 할머니.”

무로스케 할아버지 다음은 센마 할머니인가. 센마 할머니의 손을 잡고 향한 곳은 휴게실 한쪽에 놓인 찻방이었다. 어떤 전통 무형문화재 분이 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모르겠다.

다다미가 깔린 방엔 여러 사람이 앉아있었다. 센마 할머니는 이 찻방에서 다도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셨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불러와 초대하고는 하셨다.

물론 찻방은 누구나 사용해도 되는 장소이지만 센마 할머니처럼 차를 잘 만드는 분은 없었기에 사용하는 사람은 센마 할머니나 가끔 술을 몰래 들여오는 다른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물론 센마 할머니가 알면 불같이 화내시지만)

한창 장기를 두며 다투기 시작하는 무로스케 할아버지와 치아코 할머니의 목소리가 옅게 들리는 것을 들으며 센마 할머니가 타준 녹차를 내려다봤다.

진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하다. 애초에 이렇게 전통 방식으로 탄 녹차를 마실 일이 없었기에 처음 마실 때 고역이었지. 지금이야 그냥 녹즙을 마신다 생각하고 마시면 좋았다.

그래. 이것은 녹즙이다. 녹즙이다. 내 건강을 위한 녹즙!

센마 할머니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흑흑, 어르신들이 마시라고 하니까 마시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내가 쭈욱 들이마시자 모두 좋아하셨다.

“자, 레이 씨도 마셔봐.”

“……네.”

센마 할머니가 한 사람에게 잔을 내어 주는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옆에 있던 노야미 할머니가 “옆 동의 레이 씨란다.”라고 설명해줬다.

옆 동? 옆 동이 라면, 정신병원이 아니었나? 여기까지 오다니 괜찮은가, 싶었는데 괜찮은 모양이다. 아니면 오지랖이 넓은 센마 할머니가 저 사람을 챙기고 싶으셨던 것일지도 모르고.

으. 근데 입안이 텁텁하다. 게다가 알사탕을 먹던 도중이라 맛이 섞여서 더욱더 기분이 이상했다. 갑 티슈에서 휴지를 꺼내 알사탕을 뱉어내고 노야미 할머니에게는 우롱차를 마시러 간다고 했다.

 

5

실내화를 질질 끌고 정수기로 가서 종이컵에 우롱차 티백을 넣고 온수를 부었다. 밍밍한 녹차를 마셨으니 따뜻한 것으로 입을 헹궈야 했다.

우러나오려면 좀 걸릴 테니 찻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뜨거운 물이 든 종이컵을 잘 잡고 찻방으로 향했다.

“그래서…”

“내일부터…”

조심조심 물을 흘리지 않게 걸어가던 길에 코너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혀버렸다. 이런, 앞을 제대로 못 봤다. 부딪힌 그대로 종이컵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아니, 그야 당연하겠지. 내 덩치를 생각해봐라.

“뭐, 뭐야?!”

“야! 앞을 보고 걸어야지! 꼬마야 다친 곳은 없어?”

“아니, 그렇지만 너무 작아서… 이럴 때가 아니지. 얘, 괜찮니?”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뜨, 뜨거워라….”

예상치 못한 사고로 넘어지며 종이컵에 든 뜨거운 물을 내 손에 부었으니까.

“찬물! 아니, 얼음! 누구 빙결계 개성 가지신 분 없으세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살펴보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차가운 물로 식히면 되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 했다.

 

6

“쇼토!”

 

7

어?

큰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내게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아버리는 레이 씨의 행동에 굳어버렸다. 네? 어, 저기? 전 쇼토가 아닌…

“아아, 쇼토!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아, 이런.

이거 제정신이 아니네. 초점이 없잖아. 레이 씨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찬기가 느껴지는 손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뜨거운 물이 쏟아진 곳은 손이었다. 얼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레이 씨는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착각. 아, 아니. 이건 나를 누군가로 겹쳐보고 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새하얀 김이 나는 차가운 손이 내 얼굴을 매만진다. 뜨거운 것을 식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저 얹고 있기만 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다. 점차 얼굴의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갗이 따가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동상에라도 걸릴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레이 씨를…

“쇼토, 쇼토….”

계속해서 나를 쇼토라고 부르며 벌벌 떠는 레이 씨의 행동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보니 어떻게든 레이 씨를 말리려고 하지만 레이 씨와 나를 둘러싼 냉기가 방해되는 듯싶었다. 반복적으로 읊는 이름인 쇼토는 레이 씨의 아이의 이름이겠지? 조금 익숙한 이름이지만, 아니리라 생각하면서 중얼거리는 레이 씨를 달래기로 했다.

“레, 레이 씨. 저, 괜찮….”

“미안해. 미안해, 쇼토.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쇼토.”

음. 무슨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따갑던 피부에 이젠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과 쇼토라는 이름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레이 씨는 사용하는 빙결계 개성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공 드릴 테니 도움을 주세요. 아무리 애타게 신님을 불러봐도 응답이 없었다.

그래요. 일방 통신이라 이거죠? 혼자서 뭐든 해보면 되는 거잖아요.

“엄마.”

“쇼토?”

혹시나 해서 뱉어 본 단어에 레이 씨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내가 레이 씨를 엄마라고 부르자 확실하게 반응을 보여줬다. 좋아, 이대로 계속해보자. 차갑도록 시린 레이 씨의 팔을 치워내며 계속해서 엄마라 부르며 말을 걸었다.

“엄마, 나 괜찮아.”

“쇼토… 엄마가….”

“응, 알아. 나 정말 괜찮아.”

“쇼토… 미안,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엄마.”

무엇이 그렇게 미안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레이 씨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뜨거운 물에 덴 나를 자기 아들로 착각해 다급하게 달려와 개성을 사용하면서까지….

이젠 흐느끼기 시작한 레이 씨는 더는 내게 빙결계 개성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껴안고 있기만 했다. 나는 그런 레이 씨를 마주 껴안아 주고 도닥여 줬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깊고 깊은 사연이 말이다….

 

엔데버 1

“뭐?”

[오늘 환자분께서 옆 동에 입원한 환자에게 개성을 사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상황을 확인해보니 착란을 일으켜 뜨거운 물을 흘린 아이를 도우려고 했다고…]

“그 환자는?”

[현재 동상으로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 병문안을 가도록 하지.”

[환자분은…]

“레이가 개성을 사용해서 피해를 줬다는 환자에게 갈 생각이다.”

[담당 의사에게 전해두겠습니다.]

 

8

“미노루!!”

어, 원장님이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원장님에게 연락한 모양이다. 나는 원장님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아아….”

원장님은 내 상태를 보고 그대로 졸도하셨다. 나는 침착하게 그런 원장님을 바라봤고 그런 원장님을 뒤따라오셨던 간호사 선생님이 그대로 원장님을 모시고 나가며 병실 문을 닫아주셨다.

지금 내 꼴은 얼굴에 눈만 뺀 얼굴 전체를 붕대로 돌돌 감싸버린 미라 꼴이었다. 빙결계 개성을 얼굴에 직접 오랜 시간 맞닿아서 동상이 좀 심하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직접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흉은 남지 않을 거라 하셨으니 안심하는 중이지만. 원장님은 정신을 차리시면 다시 오시겠지.

“미노루!”

하품하며 TV를 켰는데 창문을 활짝 열고 호크스가 들어왔다. 전엔 제대로 문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엔 창문으로 들어오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어쩐지 급해 보여서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냥 다른 말이나 꺼냈다.

“형은 정말 소식이 빠르네?”

“최고 속도로 날아왔거든.”

네?? 으응? 어디에서 최고 속도로 날아왔길래? 그보다 누가 알려준 거지?

“어디에 있었는데?”

“비밀이야.”

갑작스러운 비밀주의 선언을 “아, 네” 하고 무시했다. 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단 말이지. 좀 치사하다.

그런 내 태도에 호크스가 너무하다며 날개를 퍼덕여 내 옆으로 내려왔다.

“그렇지만 정말 급하긴 했어. 미노루가 동상에 걸렸다고 해서 놀랐다니까? 이런 여름에 동상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잖아? 그치?”

“음.”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그런 일이 있었지?”

“……. 뭐, 나쁜 일에 휘말린 건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러면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근데 볼 게 있나? 지금 붕대로 돌돌 감싸둬서 미라 상태인데.

“흉은?”

“안 남을 거래.”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제야 안심했다며 의자를 끌고 와 앉아 미니 냉장고를 열어 익숙한 행동으로 오렌지 주스를 꺼내서 마시기 시작한 호크스를 쳐다봤다.

저번에도 미니 냉장고에 들어있던 주스를 마시던데. 뭐, 상관없나? 나는 사과주스나 알로에만 마시고, 그 외에는 마시지 않으니까. 다른 주스를 처리해주니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마시게 내버려 뒀다. 게다가 열심히 날아서 왔다는데 이 정도도 못 줄까.

TV에 다시금 집중하려는데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들어오세요” 말했다.

오늘은 손님이 많네.

“실례한다.”

그렇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엔데버였다.

…….

힐끗,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호크스의 입에서 오렌지 주스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9

내 병실은 침묵 속에 휘감겼다. (호크스는 멍하게 있다가 자기 뺨을 꼬집거나 나한테 자기 뺨 좀 꼬집어달라고 했다. 꼬집어줬더니 “꿈이 아니네?” 같은 소리나 했다.)

엔데버는 히어로 의상이 아니라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나마 다행일지도. 히어로 의상을 입고 나타났으면 쫄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지금도 쫄아 있다. 엔데버가 여기 왜 와?

“미노루, 엔데버와 아는 사이야?”

호크스가 그리 속닥였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히어로를 어떻게 알겠어? 아, 물론 올마이트는 애들이랑 만났던 적이 있어서 알고는 있지만? 엔데버는 완전 처음이다.

엔데버는 말없이 병실 문 앞에 꼿꼿이 서 있었기에 내가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저기… 여긴 무슨 일이세요?”

“병문안이다.”

그에 엔데버가 답했고 호크스의 고개가 홱 내게 돌아왔다. 아니, 저기요. 저도 모른다니까요. 그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아주시겠나요.

“레이가. 그러니까 내 아내가 피해를 줬다고 하던데.”

“아, 레이 씨.”

응? 엔데버의 아내? 레이 씨가?

“아내?”

“아내.”

그럼 쇼토가 그 토도로키 쇼토였어? 그 반반이? 빨강흰색이?

 

10

엔데버는 품에 안고 있던 (본인 덩치에 비해 작은) 꽃다발과 병문안 선물이라는 주스 세트를 호크스에게 넘겼다. 근데 그걸 왜 호크스한테? 그 와중에 호크스는 입을 꾹 다물고 꽃다발과 주스 세트를 받았다. 근데 그걸 또 왜 자연스럽게 받는 건데?

내 옆으로 와서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호크스 덕분에 그냥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호크스 계 탔네. 응, 축하해. 행복해? 그래.

행복한 호크스를 두고 여전히 꼿꼿이 서 있던 엔데버가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의 사죄로 부상에 대한 치료비를….”

“아, 괜찮아요. 저 정부 지원 시설에서 살고 있어서 병원비는 지원금으로 나가거든요.”

이어지던 말을 거의 끊듯이 한 내 말에 엔데버가 입을 다물었다. 어, 혹시 기분 나빴으려나? 눈치를 살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이번에 자기 가족이 사고를 쳤으니 뭐라도 보상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온 것 같은데…

“그러면 사인 한 장….”

호크스가 눈빛을 엄청나게 보내서 말을 바꿨다.

“두 장 해주세요.”

“…….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 그러니까 좀 해주세요. 호크스가 엄청나게 행복해하는 거 안 보이시나요? 아, 안보이겠지. 지금 엔데버는 호크스의 날개만 보이겠네.

“다른 것은 더 없나?”

이 아저씨 왜 이리 끈질기지. 바쁘시다는 NO. 2 히어로가 직접 병문안을 오고 병문안 선물도 주고 또 사인도 해주겠다고 했으면 적당히 가보겠다, 하고 가야지.

근데 표정을 보니 영 껄끄러운 표정이다. 사인만 해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으려나? 그럼 뭐가 좋을까.

“그럼 나중에 레이 씨랑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 레이는 널 상처입혔다만.”

“그건 레이 씨가 착란을 일으켜서 그런 거잖아요. 오히려 그 일 이후로 만나지 못하면 레이 씨만 더 힘들어요. 저도 레이 씨를 용서해줘야 하고요. 동상을 입기는 했지만 절 걱정해준 레이 씨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떡해요.”

엔데버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지못해 끄덕인 것 같은데. 착각인가?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그러면서 내게 명함을 주고 드디어 퇴장했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호크스가 “허어.” 하고 긴 숨을 뱉었다.

“괴, 굉장해. 엔데버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이야….”

감동스러워하는 호크스를 흘겨보다가 깨달았다.

저 아저씨, 사인 안 해주고 갔네.

 

11

깨어나신 원장님이 돌아와서 내 옆에 앉아 오렌지 주스(엔데버가 사 온 주스 세트 중 하나)를 마시고 있는 호크스를 보고 불같이 화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우왓! 이만 가볼게, 미노루! 다음엔 퇴원하고 보자!”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곧장 창문을 통해 쓩 날아간 호크스를 따라 창문으로 뛰어가는 원장님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하아, 하아. 응, 괜찮아. 나중에 연락하면 되니까.”

으흐흐. 하고 웃는 원장님을 보곤 그냥 외면하기로 했다. 원장님도 은근히 뒤끝이 있으시다니까.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크스는 한동안 오지 못할 것 같다.

“퇴원이 머지않았는데 사고로 인해 동상에 걸렸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음, 죄송해요?”

“미노루가 왜 사과하니. 네 잘못도 아닌데. 어디 상태가 나쁜 곳은 없고?”

“없어요. 동상이라고는 하지만 흉이 질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는 의사 선생님 설명이 있었어요.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마세요.”

전에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피곤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진짜 힘들었지. 원장님은 “애들이 걱정할까 봐 그렇구나?” 하고 어쩐지 훈훈하게 넘어갔다.

그건 아닌데? 싶었지만 뭐, 됐다.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잠깐 외출해서 맛있는 것 좀 먹자.”

어, 개이득.

원장님과 함께 잠시 외출하기 위해 외출 증서를 쓴 다음에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은 돈가스다! 병원 밥이 맛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간이 덜 된 요리만 먹으니까 입이 심심하던 찰나였다.

 

엔데버 2

엔데버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의사에게 들은 바로는 10살의 어린 아이라고 했는데 아이답지 않게 조리 있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똑똑한 편인 것 같았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소년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훈련은 한 듯한 움직임이었지. 어쩌면 히어로를 목표로 훈련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형제 사이려나. 닮은 것, 까지는 모르겠군. 동상에 걸렸다던 아이의 얼굴엔 붕대가 돌돌 싸매어져 있었으니까.

엔데버는 정장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의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엔데버! 오늘은 이대로 휴무이신가요?”]

[“그렇다면 저희가 다 할게요!”]

[“버닝! 가만히 있어 봐!”]

“아니, 사무소로 돌아간다.”

[“어라, 오늘 일정이 있으시다고….”]

“마쳤다.”

[“그런가요? 그러면 알겠습니다.”]

[“잠깐! 내가….”]

뚝. 끊기자마자 엔데버는 다시금 정장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묵묵히 운전하다가 깨달았다.

사인하지 않고 왔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시설에서 살고 있다며 치료비에 대한 제안을 거절하고 사인을 원했던 아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웃긴 일이다. 다시 사무소로 간다고 했기에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또 병원에 들러야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 생각은…

엔데버는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곧장 문을 열고 몸에 열을 끌어올려 불을 일으켜 뛰어올랐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에, 엔데버?! 엔데버가 왜 여기에!?”

“문답 무용!”

등 뒤로 커다란 짐을 챙기고 도망치던 빌런이 엔데버를 알아채고 개성을 사용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작 그런 속도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끄악!”

그대로 도망치려던 빌런에게 달려가 빠른 속도로 등을 발로 차 빌런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낚아챈 엔데버가 빌런을 쫓던 히어로를 맞이했다.

“에, 엔데버가 여긴 어떻게!?”

“지나가던 길에. 끼어들어 미안하군.”

“아, 아뇨. NO. 2 히어로 엔데버에게 도움을 받다니 영광이에요!”

히어로는 엔데버에게 인사를 하고 짐과 빌런을 챙겨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다가 엔데버는 다시금 차로 돌아가 사무소로 향했다.

 

12

엔데버와의 대면 이후 나는 레이 씨의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레이 씨와 만날 수 있는 날짜를 전달받았다.

“레이 환자분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미노루 환자분도 아시겠지만….”

의사 선생님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전과 같은 일을 또다시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만날 의향이 있으신가요?”

“그건 무섭지만, 그래도 만나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현재 레이 환자분의 면회는 환자 본인이 거부하는 것도 있어 일부 가족분들 외엔 받고 있지 않습니다만, 보호자께서 허락하시기도 하셨고 최근 들어 조금씩 차도를 보이니까요.”

사고가 있긴 했지만요. 하고 나를 보는 의사 선생님의 시선에 하하, 웃었다.

“그동안 레이 환자분을 봐온 담당의로서 미노루 환자분이 말하는 게 뭔지 잘 알아요. 고마워요, 미노루 군. 용케 그런 생각을 해줬네요.”

나보고 장하다고 말하는 의사 선생님을 보며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10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조금 그랬을까? 그렇지만 어쩌겠어. 생각하는 것이 조금 애답지 않으면. 나는 나니까.

“뭐, 의사로서 이런 말은 NG지만.”

의사 선생님이 작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오후 2시부터 면회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쉬도록 하세요.”

그렇게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서 나가고 홀로 남은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토도로키 쇼토의 엄마라.

 

13

내가 신님의 자비로 부모님과 나에 관한 기억을 되찾으면서 마찬가지로 기억나지 않았던 원작 내용이 부분적으로 떠올랐다. 전부가 아닌 게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어.

미도리야 데쿠라는 주인공이 올마이트를 만나 이후 최고의 히어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이게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내용 대부분이 미도리야 데쿠에게 집중된 편이었다. 그 외의 이야기는 가끔 회상이나 시점이 바뀌며 나오는 편이었기에 제대로 나오는 내용이 없기도 했다.

예로 들자면, 미네타 미노루의 부모님에 관한 내용처럼.

TOP3에 해당하는 주인공과 그 라이벌에 대한 이야기는 잘 나오던데 말이지. 그 TOP3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토도로키 쇼토다.

토도로키 쇼토는 NO. 2 히어로 엔데버의 아들로 개성혼으로 태어난 아이. 위로 세 명의 형과 누나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쇼토의 어머니가 쇼토에게 물을 부은 뒤 실수를 깨닫고 사과하는 장면도 기억이 났다.

그때 바로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갑작스러웠으니까. 게다가 쇼토라는 이름도 그냥 들으면 모르겠단 말이지.

그리고 지금 곧 만날 레이 씨가 쇼토의 어머니….

“괜찮은 걸까….”

괜히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14

레이 씨의 병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털레털레 이동해서 5분 정도 늦기는 했지만, 그사이에 어디 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노크하고 “레이 씨.”하고 불러봤다. 그런데도 조용했다.

뭐지?

“레이 씨?”

병실 문을 열고 고개만 슬쩍 넣어 안을 보니…

레이 씨가 석고대죄의 포즈로 넙죽 엎드려 있었다.

우선

문을 닫았다.

 

15

자, 잘못. 잘못 본 거겠지?

응. 그렇겠지? 응.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문을 열고 다시 보니 아까 전과 똑같은 자세로 레이 씨가 그 ‘도게자’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다시 닫았다. 미치겠네.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정말로? 그렇지만 안 들어가면 레이 씨가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은데. 마음도 힘든 사람을 몸까지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의 흐름이 그렇게 되어서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후, 하. 후, 하. 후!

좋아. 조금 진정한 마음으로 문을 여니 여전히 레이 씨가 넙죽 엎드린 그 상태로 있었다.

“레이… 씨?”

“저번의 일,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거 현실인가? 현실이구나. 우선 병실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병실 문이 닫히자 엔데버가 왔던 때와는 다른 묘한 침묵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나대로 할 말이 없었고, 레이 씨는 아까 말 한 다음부터 입을 다물고 계셨다. 저렇게 두는 것도 조금 그랬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고 정신적으로 힘드신 분을 내버려 두는 것도 그렇고.

“아니. 그, 저기… 고개 들어 주세요. 아니, 허리를… 이게 아니라 그냥 일어나 주시면 안 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합니다! 그 마음을 담아서 말하니 레이 씨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셨다. 다, 다행이다.

“역시… 정말로 죄송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레이 씨는 다시 넙죽 엎드리셨다.

…….

또다시 침묵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16

오랜 실랑이 끝에 레이 씨는 침대에, 나는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와서 뭘 했더라. 레이 씨 일으키느라 힘쓴 것 외에는 한 것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지치다니.

“이제 제대로 인사를 해볼까요? 저는 미네타 미노루라고 해요. 10살이에요.”

“10살…. 나는 토도로키 레이라고 해, 미노루 군. 아, 미노루 군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상관없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고마워.”

어쩐지 레이 씨의 얼굴이 조금 행복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레이 씨. 쇼토가 누구예요?”

알긴 알지만, 모른 척 물어봤다. 그리고 내 질문은 당연하였고. 그야 당연하지 않나. 나를 쇼토로 착각하고 개성까지 사용해서 도와줬으니까. 그 일을 당한 내가 쇼토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어?

“쇼토는….”

레이 씨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이야기해 줬다. 쇼토는 자기 아들이라고.

“막내아들이야. 올해로 10살. 미노루 군과 동갑이지. 어쩌면 같은 학교에 다녔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는 레이 씨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음, 그건 아닐걸? 아마, 도? 사실 미네타 미노루의 기억은 아예 삭제되었다시피 텅 비어서 내게 남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확실하다.

원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건 웅영에 입학한 이후니까.

“아닐걸요?”

“그건 아쉽네. 쇼토와 친구가 되어 주면 좋을 텐데”

“나중에 만나게 되면 친구가 되어 볼게요.”

“……그래 줄래?”

정말 고맙구나, 하고 웃어 보이는 레이 씨의 얼굴은 매우 수척해 보였다. 눈 밑도 검고 피부는 트고 몸은 얇고. 저 상태로 잘도 개성을 그렇게 썼구나 싶다.

“사실 오늘 사과를 받으려고 온 거 아니거든요.”

“응?”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요.”

“감사 인사…를?”

레이 씨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레이 씨에게 손을 뻗으니 레이 씨가 천천히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거두었다. 어휴. 나는 그런 레이 씨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레이 씨. 그때 제가 화상이라도 입을까 봐 걱정돼서 달려와 주신 거죠? 물론 저를 아들로 착각하시기는 했지만, 레이 씨의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는 건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정말로요.”

내 말에 놀란 눈을 한 레이 씨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푹 숙어진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한 레이 씨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잡은 손이 잘게 떨려온다.

“나, 나는… 감사 인사를 받으면 안 돼, 미노루 군. 나, 난… 나는 큰 죄를 저질렀어. 어, 엄마, 엄마로서…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어.”

“저는 레이 씨가 무슨 짓을 하셨는지 몰라요. 그리고 지금은요. 절 도와주신 일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받아주세요. 네?”

“나는….”

나는 못된 엄마인데… 결국 레이 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껴안으셨다. 그런 레이 씨의 등을 도닥이며 달래 줬다. 마음의 치료가 끝나면, 만나러 가봐요. 혼자서 가기 무섭다면, 같이 가줄 테니까 힘내요. 그런 말을 하면서.

레이 씨는 한참 눈물을 흘리셨다.

 

17

“이렇게 울어본 적이 언제인지.”

레이 씨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서 개성으로 만든 얼음으로 찜질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저런 식으로 활용도 가능하구나, 생각했다.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미노루 군.”

“뭐가 못나요. 괜찮아요, 레이 씨.”

“편하게 아줌마라고 불러도 괜찮은데.”

“음, 아줌마보단 레이 씨라고 부르는 게 좋아서요.”

내 말에 레이 씨가 그러냐며 마음대로 하라고 해주셨다.

“그전까지는 그저 마음이 아팠어. 그렇지만 울지는 못했어. 내가 울어도 되는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계속 담고 담았지. 후회할 짓만 잔뜩 만들고… 그리고 지금도 계속….”

혼잣말에 가까운 레이 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지에 몰리고 몰려 잘못 없는 아이에게 손을 대고 말았지. 그건 오롯이 내 잘못이야.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 그때는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상태였으니까.”

다시금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레이 씨의 눈가에 눈물이 몽글몽글 맺혔지만 차마 그것을 닦아 내지 못했다.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 그 아이의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서, 엄마라고 부르면서, 내가, 아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레이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옆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사실 레이 씨도 알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내게 이야기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래도 뭐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 집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어. 그저 지옥 같았어. 그래서 도망친 거야.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해서 안락하지는 않았겠지. 죄책감이 계속해서 레이 씨를 갉아내어 더욱 힘들게 만들었겠지.

“이번에 쇼토 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져서 많이 힘들었어. 나는 변하지 못했구나, 하고 자책도 많이 했지.”

레이 씨가 나를 보며 웃어 보였다.

“미노루 군이… 나를 만나겠다고 해 줘서 그리고 여기에 와서 고맙다고 해 줘서… 나는… 구원받은 기분이야. 고마워, 미노루 군. 미노루 군에게 용기를 받았어.”

힘내 볼게. 그러면서 펑펑 울기 시작한 레이 씨는 무거운 짐을 아주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았다.

 

18

그 후로 나와 레이 씨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그러니까 면회) 이후 밝아진 레이 씨의 상태를 본 의사 선생님이 바깥 외출을 허락해 준 덕분에 병원 내부만이 아니라 병원 산책로까지 함께 산책할 수 있었고 가끔은 센마 할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동상 때문에 감았던 붕대를 풀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이틀 정도 상태를 확인하고 괜찮으면 퇴원 절차를 밟아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이제 병원에서 탈출하는 거구나! 싶었다.

“후우, 덥다.”

“미노루, 덥니?”

“아, 괜찮은데….”

괜찮다고 사양하려고 했는데 레이 씨는 단호했다. “열사병에 걸리면 안 돼.” 하며 들고 온 물을 얼음물로 바꿔 주셨다. 턱 밑이나 목덜미에 잠깐 올려두니 엄청나게 시원해졌다. 레이 씨의 개성 덕분이다.

“곧 여름 방학도 끝나가겠네.”

“여름 방학이라….”

“그러고 보니 미노루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괜찮니?”

“학교….”

그러고 보니 나 학교는 어떻게 된 걸까. 미네타 미노루의 기억이 아예 없으므로 이전에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원장님이 해결해주시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래도 학교엔 가야 하는데….”

참. 레이 씨에겐 내가 시설에서 지내며 부모님과 그들에 관한 기억도 부분적으로 잃었다고 이야기해 둔 상태다. 그 이야기를 하자마자 레이 씨가 미안하다며 울어버렸지만….

레이 씨가 학교 걱정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내 또래의 아들도 있으니 어쩌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근데 같은 학교일 확률은 낮을 텐데. 애초에 이 병원, 시설과 좀 떨어진 지역에 있고.

잠깐 휴식 시간을 보낸 다음에 다시금 산책을 이어 가기로 했다.

“애들한테는 연락해 보셨어요?”

“그게… 역시… 지금은 좀….”

머뭇거리며 답하는 레이 씨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만하지. 오랜 시간 속에 묵혀 뒀던 것이 한순간에 풀릴 리가 있나. “그래도 연락해야지… 해야 하는데….” 하면서 고민하는 정도까지 발전했으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네.

 

19

“레이?”

“……엔지.”

 

20

굳은 표정의 레이 씨와 놀란 듯한 엔데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나.

이 분위기 어쩔 거야.

 

21

“미노루, 돌아가자.”

“어, 저기….”

“괜찮아. 돌아가자.”

그, 그래요. 레이 씨는 내 손을 잡고 엔데버를 본체만체하고 뒤돌았다. 나는 엔데버를 돌아봤다가 내 손을 잡아당기는 레이 씨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자식들에게 연락조차 못 하는 상태인데 남편인 엔데버를 어떻게 마주하겠어.

그런데 엔데버가 여길 다시 오다니, 무슨 일이 있던가?

“잠깐.”

엔데버의 말에 레이 씨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고 그사이에 엔데버가 다가와 레이 씨의 팔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잡지 마.”

“그 아이에게 용무가 있어서 들른 것이라서.”

레이 씨는 그제야 뒤를 돌아 엔데버를 바라봤고, 엔데버는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나는 계속 둘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이 아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데?”

“레이.”

“가족에겐 그렇게 했으면서….”

“…….”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아직도 선한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레이.”

“당신이 할 말이야?”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내 안색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 씨는 완전히 나아진 상태가 아니다. 조금씩 껍데기를 벗는 중일 뿐이고 아직도 그 안은 상처투성이다. 그런 사람 앞에 상처를 만든 원흉이 나타났으니 불안해질 수밖에.

“왜 만나러 가지 않았어?”

“레이 나는 할 일이….”

“변명하지 마! 그 아이가 당신에게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내가 몇 번이고 말했기에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

“그만, 그만!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 아이의 아빠였어. 그리고… 나는 엄마였지…. 나나 당신이나 부모 실격이네. 알고 있어? 아니,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은 갈수록 다른 것에 미치기 시작했으니까…!”

“…….”

“갈수록 미쳐갔어. 우리가 아니라 다른 것을 봤어. 내가 그것에서 눈을 돌리고 외면하는 바람에 그 아이가 상처를 입은 거야. 내가, 내가 그 아이를 혼자 둬서는 안 됐던 건데….”

 

22

저기. 저 빼고 대화해 주세요.

 

레이 1

“우선 이 아이는 돌려보내고 이야기해.”

엔데버는 미노루를 레이에게서 떼어냈다. 그 순간 레이는 엔데버가 자신에게서 쇼토와 다른 아이들을 떼어 냈던 그때의 기억이 겹쳐 깜짝 놀라면서 미노루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 레이를 엔데버가 막아섰다.

“당신 멋대로 그러지 마!”

“레이, 그만둬. 다른 곳으로 가서….”

“엔지. 그 아이를 어디로 보내려고 그래?”

“어디긴 병실로….”

“또다시 내게서 아이를 떼놓으려는 거지!”

“레이, 억지 부리지 말고 그만 병실로 돌아가. 지금 흥분 상태다.”

“흥분하지 않았어, 엔지.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미노루는 묘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작은 아이가 그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레이에게서 떼어내져 엔데버의 뒤에 있던 미노루는 상황을 가만히 바라봤다.

쌓여 있던 것이 터졌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레이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병원에 들어와 자신을 어떻게든 타일렀으나 자기 자기 손으로 쇼토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죄악감에 의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등을 돌렸고 마음도 닫았다.

그러나 미노루와 만나고부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과거이기에 머뭇거림은 여전했으나 레이는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 기억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엔데버를 대면하기 전까지는.

 

엔데버 3

미노루라는 아이에게 사인을 건네주기 위해 다시금 찾아온 병실은 조용했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아 엔데버는 병실에서 나와 미노루를 찾아 인근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옅게 웃으며 미노루와 함께 산책하는 레이를 봤을 때는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수척하게 지쳐 있던 모습이었으니까.

저렇게 생생하게 웃으며 움직이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기에 이름을 불러버렸다.

“레이?”

“……엔지.”

적대적인 시선. 도망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봤던 그 시선. 엔데버는 입을 다물고 레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최선이었다고 되새기며.

 

23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정말 나빴다. 레이 씨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쌓인 이야기가 정말 많은 모양이다.

엔데버는… 잘 모르겠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 턱도 없고. 할 말은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그 태도 때문에 레이 씨가 더 꼬이고 있는 것 같고.

“저기….”

“놔줘.”

“레이, 진정해라.”

“나는 진정한 상태야.”

“저기요….”

“흥분 상태다, 레이.”

“당신이야말로 아이를 내게서 떼어 내려 하지 마. 그때와 같은 전철을 밟으려고?”

“레이!”

이놈의 어른들은 어떻게 된 게 다들 이렇게 꽉 막힌 거람. 위장이 쓰라린 기분이다. 얼음 고래와 불 고래 사이의 송이 새우가 된 기분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둘이 이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감정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계속 주고받다 보면 결국 어그러지기 마련이었다. 욱해서 튀어나온 말에 사이가 갈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저 두 사람이다. 그냥 갈라지지만은 않을걸.

“더는 나를 억압하려 하지 마. 당신이 무얼 하려고 해도 난 내 아이들을 지켜야겠어.”

“다른 녀석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 쇼토만큼은 안돼.”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녀석은 유일한 ‘성공작’이니 녀석을 빼고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도록 하지.”

헐. 지금 저 사람이 자기 자식을 성공작이니 뭐니라고 말한 거야? 진심으로?

“……아직도 눈을 못 떴어? 그 일을 겪고도? 아니. 그 일을 겪어서?”

레이 씨가 경악하며 엔데버의 팔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레이 씨를 기준으로 주변으로 얼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엔데버는 순간적으로 최대한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몸에 불을 끌어올려 주변을 휘감았다.

“레이! 개성을 거둬!”

엔데버의 부름에도 레이 씨에게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길에 휩싸였음에도 녹지 않는 얼음 속에서 울고 있는 레이 씨와 화염을 두른 엔데버의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른을 부르는 일밖에 없음을 깨닫고 움직이려는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왔다!!!”

흙먼지와 함께 올마이트가 등장했다.

 

정말로 최악의 타이밍이네.

 

24

아니, 최고의 타이밍인가?

“……올마이트….”

“여어, 엔데버! 오랜만이지? 그로부터 5년 만이던가?”

“물러나라. 가족의 일이다. 네가 끼어들 필요 없다.”

“그건 안 될 것 같군, 엔데버. 그쪽에 있는 소년은 히어로도 아닌 평범한 소년이 아닌가! 다치면 안 되니까 말이지!”

올마이트가 용건을 말했음에도 엔데버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청록색의 눈빛이 아주 날카로워 잘 벼려진 칼 같았는데 올마이트는 아무렇지 않게 HA-HA-HA, 웃으며 그 눈빛을 받아냈다.

저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는 것이 더 신기하네. 저 눈빛 안 보여요? 실핏줄이 도드라진 아주 시뻘건 눈인데. 올마이트는 엔데버에게서 몸을 돌려 내게로 와 시선이라도 맞추듯 쪼그려 앉아 말을 건네왔다.

“미노루 소년! 여기에 계속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만 물러나는 건 어떤가? 내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도록 하마!”

그러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올마이트의 손을 내려보다가 얼굴을 올려보고 다음에 엔데버와 레이 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저 둘을 두고 가 버리고 싶었다. 올마이트의 손을 잡으면 이 귀찮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대로 둘만 두고 가기엔 들은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레이 씨를 두고는 못가요.”

“소, 소년. 여기는 엔데버에게….”

“저 아저씨에겐 부탁 못 해요. 저 아저씨는 못된 사람이니까.”

쿨럭! 하고 어쩐지 올마이트가 피를 뿜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보다 올마이트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뭐 하러 온 거지? 그래도 올마이트가 등장하며 분위기가 환기되어서 다행이다. 저것 봐. 엔데버가 드디어 날 보잖아.

“…….”

방금 내가 한 말에 어이없어하는 상태인 걸까? 나 역시 엔데버를 바라봤다. 불꽃이 휘감긴 청록색 눈빛은 정말 이질적이었다. 방금까진 올마이트를 보면서 불쾌하고 복잡한 감정을 담아냈으면서. 그 질척하고 어두운 감정을 잘도 품고 있구나 싶다.

저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말을 걸어보나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온 거네. 와줘서 고마워요, 올마이트. NO. 1 히어로는 다르네.

“아저씨는 자기 입장이 가해자라는 것은 알아요?”

내 말에 엔데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올마이트가 당황한 듯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운데 모를 수도 없겠다. 내 얼굴 가까이에 있는 올마이트의 얼굴을 밀어냈다.

“소, 소년?”

“레이 씨도 자기 자식에게는 가해자의 입장이지만… 당신에게는 피해받은 피해자 입장이에요. 가해자는 그만 물러나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꿈틀, 하고 엔데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왜요? 뭣도 모르는 꼬맹이가 이런 말 하니까 이상한가요? 그렇지만 저 레이 씨와 제법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리고 조금 전의 이야기도 들었고요.”

물론 한 사람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저쪽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그건 아니었다. 내가 원작에 대해서 기억이 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기에. 친구와 함께 봤던 내용까지만 알고 있을 뿐 그 이후에 서술되는 내용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있었다.

엔데버는 지독할 정도의 가정 폭력을 저질렀다. 나는 그것을 옹호할 생각도 이해해 줄 생각도 그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없었다. 남의 가족 사정에 너무 끼어드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당연히 누군가가 자기 가족 일에 끼어든다고 하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끼어들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끼어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여기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들 바뀌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엔데버는 계속해서 가정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나는 어딘가의 고명한 학자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정신을 보살피는 상담사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 그래서 더욱더 말해야 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부모다.

 

25

“엔데버.”

내가 엔데버를 부르자 그 청록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았다. 그는 한참이나 작은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만큼 엔데버를 올려다봤고.

“당신은 대체 자기 자식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공작’? 자기 애한테 그딴 말을 해요? 미친놈 아니에요?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은데요?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너무 돌아서 정상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그런 식으로 말해요? 빌런도 아니고. 히어로 가족은 다 그래요?”

술술 털리는 입이 참 신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빡치긴 빡쳤구나. 그래도 내 친구 중에 이런 환경을 가진 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더 화날 수밖에 없었다. 속이 불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 그저 흘려듣는지 알 수 없는 엔데버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옆에 쭈그려 앉아있던 올마이트의 턱이 떡하니 벌어진 게 보였다. 그렇게 봐도 그만둘 생각 없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들어봐요, 아저씨. 머리가 너무 굳으셔서 모르시나 본데요. 자식은 부모의 대용품이 아니에요. 쇼토는 쇼토일 뿐이라고요. 당신을 대신해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사람이라고요, 알고 있어요? 아니, 알고 있으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눈앞에 있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 저 앞에 있는 누군가의 등만 보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죠. 무시한 거예요. 분명 앞에 있는 자기 자식을. 그 사실은 아세요? 당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당신이 포기한 게 뭔지? 그동안 당신이 해 왔던 짓은 가정 폭력이라고요. 가정 폭력. 히어로가 가정 폭력이라니 우습지 않아요? 그러고서도 NO. 2 히어로라고 이름 떨쳐도 괜찮은 거예요? 진짜로? 인성 테스트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까부터 벌어져 있던 입을 겨우 닫은 올마이트가 나와 엔데버를 번갈아 보며 돌아보기 시작했다. 방금 한 이야기를 듣고 “진짜?” “정말로?”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올마이트도 몰랐나?

중요한 건 올마이트의 반응이 아니었다. 침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진짜 웃긴다. ‘성공작’? 애한테 할 말인가? 너무 구시대적 발언 아닌가요? 개성의 어머니한테 사과하세요. 개성의 어머니가 저승에서 환장할 정도로 미친 발언이라고요, 알아요? 진짜 어떻게 된 어른이 자기 자식에게 그딴 발언을 하지? 뇌가 너무 굳어서 그렇으붑.”

“미, 미, 미노루 소년. 그, 아니,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맞는 말 이네만… 그, 당사자 앞이네…. 조, 조금 자제하는 것은….”

무슨 자제? 그게 왜 필요해? 나는 내 입을 가로막은 올마이트의 손등을 때렸다. 그러자 올마이트가 “OUCH!”하고 손을 치웠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과장하기는.

“올마이트, 가만히 있어요. 저는 지금 저 인간에게 말하고 있잖아요.”

“Oh…… SORRY.”

어쩐지 이어서 이야기하라는 느낌으로 반걸음 물러나는 올마이트를 흘겨봤다가 다시금 엔데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에게 히어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

“저는 당신에게 히어로 자격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빠 자격도. 생판 남이 이런 말 해서 죄송하네요. 원래라면 레이 씨가 할 말이었는데 화가 난 나머지 그만 제가 다 말해버렸네요.”

화가 난 거구나! 하고 어쩐지 올마이트가 깨달은 듯이 중얼거렸다.

“구정물 같은 본인의 감정 때문에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마세요.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자기 마음대로 힘쓰고 다니는 빌런이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심지어 타인도 아니고 자기 가족이잖아요.”

어느 순간 몸에 휘감겨 타오르던 불길이 사라진 엔데버를 흘겨보다가 몸을 돌려 레이 씨에게로 향했다. 올마이트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얼음 속의 레이 씨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진짜 힘들다. 내가 무슨 오은영 박사님도 아니고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니까. 오지랖이 넓어서 문제네.

얼음에 손을 뻗으려 하자 올마이트가 막아섰다. 나는 괜찮다며 올마이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올마이트는 끙, 하며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얼음 위로 손을 올렸다.

“레이 씨. 갑자기 본인이 나타나서 감정이 북받친 거죠? 괜찮아요. 레이 씨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던 것뿐이에요. 엔데버가 또 뭐라고 하려고 하면 제가 막을게요. 저로 불안하다면 올마이트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와요. 같이 병실로 돌아가요, 네? 거기에서 계속 있으면 같이 산책하는 거 어렵잖아요.”

뜨거운 불이 곁에 있음에도 녹지 않고 꽁꽁 얼어붙어 있던 얼음이 천천히 녹아서 사라졌다. 그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레이 씨가 내 앞에 주저앉았다.

 

?

양소현. 향년 22세. 그녀에겐 소꿉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김지연. 소현과 지연은 옆집 사이로 이사 온 날 이후부터 친하게 지내,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으로 진학했을 정도로 친했다.

지연은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창작하여 그리거나 쓰는 것을 좋아해 간혹가다 소현에게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작품은 전부 주인공이 언제나 끝에는 행복해지는 꽉 막힌 해피 엔딩이었다. 결말로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었더라도 결국엔 행복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소현은 그런 지연의 작품을 좋아했고 유일한 독자이자 유일한 팬이 되어 주었다. 둘은 그런 사이였다. 오랫동안 이어질 인연이었을 것이다.

지연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

고등학교 2학년.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에 슬픔에 잠겨 울던 중 부모님의 숙덕거림을 들었다.

‘부모가 지연이에게 강요했다네요. 이거 하라, 저거 하라.’

‘따르지 않으면 때리고… 세상에 우리 앞에선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인 적 없었는데.’

‘우리가 제대로 못 봐줬던 거야. 조금 더 잘 봐줄 것을….’

충격적인 이야기. 지연은 단 한 번도 부모님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비밀 이야기 같은 것을 할 때조차도. 소꿉친구라고 자신하던 그런 사이였는데. 진짜 비밀을 이렇게까지 숨겨 두고 홀로 가 버릴 줄은.

소현은 그저 울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도와주지 못했다. 소현은 그게 너무 슬펐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이.

 

26

레이 씨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곤 침묵이 깔렸다. 올마이트만이 레이 씨와 나 그리고 엔데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죠?”

적막을 깨트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레이 씨를 위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이 목소리는!

“당신은….”

올백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 깔끔한 의복을 입고 조용히 나타난 원장님이 주위를 쓱 훑었다. 내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레이 씨와 나와 레이 씨 근처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올마이트 그리고 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엔데버까지 시선을 주던 원장님은 내게, 정확히는 내 옆에 서 있는 올마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올마이트는 찔린다는 듯이 원장님을 마주 봤다.

“스즈메 원장님.”

“혹시 아이 앞에서 싸우고 계셨던 겁니까?”

원장님의 눈매가 한층 매서워졌다. 올마이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자 원장님의 시선이 엔데버에게 향했다. 엔데버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상황을 대충 파악하신 듯 원장님은 이마를 짚었다.

이 골 아픈 인간들. 원장님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소리 굉장하네.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이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여러모로 고생하는 중인데! 무슨 이유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에게 피해는 주지 마셔야죠! 올마이트!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Oh….”

올마이트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매 맞은 기분이 든다. 불쌍해라.

“원장님 진정하세요….”

“미노루… 정말, 미노루는 착해도 너무 착하다니까….”

어,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원장님 잔소리를 저까지 듣는 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장님은 그런데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매서워졌다. 가볍게 두어 번 손뼉을 친 원장님이 조용한 분위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구셨다.

“그만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죠. 레이 씨는 병실로, 엔데버는… 저와 함께 미노루의 병실로 가도록 하죠. 자, 어서 먼저 가보도록 하세요. 올마이트, 레이 씨를 병실까지 옮겨주세요.”

자연스럽게 올마이트에게 일을 시킨 원장님은 얼른 가지 않고 뭘 하냐면서 올마이트에게 뭐라 했고 올마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곤 레이 씨를 품에 안고 이동했다.

레이 씨와 올마이트가 간 뒤에 원장님은 긴 한숨을 내쉬곤 엔데버를 돌아본다. 나도 엔데버에게 시선을 줬다.

“제가 오실 때는 꼭 연락 부탁드린다고 했잖습니까, 엔데버.”

“……. 이렇게 함께 있을 것이라곤 생각 못 했다.”

그래도 대답을 하기는 하네.

“하아아아.”

긴 한숨이 원장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불쌍한 원장님.

“미노루,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주변이 조금 정리되자 내게 말을 거는 원장님께 답했다.

“음… 없어요.”

“정말로? 불길에 닿지는 않았니? 얼음에 닿거나 하지는 않았고?”

내 몸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한 원장님을 말리지 않고 살펴보시게 내버려 뒀다. 세 바퀴 정도 돌고서야 나는 원장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레이 씨가 자길 가둬 뒀던 얼음에 손을 올렸지만 괜찮았다. 여기서 다쳤으면 퇴원은 또 다음 날로 미뤄질 테니까. 이제 병원은 지겹다.

 

27

나는 원장님의 품에 안겨서 엔데버와 함께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돌아오니 처음 보는 장난감과 편지가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이건 뭐예요?”

“시설의 친구들이 미노루가 얼른 퇴원하기를 바라면서 보낸 편지와 선물이란다.”

아이고 뭘 이렇게. 곧 퇴원도 하는데 그냥 시설에서 주지. 소복이 쌓인 선물의 산과 편지를 보곤 정수리를 긁었다. 편지지가 남은 게 있으려나.

“원장님 애들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편지 답장은… 최대한 빨리 써 볼게요.”

“천천히 해도 괜찮단다. 어차피 곧 퇴원이잖니.”

원장님이 웃으며 말하다가 뒤를 돌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엔데버를 바라본다.

“그래서. 엔데버 씨는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으시길래 들르셨나요?”

“전에 아이에게 사인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서.”

“……. 그러니?”

응? 아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대로 가 버리고 한참 안 와서 사인만 보내거나 아예 잊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쨌든 사인을 해주기로 하긴 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해 주기로 하셨어요.”

“그래?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시면 불편해요, 엔데버. 올마이트조차도 멋대로 오는 것을 막는 중이라서요.”

“올마이트도….”

엔데버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올마이트와 츠카우치 씨는 원장님이 병문안 거절을 해 뒀던가. 음, 뭐. 내가 그 부분은 어떻게 커버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근데 올마이트가 진짜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이해가 안 되네?

원장님이 내게 시선을 맞추며 쭈그려 앉으셨다.

“미노루, 원장님은 편지와 선물을 주러 온 것뿐이라서 이만 가 봐야 해. 혹시라도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면 주저 없이 너스콜을 누르렴. 물론 NO. 2 히어로니까 뭘 하지는 않겠지만.”

“스즈메.”

“아는 척 마시죠. 엔데버.”

어라? 원장님이랑 엔데버는 아는 사이인 건가?

“그럼 이만 가 볼게. 내일쯤이면 퇴원할 수 있을 테니까 준비할 게 많기도 하고. 내일 보자, 미노루.”

그렇게 원장님이 병실에서 나가고 엔데버와 나만이 병실에 남았다. 또다시 병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28

“좀 앉으세요.”

내 말에 엔데버가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 의자가 좀 작아서 엔데버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앉은 뒤에도 엔데버는 조용했다. 조용한 것이 더 거슬렸다. 겨우 10살의 어린애에게 가족 사정 이야기를 듣고도 얌전히 있다는 게 말이다. 솔직히 ‘네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고 뭐지?

“내가….”

“네?”

“내가 잘못한 건가?”

…….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진심으로 몰라서 저한테 묻는 거예요?”

엔데버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치 알려달라는 듯이 굴고 있어서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 씨도 아니고 저한테 묻는 거예요?”

되레 내가 더 궁금하다. 왜 레이 씨가 아니라 나한테 묻는 건지. 레이 씨라는 제대로 된 정황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 엔데버는 내 물음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내 행동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강해지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녀석은 성공…… 한 몸에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녀석이다. 나와는 달리 열기 조절이 어려워 불편함을 겪지 않을 것이고 조절하는 법과 끌어올리는….”

“그만, 그만. 이야기 들어보면 그냥 아저씨가 한 짓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뿐이잖아요. 쇼토가 그걸 바랐나요? 강해지고 싶다고?”

“……그건.”

“쇼토가 바라지 않았다면 결국 그건 폭력이죠. 억지로 시키는 것이고요. 너를 위한 것이다, 라면서 쇼토를 몰아붙였으니 마찬가지죠.”

“그런 개성으로 태어났으니 어렸을 적부터 훈련해서….”

“개성이 발현된 이후 조절이 어려운 애들이야 그에 맞는 훈련법이 필요한 법이지만 생각해봐요? 아저씨, 쇼토의 의견은 들어봤어요? 쇼토가 바라던 것을 들어준 적 있어요? 자기 할 말만 하고, 강제하고, 무리시키고. 말해봐요, 아저씨. 쇼토가 바라던 것 들어준 적 있어요?”

내 말에 다시금 엔데버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게 많은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을 잃은 것인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내 기억상 엔데버는 이렇게까지 가라앉은 인물이 아니라 어느 때든 화끈했던 캐릭터 같은데.

엔데버에게서 시선을 떼니 병실 문 사이로 올마이트가 빼꼼 그 거대한 몸을 잔뜩 수그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슬쩍 엔데버를 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엔데버가 여러모로 걸리는 모양이다.

“올마이트 그렇게 숨어있어도 다 보이니까 그냥 들어와요.”

“HAHAHA! 미노루 소년, 잘 봤다! 내가─”

“병원이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왔다. 하고 작게 속닥이듯 외친 올마이트가 조심스레 병실 안으로 들어온 다음 문을 닫았다.

“올…마이트.”

“그, 어, 방해해서 미안하네! 엔데버. 미노루 소년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그래. 그래요. 올마이트는 무슨 일로 이 근처에 오신 거예요?”

“음! 정확히는 지나가는 길에 미노루 소년이 보여서 왔다만 거기에 엔데버와 그 부인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 우선! 저번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점 먼저 사과하네! 내 친우인 츠카우치도 무척 미안해하며 나중에 제대로 인사를 하러 올 생각인 듯하니 나중에스즈메원장님께이야기해줄수없을까미노루소년.”

속 시원한 목소리로 또랑또랑 말하다가 뒤로 갈수록 다급하게 말하는 올마이트를 보며 원장님이 많이도 쪼셨나보다, 싶다.

“딱히 그 일로 올마이트나 츠카우치 씨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오오, 그런가! GOOD! 그건 다행이군!”

“그렇지만 스즈메 원장님은 아닌 것 같지만요.”

“Oh…………….”

올마이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 올마이트를 내버려 두고 엔데버를 돌아봤다.

“아저씨는 아까 제가 물어봤던 것, 생각해봤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엔데버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 잘못, 아직도 몰라요?”

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엔데버를 본 나는 올마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올마이트 인제 그만 엔데버와 함께 퇴근하세요.”

“엥.”

“저 너무 피곤해요. 오늘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음! 그, 그래! 그렇군.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자, 가도록 하지 엔데버!”

“…….”

그렇게 올마이트가 엔데버를 끌고 병실에서 나갔다. 방금까지 덩치가 엄청난 두 사람이 있었던 터라 병실이 참 휑해 보였다.

“하… 지쳤다, 정말.”

침대에 스르륵 누우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래도 위장약을 챙겨 먹어야 할 것 같다. 찌르르 울리는 배를 쓸며 병실 천장을 봤다.

 

올마이트 2

올마이트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을 했다. 5년 전 매스컴 앞에서 마주했던 이후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만남 역시 딱히 좋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저 아저씨에겐 부탁 못 해요. 저 아저씨는 못된 사람이니까.’

미노루 소년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역시. 듣다 보면 확실하게 엔데버의 행위는 ‘가정 폭력’이었다. 심지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은 엔데버가 미노루 소년의 말을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고. 그건 다르다고. 그러나 엔데버는 부정하지 않았고 침묵을 택했다. 올마이트는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엔데버, 마시겠나?”

올마이트는 자판기에서 팥죽을 뽑아 엔데버에게 건네주었다. 엔데버는 그런 올마이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에 올마이트는 머쓱해 하며 엔데버의 옆에 앉았다. 주위가 “올마이트와 엔데버다!” “NO. 1과 NO. 2가 함께 있어!” 떠들썩해지는 것이 들렸으나 엔데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올마이트는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나는….”

“음?”

“나는 어디에서부터 틀려먹은 것이지….”

그 물음에 올마이트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엔데버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을 맞잡았다. 쇼토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없다. 들은 적 없다. 지쳐 나가떨어졌던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열기를 끌어올리라는 말은 했었다. 토우야와 후유미, 나츠오와 만나게 해달라고 말하던 것 역시 훈련해야 한다며 막았다. 그것이 폭력이라고 했다. 엔데버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있잖나, 엔데버.”

“뭐지.”

“……내겐 자식은 없지만, 미노루 소년이 말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알 것 같아.”

올마이트는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승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을 떠올려봤다. 당신이 제게 해 주셨던 것. 아마도 미노루 소년이 말하려던 것이 그런 것이겠지요.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지켜봐 주는 것. 함께해 주는 것. 그리고 칭찬해 주는 것. 우리 눈에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미숙한 존재. 그렇기에 우리 어른이 존재하는 것이지. 자네도 알잖나.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올마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데버. 자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면, 죄가 깊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엔데버에게 손을 뻗었다.

“분명 세상이 달라 보이겠지!”

손을 뻗은 올마이트를 보던 엔데버는 조심히 손을 뻗어 올마이트의 손을…

“알고 있다.”

쳐냈다.

“Ouch!”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니, 아팠다네! 방금 진심으로 때리지 않았나!?”

“아니다만.”

“……. 생각이 잘 정리된 모양이군.”

그 말에 엔데버는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곤 올마이트를 흘겨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올마이트는 엔데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떠났다.

 

레이 2

레이는 병원의 다도실에 앉아서 사람을 기다렸다. 센마는 조용히 차를 타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미노루의 퇴원 날이었다. 병원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미노루가 병원에서 나간 이후 레이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서 와, 엔지.”

“레이.”

다소곳이 앉아 엔데버, 엔지를 반긴 레이에게 엔지는 묘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우리 이제 이야기해.”

“…….”

“길고 긴 화나고 슬픈 이야기겠지만 우리는 해야만 해. 나는 그 아이에게 약속했으니까.”

레이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고 엔지는 조용히 레이의 앞에 앉았다.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계속해서 부부로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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