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재프드림]얽힘
혈계 재프랜프로 네임리스 드림 (주제: 봄, 꽃)
[혈계전선/재프드림]얽힘
-네임리스 드림-
w. 솔방울새
피로가 머리끝까지 쌓여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저녁이었다. 3일 연속이었던 야근에 끝을 고하고 집에 오자마자 탄식 같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을 정도로. 다 때려치우고 곧장 씻고 자자. 그렇게 결심하고도 그녀는 잘 준비를 마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축축 늘어지려는 몸을 끌고는 눕기까지의 과정도 힘겨웠던 탓이다.
'아, 미친. 진짜 피곤해.'
불을 모두 끄고 침대에 몸을 던진 뒤 뻐근한 눈을 감았다.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눈가가 시큰거렸다. 다 집어치우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지만 내일이 주말이고, 곧 월급날이란 사실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월급. 헬사렘즈 롯에서 일반인 직장인으로 일하기란 맨몸으로 군사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위험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이 도시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쥔 이들이 남아있는 건 대부분 그만큼의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정들도 다양하게 있겠지만, 확실한 건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얻는 게 확실했다. '그러니 딱 3년만 빡세게 벌고 뜨자!'. 그런 생각으로 넘어온 게 벌써 작년 봄이었다. 슬슬 날씨가 풀리고 올해의 봄이 오기 시작했으니 그녀는 기적적으로 1년을 버텨낸 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봄이네...'
센트럴 파크에선 꽃망울들이 하나씩 톡톡 터지며 새로운 사계의 시작을 알리고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외출은 삼가는 편이지만,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한 번쯤 거닐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에 빠져들던 참이었다. 불청객의 초인종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침대 위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했다.
"이 시간에?"
기가 막혀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10시였다. 하도 피곤했어서 그렇지 시간 자체가 그렇게까지 늦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 시간에 집까지 찾아올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애초에 이 도시에서 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도 않았고. 무시하고 계속 잠을 청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이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누님- 있어요?'라는 짧은 부름이 익숙한 음성이었으므로, 그녀는 결국 흐느적흐느적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진짜 무리인데, 오늘은 진짜 아닌데. 같은 생각을 하며.
"어, 있었네요? 없으면 갈랬더니."
"엄청 오랜만이네, 재프."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훤칠한 청년의 모습에 조금은 몸에 힘이 들어갔다. 보기보다 결이 좋은 은색 머리카락이 시선을 끄는 갈색 피부의 그는 몇 달 전 단골 바에서부터 연이 닿은 이였다. 잘생긴 얼굴값을 하는지 어쩌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다른 여자와 함께였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가볍고 장난스러운 추파를 던져왔고, 알게 모르게 쌓여가고 있던 그녀는 선뜻 그에 응했더랬다. 그렇게 보낸 하룻밤이 어땠느냐 하면, 평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뜨겁고 끝내주는 밤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재프 렌프로라고 밝힌 그 역시 괜찮다고 느꼈는지 이후로는 이따금 밤에 찾아오는 섹스 파트너 관계가 되었다. 재프의 주변에는 늘 여자가 많았다. 자신처럼 가볍게 만나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애초에 떠날 것을 예정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도 딱히 없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관계였다. 잘생겼고, 잘하고, 가끔 싹퉁바가지 없지만 잠자리 매너는 좋고. 그럼 됐지 뭘 더 원할까.
"그렇게 됐네요. 아직 시간도 이른데 자려던 참임까? 불 다 꺼져있네."
"뭐.... 어쩌다보니 나도 그렇게 됐네. 넌 어디 아팠어?"
한동안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길래 실은 발걸음을 끊으려나 싶던 참이었다. 저보다 멋진 여자가 수두룩하게 많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렇게 간만에 마주하고 보니 어째 전보다 살이 더 빠진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직업도 알 수 없는데 툭하면 어딘가를 다쳐오거나, 너덜너덜한 꼴이 되어오곤 했다. 매캐한 연기와 화약의 냄새, 그리고 피 냄새를 몰고 와선 가타부타 별다른 말도 없이 같이 자자는 말부터 툭 꺼내곤 하는 놈이었다. 그에 대해 확실히 아는 건 이름인 재프 렌프로, 24세 연하, 연락처, 애연가이고 람브레타를 아낀다. 그 정도가 다였다. 워낙 이런저런 어두운 비밀이 많은 도시니 굳이 물어봤자 불필요한 위험만 더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그 이상은 알려 하지도 않았다.
"아아, 어쩌다 좀 많이 다쳐서 입원 좀 했다 왔슴다. 어떻게 알았어요?"
"소독약 냄새."
엥? 하는 소리를 내며 재프는 자신의 재킷 깃을 코에 대어 킁킁거렸다. 본인은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여태 병원에 있다가 나온 거라면 제 몸에 밴 냄새는 모를 만도 했다.
"막 퇴원하고 온 참이라...씻고 올게요."
"진짜 바로 왔나 보네. 날 찾아오는 게 아니라 집 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딱히 갈 데가 없슴다. 여기가 제일 편하기도 하고. 욕실 써도 되죠?"
그러고 보니 집이 어딘지, 있긴 한 건지도 몰랐다. 어떻든 간에 갈 데가 없어 왔다는 녀석보고 '오늘은 섹스할 힘 없으니까 돌아가.'라는 말을 하기는 뭐 해 머쓱하게 서 있자니, 재프는 이미 제 발로 들어와 등 뒤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몇 번 와봤다고 이젠 아주 제집처럼 옷을 훌훌 벗어 바닥에 던져놓더니 홀랑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말리거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어쩐다, 저 녀석이 찾아온 날은 사실상 밤을 새워야 한다고 봐야 했다. 그동안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진심으로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졸음에 멍해진 머리로 비척비척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잠자리에 필요한 것들을 꺼내기 위해 침대 옆 낮은 서랍으로 손을 뻗어 열었다.
'미치겠네. 차라리 내일 오지....'
피로에 밀리긴 했어도 쌓인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역시 이 상태로는 하다가 잠들어도 놀랍지 않을 지경이어서, 머뭇거리던 손끝을 움직여 도로 서랍을 닫아버렸다. 제집에서 눈치 보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생각을 길게 이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그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재프가 맨몸으로 침대에 올라왔을 때 곧장 그 앞에 내밀어진 것은 품이 넉넉한 가운이었다. 다소 의아한 기색으로 그가 가운을 받아 들자 그녀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은 채 입을 열었다. 누적된 졸음 때문에 다소 잠긴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할게. 나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자야 할 것 같거든? 진짜로 갈 데 없는 거면 너도 그냥 편하게 자고 가. 보아하니 몸도 다 안 나은 것 같은데 쉬어야지."
"네?"
"제일 편해서 왔다며. 아니야?"
"그건 맞는데, 아무것도 안하고요?"
역시 섹스 파트너 관계에 이런 건 좀 부담스러운가 싶어 눈을 굴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재프의 안색은 아직 환자의 그것이었다. 막 씻고 나온 참인데도 버석해 보이는 입가며, 그림자가 유독 짙어진 눈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늘 혈기 넘치고 팔팔하던 놈이라 평소와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몰랐는데, 욕실로 걸어갈 때 한쪽 다리를 조금 저는 기색까지 있었다. 그러니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뻔뻔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푹 재워줄게 이리 와서 누워. 여기서 씻기만 하고 이제 와서 다른 데 찾아갈 거 아니면."
"....진심임까?"
회색 눈동자가 잠시 속을 알 수 없는 기색으로 쳐다봐 왔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건 아닌 듯했다. 그저 정말로 진심인지를 묻는 것 같기도,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닌지 꿰뚫어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재프 렌프로는 비밀이 많기는 해도 감정적으로는 늘 속을 알기 뻔한 녀석이었으므로 이렇게 의뭉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투덜거리며 못 이기는 척 눕거나, 은근히 짜증을 내며 나가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가운을 걸쳤다. 뜻밖의 손님 탓에 켜두었던 조명이 다시 꺼지고, 습도를 머금은 채 따끈하게 데워져 있는 몸이 곁에 뉘어지자 금새 이불 속이 훈훈해졌다. 침대가 크지 않은 탓에 두 사람은 작게 뒤척이며 몸을 바짝 붙여야 했다. 그녀는 슬슬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도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
".....날 우습게 보시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럼 그렇지, 몸이 안 좋긴 하단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굴 놈이 아니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보고 누워있자니 혼자 작게 툴툴거리던 재프의 한쪽 팔이 다가와 허리를 감아 안아왔다. 이제 와서 다른 무언가를 하자는 함의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맞닿을 체온을 찾는 듯한 몸짓이었기에 그녀는 기꺼이 그쪽으로 돌아누워 품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잘 자. 재프."
"누님도요."
벌어진 가운 아래 드러난 탄탄한 가슴에 이마를 가져다 대자 익숙한 바디워시 냄새가 풍기었다. 이 녀석이 섹스 파트너의 집에서 이렇게 잠만 잔 적도 여러 번 있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졸음으로 무뎌진 머리께를 맴맴 돌다가, 애써 밀어내고 있던 무의식 속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간만의 늦잠이었다. 슬슬 봄이라고 유독 이불 속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낮게 목을 울리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자 옆구리 위에 올라와 있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
자다가 물이라도 끼얹어진 사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얼떨떨하게 주변을 살핀 뒤에야 그녀는 침대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보송한 침대 위에서 누군가와 느긋하게 동침하고 일어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를 지경이니 놀라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조차 눈이 부셔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자니 재프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깻슴까? 진짜 그대로 업어가도 모르게 자더니."
"어엉....너도 잘 잤어? 몸도 안 좋은 것 같던데, 더 자지."
충분히 잤어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조금 전 떨어진 팔을 다시 허리께에 얹더니 그대로 끌어안아 왔다. 역시 이 녀석은 이런 상황도 익숙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재프, 배고파?"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뭐? 왜? 뭐라도 먹지....라고 해봤자 장을 안 봐서 꺼내먹을 것도 없었겠구나. 아침으로 서브웨이 샌드위치 괜찮아?"
"배만 채울 수 있음 상관없슴다. 누님도 서브웨이 좋아해요? 저번에도 점심으로 먹고 있더니."
"좋아하는 것까진 아닌데, 적당히 영양 균형 맞으면서 맛도 있고 간편하잖아. 왜? 주변에 누가 서브웨이 좋아해?"
"네, 뭐. 직장 상사가. 근데 그 사람도 좋아하는 건 아니고 누님이랑 비슷한 이유일 것 같긴 함다."
직장 상사라. 재프가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당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결국은 의외란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 상사~ 그래도 직업이 있긴 했구나?"
곧장 재프의 표정이 대놓고 떫어졌다.
"그럼 여태 날 백순 줄 알았슴까? 이거 너무하네? 퇴원 직후 아니었으면 나 휴일도 없이 지금도 출근했거든요?"
"날 백수라고 생각했다기보단 딱히 신경을 안 썼지! 중요치 않기도 했고. 요즘 날도 풀렸고 마침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 같던데, 오늘 너도 쉰다면 잘됐네. 서브웨이든 햄버거든 사서 공원 가서 먹자."
어때? 물으며 눈을 빛내자 재프는 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지난 밤부터 내내 순하게 구는 게 조금은 이상할 지경이었지만, 워낙 호불호가 확실하고 싫은 건 절대 참지 않는 성격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곧장 벌떡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끌어안고 잠만 잔다는 선택지 같은 건 고려한 적도 없었다. 재프 렌프로는 지난 밤부터 내내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란히 공원을 걷고 있는 저 연상의 누님은 정작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어쨌거나 날씨가 좋으니 뭐든 괜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 겨울이 간신히 지나갔구나 했더니 어느새 완연한 봄이었다. 매번 똑같은 계절의 변화에 큰 감흥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신없는 사건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사이 나무들에 새잎이 자라나고, 꽃을 틔우기 시작한 것도 몰랐던 게 조금 억울하다 싶은 정도는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드물게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있었지만.
샌드위치를 먹으며 천천히 걷고 있으려니 마치 헬사렘즈 롯이 아닌 평범한 도심의 공원을 거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고작 일주일 전에 이 도시는 또다시 재앙을 맞이할 뻔했다. 그는 당연히도 라이브라의 주요 전력으로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작전을 가까스로 성공한 뒤 크게 다쳐 환계병동에까지 신세를 지는 것도, 며칠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입원해 있다 나오는 것도 이젠 그저 일상적인 일일 뿐이었다. 그 직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여자를 무작정 찾아가는 그 일련의 과정에도 특별할 것이라곤 없었다. 많은 선택지 중 굳이 그녀를 찾아간 이유도 그저 거리상 가장 가깝고, 함께 있을 때 편하다는 점이 다였던 것 같다. 썩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찾아가 적당히 엄살을 부리고 늦장을 부려도 받아 줄 사람이었으니까.
'진짜로 갈 데 없는 거면 너도 그냥 편하게 자고 가.'
그런데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손에 꼽을 정도긴 해도 처음 들어보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끌어안고 잠만 자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지거나 젖지 않은 보송한 침구 위에서 그저 평소와 같은 체온을 타인과 맞대고 잠을 청한 경험은 없었다. 적어도 기억하기로, 술이나 약 따위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으로는. 게다가 아침에는 더 자도 좋다는 말까지 들었다.
'내가 라이브라란 걸 알고 다른 속셈을 가진 건 아닌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무료하긴 해도 편안한 기분에 가까웠다. 과거 언젠가 스승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지키던 모닥불 앞에서처럼, 라이브라의 빈 사무실 소파에 혼자 드러누워 있을 때처럼.
재프는 그것이 집을 찾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기분임은 알지 못했다.
얼결에 끌려 나온 봄날의 공원 나들이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제드 그 녀석이 굳이 여유 날 때마다 찾아오는 이유를 이해하진 못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꽃이나 나무 따위에 관심은 없어도 그것들이 자아내는 경치의 보편적인 아름다움 정도는 느낄 줄 알았다. 그 속에서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퍽 귀여운 모습에서도.
그래, 막 스쳐 지나간 어느 행인이 뛰어가던 어린아이와 부딪혀 들고 있던 작은 병을 화단에 떨어뜨리는 일만 없었더라면 제법 평화롭고 무난한 데이트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쨍강- 하고 얇은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평화로운 풍경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꽃 하나가 내용물을 뒤집어썼다. 그 결과는 고속 무한 성장이었다.
"이게 뭐야?!"
순식간에 사람의 팔뚝 굵기까지 자라난 그것은 덩굴과도 같았으나, 줄기 전체가 잎과 노란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그녀의 오른손에 비교적 얇은 줄기가 삽시간에 엉겨들어 손목과 어깨까지 감아 올라오기 시작한 것 역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짧게 비명을 지르며 그것들을 뜯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작은 몸이 그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가려는 순간 재프는 초인적인 반사력으로 그녀의 손을 낚아채 쥐었다.
"꼼짝 말고 이대로 있어요."
뚜렷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녹색의 질긴 줄기가 피부 위를 기어올랐다. 곧장 그녀를 붙든 자신의 손목까지 휘감는 것을 보며 재프는 어금니를 작게 악물었다. 다행히 그녀는 놀란 와중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움직임을 멈추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류혈법 카구츠치, 인신의 1. 호무라마루."
재프의 다른 쪽 손아귀에서 시뻘건 핏물이 솟구치고, 곧이어 날카로운 칼날의 형태로 벼려지며 두 사람을 결박한 덩굴을 뭉텅이째 썩둑 잘라버렸다. 이어 길게 뻗어있던 칼날은 여러가닥의 실로 나뉘며 변이한 식물의 본체를 향해 뻗어갔다.
"칠옥."
지포 라이터를 튕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섬세한 화력조절로 주변에는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한 재프는 그것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남은 그을린 땅을 확인한 뒤 기술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이 오늘따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어어...?"
일반인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지고, 일단락되어버린 상황에 굉장히 얼떨떨해진 얼굴로 그녀는 재프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입술만 달싹이더니 곧 모든 의문을 밀어둔 듯 당장에 확실한 것들만을 입에 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방금 구해 준 거지?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 재프."
멋쩍게 웃으며 자유로운 손으로 가볍게 포옹을 해 오는 온기를 느끼며, 재프는 탄내 풍기는 공기 속에 남은 노란 꽃의 향기를 맡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여태껏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이 보였다. 미처 뜯어내지 못한 식물의 덩굴과 그 위를 뒤덮은 꽃송이들이 여전히 두 손을 하나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불과 피, 잿가루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홀로 향긋한 봄날의 들꽃이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살랑이며 흔들렸다. 가슴께에 덩굴이 달라붙은 것처럼 간질거려 재프 랜프로는 작게 숨을 삼켰다.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이대로 몸을 뉘어도 될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아, 그래. 지난밤과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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