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는 마냥 천사같은 사람은 아니다
스푼의 상담사
“아, 타냐 언니?”
“알아?”
다음 날, 나가는 출근하자마자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스푼 서장, 다나의 동생인 혜나에게 어제 봤던 타냐에 대해 물어봤다. 같은 조이기도 하고, 어려서 그런지 같은 조의 무서운 사사 선배에 비해 마음의 장벽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히 나가는 사사와 낯을 가리고 있었다.
혜나는 타냐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밝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스푼에서 몇 안 되는 정상적인 어른이라나. 상담실에서 어린 혜나와 함께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가는 전날 봤던 타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적으로 착하고 이성적인 어른의 모습이었다. 스푼의 의료실에서 머무르며 혜나를 봐주었단 얘기도 충분히 그럴 법했다.
“스푼에서 타냐 언니 모르면 간첩이지. 처음 입사하자마자 전 직원과 상담했다고 하더라. 몇 달 걸렸댔지?”
“전 직원과…?”
“응. 지금이야 평화롭지만, 예전엔 이런저런 일이 있었나 봐. 그래서 지금도 꾸준히 상담받는 사람이 있고, 출퇴근 시간에도 그러지 않겠어?”
출퇴근 시간?
혜나의 말만 들어서는 출퇴근 시간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상담사가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진료? 그 많은 인원이 그 시간에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무슨 그룹 상담이라도 하는 건가? 나가가 영, 감을 못 잡는 듯하자 혜나가 결국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2년 전, 과거의 이야기였다.
* * *
“꾸준히 약을 처방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네. 그런데 전 그쪽으로 공부한 게 아니고, 일일이 따로 처치할 수 없어서. 각자 병원을 찾아가야 하거든요.”
아니면 관련 인원을 의료반에 확충하거나, 요.
타냐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약물치료가 필요함’ 정도의 진단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고작 대학교 4학년생이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나친 자책이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눈치 볼 건 없는데, 그보단 스푼 소속 히어로들의 정신 상태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은 게 문제였다. 다나는 한숨을 쉬며 명단을 보다, 세는 걸 포기했다.
“네 선에서 해결할 순 없고?”
“네…. 처방을 어떻게 하는지는 제가 배워가면 되는 얘기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다 보니 지금은 온건한 케어밖에 할 수 없어요. 게다가 그 많은 분께 하루에 몇 번씩 찾아가서 접촉할 순 없으니까요. 지금도 하루에 여섯 분밖에 상담할 수 없어서 상담 일정 짜는 게 힘들어요.”
타냐가 파리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 * *
“-잠깐, 접촉?”
“아, 말 안 했나? 언니는 특기자야. 접촉하는 걸로 상대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지. 많이 접촉할수록 효과가 오래간다는데?”
난 잘 모르겠지만! 오….
와, 완전 직업에 제격. 나가는 작게 감탄했다. 왠지 모르게 포근한 분위기를 갖고 있던 타냐와 더없이 잘 어울리기도 했다. -왠지 타냐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을 돌보고 또 사랑받으며 자라왔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온 애정을 행복이라는 형태로 사방에 베풀고 다니겠지…. 그런 때 묻지 않은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던 나가의 정신을 깨운 것은 이어지는 혜나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언니는 히어로들의 심리 상담사이지만, 동시에 각종 범죄 피해자들의 히어로기도 하지. 그런 사건에 종종 불려 갈걸? 주로 피해자 정신 안정 목적으로.”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전날, 피해자인 여고생과 자연스럽게 동행하던 타냐의 모습이 기억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리 상담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싶었는데, 그런 특기라면 확실히 유용할 법도 했다. 그런데 그게 출퇴근 시간과는 무슨 관련이 있지?
“아 맞다, 나가 오빠가 말 끊어서 까먹을 뻔했잖아. 그때 그래서…”
* * *
“저, 그거 출퇴근 시간에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뀨, 귀능이 의견을 낸 것은 그때였다.
“타냐 씨, 능력 사용에 딱히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들 오고 가는 시간에 한 번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침약 저녁약 챙기듯이요.”
“오….”
“괜찮은데. 어때?”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럼 출퇴근 시간에 다들 줄 세우고 하이 파이브라도 할까요?”
“그 정도로 되겠어?”
“음, 그것도 4시간은 가요. 아니면 악수를 해도 되구요.”
그렇게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다. 그날 이후로 타냐는 아침과 저녁 2시간 동안 로비에서 대기하며 악수를 제공하게 되었다. 정작 타냐는 이 방법이 부작용도 없으니 확실히 더 낫긴 하지만, 비상약 처방은 도와드릴 수 없으니 따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아쉽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어쨌든 얼레벌레 세운 사내 규칙치고 제법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도.
* * *
“…그래서 다들 출퇴근할 때마다 줄지어서 악수를 한다고?”
나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런 진풍경이 벌어진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타냐가 모든 사원의 정신 상태를 살피고 있다는 점은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그와 악수하기 위해 전 직원이 줄을 서는 풍경이라니. 무슨 악수회도 아니고.
“딱히 퇴근할 때가 아니어도, 6시부터는 다들 로비로 찾아가서 악수하고 올라올걸? 이따 확인해봐.”
“아니,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어쨌든 타냐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덤으로 타냐가 있는 상담실 역시 그리 유명무실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그런 미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나가도 내밀한 비밀쯤은 줄줄 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건 또 어제 일인데. 멱살을 잡혔더니 텔레포트가 안돼서-”
“아, 그거?”
그런 감상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화제는 곧 어제 만난, 남의 특기를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기자로 넘어갔고, 꼬마 마녀 혜나는 잠시의 설명 후에 마약 밀매범들에게서 발견한 빗자루에 대한 일로 서장실로 불려 갔다. 덕분에 나가는 어색한 선배, 까마귀 혼혈 사사와 단둘이 남아있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같은 비행조임에도 정적밖에 남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드물게 느긋한 5시의 오후, 타냐는 모처럼 서장실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즘은 자유 상담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도 몇 없고, 있더라도 언제든 연락할 수 있도록 연락처를 걸어 두고 나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탈이었다. 그래서 대강의 제출 서류를 다나에게 넘긴 뒤,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다.
“나가 군 괜찮을까요?”
음? 무슨 일 있나?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분주하게 뭔가 챙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타냐는 호출을 받을 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스푼 상담실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식이 느린 편이다. 보통 그 사후의 뒤처리를 담당하면 담당했지, 현장에서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구르는 것 같아요.”
“사사랑 혜나가 있잖아.”
아, 최근에 새로 들어온. 일이 많은가 보다. 하긴 스푼은 고질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니까. 당장 스푼의 전 직원을 챙기는 상담 인력이 본인 하나뿐이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새삼 입사 초반의 업무 강도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직원들이 타냐에게 의존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의 기쁨인 타냐조차도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할 일이 몰아쳤던 암흑기라 할 수 있다.
“…타냐도 있고.”
다나가 곁눈질하며 말했다. 타냐는 그 말에 가볍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믿음을 받는 기분은 언제나 새롭게 짜릿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타냐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이 자리에, 히어로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고자 하는 것이다.
“걱정하고 안 하는 게 맘대로 되나요? 그냥 대충 우리도 출발하죠.”
“아직 정원이 부족하잖아.”
아마 나가는 먼저 가 있고, 다나와 귀능이 그 지원을 가는 상황인가 보다. 그 둘이 일어나면 자신도 상담실로 돌아가야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익숙했다.
“2년이나 코빼기도 안 보인 것들인데 하필 오늘 딱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런데 귀능 씨, 듀얼은 왜 챙기는 걸까…?”
나이프.
스푼과 대치 중인 악의 조직.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대량 살상조차 그 수단으로 삼는, 그리고 2년 전부터 갑자기 자취를 감춘 조직이다. 그 타이밍에 들어온 타냐는 당연히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보스인 백모래는 정화라는 특기에 신체 조작을 받은 강화 인간. 멤버인 메두사는 몸에 뱀을 키우고 있는, 마찬가지로 강화 인간. 오르카는 범고래 혼혈답게 튼튼한 몸과 괴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스푼을 배신하고 나이프에 들어간 발화 특기의 소나무 인간 송하까지.
타냐도 스푼 소속의 히어로인 이상, 그들을 모를 수는 없었다. 스푼의 전 직원을 상담할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조직인데 모를 수 있을 리가. 히어로들이 가진 트라우마의 원인 대부분은 나이프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원한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어야 할까?
아니, 원한도 각오도 없는 내가 그들을 체포, 혹은 사살하기 위해 특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히어로들이 단체로 그워억-거리는 진풍경이 앞에 펼쳐져 있다.
“엥?”
“아, 지금 6시 반이구나! 나가 오빠는 처음 보지?”
“이게 그 악수회야?”
나가는 황당하단 얼굴로 로비에 들어찬 히어로들을 쳐다보았다. 스푼 내에서 이렇게 많은 히어로들을 한 번에 보는 건 처음(서른 명 좀 넘는 수이긴 하지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체구의 타냐는 거의 파묻혀 있다시피 하고 있었고, 옆에 있던 사사도 그 틈에 낀 지 오래였다.
제일 의문스러운 건 히어로들의 변화였다. (정신적인) 피로감에 찌들어 있던 히어로들이 악수 한 번에 게X린이라도 먹은 듯한 안색 변화를 보이는 것이다. 몇몇에게는 각자의 처방을 무어라 읊어주고 나서야 히어로를 앞으로 보내는 타냐도 타냐고.
“오빠도 한 번 해봐! 기분 좋아!”
“너도 가려고?”
“음···. 난 별 차이 없긴 한데 그냥 손잡는 게 좋아서 하는 거야!”
“?”
왜지?
나가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잠자코 줄에 끼어들었다. 마약 밀매범인 레드럼의 연구소에서 갓 돌아와서 그런지, 시간이 꽤 늦어졌기 때문에 얼마 기다리지 않고도 바로 타냐를 만날 수 있었다. 타냐는 혜나에게 인사를 한 번 하고, 고작 한 번 본 것뿐인 나가를 밝게 맞아주었다.
타냐는 입구 한구석, 사정을 모른다면 생뚱맞다고 생각할 만한 위치에 간단한 책상과 의자를 두고 아침저녁마다 오가는 모양이었다. 그 위에 널려있는 여러 권의 바인더에는 사원의 이름이 한 땀 한 땀 적혀 있었다.
“어, 나가 군은 처음이죠? 상담받은 적이 없어서, 기록지를 새로 만들어야겠네요.”
“네? 전 상담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냥 기록용이에요. 그 사람에 대한 간단한 인적 정보를 알고 있어야 혹시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생겼을 때 곤란하지 않죠. 이거, 써줄래요?”
나가는 타냐가 내민 종이를 받았다. 일괄로 인쇄한 듯 보이는 서식의 A4용지에는 이름과 나이, 입사 시기와 현재 직무에 대한 정보를 적을 수 있는 칸이 있었다. 별로 대단한 정보는 아니다 싶어 안심한 나가는 빠르게 빈칸을 채웠다. 그사이에 새 바인더를 꺼낸 타냐는 나가, 라고 이름을 적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맛보기만 보여줄게요. 손 좀 줄래요?”
“네, 네!”
그러고 보니 여자 손을 이렇게 잡아보는 건 혜나를 제외하면 처음인데. 뒤늦게 따라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타냐의 오밀조밀한 생김새는 그를 나가의 또래처럼 보이게 해서, 더 부끄러웠다. 공공 의료행위··· 나 다름없는 것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되는데.
“어, 어?”
그때, 기묘한 감정 변화가 찾아왔다. 늘 평소와 비슷하던, 평범하고 조금은 의욕이 떨어지는 기분이 극적으로 변했다.
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한 비유가 있을 것 같은데···.
짹짹-
모처럼 일찍 일어난 아침. 알람도 없는데 눈이 떠져서 시간을 확인해보면 주말 오전 8시, 졸리지도 않고 개운하다. 앗싸, 하루 반나절을 이득 본 기분에 할 게 없는지 생각하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행복한 아침이다. 뭘 해도 즐거울 것 같았다!
“핫,”
방금 뭔가 이상한 영상이 지나간 것 같은데.
그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짧은 시간 동안 굳어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혜나가 깔깔거렸다. 타냐도 쿡쿡 웃으며 나가에게 말을 걸었다.
“신기하죠? 그거 효과가 4시간은 갈 테니까, 그동안 밀린 걸 다 해치우는 걸 추천해요. 마음껏 놀아도 좋구요. -아마 극히 싫어하는 걸 제외하면 뭘 해도 의욕이 날걸요?”
나가는 그제야 스푼의 히어로들이 이 악수회에 환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기분으로 출근하는 것은 거의 모든 직장인의 꿈이었다! 나가는 혜나 근처에서 엄지를 올린 사사에게 따라서 엄지를 올려주었다.
“언니, 나도!”
“혜나는 그냥 손잡아줄게. 어차피 별로 변화도 없을걸?”
“응!”
그리고 혜나는 손을 잡는 말이 무색하게 타냐에게 폭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 혜나에게 타냐는 익숙하다는 듯이 사탕이며 초콜릿들을 꺼내주었다. 어떻게 보면 친자매처럼 보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나저나, 나가는 피곤한 하루 끝이 이렇게 찬란히 보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 4시간을 알차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본인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산적인 생각이었다.
“와, 스푼의 전 사원들이 다 이런 기분으로···.”
“그건 아니에요.”
혜나의 손을 잡아주며 자리를 정리하던 타냐가 나가의 말을 부정했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흩어져있는 차트들이 보였다. 내용물은 당연히 볼 수 없게 닫혀 있었지만, 쌓고 보니 새삼 타냐가 한둘이 아닌 사람들을 케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다 다른 증상을 보여서, 그에 맞춰서 하는 거거든요. 나가 군은 아직 상담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경험해보라고 세게 해봤어요.”
의존하면 안 되니까, 다른 분들은 좀 더 약하게 하죠. 오···.
반쯤은 이해 못했다. 그냥 계속 기분이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 나가 본인은 항상 이런 기분이라면 뭐든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의욕적이 된 상태였다. 어쨌든 세심하게 강도를 조절한단 건 알겠다. 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뭐, 혜나는 늘 기운이 넘쳐서 이런 게 필요 없지만요.”
“그치? 역시 젊은 피라 이거야.”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가는 공부할 때 쓰면 이만한 능력이 없겠다 싶어 허허 웃었다.
“아, 참고로 싫은 건 여전히 싫어서 안 하려고 하니까 명심해요. 그건 마음가짐 문제더라구요. 대표적으로 일이나 공부···.”
아, 안 되겠다.
모두 퇴근하거나 야간 근무를 뛰고 있는 야심한 시각. 타냐는 퇴근을 준비한다. 하지만 오늘은 심란한 기분이라, 아직 사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상담실에서 뭉개고 있었다. 결국, 가운을 벗지도 않고 차를 한 잔 더 마시자고 결심한 타냐는 복도로 나가 물을 받아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경로였다.
“···”
상담실로 들어가기 위해 의료실로 들어서기 직전, 타냐의 눈동자는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담고 차게 가라앉았다.
타냐는 레드럼 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나이프가 돌아왔고, 그들이 레드럼을 죽였으며 연구소는 불타올랐다고···. 나이프는 만화로 그려질 법한 전형적인 악당의 행보를 걷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쪽이든 무사했으면 좋겠어···.”
타당, 탕-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혼자 놀라버린 타냐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입을 막느라 놓쳐버린 전기 포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에 있던 물은 쏟아져 의료실의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타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수건을 들고 자리를 수습했다. 딱 한 잔만 마시자고 생각해서 물을 적게 떠 온 것이 다행이었다.
“···다시, 다시 떠오자.”
타냐는 다시 한번, 물을 뜨러 복도로 나갔다.
특기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우.
둘째, 후천적으로 우연히 발견한 경우.
셋째, 후천적으로 노력해 갈고 닦은 경우.
-타냐는 후천적으로 발현한 경우이며, 명확한 계기가 있었다.
* * *
타냐는 몇 안 되는 예외를 제외하면,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 그럴 수도 있죠. 타냐가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입장은 ‘사감’이라며 배제하고, 상대의 입장만을 생각하며 공감하는 성질에서 나온다. 그에 남아버린 찌꺼기 같은 해묵은 감정들이 타냐를 괴롭혔고, 병을 불러왔으며, 특기를 발현했다.
“···특기를 발현한 계기가 뭐라고?”
“그, 부끄러운데요···.”
우울증에 걸렸을 때···. 타냐는 무슨 흑역사를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단순히 사례 수집을 위해 질문했던 듄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다나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미끄러졌으며, 귀능은 파일철을 떨궜다.
“이럴까 봐 말하기 좀 그랬는데. 저 괜찮아요, 정말로요.”
다나는 타냐가 처음 스푼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늘 발랄하게 스푼에 출근하고,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였다. 생기 없이 푸석해 보이는 얼굴, 한창 다니고 있었을 학교 얘기를 물으면 흐려지는 대답,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아문 손목의 모습도. 서장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죄송합니다···.”
“네? 아뇨, 듄 선생님. 괜찮다니까요. 데이터 수집은 중요하잖아요? 제 경우에 아마 정확한 계기는 자해일 거예요.”
아, 지금은 당연히 안 그래요! 몇 년 전 얘기인걸요. 지금은 훨씬 나아졌죠. 아하하···.
웃으면서 하는 말이 서장실의 공기를 더 얼어붙게 했다. 이 해맑기만 한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 일이 대체 뭐였을까. 다나는 개인적인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타냐의 특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타냐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해온 장면이 있다. 좁은 철장 안에 네댓 마리씩 갇혀서 퍼덕거리는 날개깃, 철장을 벗어난 아기 새들이 그를 탈출해서는 굶어 죽거나 차에 밟혀 납작하게 죽은 채 발견되는 장면. 그에 울면서 묻어주었던 경험. 그때부터 타냐는 부모님이 일하는 농장에 들어서는 것이 무서웠다.
정확히는 닭장이라 불리는 그곳. 수백 개의 철장이 모여 있는 그곳에 들어가면 고오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마음은 그게 닭들이 분노해서 내는 소리이며,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인간이 싫어진 것은.
“야, 똥개! 뭐하냐?”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흥, 계속 부를 거거든~”
“야!”
홀로 운동장 구석에 박혀있던 열두 살의 타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목숨을 취하지만 결국 먹이사슬에 속해 있으며 한 생태계를 이룬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원과 서커스, 혹은 박제···. 심지어 지금 먹고 있는 고기반찬마저도 욕심을 위해 유통되는 것이며 자신은 그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박제와 공장식 육류 생산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살인은 용납되지 못할 행위인 걸까? 동족이라서? 불법이라서? 그 목적이 불순해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모든 의문은 자연스럽게 도덕과 윤리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불과 13살 적의 일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타냐는 사랑이 많았다.
“와, 타냐 아니었으면 이건 못했다.”
“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버스 타도 되는 거야?”
“내가 좋아서 했는걸. 우린 팀이니까 당연히 상도 같이 받아야지.”
주변의 생명이 소중했고, 세상에 아픔이 없기를 원했다. 감사 인사가 곧 기쁨이고, 기대와 의존이 행복했다. 그래서 늘 모순에 시달렸다. 난 모두가 좋은데, 다들 완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아니, 타냐를 포함한 인간은 늘 다른 종뿐만 아니라 서로를 아프게 한다. 우유부단하고 강박적인 타냐만이 그 가운데 휘말리고 있었다.
그럴 수 있지, 아냐,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자기가 뭐라도 된다는 듯이 인간을 대변해보기도 하고. 나도 완벽하지 못한데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싶어, 결국 그들과 다름없는 타냐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을까?
없었다.
그 이후는 뻔한 일이다. 매일같이 싸움을 벌이던 머릿속 토론장에 온갖 사건과 문제를 대입하던 타냐는 우울증에 걸리고, 특기 덕에 모두와 멀어지고 고립되고, 그래도 자신과 같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며 심리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병을 낳았고, 그 병은 즐거운 회사 생활에서 대충 봉합되었다. 타냐는 눈과 귀를 막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좋다, 나쁘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나름대로 훌륭한 자질이었다. 상담사는 섣불리 가치판단을 하기보다는 내담자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사감과 관계없이 범죄자의 입장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여러 칭찬을 받을 때- 타냐는 그저 곤란한 듯이 웃고만 있어야 했다.
“···나이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더는 회피할 수 없었다. 나이프라니. 오롯이 자신의 가치관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판결 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냐는 가운을 탁탁 털고 소파에 파묻히듯 주저앉았다. 머그컵에서 훈훈한 차 향기가 피어올랐지만 갑갑해진 속은 풀리지 않았다. 투명한 찻물에 비치는 흑백의 풍경 사이에, 자신의 눈이 비치자마자 흠칫하며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친구가 싫어하니까 나도 싫어한다는 논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치관으로 그들이 싫다는 것을 납득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이다. 분명 타냐에게는 그들을 무서워하며 혐오하는 감정이 있지만, 타당하고 이성적인 이유가 없다면 그런 감정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타냐는 지금 감정을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잖아.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많아. 그 목적이 다를 뿐이지.”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사용하잖아.
“목숨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는 사람들은 많아.”
-공장식 축산?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거야?”
-어쨌든 법을 지키지 않은 건 사실이지.
“합법이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이지···.”
그들은 죽어도 싼 인간들인가? 몰라···. 애초에 내가 뭘 얼마나 대단하고 숭고하며 윤리적인 삶을 산다고 그들을 비난하겠어.
텅 빈 상담실에서 끝없는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결국 한 입도 대지 않은 차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타냐는 다시 가운을 걸쳤다. 두꺼운 치마, 니트, 가디건까지 걸쳤지만, 자꾸만 어디선가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남과 공유하지 못할 고민과 자기 비난을 할 때쯤이면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껏 차도 끓여왔지만, 이미 식어 있었다. 한숨과 함께 물이 흘러들었다.
“킁,”
여태껏 나이프를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뤄왔던 고민이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편하게 살아왔다. 크게 머리를 혹사하지 않고도 기쁘게 직무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 자신의 직업 만족도는 최상일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잡혀봤자 종신형 정도로 끝난다면 이렇게까지 고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죄목을 봤을 때, 사형을 피하는 게 이상하다. 그리고 타냐는 스푼의 공무 집행 중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 오늘도 나이프를 미워할 이유를 찾는 것에 실패했다. 아마 스푼 사원 중 나이프에 적개심이 가질 수 없는 사원은 타냐 한 명뿐일 것이다. 타냐는 죄책감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오늘은 더 이상 다른 사원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타냐는 보통 폭행, 테러나 대형 사고의 수습 현장에 파견된다.
“안녕하세요, 메라 씨?”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보통 피해자의 정신 케어 현장에 파견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전 타냐예요. 타냐 씨, 타냐 선생님, 어느 쪽이든 좋아요.”
“타냐 선생님, 저, 그, 정당방위 맞죠? 그런 거죠?”
“메라씨···. 전 메라 씨의 안정을 위해 파견된 상담사예요. 조금 진정하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감방에 갈 수도 있는데 어떻게 진정을 해요!!”
이번 피해자는 살인의 위협을 받았으며, 죽을 뻔한 그 찰나에 화병으로 가해자의 머리를 깼다고 한다. 가해자는 죽었고, 피해자는 이번 사례가 정당방위로 판결 나지 않을까 봐 극도로 불안해하는 상황이었다. 타냐는 이곳에 오기 전, 이번 사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본 참이었다.
살인은 나쁘다, 살인이 아니어도 다른 생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슬픈 일이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살해하는 것은 어떤가? 그래, 그럴 수 있다.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본능인걸.
죽이거나 혹은 죽거나의 상황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냐는 한 생명이 스러진 것에 애도하고, 벌 받아 마땅한 살인자를 위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피가 비치도록 손톱을 깨무는 메라의 두 손을 잡았다.
“메라 씨, 메라 씨가 침착하게 상황을 전달하면 지금 수사를 진행하시는 분들께 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충격받았는지, 절망적이었는지···. 다 말하려면 침착하셔야 해요.”
“하지만···.”
“제가 기분을 가라앉혀 드릴 수 있어요. 그런 특기거든요.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환하게 웃으며 메라의 손을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예요. 무서웠죠. 안아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나온 뒤, 타냐의 머릿속에는 죽게 된 가해자를 떠올렸다. 피해자의 부모에게 원한이 있어서 죽이고자 했다고 하던가. 복수는 납득 가능한 살인의 동기인가? 사실 복수는 분노에 속하지 않을까. 분노도, 복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 방법이 살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선택지로 몰린 가해자가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에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무고한 피해자일지도. 습관적으로 변명해버린 타냐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왜 자꾸 이런 식으로 내가 대신 변명을 해주고 있는 건지···.
아무래도 좋지만, 스푼의 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프마저 제대로 미워하지 못한 채 속으로 대변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뇌 빼고 생각하면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누군가를 마음 놓고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성질이 이번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킁,”
“어? 타냐쌤, 울어요?”
“아니거든요···!”
타냐는 딴생각을 멈추고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 사원 휴게실 냉장고에 고의 모셔놨을 치즈케이크를 생각하며 최대한 감정을 가다듬는 것은 덤이었다. -응?
“로나 씨, 혹시 공용 냉장고 있던 치즈케이크 보셨어요?”
“어, 왜요? 그거 제가 먹었는데.”
“아···.”
그거 제 거였는데.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다시 집어넣었다. 이렇게 말하면 로나 씨는 죄책감을 가질 것이고, 미안하다며 다른 것을 사주거나 할 것이다. 그건 부담스럽다. 오히려 로나 씨에게 선물했다 치고 넘어가는 게 더 나을지도. 그런 계산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하지만 아쉬운데.
아까 또 나이프 생각을 해버린 것 때문에 당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다 저번에 치즈 케이크를 사 온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외출 시간에 사 온 맛집의 치즈 케이크. 아까워서 약간 마음이 허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걸 깜빡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타냐 역시 깜빡하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전적이 없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아니에요, 저번에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없어서.”
아, 또 이런 생각이었네.
동시에 타냐는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그의 입장을 배려해주고, 이해로 싸움을 포기하기 위한 사고방식. 그런 식으로 타냐는 어떤 분노도, 다툼도 피해왔다.
사과받는 게 어때서, 왜 굳이 그것에 부채감을 느끼는 거지? 이래 놓고 나중에 후회할 거면서···. 다툼도 없이 기본적인 사과를 받기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타냐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아니, 그게 뭐가 나쁘지? 타냐는 고개를 기울였다.
“헉, 생각해보니까 그거 타냐쌤이 사 온 거잖아!”
“진짜요?! 미안해서 어쩌지, 힘들게 사 왔을 텐데! -새로 사다 줄게요! 어디서 사 왔어요?”
끙끙거리는 로나의 뒤로 레인이 윙크하는 모습이 보인다. 레인은 그런 타냐의 버릇을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타냐는 레인에게 대신해서 사과를 종용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부담을 동시에 느꼈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그럼 다음에 나갈 때 제 거도 사다 주기. 괜찮죠? 네!
휴, 겨우 상황을 넘겼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로나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활짝 웃으며 타냐를 휴게실로 이끌었다. 여사원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팀의 히어로도 몇몇 보였다.
“타냐쌤은 누가 죽여도 괜찮다고 할 것 같다니까~”
“음···. 사정이 있다면요?”
“죽고 나서 사정을 어떻게 들어!!”
푸하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진심인데. 타냐는 의아했지만 일단 웃었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냐는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었다. 죽는 그 순간에 삶의 갈망에 시달리는 것보단 차라리 이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쩌면 내가 지금 갈 팔자였을지도 모르지, 하면서.
실제로 몇 번이나 있었던 삶의 위협에서, 타냐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있어도 삶에 대한 갈망은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사정이 있었을 거야, 를 되뇌며 자신을 납득시켰던 것이 생각난다.
“아, 그래서 로나 씨가 제가 타냐쌤이랑 같이 나가서 사 온 치즈 케이크를 먹은 거예요?”
“잘못했네! 언제 또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알고 있어요!”
“그만 해요. 저한테 또 새로 케이크 사준다고 하셨으니까-읍?”
한껏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로나를 놀리는 여사원들을 말리려다가, 타냐 입 가득히 케이크 조각이 들어왔다. 단 생크림의 맛이 새콤한 것을 보니, 딸기 생크림 케이크 같았다. 그러고 보니 케이크 타임이었는지, 다들 조각 케이크 접시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 케이크를 넣고 있는 것은 현장에서 근무하는 히어로, 히나였다.
“제꺼 나눠 먹을래요?”
“···네.”
히나가 착하다는 듯 타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냐는 조금 눈치를 봤지만, 이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아까의 부담은 온데간데없이, 상황은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그게 다행스러울 따름이었다.
“타냐?”
처음 듣네, 신입인가?
온통 새하얀 색의 정장, 그리고 가운까지 걸치고 있는 백모래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저렇게 허술해 보이는 인간이 나이프의 보스이며, 희대의 살인마라는 게 새삼스럽다. 오르카는 헛기침을 하며 보고를 계속했다.
“저희가 모습을 감춘 직후에 입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능력은 상대방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고 따로 신체 능력은 그다지···.”
“아, 그래? 징그럽네.”
더 보고를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을 자르는 백모래의 행동에 오르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보스의 목적은 사랑이 아닌가. 상대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그만 있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처참한, 상대가 눈길도 주지 않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도 백모래에게 회생의 기회가 생기는 것 아닌가. 한쪽은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증오하는 관계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또 드물 것이다.
“내 사랑의 감정을 남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거잖아.”
어떻게 그걸 좋아하겠어? 아, 확실히.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확실히 유능한 직원이지만 늘 일정 이상의 민원을 받는 직원이기도 했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충분히 나쁘게 사용할 수 있는 특기이기도 하고···.
자, 이제 2년 사이에 새로이 들어온 스푼 직원들에 대한 정보는 이제 최근 입사한 고등학생 히어로, 나가만을 남기고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백모래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남을 미워하기엔 너무 우유부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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