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

[혈계전선/레오드림]앨범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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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전선/레오드림]앨범

-네임리스 드림-

w. 솔방울새

사진은 언뜻 봐선 단순히 찰나를 복사한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네모난 사각형 안에 피사체를 배치하고, 초점을 맞춘 뒤 셔터를 누르는 일련의 행동만으로 작은 기계는 훌륭하게 순간의 장면을 담아낼 수 있으니까. 어렵지도 않은 데다 별다른 기술 없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간편하게 쌓인 사진들을 통해 그 사람의 시선과 애정까지도 알 수 있단 점일 것이다. 레오나르도 워치에게서 처음 앨범을 받았던 날, 그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연하남은 꽤 수줍음이 많았다. 가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대범한 모습을 보여 놀라게 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러했다. 간만에 날이 풀려 레오와의 데이트를 약속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렇듯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그는 기다리던 이를 보자마자 반색하더니, 다가가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뺨을 붉혀버렸다.

"많이 기다렸어?"

"전혀요! 제가 더 일찍 나와서 그렇지 아직 약속한 시간보다도 더 이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시간을 당겨 나와도 매번 네가 먼저 와 있잖아. 얼마나 미리 오는 거야?"

  이쯤 되면 정말로 궁금해져 물었지만 레오는 그저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이고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건 비밀이에요."

"의외로 쉽지 않아, 너."

"에에. 그렇진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슬슬 짧다곤 할 수 없는 시간을 만나왔는데도 손을 잡을 때마다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일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레오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기색이거나 자신을 편치 못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면 조금은 기분이 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레오는 순수하게 수줍음이 많은 성격일 뿐이었다. 그런 반응들에 덩달아 조심스러워지는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은 오히려 신뢰와 애정을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하게 쌓을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어서 가요. 지난주엔가 42번가 쪽에서 정말 맛있는 식당을 찾았거든요. 마침 어제 스티븐 씨가 남는다며 주신 저녁 영화표도 있으니 같이 보러 가실래요? 그리고 시간이 되면 공원에서 산책하는 건 어떠세요? 제드 씨가 지금 공원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고 했어요."

  며칠 전엔가 레오가 메시지로 말했던 기억이 났다. 재프, 제드와 함께 새로 생긴 퓨전 레스토랑을 갔는데 맛이 좋다며 음식 사진을 찍어 보내왔었다. 맛보여주고 싶으니 다음에는 꼭 같이 와서 먹자며. 길게 고민할 것 없었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둘 다 좋다고 대답하자 레오의 얼굴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공원에 가는 김에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늘 챙겨 다니는 듯 보이던 작고 노란 카메라를 살짝 들어 보이며 잠시 말을 고르던 레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중간중간에 사진을 좀 찍어도 괜찮을까요?"

"사진? 그거야 원래도 자주 찍던 거잖아."

"그런 게 아니라... 으음. 그동안은 꼭 제가 사진을 여기서 찍어도 되냐고 묻고, 누나가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면 그대로 찍곤 했잖아요. 오늘은 그렇게 의식하고 지은 표정이나 포즈가 아닌 자연스러운 순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걱정되신다면 편하게 거절해주셔도 괜찮아요! 정말 가벼운 제안이니까요."

"한 마디로 하루 치 사진 촬영을 통째로 허락받고 싶다는 거지?"

"그렇게 되겠네요. 조심스러우실 수 있다는 건 이해해요. 당연히 다 찍고 나면 찍은 거 다 보여드릴 거고, 마음에 안 드시는 건 편하게 지워주셔도 좋으니까 한 번 생각해주시면...."

  정작 말하는 레오야말로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잠시 이 귀여운 애인이 그동안 찍어 보여주었던 사진들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에도 금방 긍정을 표하자 긴장한 기색으로 굳어있던 안색이 순식간에 환하게 피어났다. 그 순수한 모습을 보자니 잠깐의 고민도 불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나온 사진은 나한테 보내줘야 해?"

"당연하죠! 잘 찍어드릴 테니까 믿어주세요. 그럼 저희 식사부터 하러 가죠."

  맞잡고 있던 손을 타고 들뜬 레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법 든든하게 목적지를 향해 이끄는 그를 따라 가벼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반나절의 데이트는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레스토랑의 음식은 입맛에 잘 맞아 두 사람 모두에게 재방문을 결심하게 했다. 조금 과식을 하곤 소화시킬 겸 걸어서 찾아간 공원은 제드의 말 대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광장 쪽에서 바람을 타고 팔랑이며 날아온 종이 나비들이 꽃잎들과 함께 사람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범인은 상상조차 못 할 규모의 사건들이 표면 아래 몸을 불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그곳만큼은 헬사렘즈 롯의 마경에서 뚝 떨어져 나온 듯한 광경이었다. 휴마고 이계인이고 상관없이 가족 단위로 놀러 오거나 친구, 연인과 함께 공원을 찾은 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분명 소화시키자고 시작한 산책이었는데, 들뜬 기분에 휩쓸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놀이터 근처에서 파는 와플을 사 들고 먹으며 걷고 있었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레오 쪽을 돌아보면, 어느새 카메라를 들어 이쪽을 찍고 있던 레오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찰나의 평범한 일상마저도 더없이 귀한 도시였다. 보기보다 믿음직스러운 연하의 남친 곁에서 단 하루쯤은 모든 걱정과 고민을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렇게 한가로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크고 요란한 사건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레오 역시 같은 생각인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풍경이나 분위기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녔다. 사적인 일에는 되도록 신들의 의안을 쓰지 않으려는 레오지만 어쩌면 그 특별한 눈으로 피해야 할 곳을 파악하며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단 의심이 들어버릴 정도였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극도로 끌어 올려진 본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안개로 뒤덮인 도시는 금새 찬 공기를 머금었다. 한기에 뻣뻣해진 손을 무심코 두어 번 쥐었다 펴자 레오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마침 시간이 되었으니 영화를 보러 가자고 권했다. 운 좋게도 스티븐이 주었다는 영화표는 얼마 전부터 내심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로맨스 영화였다. 그래, 팝콘과 콜라를 사 들고 들어가며 아무 생각 없이 웃을 게 아니라 그 시점에서 한 번쯤 의심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왜 어울리지도 않게 로맨스 영화표를 가지고 있었는지.

"....스티븐 씨가 왜 여기 계세요."

  지정석에 앉자마자 보인 옆 옆자리 사람의 얼굴에 레오가 허망하게 물었다. 그 사이에 앉아있는 입장에서는 차마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팝콘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만 들고 마시던 스티븐이 이쪽을 돌아보며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무하는군, 바빠서 여유가 없을 뿐이지 영화 보는 건 좋아하는 편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영화표를 주신 건 못 보셔서 주신 거 아니었어요?"

"스폰서들과 보기로 했다가 일정이 바뀌어서 취소되었네."

  스폰서들이랑 로맨스 영화를 보려 했다고?! 기가 막힌 외침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순간 상영관의 불이 모두 꺼지고 주변이 어두워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작게 중얼거리는 레오의 손등을 달래듯 쓸어주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당황스러울 뿐 특별히 나쁠 것도 없었다. 레오도 그녀도 로맨스 영화를 본다고 사람 가득한 영화관에서 손잡는 것 이상의 스킨십을 할 만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하나뿐인 콜라 컵에 두 개 꽂힌 빨대, 그중 하나에 입을 대고 마신 뒤 시선을 맞추며 웃어 보이자 레오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따라 웃었다. 

 

  영화 자체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여러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초반의 주인공은 우유부단해 보였고,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점차 상황에 적응해가며 자신의 중심을 잡고 관계를 주도해나가는 모습이 꽤 멋있었다. 

"나는 이만 먼저 가보지, 둘이 좋은 시간 보내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마자 스티븐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을 나가버렸다. 정말로 순수하게 영화를 보러 온 것뿐이었는지, 그는 내내 없는 사람처럼 조용해 잠시 존재마저 잊을 뻔했다. 레오는 그의 등 뒤로 가볍게 인사하곤 무안한 듯 미소지었다.

"죄송해요. 혹시 불편하셨다면..."

"아냐, 아냐. 정말 하나도 안 불편했으니까 걱정 마. 영화도 재미있었는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안도하는 레오와 팔짱을 끼고 좌석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크레딧은 아직도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상영관에는 그들을 포함한 몇몇 커플만이 남아있었다. 길게 여운을 남기듯 영화 내에서 나왔던 배경 음악들이 차례로 들려오자 묘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레오의 뺨에 짧게 입 맞추자, 그의 말간 뺨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귀여운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니 놀라 입만 벙긋거리던 레오도 곧 부끄러워하며 따라 웃어버렸다. 

 

  쿠키 영상도 없는 영화인데, 결국은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있다 나왔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을 맞이한 도시는 그럼에도 여전히 밝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저녁 식사를 해야 할 때라 가볍게 배를 채우러 찾아간 곳은 비비안 씨의 다이너였다. 데이트의 끝을 장식하는 자리인 만큼 더 비싼 곳을 갔어도 좋았겠지만 이곳은 이곳대로 두 사람에게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마경 같은 도시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고, 단골이었던 그들이 처음 만나 연을 이어가기 시작한 곳이기도 했으니. 햄버거를 다 먹은 뒤 갓 튀겨나온 바삭한 감자튀김을 집어 먹고 있자니 레오가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풀어 내밀었다.

"여기... 제가 오늘 찍은 사진들 좀 봐주시겠어요?"

"좋아, 어디 얼마나 잘 찍었나 보자."

"으와아악... 너무 기대는 말아주세요!"

  카메라를 가져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날짜의 첫 번째 사진은 약속 장소에 먼저 나온 레오가 기다리는 동안 주변 풍경을 찍은 것부터 시작했다. 버튼을 눌러 사진을 넘길 때마다 작은 액정 안에서 하루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레오가 찍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순간도,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있었다. 조심스레 맞잡은 손.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 함께 잔을 맞부딪혔던 때. 공원에서 신난 듯 앞서 걸어가는 자신의 뒷모습과 레오를 돌아보며 손을 뻗는 모습.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과 흩날리는 종이 나비. 평화로운 풍경. 멀리서 이쪽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제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웃는 모습. 머리에 종이 나비가 붙은 줄도 모르고 와플을 먹고 있는 모습...

"저 때 내 머리에서 떼어 준 게 저거였구나."

"네에..."

"잘 찍었네. 고마워서 어쩌지, 사진 다 달라고 해야 하게 생겼는데?"

  기뻐하며 말하자 레오는 수줍게 헤헤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정말요? 기뻐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찍으면서 레오 본인이 중간중간 추려내기도 했겠지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찍힌 사진들일 텐데도 불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 잘 찍었다고 중간중간 칭찬하거나 감탄할 때마다 레오는 매번 또 뺨을 달구며 기뻐했다. 주변 풍경에 녹아들듯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담백한 듯 보이면서도 찍은 사람의 마음이 자연히 느껴졌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떤 순간을 마음에 담아 포착하고자 했는지, 무엇을 기억과 사진에 남기고 싶어 했는지 전해져 왔다. 원치 않아도 수없이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그 자신의 눈 대신 평범한 렌즈를 통해서. 영화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콜라와 팝콘을 들고 함께 찍은 셀카를 마지막으로 그 뒤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사진 보니까 이제야 알았는데, 오늘 정말 하루종일 먹고 다녔네."

  점심 먹고, 소화시킨다고 공원에 가서 와플 먹고, 영화 보러 가서 또 팝콘과 콜라를 먹고, 지금은 또 저녁을 먹은 참이었다. 새삼 깨달은 사실에 중얼거리니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하던 레오가 중얼거렸다.

"저는 잘 드시는 모습 보기 좋은걸요."

"그러고 보니 엄청 배불러. 갑자기 배가 터질 것 같아."

"그건 안 돼요!"

  같이 장난치고 떠든 끝에 레오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자 집에 가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각자 내일을 위해 집에 갈 때가 되어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니 자기 전 레오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혹시 사진들 내일 드려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레오가 사진들을 인화해 작은 사진첩을 만들어 USB와 함께 건네 올 줄은 모른 채. 그중 자신이 가장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가져간 스티븐이 그것을 라이브라 한쪽 벽에 가득한 액자 중 하나에 넣어버릴 줄은 더더욱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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