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쟈밀 바이퍼 드림

 

‘좋아, 이만 돌아갈까.’

 

신발 가게를 나오는 쟈밀은 들고 있는 쇼핑백을 고쳐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외출 후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지만 애초에 학교를 나선 시간이 늦어서일까.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이제 수평선에 거의 닿을 만큼 기울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돌아가서 바로 저녁 준비를 해야겠지. 그래도 부사감으로서 해야 할 일은 오전에 전부 해 뒀으니, 저녁 식사 후에는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다행일까.

푸른 빛을 잃고 그을려가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린 그는 곧장 돌아가기 위해 상가를 떠나려 했지만, 뜻밖의 요소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우와! 뽑았다!”

 

웅성거리는 인파의 소음 속. 유독 그 명랑한 목소리만 제 귓가에 파고든 것은 우연이었을까.

기쁨에 찬 감탄사에 고개를 돌린 그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저건…….’

 

소리가 들려온 곳은 작은 오락실이었다. 본격적인 유흥시설이라기보다는, 가게와 가게 사이에서 아이들 잔돈이나 털어가는 그런 오락실 말이다.

통일성 없이 이런저런 종류의 오락기가 다닥다닥 붙은 한산한 가게 안. 눈에 띄는 것은 10살 언저리 즈음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와 둘 사이에서 인형 뽑기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자였다.

아까 감탄을 지른 것은, 목소리를 보아 아마 소년이겠지.

쟈밀은 기대감에 차 두 눈을 빛내는 소년과 그에게 인형을 건네는 익숙한 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져도 돼요, 누나?”

“그럼. 나는 게임이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너 줄게.”

“어어, 그래도…….”

“어차피 여러 개 뽑았으니까 괜찮아. 자. 너도 하나 가져.”

 

이목을 끈 것은 소년이었지만, 결국 쟈밀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구면의 후배였다.

아이렌은 제 주변을 맴돌던 두 아이에게 각각 토끼 인형과 곰 인형을 나눠주고는, 얼른 가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얼떨결에 선물을 받는 어린 것들은 서로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이내 솔직하게 기뻐하며 함께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까르르 웃으며 뛰어가는 아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렌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그렇게 꿋꿋하게 인사를 하던 그는 작은 인기척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 쉬며 지갑을 살폈다.

 

“으음, 잔돈도 없고. 그냥 갈까.”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뽑고 싶은 인형이 아직 기계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가며 계속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단순히 이 도박성 게임을 더 즐기고 싶은 걸 수도 있지만, 쟈밀이 보기엔 그런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왜냐하면, 지금 아이렌의 가방 앞주머니에 쑤셔 넣어진 인형의 수가 결코 작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여러 개 나오는 구조의 뽑기 기계라지만, 저만큼 뽑았다면 분명 게임 자체에도 질릴 만할 터. 아이들에게 ‘그저 게임이 하고 싶었다’라고 한 말도 하얀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아이렌에 대해 전부 알지는 못해도 행동 메커니즘 정도는 대충 이해하고 있는 그는 그리 확신하고, 망설이는 뒤통수를 향해 다가갔다.

 

“뭘 뽑고 싶었는데?”

“헉!”

 

지갑을 넣고 주머니를 뒤지며 동전을 찾던 아이렌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설마 이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건지, 제비꽃색 눈동자에는 반가움과 놀람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선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하지만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놀라지 않나.

하지만 알 것 같다. 바짝 긴장하고 사는 게 기본값인 사람들은 작은 자극도 크게 받아들이곤 했으니까. 언제나 어깨에 힘이 바짝 든 후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쟈밀은 아까 전 소년 소녀가 뛰어갔던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아는 애들이야?”

“네?”

“아까 인형 준 애들.”

“아하. 아뇨, 처음 보는 애들인데요. 그런데 그걸 봤어요? 언제부터 보고 계셨던 거예요?”

 

그거엔 제가 답할 의무가 없겠지. 사실 비밀로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애초에 구체적으로 대답하기도 애매한 질문 아닌가? 시간을 재면서 상대를 관찰하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쟈밀은 애매한 대답을 하는 대신, 제가 하려던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러면 모르는 애들에게 애써 뽑은 인형을 준 건가?”

“하지만 제가 뽑기 전부터 옆에서 계속 보고 있던걸요. 저게 가지고 싶어, 라면서.”

“네가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고?”

“전 저기 여우 인형이 가지고 싶었던 거라서 괜찮아요. 결국 못 뽑았지만.”

 

아이렌의 손짓을 따라 기계 안을 본 쟈밀은 자연스럽게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인형들까지 눈으로 훑어보았다. 애초에 종류별로 개수가 한정되어 있어서일까. 운이 없게도 그 수많은 동물 인형 여우 인형만큼은 주머니 속에 들어오지 못했었다.

강아지, 고양이, 양, 염소. 그리고 코끼리까지.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 되는 동물 인형들이 주머니 속에 엉켜있는 꼴이란 참으로 볼만했다. 확실히 이렇게 많이 뽑았다면 두 개 정도 나눠주는 건 오히려 짐을 덜어서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보통 이런 걸 나눠준다면 친밀한 이, 아니면 적어도 아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게 보통이 아닐까. 쟈밀은 그리 생각했기에,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이에 공짜로 뭔가를 주다니. 너는 정말 애랑 동물에 정말 약하구나.”

“옆에서 응원해 준 게 귀여워서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아이에 약한 것 같은데.”

“으음, 그런가요. 뭐. 실제로 아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을 부정해봐야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 정도의 현명함은 있는 아이렌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보기 좋지 않나요?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이.”

“그런가?”

“예. 겨우 작은 인형 하나로 저렇게까지 행복해한다면 못 줄 이유가 없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곱씹는 걸까. 아이렌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한결 더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알면 삶이 늘 즐겁겠죠. 저런 삶의 태도는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말이 있어?”

“제가 살던 세계의 시의 일부예요. 워즈워스의 시였던가?”

 

그런 것도 외우고 다니는 건가. 이렇게 보면 이 녀석이 왜 영화연구부에 있는지 실감이 간다.

쟈밀은 눈앞에 있는 자신이 아닌 아이들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는 아이렌이 주절주절 본인만의 철학을 늘어놓는 걸 말리지 않았다.

 

“물론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는 것보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원대한 것을 이루는 것도 멋진 삶이라 생각해요. 삶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성공한 삶과 실패한 삶이라는 건 있지 않나?”

“맞아요. 하지만 부자라고 반드시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닐 테고, 빈곤층이라고 불행하기만 한 건 아닐 테니까요.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겠지요. 중요한 건 제 삶을 사랑하는 자세니까…….”

 

상당히 원론적인 이야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고리타분하고 실용성 없는 결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단 걸까. 말끝을 흐린 아이렌은 곧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었다.

 

“그래도 역시 중요한 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요인이겠죠. 부모의 재력이나 자신의 재능, 그리고 타고난 예민함 같은 것들이 삶의 난이도를 결정하니까요.”

“앞의 둘은 알겠는데, 마지막은 어떤 의미지?”

“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런 거죠. 예민한 사람은 외부 자극이나 내면의 동요에 쉽게 지치지만, 성질이 느긋한 사람은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러니 같은 일을 겪어도 후자가 더 무던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죠. 위기 대처 능력은 전자가 더 좋겠지만.”

 

알 것 같다. 말하자면 전자는 본인이나 아이렌 같은 타입. 후자는 카림 같은 타입 아닌가. 마침 너무나도 적절한 예시가 있어 쉽게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쟈밀이었다.

 

“그래도 뭐,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간이니까요. 아스팔트 땅에서도 피는 꽃이 있나 하면, 온실에서 죽는 꽃도 있죠.”

 

그럴싸한 비유를 들며 조잘거리는 아이렌의 얼굴엔 생기가 넘쳤다. 마치 물을 흠뻑 머금은 꽃처럼 입을 놀릴수록 피어나는 그의 모습은, 솔직히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 빤히 바라본 게 문제였을까. 쟈밀의 시선을 느낀 아이렌은 말을 끊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노인정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걸 오락실에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서.”

“음. 재미없죠, 이런 이야기?”

“아니. 실없는 이야기보단 훨씬 나아.”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는 아이렌이 알아서 생각하는 걸 주절주절 늘어놔 주는데, 재미없을 리가 있나. 어찌 되든 상관없는 녀석의 생각 따위는 궁금하지 않지만, 아이렌의 생각이라면 머리를 가르는 난폭한 수를 써서라도 알아보고 싶은 자신이니 이런 대화는 오히려 제게 이득이다.

쟈밀은 애매하게 끊긴 대화가 아쉽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난 돌아갈 건데, 넌? 다른 볼일이 있나?”

“꼭 해야 할 일은 없고, 바다나 보고 돌아갈까 했는데……. 선배도 같이 갈래요?”

“바다라.”

 

이 녀석은 인어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도 바다가 싫은 건 아니니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도록 할까.”

 

학교 안에서 아이렌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든 일이다. 여러모로 눈에 띄는 이 홍일점 후배의 곁에는 늘 사람이 꼬여 들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둘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겠나. 다소 불순한 의도로 동행을 결정한 그는 아이렌과 함께 상가를 떠나 바다가 보이는 길로 향했다.

 

“쇼핑 다녀오셨어요?”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중. 먼저 침묵을 깬 건 아이렌 쪽이었다.

쟈밀은 후배의 시선이 닿은 쇼핑백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음. 농구화가 낡아서 새로 샀지.”

“아하. 다음 경기가 기대되네요.”

“뭐, 팀의 에이스가 되려는 생각은 없지만, 이왕 뛰는 김에 이기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

 

자신은 당연한 소리를 한 것뿐인데, 상대에겐 뭔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라도 한 걸까. 제 말에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흐뭇하게 웃은 아이렌은 영감처럼 뒷짐을 진 채 뜬금없는 칭찬을 내뱉었다.

 

“선배는 뭘 해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거야 선배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시잖아요. 뭐든 성취하려고 하시고, 더 높은 자리를 위해 노력하시죠. 거기에 명석하시고 처세술도 좋으시니, 마음만 먹는다면 뭘 못하시겠어요.”

 

그것참 듣기 좋은 말들이다. 저런 칭찬을 진심으로, 그것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건 아이렌의 환상적인 점이자 끔찍한 점이기도 했지.

쟈밀은 괜히 멋쩍어져,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자조하면서 주저앉아 있어 봐야 바뀌는 건 없으니까, 당연하지 않나? 경쟁과 투쟁은 생물의 본능이라고.”

“그렇죠. 포기하는 건 허무한 일이니까요.”

 

그 말이 다 옳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렌은 어느새 퍽 가까워진 바다를 마주하고 멈춰 섰다. 이젠 수평선에 발을 걸치게 된 태양 탓에, 현자의 섬 주변 바다는 짙은 오렌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 앞. 나란히 멈춰 선 두 사람은 그저 가라앉는 태양만을 응시한다.

불편할 이유 없는 자연스러운 침묵 앞. 난색으로 물든 세상을 음미하던 아이렌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은밀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저는 살아가는 게 체질이 아닌 거 같아요.”

 

마치 밀어처럼 조용히 속닥거린 말은 그리 달콤하지도, 유쾌하지도, 희망차지도 않았다.

쟈밀은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는 고정한 채 눈동자만 아이렌을 향해 움직였다.

 

“사는데 체질이 있어?”

“제 생각엔 있는 거 같아요.”

“생존은 본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잖아요.”

 

그런 말장난이나 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닐 텐데.

마음속으로만 한 대꾸지만, 아이렌에겐 충분히 전해진 걸까. 그는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긴 치마를 한쪽 팔로 수습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걸 쟁취하는 과정과 결과에서 즐거움을 얻으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잖아요. 인생은 좋은 일만 있지 않지만 나쁜 일만 있지도 않지요. 그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망과 삶의 곳곳에 숨어있던 기쁨으로 살아가곤 하죠.”

 

지극히 객관적인,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한 서술은 참으로 건조했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붙는 말은, 불어오는 바람처럼 습하고 차가우며 비릿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전 그런 게 잘 안되는 거 같아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간절히 원하는 건 없거든요.”

 

알고는 있구나.

쟈밀은 하마터면 그렇게 대꾸할 뻔한 입을 의식적으로 꾹 닫았다.

아이렌은 호불호도 확실하고 고집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에 필사적이지는 않았다. 감정표현이 아주 풍부한 편은 아니더라도 희로애락은 확실하게 느끼고 표현하긴 했어도,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고 할까.

욕망도 결핍도 슬픔도 분노도 기쁨도 외로움도. 그 모든 번뇌를 절대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주하지만, 결국 전부 다 아무것도 아닌 듯 넘기는 의연함. 학습된 억압. 극도의 통제 끝에 도달한 데스트루도(destrudo). 바로 그것이야말로 아이렌의 본질이었고, 자신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극적이게도, 쟈밀은 아이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탈하거나 열반에 들기엔 자잘하게 미련이 많아서, 일단 숨이 붙어있는 이상 열심히 살긴 하는데 이게 체질은 아닌 거 같아요.”

“…….”

“뭐, 이걸 안다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성실하게 살아야지요.”

 

아, 또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급히 말을 수습하다니. 하여간, 헛똑똑이가 따로 없다. 남의 속은 기분 나쁠 정도로 낱낱이 들여다보면서, 타인의 욕망에 맞장구쳐주는 건 귀신같이 잘하면서, 결국 제 내면은 아수라장이 되어도 내버려 두는 꼴이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걸. 제게만 속삭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쟈밀은 그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꾹 닫아둔 입을 열고 본심을 토해냈다.

 

“아무리 몸에 맞지 않고 서툴러도, 하다 보면 느는 법이지.”

 

이 지독한 허무주의자 후배가 원하는 건 문제를 해결해 줄 대답이 아닐 거다.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쟈밀은 그냥 제가 원하는 바를 말하기로 했다. 무엇이든 결국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렌과 달리, 자신은 야망도 욕심도 있는 극히 평범한 인간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꼭 해야만 했으니까.

 

“힘든 게 있으면 내가 옆에서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마. 넌 겨우 16살이잖아.”

 

아이렌은 본인 입으로 ‘성실하게 살아야지요’라고 했지만, 쟈밀은 그게 꼭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까 전 오락실에서 아이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하얀 거짓말 같다고 할까.

그래서, 그는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자신과 살아달라고 말이다.

그의 진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렌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6살…….”

“그래. 아니야?”

“뭐……. 맞죠.”

 

미적지근하게 긍정한 아이렌은 볼을 긁적이더니, 갑자기 쟈밀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예고 없는 애교에 멈칫한 쟈밀은 제게 기대어오는 아이렌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훨씬 평온함을 눈치채고 작게 탄식했다.

 

“선배도 상냥하네요. 이런 손 많이 가는 후배를 위해 그렇게까지 도와주다니.”

“너한텐 빚진 게 있으니까.”

“윈터 홀리데이 때 그거요? 전 이제 신경 안 쓰는데.”

 

아니. 너는 더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도, 나는 아니다. 그날 이후로, 네가 내 삶에 뿌리박혀 버렸으니까.

그러나 그걸 어찌 말하겠나. 자신은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는 없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아, 어쩌면 자신도 아직 살아가는 기술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다.

제가 누굴 가르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은 참으로 오랜만에 든 쟈밀은, 제 팔에 찰싹 달라붙은 아이렌에게 슬쩍 머리를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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