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는 원칙을 지킨다
스푼의 상담사
“타냐 언니 큰일 났어!”
“응?”
모처럼 시간이 빈 어느 날 오후, 타냐는 느닷없는 혜나의 습격을 받았다. 무슨 일이래···? 싶으면서도 느껴지는 익숙한 기분에, 이어질 말이 예상되어 절로 입 밖에 튀어나왔다.
“서장님 화나셨니?”
“언니 지금 엄청 화났어!”
두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잠시간의 아이컨택을 하곤, 곧바로 상담실을 뛰쳐나갔다. 그래, 타냐에게 이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화가 나 날뛰는 서장님을 '특기가 사라지면 안 된다'는 명분으로 순식간에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타냐가 유일하니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
“안 그래도 기분 별로였는데, 나가 오빠가 지각하고 연락도 무시했나 봐!”
아이고야, 4시 50분. 마침 빈 시간이라서 다행이지. 상담 일정이 잡혀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타냐가 스푼의 상담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장 전용인 건 아니다 보니 당장 급한 일이 생겨도 타냐는 상담 중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때그때 타이밍 좋게 대응하기는 힘들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하루의 마지막 상담은 뒤 일정이 따로 없다는 핑계로 몇십 분 정도 오버되는 일이 흔한데, 오늘따라 빨리 끝났다. 그러니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뛰어갈 수 있는 것이다.
“타냐 언니가 당장 시간이 비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나가 오빠는 오늘 지옥을 보지 않았을까. 음, 그러게.
서장실에 막 도착한 타냐는 사사에게 암바를 걸고 있는 다나를 목격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다나의 뒤로 가서 조심스럽게 어깨를 붙잡았다.
“서장님, 괜찮으세요?”
“타냐? ···나야 뭐 괜찮지.”
“아니라던데요? 오늘 무슨 일 있으셨다고, 귀능 씨가 그러던데.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잠깐 얘기해봐요.
순식간에 차분해진 붉은 눈빛이 투명한 석류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같은 계열의 색이었지만 그 명도가 달라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귀능과 혜나, 사사는 슬금슬금 서장실을 탈출했다. 다나가 분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이 가득한 표정은 덤이었다.
나가 오빠는 운도 좋지. 그더게···.
타냐는 그런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빨리 탈출하라는 신호였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아, 그래서 오늘 학교 폭력범 잡다가 폭력 때문에 경찰서까지 다녀오신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피곤하실 텐데. 저라도 같이 갈 걸 그랬나 봐요. 아까 잠시 시간 비었었거든요.”
“아니, 이 정도는 네가 불려 갈 정도의 일도 아니고. 어쨌든 해결했으니까-”
“그래도요.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이 혼자 가서, 그런 고생까지 했다고 하니 당연히 속상하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떡하지···. 손이라도 다시 잡아드릴까요?”
아까 한 건 지속 효과가 5분 정도밖에 안 돼서. ···충분하니까 됐다.
다나의 분노로 지옥의 현장처럼 보였던 서장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차의 향기가 떠돌았다. 이런 극적인 분위기 전환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라, 둘 다 익숙한 기색이었다. 타냐는 느긋하게 서장실에 비치된 머그잔에 물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분 단위 능력 조절에 익숙해지는 데 얼마나 걸렸지?”
“음, 스푼에 온 뒤부터 연습한 거라 아마 기록이 남아있을걸요. 한 4달? 서장님 말대로 분 단위로 조절하는 건 좀 더 걸렸지만요. 물론 지금은 나름 정확해요!”
“알아.”
타냐는 드물게 뿌듯하다는 얼굴로 두 손을 흔들었다. 타냐는 후천적으로 능력을 발현했고, 몹시 서툴렀다. 그렇게 무식하게 쓰던 능력을 조절하기 위해 훈련하던 시절의 기억은 타냐 안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아, 듄 선생님 보고 싶다.
“후천적으로 발현한 거라 어려웠을 텐데. 잘했네.”
“이제 와서 그러면 좀 부끄럽네요. 제가 보기엔 그때도 좀 미숙했거든요.”
다나는 타냐가 처음 입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조건이 단순 접촉인 줄도 모르고 무식하게 사람들을 안으며 안정시키던 갓 23살의 대학생은 지금, 어엿한 스푼의 히어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가 이어지고, 제한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다나는 차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5시를 넘긴 시각.
“아, 연락이. 그럼 전 이제 상담실로 돌아가 볼게요. 나가 군은 곧 오겠죠?”
“그렇겠지. 일찍 오라고 했더니, 이 자식이···.”
“그래도 너무 혼내진 않았으면 해요, 서장님.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이게 처음이잖아요, 네?”
“···그래.”
감사해요. 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 파이팅!
가볍게 파이팅 포즈를 취한 타냐는 그렇게 문밖으로 사라졌고, 지각한 나가는 타냐의 쉴드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짜 나이프의 아지트에 놀러 가게 되었다.
“아, 오수 씨요?”
[네. 어차피 요즘 상담 일정도 좀 비었고, 오늘은 금요일이잖아요?]
“아, 네. 확실히 오늘 상담 일정은 이게 끝이긴 한데···. 그래도 자리 비워도 될까요?”
[타냐 양이 연락 꼼꼼히 챙기는 거 다 아는데요 뭐. 근처니까 가서 연락 오면 그때 돌아가도 충분할 거예요.]
뀨, 핸드폰 너머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목소리에 타냐가 작게 웃음 지었다. 확실히 요즘 상담 일정이 조금 비긴 했다. 정기적으로 오는, 몇 없는 직원들만 챙기고 있어서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니, 사실은 다들 바빠서 못 오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에 잠시 흠칫한 타냐는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핸드폰 너머에선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네, 그럼 가볼래요. 다들 오랜만에 보겠네요.”
[네, 그럼 서장님께 그렇게 전할게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타냐는 바로 출발하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펼쳐진 차트를 제자리에 넣고, 순서에 맞게 정렬한다. 핸드폰 알림을 확인한 뒤 문 앞에는 자리 비움 표지판과 연락처를 함께 걸어두었다. 업무 시간에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늘 걸어놓는 현판이었다.
-가짜 나이프라.
2년 전, 나이프가 돌연 자취를 감추고 스푼의 향방이 불안정해질 때쯤 입사한 타냐는 후원자로 나타난 그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얀 머리에 푸른 눈, 허리에 작은 날개를 달고 있는 힐러 형제. 그리고 온통 파란 색채를 가진 청년···. 당시엔 잠시 소개하고 어색하게 헤어졌었지만, 이제는 크게 달라졌지.
가짜 나이프의 보스인 오수. 곁에 있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약 인간. 타냐의 몇 없는 친구 목록에 단단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서장님도 가세요?”
“뀨···. 그렇게 됐네요.”
“불만 있냐?”
“뀽! 아파욧!”
어쩌다 보니 모이게 된 인원은 네 명. 다나와 귀능, 타냐와 나가였다. 타냐는 서장님도 쉬는 날이 있어야 한다며 환영했다. 나가는 귀능을 째려보는 다나와, 어째선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의 타냐 사이에 껴서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가는 유난히 타냐에게 낯을 가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의 악수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사는 하지만 막상 둘이 있으면 죽을 듯이 어색한 사이. 마치 처음 사사를 만났을 때와 같은 죽음의 침묵···!
게다가 타냐는 특유의 꿀 같은 금발과 발그레한 얼굴 때문에 마치 아기 천사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사 앞에서 했던 것처럼 망한 개그를 보여서는 지옥으로 끌려들어 갈 것만 같은 신성함이었다.
뭐,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는 타냐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무슨 일 있겠네요. 긴장하세요, 나가 군.”
“네?”
그때, 귀능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옆에서 다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가는 민망한 듯 웃어 보이는 타냐를 보고 그와 관련된 일임을 직감했다.
“타냐 양과 함께 있으면 거의 90%의 확률로 사건이-”
끼기익- 쾅!
“꺅, 교통사고야!”
“119, 119!”
“-발생하거든요.”
타냐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 자동차가 가로등에 처박혔다. 특유의 반사신경으로 타냐를 보호한 다나가 이를 갈았고, 귀능은 뀽,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 자동차의 문을 뜯어냈다.
“벌써 한 건 했네요, 타냐 양.”
“아하하···. 그래도 요즘은 좀 조용했는데.”
“저, 저기 저는 지금 이해를 못 했는데요···. 이 상황이 타냐 선배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이것 좀···.”
“아, 네.”
다나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고, 귀능과 나가는 자동차에 타고 있던 운전자와 동승자를 구조했다. 다행히 추가 피해는 없어 보였다. 빠르게 일단락된 상황을 경찰에게 인계하고, 네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가 군, 코난 아시죠?”
“아, 갈 때마다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타냐 양이 그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정 이상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늘 사건에 휘말리죠. 살인, 강도, 교통사고나 자연재해 등···. 사건 체질이라고 보면 돼요.”
“그게 가능한 거였어요?!”
믿을 수 없는 말에 나가가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장본인인 타냐와 그 옆의 다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에, 정말로?
나가는 잠시 몸은 어리지만, 머리는 고등학생인 탐정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너무 이미지가 다르잖아! 그 탐정은 가는 곳마다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사신이라고 불릴만했다. 하지만 타냐의 경우엔 자의와 상관없이 너무 많은 사람 사이에 있기만 하면 사건에 휘말리는 거다. 대략··· 그··· 사신과 피해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네. 그래서 좀 인적이 없는 곳으로 다니고···. 죄송한 일이지만, 외출할 땐 무조건 히어로분과 동행하고 있어요.”
“그게 뭐가 죄송한 일이야.”
“아니 그래도···. 사건 체질이라니.”
“하지만 사실인걸요.”
타냐가 헤실 웃어 보였다.
아, 네. 나가는 떨떠름해졌다. 사람은 좋은데 참···. 어떻게 스푼에는 멀쩡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지가 의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간단한 설명과 몇 분의 현장 수습 끝에 네 사람은 사람이 없는 골목을 통해 겨우 무사히 가짜 나이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별일 없이 도착했으니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가는 평범한 꽃집이라고 생각했던 가짜 나이프의 아지트를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스푼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정말 평범한 꽃집인 줄 알았다. 일호 형도 그냥 꽃집 형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나가가 과거를 회상하거나 말거나, 곧 아지트에서 세 사람이 나와 일행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그중에서도 보스, 오수는 특히 더 반기는 눈치였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타냐 씨,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죠. 오수 씨는요? 지난번에 스푼에 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상담실에 한 번 들렀다 가지 그랬어요.”
“아, 그래도 업무 시간인데 방해될까 봐-”
“오수 씨가 무슨 방해예요-”
와, 천사 둘이서 얘기하고 있다···.
나가의 짤막한 감상평이었다. 밝고 몽실몽실해 보이는 색의 머리카락에 순박한 얼굴, 체구마저 맞춘 듯이 비슷했다. 한쪽이 지나치게 병약해 보인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한 쌍의 천사들이었다.
“자, 자. 귀능 씨랑 나가 씨. 먼저 약부터 먹을까요”
“네···. 어, 타냐 선배는 안 먹어도 되나요?”
“넹. 나름 막을 수 있거든요.”
“아 진짜요? 특기예요?”
“네. 그러니까 저희 보스도 맘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죠.”
그러네. 마약 인간이라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오수로서는 중독의 위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무척이나 편할 것이다. 납득한 나가는 일호가 밥을 준비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수가 유독 반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타냐 선배는 까면 깔수록 뭔가 자꾸 나오는 것 같아서 신기하네. 나가는 자신이 아무리 드문 특기자라고는 해도, 타냐만큼 독특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물론 절대 그럴 리 없다).
아, 지난번의 여고생 납치 사건에서 만났던 납치범의 무효화 특기를 떠올린 나가가 퍼뜩 질문했다.
“어, 근데 무효화···? 같은 특기라면 마약이 흘러나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있지 않나요?”
“그건 안돼.”
히익, 귀능에게 물어봤던 질문의 답이 바로 뒤에서 들려오자 소름이 쫙 끼쳤다. 서장님이라서 더 무서웠다. 나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되물었다. 왜요?
“오수의 경우는 체질의 문제라 무효화가 힘들고, 타냐는 자기 보호만 가능하거든. 위협을 향한 얇은 갑옷을 두르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특기 무효화도 그 일환일 뿐이야.”
갑옷도 얇아서 경도가 형편없지만, 저 정도는 가능하지. 아.
나가는 밥을 먹고 나서도 단란하게 얘기를 나누는 타냐와 오수를 바라봤다.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네. 그래서 고민이에요···. 도서관을 갈지, 아니면 힘내서 서점에 갈지.”
“그렇죠···. 저도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안 돼서 같이 갈 수도 없고.”
“공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데요, 뭐.”
그러고 보니 다나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굉장히 초조한 것처럼 다리를 떨면서··· 어? 머릿속에서 푸른 불이 번쩍였다. 그린 라이트?
누구지? 역시 타냐 선배? 그래서 지금 오수 씨를 질투하는 건가···. 하지만 저 둘은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나가가 생각해도 타냐에겐 다나 같은 무서운 사람보단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오수 같은 사람이 어울렸다. 차마 응원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서장님···.
“아, 연락이 와서···. 저 먼저 가볼게요, 오수 씨.”
“네? 여기 일호가 챙겨준 반찬인데 가져가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와아, 감사합니다! 서장님, 저 먼저 가볼게요.”
“어딜 혼자 가. 또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데려다줄 테니까 가자.”
“앗, 고맙습니다···. 오수 씨, 일호, 이호 씨가 안 보이는데 먼저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음, 역시 서장님이 더 든든하긴 한데··· 역시 오수 씨가 더···. 나가는 굉장히 잘못된 착각을 하며 타냐에게 꾸벅 인사했다.
“재밌었어?”
“네?”
“너 말이야, 요새 기분 계속 안 좋았잖아.”
“!”
인적 없는 거리에 둘만 남게 되자 들려온 말에, 타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나, 싶었다. 확실히, 요새 나이프에 대해 고민을 하느라 늦게까지 숙소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걸 다나가 주시했을 줄은 몰랐던 타냐는 안절부절못했다.
“아, 네. 요즘 고민이 있어서···.”
“뭔데. 말해봐.”
“들어주시게요?”
“네가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지는 않을 거 아냐.”
와, 서장님이 남자였으면 반했겠다. 무거운 신뢰가 담겨 있는 말에 타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누구에게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얘기였다. 타냐는 결국 말을 거르고 거르다 말을 텄다.
“그··· 나이프를 원칙의 예외로 둘 이유를 찾고 있었어요!”
“하?”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는 듯 다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럴만했다. 정말 어이없는 소리니까. 하지만 타냐는 진심이었다.
음, 요약해보자. 인간의 법이 아닌 자연의 룰로 생각하면 원래부터 인간이 죽든 동물이 죽든 똑같이 느껴져서 살인과 도살이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모두가 괴로워서 억지로 외면하고 납득을 포기했다.
그런 나사 빠진 모럴이 또 일하기엔 지장 없어서 대충 유지하고 지냈고. 그러다 보니 나이프의 행적을 직시하기에 자신은 여전히 우유부단해서. 그런데 그런 감정만으로 특기를 사용하긴 싫어서···. 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 평소엔 원칙을 지키느라 현장에 나서지 않았는데···. 이제 나이프라는 적이 나왔으니까 마주치면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은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원칙대로 '안녕하세요, 감정을 조절해드릴게요, 괜찮을까요?'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허··· 그게 이유까지 있어야 할 일이냐?”
“저한텐, 네.”
“나는?”
“허락해주셨잖아요. 언제든 하라고.”
···이건 이것대로 기분 나쁜데. 네?
다나가 한숨을 쉬자, 타냐는 반사적으로 손을 붙잡았다. 부끄럽게도, 이번엔 사감이 담겨 있었다. 이래도 화낼 거예요? 울말울망한 눈빛이 다나의 양심을 공격했다.
“나이프는 나쁜 놈들이야.”
“알아요.”
“네가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죽어.”
“···네.”
“이래도 네 원칙에 포함되나?”
“네에, 예외는 없어야 하니까···.”
타냐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가 현장 임무에 굳이 나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신체 능력 때문도 있지만, 이 빡빡한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유하면서도 확실한 원칙이 있는 타냐의 모습은 시민에게 신뢰성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이럴 땐 글쎄.
“하하, 아니에요. 좀 쓸데없는 고민이죠?”
역시 고민을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타냐는 애써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타냐가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타냐의 몇 걸음 뒤에서 걷고 있을 다나의 표정이 궁금하면서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됐어. 어차피 그 자식들은 내가 잡아 족칠 거니까.”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예외는 나로 족하지. 됐냐?
-그러니까, 이런 말은 예상치 못했다는 소리다. 타냐는 새빨갛게 물든 귀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기를 바라며 입을 뻐끔거리다 생각했다.
정말로, 사람을 혹하게 하는 데에는 재능이 있는 서장님-이라고.
-그 예외는 아직, 단 한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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