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하펜_설야 夜, 野
드림
눈이 녹지 않는 밤은 춥디추운 법이었다. 선후관계야 반대지만 설원에 서서 느끼기엔 그 편이었다. 눈이 녹지 않는 풍경이 보이고 손이 시려 아리다. 실린더에도 물, 바람 결정을 채웠다. 기다란 증기가 뻗더니 허공에서 뭉쳤다. 낮이라면 흔한 말처럼 솜이라든지 포근한 형상이었겠다. 어쨌거나 밤이 잡아먹기 좋은 인상이었다. 원리며 이론을 따지지 않는다면, 구름의 축소판 내지는 일부로 보였다.
그런 눈밭에 하펜이 앉았다. 고개를 들었고 이내 눈을 감았다. 싸라기는 콧잔등에 앉았다. 수고를 모른 척하는 것인지 누구보다 신경쓰는 것인지. 눈을 끔뻑이다 콧잔등을 훔치고 뒷목을 다 접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기우뚱거리다 벌렁 누워버렸다. 파인하펜은 여전히 설원에 숨기 좋았다. 머리칼이 새하얗기도 하거니와 자이언트인 내게도 광활한 들野이었다. 다만 두 안광이 문제였다. 야밤에 누굴 찾기도 좋지만 저도 잘 띄었다. 눈이 멎은 직후에 하펜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웬 눈인가 했어. 맑은데.
또 할까.
고민도 않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로브 자락으로 실런더를 덮고 옆에 가 앉았다. 체중 아래서 뭉개지는 감각이 보드라웠다. 레인캐스팅으로 뿌린 눈은 미미했다. 이 설원은 피시스였다. 눈 녹는 날이라곤 애들 좋아하는 전설 속에 나왔다. 용의 브레스로 녹아내린다든지. 작은 양념통으로 소금을 뿌린 정도 되려나. 하펜과 내게나 조금 전에 눈이 내렸지, 남들에겐 오늘의 강설은 없는 일이었다. 밤하늘이 맑아 점점이 별이 많았다. 눈구름을 거꾸로 만들었다면 비슷했을지 모르겠다. 파인하펜 옆에 있으니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별빛 속에서도 이웨카, 붉은 달이 의기양양 떴다. 더군다나 깊은 밤이었다. 하늘 한가운데 마음껏 떴다. 라데카가 훨씬 크고 공전궤도가 가깝건만.
그럼에도. 내 님 두 눈의 달이 어쨌다는 연시까지 가진 달이다만 파인하펜에겐 어림 없었다. 그의 눈은 무언갈 비추지 않았다. 그런 눈을 바라보다가 마주치거든, 내 눈에도 안광이 비치는지는 모르겠다. 상이야 빛나지 않더라도 눈동자에 담기기 마련이다만 확인하지 않았다. 하펜에게 물으면 분명 확인해줄 테다. 빤히 바라보다 그렇다고 말할 게 뻔했다. 그 근위대장도? 근위대장도 물었어, 이미 알고 있어? 물음이 이어질 것도 불보듯 했다. 별에서 내려왔다는 밀레시안에겐 너무나 잘 어울렸다. 파인하펜이나 나나 밀레시안이지만 하펜은 가끔 아닌 것처럼 굴었다. 치명상에 환생은 않고 붕대를 두른다거나. 꼬박꼬박 잠자리에 든다거나. 그래봤자 누구보다 밀레시안다운 눈으로 보고 있노라 생각하고 관두었다.
할렉, 별 보는 것도 간만이다. 그치.
계속 탈틴에 있었으니까.
탈틴이 아니더라도 울라대륙에서 이만한 설경을 볼 일이 없었다. 강설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렇게 눈이 쌓이면 쌓아 치워둘 곳도 찾지 못하겠지. 레인 캐스팅도 피시스에서나 눈구름을 만들었다. 울라에선 본래 이름대로 비만 내렸다. 대책 없는 밀레시안이 플레이머로 녹이려드는 게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 …하펜이라면 시도하고도 남았고. 게다가 탈틴의 그림자세계는 항상 어두워 그리 이름 붙였다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저거도 무슨 별자리야?
하펜의 손가락이 밤하늘이며 생각을 가르고 들었다. 유난히 크고 밝은 빛이었다. 별보다는 행성일 걸. 그것도 일단은 별이라 부르긴 하니까. 내 대답에 하펜은 시시해진 모양이었다. 나라고 피시스를 다 아는 건 아니야. 만회하라는 듯 하펜이 다른 하늘을 지목했다. 이번엔 별이 맞는 데다가 곰의 꼬리 부근이었다. 어쩌다 곰이 별로 남았는지 기억나는대로 설화를 꺼냈다. 다행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눈밭에 양팔을 문질러 날개를 만들었다.
별자리를 좋아하는진 몰랐어.
예쁘잖아. 그리고 별이면 밀레시안 고향 아니야? 그, 별에서 내려왔다잖아.
제 생각에도 엉뚱한지 웃음을 키득거렸다.
고향이라면, 여기가 피시스인데. 발레스는 아니어도.
두 손바닥에 눈을 펐다. 후 불은 입김이 희게 뻗어 또 하얀 눈을 날렸다. 얼굴에 떨어지자 하펜이 눈을 감고 킬킬 웃었다. 티르 코네일은 어떤 곳이야? 나는 갈 일이 없어서. 하펜은 내 물음에 티르 코네일? 하고 되물었다. 생각 내지는 반추하는지 눈동자가 굴러갔다.
낚싯대 들고 앉기 좋지. 고기 종류가 많지는 않아도.
하펜은 커다란 고기를 낚았단 소문을 시작으로 일화를 늘어놓았다. 노라는 빵을 원체 좋아하니 빵을 주면 값보다 좋은 방을 보여주었고, 라사가 딜리스와 만나거든 숙취에 시달리느라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마법 수업은 피하라는. 아침 이슬이 묘한, 한적한 마을이었고 조용한 한낮의 거리가 괜찮은 곳이었다. 초여름이 오거들랑 이델리아 천에 발을 담아봐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여행객의 말이었다.
그러면 이멘 마하가 네 고향이야?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그리 부를 만한 곳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았다. 정착한다면 고를까 싶은 장소였다. 솜씨 좋은 요리사가 식당을 운영하는 데다가 호수를 끼고 있었다. 파인하펜은 호숫가든 해변이든 앞을 보고 걷질 않았다.
내 고향은 별로 재미없어.
바닥을 문지르던 팔을 멈췄다. 생각에만 몰두하려는 것인지.
고향이란 게 가끔 그렇듯이. 가끔, 아주 가끔은 편린이 떠올라 그립지. 이틀만 있어도 나오고 싶을 걸.
할 말은 그것뿐인 듯 했다. 이제 누운 자리에 종아리까지 문질렀다. 나는 가져온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하펜을 일으켜 앉히고 등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마주 앉았으니, 앞을 보면 하펜이든 모닥불이든 그 상으로 빛이 맺힐 터였다. 장갑을 벗어다 손을 녹였다. 손등이 희고 깨끗했다. 손바닥을 뒤집어도 섬섬옥수 그대로였다. 파인하펜이 잠들 때까지 그걸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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